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아직도 약간 멍한 상태에서 입을 열어 물었다.“여... 여기가 어디예요?”배남준은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차 안이야.”“내내 차 안에 있었던 거예요?”윤혜인은 깜짝 놀랐다.“도착해서 지금까지 계속 차에 있었단 말이에요?”“응. 네가 잠들었거든.”배남준이 말했다.“얼마나 잤는데요?”“네 시간 넘게.”윤혜인은 놀라서 멍하니 있었다.‘네 시간이나 잤다니...’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남준 오빠, 왜 안 깨웠어요?”윤혜인은 약간 미안해졌다. 배남준이 네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다.하지만 배남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여은 씨가 너 요즘 잠을 잘 못 잔다고 하더라고. 아마 산책하고 나서 피곤해서 잘 잔 것 같아. 그래서 깨우지 않고 좀 더 자게 했어.”이 말을 듣고 윤혜인은 배남준이 얼마나 배려심이 깊고 인내심이 강한지 새삼 느꼈다.배남준은 기다리는 동안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가 잘 자기를 바란 것이다.윤혜인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남준 오빠, 다음에는 나한테 이렇게까지 맞춰주지 않아도 돼요. 이러면 내가... 좀 미안하잖아요.”곽경천이 항상 윤혜인에게 배남준을 오빠처럼 생각하라고 했지만 윤혜인은 그렇게 대놓고 그를 오빠처럼 대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곧 배남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한테 맞추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너한테 고마워해야지.”“나한테 고맙다고요?”윤혜인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뭐 때문에요?”배남준은 설명했다.“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매일 서재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바로 잠드는 날이 많았거든. 그런데 오늘 네가 자는 바람에 오랜만에 하늘을 봤더니 달이 이렇게나 밝고 예쁜 걸 처음 알았어.”윤혜인은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밤하늘에는 고요한 밤을 밝히는 아름다운 보름달이 떠 있었다. 정말로 환상적이었다.뒤이어 배남준의 따뜻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렸다.“오늘 네 덕분에 이렇게 멋진 달을
윤혜인은 전화를 확인하고 발신자가 이하진임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하진아...”하지만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이하진이 다급하게 말했다.“혜인 누나, 어디에요? 형이...”그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윤혜인은 불안해졌다.‘준혁 씨가 아직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나?’“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형한테 무슨 일 있어?”윤혜인은 침착하게 물었다.“형이 호텔에서 갑자기 쓰러졌어요. 제가 구급차를 불렀는데 20분 정도 걸린다고 해요. 너무 무서워요...”윤혜인의 마음은 놀라움과 걱정으로 가득 찼다.‘멀쩡히 있다가 왜 갑자기 쓰러진 거지?’“어느 호텔이야?”윤혜인이 물었다.“요트 호텔이에요.”이하진이 답했다.‘요트 호텔은...’윤혜인은 그 호텔이 저택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지난번에 이곳에 7성급 호텔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거기면 내가 있는 데랑 가까워.”윤혜인은 옷을 대충 걸쳐 입으며 말했다.“내가 지금 남준 오빠랑 같이 갈 테니 그동안 내가 알려준 대로 응급조치 먼저 해.”윤혜인은 이하진에게 간단한 응급 처치를 알려준 뒤 서둘러 배남준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계단을 내려가며 전화를 끊고 문을 두드렸는데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다행히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배남준이 이미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의 모습을 본 배남준은 평소의 여유 있는 표정에서 다급한 기색으로 변했다.“혜인아, 무슨 일이야?”“준혁... 준혁 씨가 쓰러졌어요. 남준 오빠, 의사 좀... 준혁 씨 좀 도와줄 수 있어요?”윤혜인은 숨을 고르며 겨우 말을 마쳤다.그러자 배남준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달랬다.“진정해. 내가 바로 조치할게.”곧 그는 핸드폰을 꺼내 북안도의 말을 하며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마친 후 윤혜인에게 말했다.“걱정 마. 북안도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불렀어.”두 사람은 서둘러 출발했고 그렇게 5분 만에 요트 호텔에 도착했다.
