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자신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윤혜인이 말할 다음 말을 들어야 했다.윤혜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이미 결혼했고 내 삶이 있어요. 준혁 씨가 여기에 머물면 나와 남준 씨 사이에 오해가 생길 거예요. 나는 그런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윤혜인은 한 손으로 코트를 잡아당기며 몸을 더 따뜻하게 감싸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배남준을 남준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단순히 남준 씨라고 불렀다.마치 과거에 이준혁을 준혁 씨라고 부르던 시절처럼 모든 게 변했다는 걸 상기시키고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에게 모든 것이 달라졌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윤혜인은 덧붙였다.“준혁 씨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특별했어요. 사람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을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맞지 않았죠. 그러니 헤어진 건 옳은 선택이에요. 이제는 남준 씨와 함께 단순한 삶을 살고 싶어요. 이해할 수 있겠죠?”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준혁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윤혜인은 그가 이미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아마 곧 그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준혁 씨가 이해해주길 바라요.”윤혜인은 일어나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기 백일 되면... 그때 준혁 씨 초대할게요.”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준혁 씨, 서울로 돌아가 치료받아요. 거기가 준혁 씨 건강에는 더 적합할 거예요.”그 말을 남기고 윤혜인은 발걸음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혜인아, 가지 마...”눈빛에 어둡고 지친 기운이 가득한 채 이준혁은 그녀의 등을 향해 간절하게 불렀다.그러더니 이준혁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제발, 부탁이야. 나 정말 아무것도 안 할게. 그저 아이가 태어나는 걸 보고 싶어. 아름이가 태어날 때도 난 없었어.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자존심 강했던 이준혁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간절히 윤혜인에게 애원했다.그 모습에 발걸
윤혜인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랑할 용기가 없는 것이었다.사랑의 대가는 너무나 컸고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때 적절한 타이밍에 문이 열리더니 배남준이 들어왔다.“이야기 다 끝났어?”이준혁은 잠시 굳은 얼굴로 배남준을 바라보았다.‘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혜인이가 나랑 대화를 나눈 것도 배남준과 상의한 결과였다는 건가?’이준혁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사실은 이미 눈앞에 명확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이준혁을 바라보았다.“이준혁 씨, 다리를 위해서라도 서울로 돌아가 치료받는 게 좋을 겁니다. 아이 백일 때 오셔도 돼요. 언제든지 환영하니까요.”배남준의 태도는 당당했지만 그에 비해 이준혁의 자존심과 집착은 한순간에 초라해졌다.그는 마치 자신이 남의 가정을 침범하려는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한 듯한 기분이었다.온몸이 경직된 채 이준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배남준은 그의 무례함과 대답 없는 태도에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윤혜인에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집에 가자.”“네.”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짧은 ‘네’라는 대답 속에서도 배남준에 대한 의지가 느껴졌다.윤혜인은 그를 아주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마치 알콩달콩한 여느 부부처럼 느껴졌다.배남준의 손은 윤혜인과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며 더 단단히 그녀와 연결됐다.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이 순간, 이준혁은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올라 그들을 쫓아가서라도 이 관계를 깨뜨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혜인이는 분명히 나랑 함께 잘 살아 보겠다고 약속했는데...’하지만 이제 윤혜인은 아무 망설임 없이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태연하게 떠나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굳어버린 다리는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이준혁은 그들을 쫓아가는 것은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쾅!”침대 옆의 스탠드가 바
