“비밀?”발걸음을 멈춘 윤혜인이 돌아섰다.절뚝거리며 일어난 주산응이 입맛을 다셨다.“돈 내놔. 그럼 알려줄게.”“그럼 됐어. 비밀이고 뭐고 상관없어.”윤혜인이 또다시 돌아서려 하자 주산응은 또 목소리를 높였다.“네가 어떻게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이야. 정말 알고 싶지 않아?”“뭐?”‘아빠 말로는 6살 때 날 잃어버렸다고 했어. 엄마는 슬픔에 매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고... 그러다 어느 날 쪽지 한 장 남겨놓고 실종되었다고 했었지... 그냥 단순히 길을 잃은 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윤혜인의 검은 눈동자가 주산응을 응시했다.“주산응, 지금 나한테 사기치려는 거지?”어린 주제에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윤혜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돈을 받으려면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거짓말 아니야. 맹세해.”“그럼 말해 봐든가.”“이게 어디서 맨입으로 들으려고. 일단 돈부터 내놔. 안 그럼 한 마디도 안 할 거야.”“얼마나 필요한데?”이에 주산응이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10억이면 돼.”“하, 그냥 그 비밀 평생 품고 있어.”솔직히 궁금한 건 사실이었지만 주산응의 인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윤혜인은 그 돈을 주고 싶지 않았다.지금 10억을 준다면 앞으로 50억, 100억 평생 그녀의 등골만 빨아먹을 게 분명했다.“참나... 10억도 없어?”그리고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배남준을 훑어보았다.“남자가 또 바뀌었네. 하여간 재주도 좋아...”윤혜인이 매서운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닥쳐.”‘호오, 켕기는 게 있긴 하나 보지? 새 남자친구 앞에서 내숭이라도 떨고 싶은 거야?’“내 입 막고 싶으면 돈으로 막아. 안 그럼 저 남자 앞에서 네가 어떤 짓까지 했는지 다 밝힐 테니까.”‘그 동안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까불었지? 돈 많은 사장님들이 널 진짜 사랑해서 만나는 줄 알아? 그냥 대충 가지고 노는 것뿐이야.’“할 말 없으면 그냥 가.”“왜 지금 남친이
그 말에 주산응은 기가 찰 따름이었다.‘뭐? 개? 지금 내가 개라 이거야? 그래... 내가 이대로 넘어갈 것 같아?’피가 흐르는 입술을 막은 채 주산응이 고래고래 소리쳤다.“이 계집애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몇 명인 줄 알아? 돈만 많으면 유부남도 만나는 애가 얘가. 지금 돈 좀 있으니까 그나마 옆에 있는 거지 조금만 수틀리면 바로 차버릴 거라고!”주산응의 선 넘는 말에 윤헤인이 분노했다.“닥쳐. 또 그렇게 헛소리 해봐. 그땐 진짜 신고할 거니까!”“헛소리? 저번에 병원에서 널 도와준 남자도 그렇고. 아, 저번에 남자랑 차에서 키스까지 하던 거 내가 똑똑히 봤어! 어느 남자가 너 같은 걸 아내로 맞이하겠어? 음탕한 계집애!”거칠게 핏물을 내뱉은 주산응이 욕설을 이어갔다.“하여간 너도 참... 남자 보는 눈이 점점 떨어져서 어떡하냐? 전에 남자는 10억 그냥 턱턱 내놓더만. 이 남자는 돈 한 푼 안 주네.”“1억이라니? 누가 그 돈을 줬단 소리야!”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숨길 게 있나 싶어 주산응은 말을 이어갔다.“전에 너랑 키스했던 그 남자 말이야. 이선그룹에서 일한다는 그 남자, 내가 회사까지 따라가서 네가 그 동안 길러준 은혜도 모르고 건방지게 군다고 하니까 바로 1억 보내주던데? 너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하면서.”그리고 배남준에게 눈을 돌린 그가 말했다.“어디 보자. 이쪽도 귀티는 좔좔 흐르는 것 같은데 왜 이러나 몰라.”“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전 혜인이랑 그냥 친구입니다.”배남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에이, 남녀 사이에 친구는 무슨. 쟤랑 자고 싶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했어?”다른 건 몰라도 윤혜인의 외모만큼은 인정하는 주산응이었다.그 시골에서 자라면서도 고급스러운 미모와 몸가짐은 눈에 확 띨 정도로 남달랐으니 말이다.점잖은 배남준이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닥쳐!”한편, 윤혜인은 주산응의 한 말에 꽤 충격을 먹은 상태였다.‘이준혁이 주산응한테 돈을 줬다고... 나 귀찮게 하지 말라고? 어쩐지 병원