윤혜인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배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같이 가자.”윤혜인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병원에 도착하자 윤혜인은 복도에 앉아 이준혁이 진찰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그녀는 그날 결혼식 이후 이준혁이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그가 북안도에 머무른 지는 한 주가 넘었고 배씨 가문과 가까운 요트 호텔에 묵고 있었다.‘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사실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긴 했지만 윤혜인은 마음속으로 그 관계를 곱씹고 싶지 않았다.마치 그 저주가 다시 발동한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오늘 밤 이하진이 아니었다면 이준혁은 호텔에서 쓰러져 아무도 모른 채 있을 뻔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이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살짝 아팠다.그는 부드럽게 말했다.“혜인아, 그날 내가 이준혁 씨가 안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제안했지만 이준혁 씨는 떠나길 원하지 않더라고.”“준혁 씨가...”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마음이 복잡했다.배남준은 잠시 기다렸지만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계속해서 말했다.“또 한 가지가 있어. 오늘 우리가 공원에 갔을 때 검은색 SUV가 계속 따라오는 걸 봤어. 나중에 알아보니 그 차 안에 앉아 있던 사람이 바로 이준혁 씨였어. 아마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술에 의지한 거겠지.”배남준은 늘 솔직한 편이었다.그가 보기엔 이준혁이 그런 행동을 한 건 분명 윤혜인 때문이었으니 윤혜인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잠시 멍해졌다.‘오늘 그 검은색 SUV 안에 준혁 씨가 있었다니...’그러니 그녀가 SUV를 봤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게 당연했다.배남준은 윤혜인이 여전히 말이 없자 물었다.“혜인아, 이준혁 씨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고 싶어?”이 말을 할 때 배남준의 마음도 조금 불안했다.그는 윤혜인과 이준혁 사이에 진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서울에서도 그건 분명했다.몇 번을 헤어지고 다
윤혜인은 김성훈이 의학에 대해 잘 안다는 걸 알고 깊은 밤에도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김성훈은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라며 연신 미친놈이라며 외쳤다.그는 이준혁이 결혼식에 참석한 건 알았지만 이준혁이 비서와 함께 돌아오지 않고 주훈을 홀로 보내고 자신은 북안도에 남아 있었다는 건 몰랐다.북안도는 한류 지대에 위치해 기후가 춥고 습해서 부상을 치료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때문에 거기에 남아 있는 건 분명 다리 부상을 더 악화시킬 것이 뻔했다.지금 다치고 탈구된 데다 염증까지 생긴 상황에서 북안도에서 수술은 가능할지 몰라도 수술 후의 회복은 어떻게 할 것인가?북안도의 춥고 습한 환경은 회복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이후 김성훈이 제안한 것은 이준혁이 서울로 돌아가 수술을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서울에는 이준혁이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더 나은 환경이 있다는 이유였다.그는 덧붙였다.“추운 습기가 다리엔 안 좋은 걸 알면서도 돌아오지 않는다니... 내가 보기엔 그냥 다리를 포기하고 싶은 겁니다.”상황이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던 윤혜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교수님, 그럼 왜 지금까지도 준혁 씨의 다리가 이렇게 심각한 건가요?”두 달 가까이 치료를 했는데 어떻게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자 김성훈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사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에요. 뭐, 아주 심각한 건 아니죠.”윤혜인은 믿지 않았다.이준혁의 창백한 얼굴과 북안도 의사가 상황을 보고 고개를 내젓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분명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으니 말이다.“교수님, 준혁 씨의 다리 상태가 실제로 어떤지 알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나요?”윤혜인은 입술을 꼭 다물고 말을 덧붙였다.“어차피 알아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교수님에게서 가장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어요.”곧 김성훈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혜인 씨, 솔직히 말할게요. 준혁이는 지난 두 달 동안 하루도
김성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예요... 두 사람 정말... 에휴...”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남녀 간의 감정은 참 복잡해서 누구 하나 잘못한 건 없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서로 사랑할 인연이 있었지만 평생 함께할 운명은 아닌 듯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윤혜인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창백한 얼굴과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더욱 우울해 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결국 참지 못하고 배남준은 윤혜인을 강제로 이끌어 쉬게 했다.“윤혜인, 말 좀 들어. 네 배 속의 아기도 쉬어야 해.”“남준 오빠...”그때 윤혜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준혁 씨 치료하러 보내야 해요.”