배남준은 윤혜인이 산 것이면 가지려고 했다.“아니야. 그렇게 까탈스럽지는 않아.”배남준이 웃으며 말했다.“집에 가자.”배남준이 차 문을 열며 윤혜인을 차에 태웠다.차는 이미 떠났지만 창문가를 꿋꿋이 지키는 그림자는 여전했다.이준혁은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보며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그녀의 손을 잡고 안고 달래는 건 원래 그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배남준이 그의 자리를 완전히 뺏어가 버렸다.이준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이준혁은 이튿날 비행기로 떠났다.지금 서울로 돌아가 수술한다면 윤혜인의 출산 예정일을 놓칠 게 뻔했다.이준혁은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윤혜인은 매정하게도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윤혜인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로 다른 사람과 새로운 삶은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이준혁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친근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요동쳤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더 미쳐가거나 아니면 더 비굴해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준혁의 교양과 자존심이 그가 더 비굴해지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 윤혜인이 원하는 조용한 삶을 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구경도 하고 산책도 했다.그럴 때마다 옆에는 배남준이 함께했다.저녁이 되자 테이블에는 윤혜인의 입맛을 맞춰서 준비한 요리들이 올라왔지만 윤혜인은 젓가락만 헤집을 뿐 별로 먹지 않았다.배남준이 다가와 물었다.“저녁 먹어?”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배남준을 올려다봤다.“오빠, 어쩐 일로 왔어요?”도우미가 배남준의 손에서 외투를 받아 걸었다.배남준이 말했다.“같이 밥 먹으려고 왔지.”배남준은 요즘 호적을 따로 옮기느라 바빴다. 윤혜인과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이민 하러 가겠다는 핑계로 말이다.배씨 가문은 이런 규정이 있었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면 호적
배남준은 차갑게 굳은 어머니의 시체를 지키고 있었지만 배영석은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배남준은 언젠가 배씨 가문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그렇게 조금 크고 나서도 배씨 가문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특출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교육자가 되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다사실 배남준은 학식이 높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총명했다. 국제 무역도 막힘없이 해냈고 다른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배영석은 평생을 용맹하게 산 자신과는 달리 유약한 서생으로 자란 배남준을 보며 후계자 교육을 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하여 배남준이 호적을 따로 파겠다고 해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배영석은 배남준이 북안도를 떠나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교육자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아이도 제대로 키우지 못할 텐데 고생 좀 하다 보면 다시 북안도로 돌아와 의지할 곳을 찾을 것이다.배영석은 배남준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지만 배남준의 와이프 윤혜인과 처남인 곽경천이 궁금했다.곽씨 가문은 L 국에서도 꽤 유명했다. 이번에 곽진명은 몸이 좋지 않아 오지 못했지만 곽진명과 어떻게 항운 사업을 확장할지를 관해 토론해 보고 싶었다.곽씨 가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라도 배영석은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러주며 새며느리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그러면 북안도에서 며느리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한편, 배남준이 손을 씻고는 식탁을 마주한 채 앉았다.도우미가 수저를 내다 주고는 천천히 물러가자 주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배남준이 야채를 집어서 먹더니 말했다.“맛 괜찮네. 이거 먹어봐. 아이에게 좋대.”윤혜인이 한 젓가락 집어서 입에 넣었지만 나무껍질을 씹는 것처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도 배남준이 먼저 한입 먹고 괜찮다 싶으면 윤혜인에게 말해줬다. 윤혜인은 그런 배남준의 성화에 못 이겨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먹었다.웬만큼 먹자 배남준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이준혁 씨 수술 잘 받았고