“어어!”주산응이 차 뒤편에서 소리 지르며 달려왔다. “머……멈춰!”그러건 말건 차는 멈출 기세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쿵!”큰 소리가 울렸다.주산응은 볼품없이 넘어져,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극심한 고통에 눈물이 줄줄 나왔고, 흐릿한 시선으로 차를 확인하고 뒷걸음질했다.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왔다.윤혜인은 무표정으로 전했다. “아직도 할 말 있어?”주산응은 피떡이 되어 못 볼 꼴이 된 얼굴에, 더 이상 이 조그만 녀석에게서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라고 직감했다.“얼마 줄 건데?”윤혜인도 그와 똑같이 한 손을 척 들어 올렸다.주응산은 입꼬리가 떨렸다.그러나 그도 이 비밀은 윤혜인 말고는 흥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한 푼도 못 받을 것이 눈에 생생했다.주응산은 두 눈을 딱 감고 입을 삐쭉하며 말했다. “그래그래! 오천이면 오천이지! 오천만 주면 내가 싹 다 알려줄게. 한마디 거짓말도 없이.”윤혜인은 그를 정신병자 보듯 흘겨봤다.그리고 시정했다.“내 뜻은 오백이라고.”“……!” 주산응은 말을 못이었다.그는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욕을 퍼부었다. “미친년, 어디 문제 있나, 그렇게 깎는 게 어디 있어!”윤혜인은 아무것도 안 들리는 양 담담히 계속 내뱉었다. “사백.”“……정신병 걸린 년, 진짜 심각하네!”윤혜인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마지막은 무슨 마지막!” 주산응은 화병에 붉으락푸르락했다.반면 윤혜인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이백.”“……”어라? 주산응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수학을 돼지한테서 배웠나, 다음은 삼백 이겠지?”윤혜인은 느긋하게 답했다. “내가 내는 거니까 내 마음이지.”주산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꿈 깨. 삼백이면 몰라도……”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엔진음이 울리며 차창이 닫혔다.주산응의 피 먼지가 붙은 얼굴은 삽시에 사색이 됐다.그는 미친 사람의 끝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판사판인 데다, 한번 뱉은 말은 무조건 실행했다.
윤혜인은 주산응의 감춰지지 않는 욕심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빨리 말해.”주산응의 손아귀의 돈다발을 하나하나 다 세어보고 나서야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몇 년 전인가, 밖에서 술을 먹었어. 형부가 술집에 나를 데리러 온 거야. 돌아가는 길에 한 쓰레기통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린 거지. 한밤중에 얼마나 무섭던지. 형부보고 빨리 가자고 말했는데, 글쎄 형부가 기어코 가서 확인하겠다는 거야.나는 당연히 따라 안 갔지. 얼마 안 지나서 형부가 포대에 쌓인 아기를 꺼내더라고. 머리에는 물고기 잡을 때 쓰는 튼튼한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는 게, 딱 누군가가 이 애를 죽이려고 한 것 같았어.형부는 이 애를 데려갔는데, 마침 그 날 밤 집에 어린 손녀가 갑자기 열이 내리지 않아서 급성 뇌염으로 죽어버린 거야.우리 누나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서 이 딸 하나뿐이었는데, 혹여나 어르신이 충격받으실까 봐 형부가 이 애를 손녀딸인 거로 속이자고 한 거였어.”주산응의 말은 꽤 길었다. 윤혜인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그녀가 바로 그 이야기 속의 어린 아기였다……“난 다 말했어. 절대 거짓은 들어있지 않아. 그때 형부와 절대 어머니한테 들키지 않게 할 거라고 약속했었다고.”윤혜은의 양부, 바로 주산응의 형부는 주산응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 자루의 양심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누나가 돌아간 뒤 형부는 아버지와도 같은 역할을 하며 집안을 지켜줬다.모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며 자기가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굶기지는 않았다.형부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이상한 사람들과 엮여 도박 놀음을 하러 다니진 않았을 것이라고 주산응은 생각했다.주산응이 돌아간 후.윤혜은은 아직도 충격적인 진실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주산응이 말한 게 모두 사실이라면 당시 자신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고의로 해코지당한 것이 아닌가!6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누군가에게 해코지당할 정도로 나쁜 일을