그녀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배남준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가 도와줘야 해요.”배남준은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윤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이준혁이 그날 오후 내내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도 배남준은 많은 생각을 했다.잠시 동안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기도 했다.왜냐하면 배남준은 자신이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방금 윤혜인이 그 남자를 선택해도 축복해주겠다고 했던 말은 사실 진심이 아니었다.배남준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네가 결정한 대로 할게. 내가 도울게.”...다음 날, 이준혁은 드디어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윤혜인을 보며 이준혁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손을 뻗어 만져보지도 못했다. 손을 내밀면 이 꿈이 깨질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윤혜인은 막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어젯밤 잠깐 눈을 붙였지만 불안한 꿈만 꾸고 제대로 쉬지 못했다.악몽 속에서 그 남자가 죽는 장면이 떠올라 밤새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 때문에 아침
분명히 그 코트는 남자의 것이었다.그리고 이 외투는 공원에서 배남준이 입고 있던 것이었다.순식간에 이준혁의 표정이 굳어졌다.윤혜인은 어젯밤 급하게 나와 옷을 얇게 입고 있었고 기다리는 동안 배남준이 자신의 코트를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이후 여은이 더 두꺼운 옷을 가져왔지만 윤혜인은 막 병실에 들어올 때 그래도 배남준의 코트를 다시 입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이준혁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이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괜찮아.”코끝이 찡해진 윤혜인은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괜찮을 리가 없잖아요.”이준혁은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 가슴이 아려왔다.자연스레 손이 침대 옆으로 들리더니 침대 면에서 주먹 한 뼘 정도의 거리에서 멈췄다.마치 보이지 않는 도덕적 경계선이 그를 붙잡고 있는 듯했다.이준혁은 자신의 명성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윤혜인은 앞으로 북안도에서 오래 머물러야 할지 모른다.때문에 그는 그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미안해.”이준혁이 그녀에게 사과했다.“놀랐지?”“아니요.”윤혜인은 울먹이며 말했다.“나 그렇게 겁쟁이는 아니에요.”그의 무릎 부상은 결국 윤혜인을 보호하다 입은 상처였다.죽기 전에 윤혜인을 노리는 에단 로드를 처리하려고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큰 부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배를 바라보며 힘겹게 집중했다.“그럼 너는 어때요? 몸은 괜찮아? 아기는 잘 있지?”두 사람이 이렇게 부드러운 대화를 나눈 건 참 오랜만이었다.윤혜인은 마음속의 쓴맛을 억누르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얌전하고 자주 발로 차지도 않아요.”“발로 차다니?”이준혁은 흥미가 생긴 듯 물었다. “아기가 발로 찬다고?”윤혜인이 임신했을 때, 그는 곁에 있지 못했기에 태동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네. 가끔은 아주 장난꾸러기예요.”윤혜인이 말하는 동안 갑자기 배가 살짝 불룩해졌고 이준혁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
이준혁은 자신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윤혜인이 말할 다음 말을 들어야 했다.윤혜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이미 결혼했고 내 삶이 있어요. 준혁 씨가 여기에 머물면 나와 남준 씨 사이에 오해가 생길 거예요. 나는 그런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윤혜인은 한 손으로 코트를 잡아당기며 몸을 더 따뜻하게 감싸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배남준을 남준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단순히 남준 씨라고 불렀다.마치 과거에 이준혁을 준혁 씨라고 부르던 시절처럼 모든 게 변했다는 걸 상기시키고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에게 모든 것이 달라졌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윤혜인은 덧붙였다.“준혁 씨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특별했어요. 사람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을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맞지 않았죠. 그러니 헤어진 건 옳은 선택이에요. 이제는 남준 씨와 함께 단순한 삶을 살고 싶어요. 이해할 수 있겠죠?”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준혁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윤혜인은 그가 이미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아마 곧 그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준혁 씨가 이해해주길 바라요.”윤혜인은 일어나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기 백일 되면... 그때 준혁 씨 초대할게요.”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준혁 씨, 서울로 돌아가 치료받아요. 거기가 준혁 씨 건강에는 더 적합할 거예요.”그 말을 남기고 윤혜인은 발걸음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혜인아, 가지 마...”눈빛에 어둡고 지친 기운이 가득한 채 이준혁은 그녀의 등을 향해 간절하게 불렀다.그러더니 이준혁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제발, 부탁이야. 나 정말 아무것도 안 할게. 그저 아이가 태어나는 걸 보고 싶어. 아름이가 태어날 때도 난 없었어.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자존심 강했던 이준혁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간절히 윤혜인에게 애원했다.그 모습에 발걸