윤혜인도 조금이라도 많이 먹고 싶어 억지로 먹지만 그러고 나면 다 토해내기 일쑤였기에 오히려 역효과였다.심지어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할 것 같았고 합격한 엄마도 될 수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곽경천과 배남준은 다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윤혜인도 배가 점점 불러왔기에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란 최대한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배남준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배남준이 뭔가 눈치챈 것 같았다.다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참다간 정말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잡고 얘기하는 게 제일 전형적인 자아 구제 수단이었다.윤혜인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병이 나기 전에 적극적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오빠, 나 살짝 힘들어. 아무것도 못 하는데 짐만 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이 셋을 잘 키워낼 수 있는지도 의문이야.”윤혜인은 마음속에 꾹꾹 눌러뒀던 말을 내뱉고 나서야 참아왔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원지민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짐이 된 것이다.배남준은 윤혜인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발견했다. 배남준과 곽경천은 매일 자기가 할 일에 몰두하느라 여자가 임신하면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놓치고 말았다.방에 앉아 소식만 기다리는 나날 속에 윤혜인은 자기가 점점 쓸모없는 사람으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혜인아.”배남준이 윤혜인 맞은편에 앉더니 손을 꼭 잡으며 윤혜인을 바라봤다.“혜인아, 너 지금 엄청 잘하고 있어. 부담 갖지 마. 우리 기분 걱정하느라 무슨 생각이 들어도 꾹 참고 혼자 소화해 내면서 몸도 잘 챙기고 있잖아.”“모든 일을 질서정연하게 잘 해내고 있는데 아이들을 잘 키워내지 못할 리가 있겠어?”“아름이 봐봐 얼마나 건강하고 예뻐. 네가 좋은 엄마라는 제일 좋은 증거잖아.”배남준이 곽아름 얘기만 꺼내도 윤혜인은 잠시 기분 나쁜
곽경천이 윤혜인을 찾아 얘기를 나눴다. 별다른 진척은 없어도 배남준의 건의에 따라 윤혜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이를 들은 윤혜인이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오빠, 혹시 그 CCTV 영상 나 보여줄 수 있어?”얘기를 들어보니 CCTV 속에 찍힌 안경남이 유일한 단서 같았다.곽경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윤혜인이 임신 중에 걱정하는 게 싫었지만 이 일은 윤혜인에게 큰 고민거리가 된 것 같았다.곽경천은 CCTV 영상을 태블릿에 카피해 윤혜인에게 건네더니 자기도 옆에 앉아서 같이 봤다.이 영상을 500번도 넘게 본 곽경천이었다. 남자가 사라진 골목의 CCTV도 100번 넘게 봤지만 전혀 단서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멀쩡한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니 정말 난해했다.윤혜인이 다시 한번 쭉 보더니 순환 재생을 누르며 여러 번 돌려봤다.남자가 어딘가 이상했지만 도대체 어디가 이상한지는 콕 집어내긴 힘들었다.옷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 까만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어깨에 엄청 두꺼운 패드를 욱여넣은 것 같았다. 이렇게 두꺼운 패드를 넣었다는 건 체격을 불리기 위해서였다.남자는 점잖으면서 빈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키도 작은 편이었다. 겨우 170이 되는 키에 어깨 패드를 잔뜩 욱여넣으니 꼴이 오히려 우스워 보였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곽경천의 말처럼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다.그래도 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여러 번 더 돌려봤다. 곽경천이 나가서 30분 남짓하게 통화를 하고 왔지만 윤혜인은 아직도 소파에 앉아 쿠션을 앉고 영상을 보고 있었다.“됐어.”곽경천이 그쪽으로 다가가 말했다.“내일 마저 봐. 그러다 눈 나빠지겠다.”곽경천이 이렇게 말하며 태블릿을 끄려 했다. 하지만 태블릿을 아래로 누르는 순간 윤혜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곽경천이 멈칫했다. 윤혜인이 정지 버튼을 누르자 화면은 안경남이 진열장 앞에 3초 정도 머물러 있는 게 보였다.하지만 진열장 안에는 눈길을 끌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저 하얀 벽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라니.곽경천은 문득 그 사람이 사라진 골목에 까만 옷을 입은 행색이 수상한 여자를 봤던 게 떠올랐다. 백번도 넘게 본 영상이라 틀림없었다.곽경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윤혜인을 꼭 끌어안으며 칭찬했다.“혜인아, 정말 고마워. 정말 큰 도움이 됐어.”윤혜인은 너무 기뻤다. 윤아름을 찾을 단서가 다시 생겨난 것이다.곽경천은 골목 CCTV 영상을 핸드폰에서 카피해 윤혜인과 계속 돌려보기 시작했다.이번에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까만 옷을 입은 여자가 약재를 사 간 안경남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이에 그들은 이 여자가 윤아름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아니면 약재 하나를 사기 위해 남자로 위장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동시에 윤아름이 살아있다는 게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도 설명할 수 있었다.