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아직도 약간 멍한 상태에서 입을 열어 물었다.“여... 여기가 어디예요?”배남준은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차 안이야.”“내내 차 안에 있었던 거예요?”윤혜인은 깜짝 놀랐다.“도착해서 지금까지 계속 차에 있었단 말이에요?”“응. 네가 잠들었거든.”배남준이 말했다.“얼마나 잤는데요?”“네 시간 넘게.”윤혜인은 놀라서 멍하니 있었다.‘네 시간이나 잤다니...’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남준 오빠, 왜 안 깨웠어요?”윤혜인은 약간 미안해졌다. 배남준이 네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배남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여은 씨가 너 요즘 잠을 잘 못 잔다고 하더라고. 아마 산책하고 나서 피곤해서 잘 잔 것 같아. 그래서 깨우지 않고 좀 더 자게 했어.”이 말을 듣고 윤혜인은 배남준이 얼마나 배려심이 깊고 인내심이 강한지 새삼 느꼈다.배남준은 기다리는 동안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가 잘 자기를 바란 것이다.윤혜인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남준 오빠, 다음에는 나한테 이렇게까지 맞춰주지 않아도 돼요. 이러면 내가... 좀 미안하잖아요.”곽경천이 항상 윤혜인에게 배남준을 오빠처럼 생각하라고 했지만 윤혜인은 그렇게 대놓고 그를 오빠처럼 대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곧 배남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한테 맞추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너한테 고마워해야지.”“나한테 고맙다고요?”윤혜인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뭐 때문에요?”배남준은 설명했다.“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매일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바로 잠드는 날이 많았거든. 그런데 오늘 네가 자는 바람에 오랜만에 하늘을 봤더니 달이 이렇게나 밝고 예쁜 걸 처음 알았어.”윤혜인은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밤하늘에는 고요한 밤을 밝히는 아름다운 보름달이 떠 있었다. 정말로 환상적이었다.뒤이어 배남준의 따뜻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렸다.“오늘 네 덕분에 이렇게 멋진 달을
윤혜인은 전화를 확인하고 발신자가 이하진임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하진아...”하지만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이하진이 다급하게 말했다.“혜인 누나, 어디에요? 형이...”그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윤혜인은 불안해졌다.‘준혁 씨가 아직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나?’“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형한테 무슨 일 있어?”윤혜인은 침착하게 물었다.“형이 호텔에서 갑자기 쓰러졌어요. 제가 구급차를 불렀는데 20분 정도 걸린다고 해요. 너무 무서워요...”윤혜인의 마음은 놀라움과 걱정으로 가득 찼다.‘멀쩡히 있다가 왜 갑자기 쓰러진 거지?’“어느 호텔이야?”윤혜인이 물었다.“요트 호텔이에요.”이하진이 답했다.‘요트 호텔은...’윤혜인은 그 호텔이 저택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지난번에 이곳에 7성급 호텔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거기면 내가 있는 데랑 가까워.”윤혜인은 옷을 대충 걸쳐 입으며 말했다.“내가 지금 남준 오빠랑 같이 갈 테니 그동안 내가 알려준 대로 응급조치 먼저 해.”윤혜인은 이하진에게 간단한 응급 처치를 알려준 뒤 서둘러 배남준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계단을 내려가며 전화를 끊고 문을 두드렸는데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다행히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배남준이 이미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의 모습을 본 배남준은 평소의 여유 있는 표정에서 다급한 기색으로 변했다.“혜인아, 무슨 일이야?”“준혁... 준혁 씨가 쓰러졌어요. 남준 오빠, 의사 좀... 준혁 씨 좀 도와줄 수 있어요?”윤혜인은 숨을 고르며 겨우 말을 마쳤다.그러자 배남준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달랬다.“진정해. 내가 바로 조치할게.”곧 그는 핸드폰을 꺼내 북안도의 말을 하며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마친 후 윤혜인에게 말했다.“걱정 마. 북안도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불렀어.”두 사람은 서둘러 출발했고 그렇게 5분 만에 요트 호텔에 도착했다.
