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김성훈이 의학에 대해 잘 안다는 걸 알고 깊은 밤에도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김성훈은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라며 연신 미친놈이라며 외쳤다.그는 이준혁이 결혼식에 참석한 건 알았지만 이준혁이 비서와 함께 돌아오지 않고 주훈을 홀로 보내고 자신은 북안도에 남아 있었다는 건 몰랐다.북안도는 한류 지대에 위치해 기후가 춥고 습해서 부상을 치료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때문에 거기에 남아 있는 건 분명 다리 부상을 더 악화시킬 것이 뻔했다.지금 다치고 탈구된 데다 염증까지 생긴 상황에서 북안도에서 수술은 가능할지 몰라도 수술 후의 회복은 어떻게 할 것인가?북안도의 춥고 습한 환경은 회복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이후 김성훈이 제안한 것은 이준혁이 서울로 돌아가 수술을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서울에는 이준혁이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더 나은 환경이 있다는 이유였다.그는 덧붙였다.“추운 습기가 다리엔 안 좋은 걸 알면서도 돌아오지 않는다니... 내가 보기엔 그냥 다리를 포기하고 싶은 겁니다.”상황이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던 윤혜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교수님, 그럼 왜 지금까지도 준혁 씨의 다리가 이렇게 심각한 건가요?”두 달 가까이 치료를 했는데 어떻게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자 김성훈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사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에요. 뭐, 아주 심각한 건 아니죠.”윤혜인은 믿지 않았다.이준혁의 창백한 얼굴과 북안도 의사가 상황을 보고 고개를 내젓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분명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으니 말이다.“교수님, 준혁 씨의 다리 상태가 실제로 어떤지 알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나요?”윤혜인은 입술을 꼭 다물고 말을 덧붙였다.“어차피 알아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교수님에게서 가장 객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어요.”곧 김성훈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혜인 씨, 솔직히 말할게요. 준혁이는 지난 두 달 동안 하루도
김성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예요... 두 사람 정말... 에휴...”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남녀 간의 감정은 참 복잡해서 누구 하나 잘못한 건 없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서로 사랑할 인연이 있었지만 평생 함께할 운명은 아닌 듯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윤혜인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창백한 얼굴과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더욱 우울해 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결국 참지 못하고 배남준은 윤혜인을 강제로 이끌어 쉬게 했다.“윤혜인, 말 좀 들어. 네 배 속의 아기도 쉬어야 해.”“남준 오빠...”그때 윤혜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준혁 씨 치료하러 보내야 해요.”그녀는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배남준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빠가 도와줘야 해요.”배남준은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윤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이준혁이 그날 오후 내내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도 배남준은 많은 생각을 했다.잠시 동안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기도 했다.왜냐하면 배남준은 자신이 그리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방금 윤혜인이 그 남자를 선택해도 축복해주겠다고 했던 말은 사실 진심이 아니었다.배남준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네가 결정한 대로 할게. 내가 도울게.”...다음 날, 이준혁은 드디어 깨어났다.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윤혜인을 보며 이준혁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손을 뻗어 만져보지도 못했다. 손을 내밀면 이 꿈이 깨질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윤혜인은 막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어젯밤 잠깐 눈을 붙였지만 불안한 꿈만 꾸고 제대로 쉬지 못했다.악몽 속에서 그 남자가 죽는 장면이 떠올라 밤새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 때문에 아침
분명히 그 코트는 남자의 것이었다.그리고 이 외투는 공원에서 배남준이 입고 있던 것이었다.순식간에 이준혁의 표정이 굳어졌다.윤혜인은 어젯밤 급하게 나와 옷을 얇게 입고 있었고 기다리는 동안 배남준이 자신의 코트를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이후 여은이 더 두꺼운 옷을 가져왔지만 윤혜인은 막 병실에 들어올 때 그래도 배남준의 코트를 다시 입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이준혁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이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괜찮아.”코끝이 찡해진 윤혜인은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괜찮을 리가 없잖아요.”이준혁은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 가슴이 아려왔다.자연스레 손이 침대 옆으로 들리더니 침대 면에서 주먹 한 뼘 정도의 거리에서 멈췄다.마치 보이지 않는 도덕적 경계선이 그를 붙잡고 있는 듯했다.이준혁은 자신의 명성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윤혜인은 앞으로 북안도에서 오래 머물러야 할지 모른다.때문에 그는 그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미안해.”이준혁이 그녀에게 사과했다.“놀랐지?”“아니요.”윤혜인은 울먹이며 말했다.“나 그렇게 겁쟁이는 아니에요.”그의 무릎 부상은 결국 윤혜인을 보호하다 입은 상처였다.죽기 전에 윤혜인을 노리는 에단 로드를 처리하려고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큰 부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배를 바라보며 힘겹게 집중했다.“그럼 너는 어때요? 몸은 괜찮아? 아기는 잘 있지?”두 사람이 이렇게 부드러운 대화를 나눈 건 참 오랜만이었다.윤혜인은 마음속의 쓴맛을 억누르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얌전하고 자주 발로 차지도 않아요.”“발로 차다니?”이준혁은 흥미가 생긴 듯 물었다. “아기가 발로 찬다고?”윤혜인이 임신했을 때, 그는 곁에 있지 못했기에 태동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네. 가끔은 아주 장난꾸러기예요.”윤혜인이 말하는 동안 갑자기 배가 살짝 불룩해졌고 이준혁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