‘엄마가 아직 살아있다니.’곽경천은 이 영상을 컴퓨터 고수에게 보내 이 여자의 형상만 단독으로 따내 알아보기 쉽게 해상도를 높여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의 정면 형상이 나왔다.곽경천은 그 사진을 배남준에게 보내 조사해달라고 했다. 배남준이 북안도에서의 세력이라면 여자를 빠른 시일 내에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해가 지기도 전에 소식이 왔다.여자는 강북구 진 의사님의 딸 진우희였고 마찬가지로 의대생이었다.곽경천은 여자를 찾는 일에는 윤혜인을 나서지 못하게 했다. 언제든 잠재적인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윤혜인도 배가 나날이 커져 불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따라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조심하라고 당부하며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말라고 덧붙였다.곽경천이 가고 윤혜인은 마음을 졸이며 집에서 기다렸다.한편. 원씨 저택.오늘은 윤아름에게 주기적으로 침을 놓는 날이었기에 진우희는 문 앞에 서서 집사가 나오길 기다렸다.집사가 검사를 마치고 진우희에게 지하로 통하는 숨겨진 문을 열어줬다.안으로 들어가자 윤아름이 침대맡에 앉아 수놓기하고 있었다. 원진우에게 한참 빌어서야 특제된 바늘로 심심풀이할 수 있게 동의했다
작은 여자아이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엄마, 나는 잘 모르겠어요. 무슨 이야기에요?”“엄마가 들려줄 테니까 얌전하게 자야 해.”윤아름이 여자아이의 머리를 만지며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요. 엄마.”여자아이가 윤아름의 품에 기대 눈을 감고 윤아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엄마 제비와 작은 제비는 원래 수풀이 우거진 숲에 살고 있었는데 정말 풍요로운 숲이었어. 안에는 친절한 이웃들도 많고 먹을 것도 참 많았단다. 엄마 제비와 작은 제비는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어.”“엄마 제비는 작은 제비에게 많은 걸 가르쳐줬지. 그들이 둥지를 튼 작은 나무 아래는 식물이 하나 자라나고 있었는데 작은 제비는 여러 꽃과 식물을 알아가는 걸 좋아했단다. 새로운 식물을 볼 때마다 엄마에게 이건 무엇이냐고 물었지.”“그러면 엄마 제비는 그 식물이 아주 좋은 약재인 당귀라고 말해줬어. 병을 고쳐줄뿐더러 목숨까지 구해줄 수 있는 신선들이 먹는 약이라고.”“천진난만한 작은 제비는 이렇게 물었어. 엄마, 그러면 우리 둥지 아래 자라난 저 당귀 팅커벨이 변한 게 아닐까요? 우리 집 지켜주려고요.”“엄마 제비가 말했지. 맞아. 당귀가 자라난 옆이 바로 우리 집이야. 만약 어느 날 길을 잃으면 당귀를 찾아. 그러면 엄마가 꼭 거기에서 기다릴 거야.”“작은 제비는 잘 기억하겠다고 말했어.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제비가 작은 제비에게 먹일 먹이를 구하러 갔다가 천재지변이 일어난 거야. 무시무시한 불이 숲을 삼켜버릴 기세로 활활 타올랐어. 숲에 있던 동물 친구들이 하나둘씩 죽어갔고 엄마 제비가 먹이를 물고 돌아왔을 때는 까맣게 타버린 나무 기둥만 발견했지. 숲은 까맣게 탄 재와 잔가지들만 남아 있었고 녹음은 찾아볼 수 없었어.”엄마 제비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애타게 작은 제비를 불렀지만 더는 작은 제비가 해맑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부르는 걸 들을 수가 없었어.”“산불이 지나갔지만 엄마 제비는 숲을 떠나지 않았어. 착한 인간들이 숲을 재건하는 걸 보며 엄마 제비는
“소원, 우리 혼인신고 했어.”육경한이 짧고 간결하게 설명했다.소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표님 미친 거 아니야? 혼인신고를 했다고?’한참 후, 소종은 겨우 입을 열었는데 말 속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형님,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그 여자가 형님을 해치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옆에 두시겠다고요?”소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됐다.육경한의 머리를 한번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병원에 가서 뇌 CT라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그저 황당하고 답답할 뿐이었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육경한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나마 소종은 평생을 함께하며 고난을 헤쳐온 동료였기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 자체를 꺼낼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형님...”소종은 어렵게 입을 뗐다.그가 육경한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건 솔직한 진심을 말할 때뿐이었다.그 호칭은 그들이 한때 얼마나 험난한 늪에서 기어 나왔는지를 상기시켜주는 이름이었다.지금의 안정된 삶을 소중히 여겨야 했다.그런데 왜 굳이 육경한이 스스로 곁에 시한폭탄을 들여놓으려 하는지, 그것도 머리맡에까지 두는지 소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만.”육경한이 그의 말을 끊었다.“이제부터 소원은 내 아내야. 미우 그룹의 모든 자원은 소원을 위해 조건 없이 제공될 거다. 그리고 누구든 내 아내를 괴롭히는 걸 나는 보고 싶지 않아. 알겠어?”“...”소종은 말문이 막혔다.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차갑고 무정한 여자가 대체 뭐가 좋아서 대표님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육경한이 한 말은 지켜야 했다.지켜야 하는 동시에 그의 안전도 보장해야 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알겠습니다.”소종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봐.”육경한이 말했다.사무실에서 나간 뒤에도 소종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하여 그는 바로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들을 닭 잡듯이 몰아