윤혜인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배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같이 가자.”윤혜인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에 도착하자 윤혜인은 복도에 앉아 이준혁이 진찰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그녀는 그날 결혼식 이후 이준혁이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그가 북안도에 머무른 지는 한 주가 넘었고 배씨 가문과 가까운 요트 호텔에 묵고 있었다.‘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사실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긴 했지만 윤혜인은 마음속으로 그 관계를 곱씹고 싶지 않았다.마치 그 저주가 다시 발동한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오늘 밤 이하진이 아니었다면 이준혁은 호텔에서 쓰러져 아무도 모른 채 있을 뻔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이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살짝 아팠다.그는 부드럽게 말했다.“혜인아, 그날 내가 이준혁 씨가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제안했지만 이준혁 씨는 떠나길 원하지 않더라고.”“준혁 씨가...”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마음이 복잡했다.배남준은 잠시 기다렸지만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계속해서 말했다.“또 한 가지가 있어. 오늘 우리가 공원에 갔을 때 검은색 SUV가 계속 따라오는 걸 봤어. 나중에 알아보니 그 차 안에 앉아 있던 사람이 바로 이준혁 씨였어. 아마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술에 의지한 거겠지.”배남준은 늘 솔직한 편이었다.그가 보기엔 이준혁이 그런 행동을 한 건 분명 윤혜인 때문이었으니 윤혜인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잠시 멍해졌다.‘오늘 그 검은색 SUV 안에 준혁 씨가 있었다니...’그러니 그녀가 SUV를 봤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게 당연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여전히 말이 없자 물었다.“혜인아, 이준혁 씨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고 싶어?”이 말을 할 때 배남준의 마음도 조금 불안했다.그는 윤혜인과 이준혁 사이에 진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서울에서도 그건 분명했다.몇 번을 헤어지고 다
윤혜인은 김성훈이 의학에 대해 잘 안다는 걸 알고 깊은 밤에도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김성훈은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라며 연신 미친놈이라며 외쳤다.그는 이준혁이 결혼식에 참석한 건 알았지만 이준혁이 비서와 함께 돌아오지 않고 주훈을 홀로 보내고 자신은 북안도에 남아 있었다는 건 몰랐다.북안도는 한류 지대에 위치해 기후가 춥고 습해서 부상을 치료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때문에 거기에 남아 있는 건 분명 다리 부상을 더 악화시킬 것이 뻔했다.지금 다치고 탈구된 데다 염증까지 생긴 상황에서 북안도에서 수술은 가능할지 몰라도 수술 후의 회복은 어떻게 할 것인가?북안도의 춥고 습한 환경은 회복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이후 김성훈이 제안한 것은 이준혁이 서울로 돌아가 수술을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서울에는 이준혁이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더 나은 환경이 있다는 이유였다.그는 덧붙였다.“추운 습기가 다리엔 안 좋은 걸 알면서도 돌아오지 않는다니... 내가 보기엔 그냥 다리를 포기하고 싶은 겁니다.”상황이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던 윤혜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교수님, 그럼 왜 지금까지도 준혁 씨의 다리가 이렇게 심각한 건가요?”두 달 가까이 치료를 했는데 어떻게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자 김성훈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사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에요. 뭐, 아주 심각한 건 아니죠.”윤혜인은 믿지 않았다.이준혁의 창백한 얼굴과 북안도 의사가 상황을 보고 고개를 내젓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분명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으니 말이다.“교수님, 준혁 씨의 다리 상태가 실제로 어떤지 알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나요?”윤혜인은 입술을 꼭 다물고 말을 덧붙였다.“어차피 알아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교수님에게서 가장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어요.”곧 김성훈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혜인 씨, 솔직히 말할게요. 준혁이는 지난 두 달 동안 하루도
김성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예요... 두 사람 정말... 에휴...”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남녀 간의 감정은 참 복잡해서 누구 하나 잘못한 건 없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서로 사랑할 인연이 있었지만 평생 함께할 운명은 아닌 듯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윤혜인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창백한 얼굴과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더욱 우울해 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결국 참지 못하고 배남준은 윤혜인을 강제로 이끌어 쉬게 했다.“윤혜인, 말 좀 들어. 네 배 속의 아기도 쉬어야 해.”“남준 오빠...”그때 윤혜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준혁 씨 치료하러 보내야 해요.”그녀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배남준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가 도와줘야 해요.”배남준은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윤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이준혁이 그날 오후 내내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도 배남준은 많은 생각을 했다.잠시 동안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기도 했다.왜냐하면 배남준은 자신이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방금 윤혜인이 그 남자를 선택해도 축복해주겠다고 했던 말은 사실 진심이 아니었다.배남준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네가 결정한 대로 할게. 내가 도울게.”...다음 날, 이준혁은 드디어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윤혜인을 보며 이준혁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손을 뻗어 만져보지도 못했다. 손을 내밀면 이 꿈이 깨질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윤혜인은 막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어젯밤 잠깐 눈을 붙였지만 불안한 꿈만 꾸고 제대로 쉬지 못했다.악몽 속에서 그 남자가 죽는 장면이 떠올라 밤새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 때문에 아침