잇따른 클락션 소리가 울려 퍼졌다.배남준은 거의 본능적으로 윤혜은을 끌어안아 뒤로 몇 발 물러섰다.하지만 그 차는 그들을 향해 온 것이 아니었다.차는 그대로 배남준의 검은색 밴을 들이받았다.“쾅!”극도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밴은 완전히 일그러졌으나 뒤의 차량은 큰 변화가 없었다.범퍼 빼고는 거의 손상을 입은 곳이 없었다.이도 주훈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아귀는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전에 비슷한 일이 있은 뒤로 주훈은 무슨 일이 있던 대표에게 핸들을 쥐여주지 않았다.주훈이 직접 운전하면 그나마 힘 조절이 가능했기 때문이다.대표였다면 눈앞의 차는 이미 가루가 됐을지도 모른다……윤혜은은 머리가 아팠던 찰나에 또 충격을 받아버려 그만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완전히 배남준의 품에 기대었다.검은색 고급 외제 차의 문이 열렸다.광택이 나는 구두가 천천히 지면에 닿았다.남자는 한 손은 슈트 바지 주머니에 걸친 채 걸어왔다.올블랙의 슈트가 검은 먹과도 같이 엄숙한 분위기를 냈다. 몸짓에서 자연스레 스며 나오는 고귀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배남준은 기분이 상했다. 산에서 도를 닦는 승도 성깔이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얼음 밭의 늑대 굴어서 자라온 그는 어떻겠는가.“이건 무슨 뜻이죠?”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눈웃음을 지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었으나, 그뿐이었다.이준혁의 검은 눈이 여인을 안고 있는 남자의 팔에 잠시 머물렀다. 차가운 시선으로 입꼬리만 씩 올리며 말했다. “실수로 차를 긁었네요.”배남준의 눈에는 더 힘이 들어갔다.왜 말이 통하지 않는 건가.이번은 차였지만, 다음은 사람을 칠게 아닌가!두 남자는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범 두 마리가 대치하듯 기세 흉흉하여, 누구 하나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그때, 윤혜은이 벌떡 일어나 얼굴을 굳혔다.“준혁 씨, 미쳤어요? 왜 여기 있는 거예요?!”순간 헛것이라도 보고 있는 줄 알았다.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난 것인가.이준혁은 먹먹
윤혜은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트집 잡을 군데는 딱히 없었다.교활한 남자였다.주훈은 벌써 따로 차를 두 대 마련해 왔다. “배남준씨, 실례를 끼쳤습니다. 함께 가시죠.”배남준은 윤혜은을 보며 물었다. “같이 올 거야?”하지만 윤혜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말을 가로챘다. “한길이 아니니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윤혜은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당신과도 같은 길이 아닌걸요.”배남준은 더 할 말이 있는 낌새였으나 주훈이 입을 열었다. “배남준씨, 안심하세요. 차는 충분히 있으니, 제가 꼭 아가씨를 집까지 바래다 드릴 겁니다.”윤혜은은 배남준의 차에 아직 처리하지 않은 돈과 서류들이 남아 있던 것이 떠올라 말했다. “남준 오빠, 먼저 가세요. 전 괜찮아요.”배남준은 신경이 쓰였지만 차 안에 가족과 연관된 기밀 문서들이 있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윤혜은에게는 이준혁도 있었기에 다른 건 몰라도 위험만큼은 없을 것이다.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당부했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윤혜은은 자신 때문에 배남준에게 적지 않은 일들을 떠안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순순히 응했다.곁에 서 있던 이준혁만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힘을 풀었다.배남준은 그를 보며 전했다. “혜은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이준혁은 여전히 서늘한 눈길로 회답했다. “당연합니다.”두 사람의 대화에는 곁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칼바람이 서려 있었다.두 쌍의 눈 속의 거센 파도는 모두 윤혜은을 자신의 소유물인 양 감싸고 돌았다.배남준이 먼저 시선을 돌려 윤혜은을 따뜻하게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이준혁은 윤혜은을 바라보는 배남준의 시선을 주시하다, 또 한 번 심장이 찢기는듯한 기분이 들었다.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질 지경이었다.윤혜은은 주훈이 마련한 차가 도착하자 바로 빠른 걸음으로 올라타 문을 닫았다.이준혁이 오를 틈은 한치도 남기지 않았다.“서호 별장까지 가주세요.” 기사에게 전했다.기사는 대표를 두고 감히 먼저