“대표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얼굴이 정말 밝아 보이네요.”“대표님 결혼하신다면서요? 아마 방민아 씨와 관련된 일이겠죠.”“방민아 씨랑 늘 사이가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기분 좋아 보인 적은 없었는데... 꼭 방민아 씨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그럼 누구 때문인데요?”직원들이 소곤소곤 수군거리는 소리에 갑자기 낮고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다들 그렇게 한가해요?”직원들이 고개를 돌리자 소종이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소 비서님...”소종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일 안 하고 대표님 뒷얘기나 하다니. 다음번에 근무 시간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월간 개근 수당 전부 삭감할 테니까 알아서들 해요.”직원들은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흩어졌지만 모퉁이를 돌아가면서도 계속 속삭였다.“소 비서님, 왜 이렇게 분노하신 거예요? 뭔가 이상한 냄새 나는데.”“대표님 기분은 좋아 보이던데 소 비서님은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이죠?”“그만해요. 또 걸리면 진짜 큰일 나요. 빨리 일이나 하자고요...”소종의 얼굴이 어두웠던 이유는 방금 홍보 부서에서 나온 직후였기 때문이다.30분 전, 육경한은 그에게 방씨 가문과의 결혼 취소에 대한 공식 발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이 발표는 회사 안팎으로 큰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단순히 대표의 개인사가 아니라 방씨 가문과 여전히 협력 관계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터진 폭탄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만약 방민아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면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추락할 수밖에 없겠지.’소종은 속으로 기도했다.‘제발 방민아가 입 다물고 조용히 넘어가 줬으면. 괜히 일 키우지 말라고.’그러나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그는 방민아를 조금은 비웃고 있었다.‘사모님 자리를 꿰찰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패배하다니. 쓸모없네.’그렇게 소종은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육경한은 책상 앞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프로젝트 제안서를 수정하고 있었
소원은 밤새 이어진 피곤함에 결국 다음 날 오후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보니 침대에 남아 있어야 할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몸 아래 깔린 침대 시트도 전날의 짙은 색에서 은은한 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소원은 희미하게 기억났다.‘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던 건... 너무 젖어서 못 잘 지경이었으니까.’이런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남자의 지나친 무절제함에 화가 치밀었다.‘도대체 이 거래는 누구한테 유리한 거야? 완전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처럼 굴었잖아.’처음의 분위기조차 그저 식전 음식 같은 것에 불과했다니 정말 어이없을 정도였다.소원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방 문이 살며시 두드려졌다.“사모님, 깨어나셨습니까?”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소원은 곧 대답했다.“네, 깼어요.”“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말을 듣고 소원은 잠시 침묵했다.‘우리가 어제 얼마나 늦게까지 했는지 다들 아는 걸까...’창피함이 몰려왔지만 굳이 내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10분 뒤에 가져와 주세요.”침대에서 내려오려던 그녀는 한쪽 다리가 휘청이며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속으로 육경한을 욕한 뒤 이를 악물며 욕실로 가 재빠르게 씻었다.방으로 올라온 아침 식사를 보니 준비된 음식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정갈했다.죽, 깔끔한 반찬, 그리고 속을 편하게 해주는 보양식 위주의 메뉴였다.소원은 생각보다 배가 고팠는지라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그녀의 속이 가벼워진 건 단순히 음식을 먹어서만이 아니었다.유진이와 아주머니의 상황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마음속 큰 짐이 내려간 덕이었다.‘아주머니는 그동안 유진이를 위해 거의 모든 걸 바치셨어. 내가 아주머니를 포기할 순 없어. 반드시 좋은 치료를 받게 해야 해.’그녀는 어제 전문가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제대로 치료만 한다면 아주머니의 몸 상태가 70% 정도는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였다.특히 소원