이준혁은 자신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윤혜인이 말할 다음 말을 들어야 했다.윤혜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이미 결혼했고 내 삶이 있어요. 준혁 씨가 여기에 머물면 나와 남준 씨 사이에 오해가 생길 거예요. 나는 그런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윤혜인은 한 손으로 코트를 잡아당기며 몸을 더 따뜻하게 감싸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배남준을 남준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단순히 남준 씨라고 불렀다.마치 과거에 이준혁을 준혁 씨라고 부르던 시절처럼 모든 게 변했다는 걸 상기시키고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에게 모든 것이 달라졌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윤혜인은 덧붙였다.“준혁 씨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특별했어요. 사람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을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맞지 않았죠. 그러니 헤어진 건 옳은 선택이에요. 이제는 남준 씨와 함께 단순한 삶을 살고 싶어요. 이해할 수 있겠죠?”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준혁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윤혜인은 그가 이미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아마 곧 그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준혁 씨가 이해해주길 바라요.”윤혜인은 일어나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기 백일 되면... 그때 준혁 씨 초대할게요.”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준혁 씨, 서울로 돌아가 치료받아요. 거기가 준혁 씨 건강에는 더 적합할 거예요.”그 말을 남기고 윤혜인은 발걸음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혜인아, 가지 마...”눈빛에 어둡고 지친 기운이 가득한 채 이준혁은 그녀의 등을 향해 간절하게 불렀다.그러더니 이준혁은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제발, 부탁이야. 나 정말 아무것도 안 할게. 그저 아이가 태어나는 걸 보고 싶어. 아름이가 태어날 때도 난 없었어.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아.”자존심 강했던 이준혁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간절히 윤혜인에게 애원했다.그 모습에 발걸
윤혜인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랑할 용기가 없는 것이었다.사랑의 대가는 너무나 컸고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때 적절한 타이밍에 문이 열리더니 배남준이 들어왔다.“이야기 다 끝났어?”이준혁은 잠시 굳은 얼굴로 배남준을 바라보았다.‘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혜인이가 나랑 대화를 나눈 것도 배남준과 상의한 결과였다는 건가?’이준혁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사실은 이미 눈앞에 명확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배남준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이준혁을 바라보았다.“이준혁 씨, 다리를 위해서라도 서울로 돌아가 치료받는 게 좋을 겁니다. 아이 백일 때 오셔도 돼요. 언제든지 환영하니까요.”배남준의 태도는 당당했지만 그에 비해 이준혁의 자존심과 집착은 한순간에 초라해졌다.그는 마치 자신이 남의 가정을 침범하려는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한 듯한 기분이었다.온몸이 경직된 채 이준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배남준은 그의 무례함과 대답 없는 태도에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윤혜인에게 고개를 돌렸다.“우리 집에 가자.”“네.”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짧은 ‘네’라는 대답 속에서도 배남준에 대한 의지가 느껴졌다.윤혜인은 그를 아주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마치 알콩달콩한 여느 부부처럼 느껴졌다.배남준의 손은 윤혜인과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며 더 단단히 그녀와 연결됐다.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이 순간, 이준혁은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올라 그들을 쫓아가서라도 이 관계를 깨뜨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혜인이는 분명히 나랑 함께 잘 살아 보겠다고 약속했는데...’하지만 이제 윤혜인은 아무 망설임 없이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태연하게 떠나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굳어버린 다리는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이준혁은 그들을 쫓아가는 것은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쾅!”침대 옆의 스탠드가 바