남자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을 본 윤혜은은 서늘한 얼굴로 차 문을 열려 했다.이준혁은 그 모습에 급히 불러세웠다. “혜은아, 아름이……”윤혜은은 나지막이 말하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름이 오늘 많이 놀랐겠어. 아름이가 많이 걱정할까 봐 가보고 싶은데.”이 말에 윤혜은은 담시 멈칫했다.이준혁은 윤혜은이 아름이에게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아름이 보게 해줘. 매일 너희 앞에 나타나진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그러니 오늘 밤만 보게 해줘, 제발.”남자의 낮게 떨리는 목소리는 자존감은 다 내려놓은 채 구질구질하게 빌기만 했다.문을 열려던 윤혜은의 손이 멈췄다.“혜은아, 부탁이야. 오늘만 아름이와 만나게 해줘.”이준혁의 그 잘난 얼굴이 시허옇게 질린 것을 보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약해졌다.하지만 그 정도로는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다 녹일 수는 없었다.자기가 당했던 그 상처들을 생각하면 일분일초가 고통스러웠다.그러나 아름이의 눈물범벅이 된 작은 얼굴을 떠올리면 별수가 없었다……약간의 고민 끝에 드디어 혜은은 손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녀가 동의 했음을 알아차렸다.내심 기쁘면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다.아름이가 아니었더라면 일말의 기회라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서호 별장.혜은은 문 앞에 도착하고 바로, 홍 아줌마가 아름이를 안고 정원에서 거니는 모습을 보았다.그녀는 가끔 아름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작은 목소리로 달래고 있었다.그 모습에 혜은은 가슴이 아려와 곧장 달려가 이름을 불렀다. “아름아!”아름이는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엄마……”어린아이는 얼굴이 발그스레 했다. 아마도 오랫동안 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긴 속눈썹이 바람에 말라 다 뭉쳐버렸었다. 가여운 것.혜은은 당장 팔을 뻗어 안아줬다.“아름아.”이준혁이 뒤에서 함께 이름을 불렀다.아름이는 그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물었다.“아빠, 안 죽었네……”이준혁은 홍 아주머니 손에서 아름이를 안아 와, 웃으며
그 말에 윤혜인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때로는 혈연관계를 정말로 믿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았다.분명 아름이의 옆에도 꽤 남자가 많았다. 예를 들면 삼촌도 있었고 배남준 아저씨와 외할아버지도 있었다.이렇게 많은 어른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는데도 결국에는 이준혁과 가장 친해졌다.그런 친밀감은 나타난 것과 같았고 아무런 장벽도 없었다.정말 아름이의 심리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많은 이성의 관심을 받더라도 아빠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는 것 같았다.심리 선생님의 말씀처럼 건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의 사랑이 있어야 했고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클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들은 수많은 오해와 상처가 있는데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방 안에서 아름이는 오늘 밤 특히나 이준혁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아름이는 화장실에 갈 때를 빼고 손을 씻을 때도 이준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이준혁은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름이를 바라보았고 진심으로 아름이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의 안색이 조금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허리를 굽힐 때면 그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피를 토하고 실신한 뒤 그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윤혜인은 앞으로 다가가 이준혁의 품에 안겨 있는 아름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름아 너무 늦었어. 우리 이제 씻고 자야 해.”아름이는 한창 재밌게 놀고 있었기에 이준혁과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아름이는 이준혁의 목을 꽉 껴안고서는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엄마 오늘 밤 아빠도 여기서 자면 안 돼?”윤혜인은 아름이가 이른 부탁을 할 줄은 몰라 멈칫했고 이준혁은 옆에서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도 지금 자신의 안색이 얼마나 안 좋은지 몰랐다.그는 지금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했다.윤혜인은 심장이 빨리 뛰면서 익숙한 슬픔이 느껴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