게다가 남자는 온갖 수를 다 써서 소원을 자극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속으로 외쳤다.‘대체 이런 것들은 어디서 배운 거지? 이런 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그의 과감한 행동과 적재적소에서의 신경 자극은 소원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이건 육경한의 평소 이미지와 너무 달라.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아.’그는 그녀의 입술 대신 다른 곳에 입맞춤을 했다.그 덕분에 상황이 더 격렬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육경한은 손목을 고정하던 손을 천천히 놓고는 소원의 목을 지그시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리고 다른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수건 아래로 들어갔다.소원이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그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그는 소원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 속에는 그녀가 불편하게 여기는 생생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는지라 눈을 질끈 감았다.‘이 모든 게 거짓이야. 단지 각자 필요한 걸 얻기 위해 몸을 거래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소원은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지만 육경한은 결코 그녀에게 그런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 행동했다.그는 그녀의 방어선과 수치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듯 무릎을 굽히며 가까이 다가왔다.그리고 혼란 속에서 수건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소원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유리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곧게 펴졌다.‘이 사람이 미쳤나? 어떻게 이런 일을...’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욕실 벽면의 반사된 모습을 향했고 흐릿한 증기 속에서도 두 사람의 실루엣이 뚜렷하게 보였다.그는 마치 새로운 경험을 주는 듯 그녀의 모든 감각을 흔들었다.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머릿속이 하얘지며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한 마디로 분노를 터뜨렸다.“육경한, 진짜 정신 나갔어?”하지만 그는 소원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단숨에 들어 올려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그리고 소원의 입술을 강하게 붙잡고 깊은
소원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몸 앞의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그 행동에 육경한은 비웃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뭘 감추는 거야? 내가 못 본 데라도 있나?”그의 말투는 낮게 깔리면서도 약간 장난스러워 듣는 이를 무안하게 만들었다.소원은 그의 말을 듣고 더욱 수건을 꽉 붙들며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당신더러 들어오라 했어?”육경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섞어 말했다.“내 집에 내가 들어오는 데 허락이 필요한가?”그의 말이 얄밉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소원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나가줘. 옷 입어야 하니까.”그러자 육경한은 침대 위에 놓인 갈아입을 옷을 집어 들고는 대충 소원에게 던졌다.“그냥 이거 입어. 어차피 내가 못 본 것도 없잖아.”“...”더 이상 말다툼을 할 기운도 없었는지라 소원은 옷을 품에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욕실에서 옷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육경한이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그가 던진 것은 옷이 아니라 얇고 거의 투명한 속옷 같은 옷이었다. 꼭 가릴 곳만 어렴풋이 가려진 도저히 입고 나갈 수 없는 옷이었다.과거에도 이런 옷을 입어본 적 없는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이 인간이 정말...!’분노가 치밀어 오른 소원은 소리쳤다.“육경한! 이게 뭐야!”그 순간, 욕실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육경한이 문턱에 느긋하게 기댔다.“나 불렀어?”소원은 수건을 꼭 붙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부른 거 아니야, 나가!”육경한은 그녀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분명 내 이름을 불렀잖아?”소원은 그의 태도에 답답함과 불쾌감을 느끼며 말했다.“그건 당신더러 들어오라는 뜻이 아니야!”그러나 육경한의 깊은 눈빛이 소원을 강하게 응시하자 그녀는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다.그와 결혼을 결정했던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며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그렇다고 완전히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그녀는 선