배남준은 윤혜인이 산 것이면 가지려고 했다.“아니야. 그렇게 까탈스럽지는 않아.”배남준이 웃으며 말했다.“집에 가자.”배남준이 차 문을 열며 윤혜인을 차에 태웠다.차는 이미 떠났지만 창문가를 꿋꿋이 지키는 그림자는 여전했다.이준혁은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보며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그녀의 손을 잡고 안고 달래는 건 원래 그가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배남준이 그의 자리를 완전히 뺏어가 버렸다.이준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이준혁은 이튿날 비행기로 떠났다.지금 서울로 돌아가 수술한다면 윤혜인의 출산 예정일을 놓칠 게 뻔했다.이준혁은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윤혜인은 매정하게도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윤혜인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로 다른 사람과 새로운 삶은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이준혁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친근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요동쳤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더 미쳐가거나 아니면 더 비굴해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준혁의 교양과 자존심이 그가 더 비굴해지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 윤혜인이 원하는 조용한 삶을 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구경도 하고 산책도 했다.그럴 때마다 옆에는 배남준이 함께했다.저녁이 되자 테이블에는 윤혜인의 입맛을 맞춰서 준비한 요리들이 올라왔지만 윤혜인은 젓가락만 헤집을 뿐 별로 먹지 않았다.배남준이 다가와 물었다.“저녁 먹어?”윤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배남준을 올려다봤다.“오빠, 어쩐 일로 왔어요?”도우미가 배남준의 손에서 외투를 받아 걸었다.배남준이 말했다.“같이 밥 먹으려고 왔지.”배남준은 요즘 호적을 따로 옮기느라 바빴다. 윤혜인과 아이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이민 하러 가겠다는 핑계로 말이다.배씨 가문은 이런 규정이 있었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면 호적
배남준은 차갑게 굳은 어머니의 시체를 지키고 있었지만 배영석은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배남준은 언젠가 배씨 가문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되었다.그렇게 조금 크고 나서도 배씨 가문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특출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교육자가 되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다사실 배남준은 학식이 높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총명했다. 국제 무역도 막힘없이 해냈고 다른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배영석은 평생을 용맹하게 산 자신과는 달리 유약한 서생으로 자란 배남준을 보며 후계자 교육을 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하여 배남준이 호적을 따로 파겠다고 해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배영석은 배남준이 북안도를 떠나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교육자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아이도 제대로 키우지 못할 텐데 고생 좀 하다 보면 다시 북안도로 돌아와 의지할 곳을 찾을 것이다.배영석은 배남준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지만 배남준의 와이프 윤혜인과 처남인 곽경천이 궁금했다.곽씨 가문은 L 국에서도 꽤 유명했다. 이번에 곽진명은 몸이 좋지 않아 오지 못했지만 곽진명과 어떻게 항운 사업을 확장할지를 관해 토론해 보고 싶었다.곽씨 가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라도 배영석은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러주며 새며느리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그러면 북안도에서 며느리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한편, 배남준이 손을 씻고는 식탁을 마주한 채 앉았다.도우미가 수저를 내다 주고는 천천히 물러가자 주방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배남준이 야채를 집어서 먹더니 말했다.“맛 괜찮네. 이거 먹어봐. 아이에게 좋대.”윤혜인이 한 젓가락 집어서 입에 넣었지만 나무껍질을 씹는 것처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를 위해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도 배남준이 먼저 한입 먹고 괜찮다 싶으면 윤혜인에게 말해줬다. 윤혜인은 그런 배남준의 성화에 못 이겨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먹었다.웬만큼 먹자 배남준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이준혁 씨 수술 잘 받았고
윤혜인도 조금이라도 많이 먹고 싶어 억지로 먹지만 그러고 나면 다 토해내기 일쑤였기에 오히려 역효과였다.심지어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할 것 같았고 합격한 엄마도 될 수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곽경천과 배남준은 다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윤혜인도 배가 점점 불러왔기에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란 최대한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배남준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배남준이 뭔가 눈치챈 것 같았다.다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참다간 정말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잡고 얘기하는 게 제일 전형적인 자아 구제 수단이었다.윤혜인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병이 나기 전에 적극적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오빠, 나 살짝 힘들어. 아무것도 못 하는데 짐만 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이 셋을 잘 키워낼 수 있는지도 의문이야.”윤혜인은 마음속에 꾹꾹 눌러뒀던 말을 내뱉고 나서야 참아왔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원지민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짐이 된 것이다.배남준은 윤혜인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발견했다. 배남준과 곽경천은 매일 자기가 할 일에 몰두하느라 여자가 임신하면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놓치고 말았다.방에 앉아 소식만 기다리는 나날 속에 윤혜인은 자기가 점점 쓸모없는 사람으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혜인아.”배남준이 윤혜인 맞은편에 앉더니 손을 꼭 잡으며 윤혜인을 바라봤다.“혜인아, 너 지금 엄청 잘하고 있어. 부담 갖지 마. 우리 기분 걱정하느라 무슨 생각이 들어도 꾹 참고 혼자 소화해 내면서 몸도 잘 챙기고 있잖아.”“모든 일을 질서정연하게 잘 해내고 있는데 아이들을 잘 키워내지 못할 리가 있겠어?”“아름이 봐봐 얼마나 건강하고 예뻐. 네가 좋은 엄마라는 제일 좋은 증거잖아.”배남준이 곽아름 얘기만 꺼내도 윤혜인은 잠시 기분 나쁜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