윤혜인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랑할 용기가 없는 것이었다.사랑의 대가는 너무나 컸고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때 적절한 타이밍에 문이 열리더니 배남준이 들어왔다.“이야기 다 끝났어?”이준혁은 잠시 굳은 얼굴로 배남준을 바라보았다.‘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혜인이가 나랑 대화를 나눈 것도 배남준과 상의한 결과였다는 건가?’이준혁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사실은 이미 눈앞에 명확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이준혁을 바라보았다.“이준혁 씨, 다리를 위해서라도 서울로 돌아가 치료받는 게 좋을 겁니다. 아이 백일 때 오셔도 돼요. 언제든지 환영하니까요.”배남준의 태도는 당당했지만 그에 비해 이준혁의 자존심과 집착은 한순간에 초라해졌다.그는 마치 자신이 남의 가정을 침범하려는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한 듯한 기분이었다.온몸이 경직된 채 이준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배남준은 그의 무례함과 대답 없는 태도에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윤혜인에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집에 가자.”“네.”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짧은 ‘네’라는 대답 속에서도 배남준에 대한 의지가 느껴졌다.윤혜인은 그를 아주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마치 알콩달콩한 여느 부부처럼 느껴졌다.배남준의 손은 윤혜인과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며 더 단단히 그녀와 연결됐다.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이 순간, 이준혁은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올라 그들을 쫓아가서라도 이 관계를 깨뜨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혜인이는 분명히 나랑 함께 잘 살아 보겠다고 약속했는데...’하지만 이제 윤혜인은 아무 망설임 없이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태연하게 떠나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굳어버린 다리는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이준혁은 그들을 쫓아가는 것은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쾅!”침대 옆의 스탠드가 바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
육경한이 가자 유진은 소원을 데리고 시터가 남긴 약 찌꺼기를 찾으러 갔지만 주방은 말끔히 청소한 상태였고 시터가 쓰던 방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소원은 시터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에 보디가드를 찾아가서야 시터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몇 마디 묻지도 못했는데 쓰러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온 걸 보고 방민아와 같이 경찰에게 넘겼다고 말했다.‘정녕 그 약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걸까?’그때 유진이 말했다.“엄마, 약 봉투를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봉투로 무슨 약인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요?”소원은 너무 기쁜 나머지 유진을 안고 뽀뽀했다.“유진이 정말 너무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됐어.”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수줍어했다. 유진은 차갑던 예전과 달리 많이 밝아진 것 같은 소원이 너무 좋아 손을 꼭 잡은 채 용기 내어 물었다.“엄마, 혹시 유진이가 미운 건 아니죠? 유진이가 나쁜 이모 말 들은 건 나쁜 이모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예요.”소원이 유진의 볼을 어루만지며 웃었다.“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똑똑한 유진이가 알아서 자기를 지켜냈으니 엄마는 너무 뿌듯한걸?”소원이 자기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소원은 유진의 호루라기에서 뺀 메모리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었다. 용량이 생각보다 컸고 유진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시간까지 표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으로 아주머니가 시터의 박해를 받았다는 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지만 방민아가 이 일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영상이 아니라 사진이었기에 오디오가 없어 방민아가 시터와 서 있는 것만으로 이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었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시터가 직접 방민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시터의 마음을 돌리기 매우 어려워 보였다.일단 급선무가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이었기에 일단 다른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뒤로 넘기던 소원은 원하는 사진을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육경한에게 보내줬다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