“유진아, 네가 한 일들이 정말 많고 대단했어. 알아?”소원이 유진이를 다독였다.하지만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이야기해본 적이 많지 않은 소원은 혹여나 말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말이 유진이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됐다.다행히 유진이는 매우 똑똑했는지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저 알아요. 제가 틀린 건 없었고 앞으로도 나쁜 사람들 혼내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소원은 아들의 영리함이 대견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제일 중요한 건 우리 안전을 지키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잡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알겠지?”“네, 알겠어요, 엄마.”유진이는 말을 이었다.“엄마, 다음에 외할머니 뵈러 갈 때는 우리 같이 가요.”소원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외할머니 뵈러 갔었니?”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러나 두 글자를 말한 후, 유진이는 소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말을 고쳤다.“그... 아저씨가 데려갔어요. 그 아저씨가 여기가 엄마의 엄마, 제 외할머니라고 알려줬어요.”소원의 마음은 복잡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는 기분이 밀려왔다.육경한이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갔다니 뜻밖이었다.소원이 전미영을 찾아갔을 때마다 그와 마주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일부러 시간을 피해서 간 모양이었다.‘참 계산적이네.’유진이가 말했다.“외할머니는 말을 못 하시지만 저한테 웃어주셨어요. 제가 외할머니한테 말도 많이 걸었는데 계속 웃으면서 들어주셨거든요.”소원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응. 우리 유진이 정말 기특하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구나. 다음에는 같이 가자.”잠시 후, 유진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저 언제 삼촌 볼 수 있어요? 저 삼촌이 너무 보고 싶어요.”서현재는 유진이의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하며 큰 위안과 즐거움을 준 사람이었다.유진이는 아직 어리지만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못 본
시선을 축 늘어트린 육경한의 눈동자에 소원의 목에 올라온 닭살이 보였다. 입고 온 옷이 얇았는데 병원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 것이다.소원은 아주머니가 너무 걱정되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줘도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육경한이 옷을 벗어줬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전문가 회진은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토론으로 얻은 방안은 투석, 즉 피를 바꾸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아주머니가 언제 깨어날지도 미지수였고 치료한다 해도 아주머니의 몸은 예전처럼 돌아가기 어려웠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생활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순간 방민아에 대한 원망도 극에 달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방민아만 생각하면 정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육경한에게 말했다.“난 아주머니 이렇게 만든 사람 절대 용서 못 해.”육경한은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게.”“약속 못 지킬까 봐 그러지.”적어도 지금은 육경한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원은 말을 가려서 했다. 유진을 지키려면, 서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내려면 일단 몸을 사려야 했다. 서진태는 소원이 봤던 사람 중에 제일 악독한 사람이었기에 서현재도 잘 지낼 리가 없었다.지금 상황을 해결하려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밖에 없었다.육경한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유진이 내 아들이기도 해.”소원이 대꾸했다.“알면 됐어.”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니 소원도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육경한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방민아의 상황은 절대 좋아질 수 없었다.간호조무사가 일단 두 사람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일단 여독을 말끔히 배출하고 투석을 시작해야 했기에 두 사람이 여기 남아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