분명히 그 코트는 남자의 것이었다.그리고 이 외투는 공원에서 배남준이 입고 있던 것이었다.순식간에 이준혁의 표정이 굳어졌다.윤혜인은 어젯밤 급하게 나와 옷을 얇게 입고 있었고 기다리는 동안 배남준이 자신의 코트를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이후 여은이 더 두꺼운 옷을 가져왔지만 윤혜인은 막 병실에 들어올 때 그래도 배남준의 코트를 다시 입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이준혁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이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괜찮아.”코끝이 찡해진 윤혜인은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괜찮을 리가 없잖아요.”이준혁은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 가슴이 아려왔다.자연스레 손이 침대 옆으로 들리더니 침대 면에서 주먹 한 뼘 정도의 거리에서 멈췄다.마치 보이지 않는 도덕적 경계선이 그를 붙잡고 있는 듯했다.이준혁은 자신의 명성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윤혜인은 앞으로 북안도에서 오래 머물러야 할지 모른다.때문에 그는 그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미안해.”이준혁이 그녀에게 사과했다.“놀랐지?”“아니요.”윤혜인은 울먹이며 말했다.“나 그렇게 겁쟁이는 아니에요.”그의 무릎 부상은 결국 윤혜인을 보호하다 입은 상처였다.죽기 전에 윤혜인을 노리는 에단 로드를 처리하려고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큰 부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배를 바라보며 힘겹게 집중했다.“그럼 너는 어때요? 몸은 괜찮아? 아기는 잘 있지?”두 사람이 이렇게 부드러운 대화를 나눈 건 참 오랜만이었다.윤혜인은 마음속의 쓴맛을 억누르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얌전하고 자주 발로 차지도 않아요.”“발로 차다니?”이준혁은 흥미가 생긴 듯 물었다. “아기가 발로 찬다고?”윤혜인이 임신했을 때, 그는 곁에 있지 못했기에 태동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네. 가끔은 아주 장난꾸러기예요.”윤혜인이 말하는 동안 갑자기 배가 살짝 불룩해졌고 이준혁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
이준혁은 자신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윤혜인이 말할 다음 말을 들어야 했다.윤혜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이미 결혼했고 내 삶이 있어요. 준혁 씨가 여기에 머물면 나와 남준 씨 사이에 오해가 생길 거예요. 나는 그런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윤혜인은 한 손으로 코트를 잡아당기며 몸을 더 따뜻하게 감싸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배남준을 남준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단순히 남준 씨라고 불렀다.마치 과거에 이준혁을 준혁 씨라고 부르던 시절처럼 모든 게 변했다는 걸 상기시키고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에게 모든 것이 달라졌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윤혜인은 덧붙였다.“준혁 씨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특별했어요. 사람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을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맞지 않았죠. 그러니 헤어진 건 옳은 선택이에요. 이제는 남준 씨와 함께 단순한 삶을 살고 싶어요. 이해할 수 있겠죠?”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준혁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윤혜인은 그가 이미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아마 곧 그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준혁 씨가 이해해주길 바라요.”윤혜인은 일어나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기 백일 되면... 그때 준혁 씨 초대할게요.”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준혁 씨, 서울로 돌아가 치료받아요. 거기가 준혁 씨 건강에는 더 적합할 거예요.”그 말을 남기고 윤혜인은 발걸음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혜인아, 가지 마...”눈빛에 어둡고 지친 기운이 가득한 채 이준혁은 그녀의 등을 향해 간절하게 불렀다.그러더니 이준혁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제발, 부탁이야. 나 정말 아무것도 안 할게. 그저 아이가 태어나는 걸 보고 싶어. 아름이가 태어날 때도 난 없었어.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자존심 강했던 이준혁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간절히 윤혜인에게 애원했다.그 모습에 발걸
윤혜인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랑할 용기가 없는 것이었다.사랑의 대가는 너무나 컸고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때 적절한 타이밍에 문이 열리더니 배남준이 들어왔다.“이야기 다 끝났어?”이준혁은 잠시 굳은 얼굴로 배남준을 바라보았다.‘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혜인이가 나랑 대화를 나눈 것도 배남준과 상의한 결과였다는 건가?’이준혁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사실은 이미 눈앞에 명확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이준혁을 바라보았다.“이준혁 씨, 다리를 위해서라도 서울로 돌아가 치료받는 게 좋을 겁니다. 아이 백일 때 오셔도 돼요. 언제든지 환영하니까요.”배남준의 태도는 당당했지만 그에 비해 이준혁의 자존심과 집착은 한순간에 초라해졌다.그는 마치 자신이 남의 가정을 침범하려는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한 듯한 기분이었다.온몸이 경직된 채 이준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배남준은 그의 무례함과 대답 없는 태도에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윤혜인에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집에 가자.”“네.”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짧은 ‘네’라는 대답 속에서도 배남준에 대한 의지가 느껴졌다.윤혜인은 그를 아주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마치 알콩달콩한 여느 부부처럼 느껴졌다.배남준의 손은 윤혜인과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며 더 단단히 그녀와 연결됐다.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이 순간, 이준혁은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올라 그들을 쫓아가서라도 이 관계를 깨뜨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혜인이는 분명히 나랑 함께 잘 살아 보겠다고 약속했는데...’하지만 이제 윤혜인은 아무 망설임 없이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태연하게 떠나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굳어버린 다리는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이준혁은 그들을 쫓아가는 것은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쾅!”침대 옆의 스탠드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