사실 그게 더 무서웠다. 육경한이 소원을 위해 한걸음 크게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은 영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방민아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절대 소원과 유진을 건드리지 않고 몸을 사렸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지금 행복하게 육경한과 결혼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방민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지금 당장 이혼해요. 이혼만 해준다면 돈은 원하는 만큼 두둑이 챙겨주고 아이랑 떠날 수 있게 해줄게요. 어때요?”소원이 콧방귀를 뀌었다.“방민아 씨, 진심이에요? 설마...”소원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원하는 걸 얻고 나서 우리가 다시 눈엣가시라고 생각해 우리를 다시 찾아내거나 함정을 팔 수도 있잖아요.”방민아는 그녀의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소원이 너무 싫었다. 소원과 유진은 정말 방민아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거슬리는 눈엣가와도 같아 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육경한의 마음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에 방민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 약속한 거니까 변하지 않아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방민아 씨,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한 승낙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요. 내가 방민아 씨를 믿을 일은 더더욱 없고요.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 돈도 많고 신분도 있는 방민아 씨가 이번에도 무사히 나올지 모르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요.”“아악. 내가 당신 죽여버릴 거야.”방민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젊은 경찰이 방민아를 제압하더니 날카롭게 경고했다.“방민아 씨, 난동 그만 부리고 업무에 협조해 주세요. 첫 번째 경고에요.”무슨 일이 있으면 방씨 가문에서 대신 해결해 줬기에 방민아는 이런 상황에 놓인 적이 단
소원은 출동한 경찰이 나이가 젊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어 남자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얇은 걸 봐서는 여자였다. 그래도 방민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경찰 번호는 3210921, 아가씨,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으니 협조 바랍니다.”방민아가 코웃음 쳤다.“적법하면 체포영장 내놔요. 신고한다고 다 잡아가지 말고.”“그건 조사에 협조하면 다 밝혀질 일이에요.”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방민아의 손을 뜯어내려는데 손이 닿기도 전에 방민아가 막무가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요. 집행하는 척하면서 성추행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젊은 경찰은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출동하면서 막무가내로 체포에 불응하는 사람을 많이 보기도 했고 경찰이 서비스 업종도 아니었기에 범죄자의 체면을 봐주거나 범죄자가 하자는 대로 해줄 리가 없었다.젊은 경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기요, 아줌마, 자중하세요. 이 장면은 보디캠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어요. 게다가 전 여자고요.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방민아 씨입니다. 전 그저 제 옷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을 뿐이고요.”아줌마라는 호칭에 방민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서울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문의 여식으로 살아온 방민아를 보는 사람마다 아가씨로 존칭했는데 이 경찰은 난동 좀 부린 거 가지고 바로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줌마는 방민아 같은 나이에 쓰일만한 호칭이 아니라 40에서 50대는 되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데 말이다.“아줌마라니. 예의라는 게 없어요? 죽고 싶어요?”방민아가 발악하자 젊은 경찰은 구겨진 제복을 툭툭 털며 말했다.“내 말 틀렸나요? 방민아 씨 말대로라며 나도 아줌마한테 성추행당했다고 할 수 있잖아요.”약이 잔뜩 올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방민아를 보며 소원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방민아 씨, 경찰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방씨 가문 도우미인 줄 알아요?”방민아는 이런 상황을 만든 소원을 보며 걷잡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