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진명은 구지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이가 든 그로서는 앞으로 곽씨 가문의 영광을 유지하거나 더 높은 경지로 올리기 위해서는 곽경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곽씨 가문의 번영뿐만 아니라 윤아름과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아오는 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윤아름과 여동생을 찾게 된다면, 곽씨 가문은 충분히 강력해져야만 다시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강력한 가문과의 계약 결혼이 곽경천의 운명이었다.구지윤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자격이 부족했고 운이 좋지 않았다.곽경천이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곽진명이 잠시 동정심에 허락한다 해도 언젠가 곽씨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면 곽진명이 경험했던 비극을 똑같이 구지윤에게 물려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남자로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도 못하는 것 말이다.그는 구지윤을 위해서라도, 그녀가 자신과 어울리는 평범한 가정에서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곽진명은 구지윤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아무튼 이 일은 우리 곽씨 가문이 너한테 잘못한 거야. 경천이가 보상을 제안했다던데 내 생각에도 괜찮은 방법이다. 네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나서 나중에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 평범한 행복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떤 때라도 곽씨 가문은 언제나 네 뒤에 있을 거야.”서재의 노란 조명이 구지윤의 얼굴을 비추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매우 연약해 보였다.“회장님, 제가 아스테리아로 유학 가는 건 도련님의 뜻인가요?”곽진명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인정했다.그러자 구지윤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마음속이 쓰리고 아픈 감정이 몰려왔다.곽진명은 그런 그녀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아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곽경천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해 터득하는 것이 너무 늦었다.구지윤이 분명 오래전부터 곽경천을 좋아했지만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이런 일은 벌어지기 전에 방
그리고 구지윤은 그런 홍승희의 딸이었다. 그녀의 순수한 몸을 자신의 아들이 차지했다면 곽진명은 최소한 홍승희에게도 예의를 갖추어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구지윤은 곽진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생각한 듯 급히 해명했다.“회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술집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로 의도치 않은 사고였어요. 저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도련님을 탓하지 말아 주세요.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곽진명은 그녀가 정말로 어머니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네 뜻을 따르마. 많이 속상했겠구나.”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에요, 회장님. 속상하지 않아요. 회장님께서 저희를 이렇게 잘 돌봐주시고 엄마에게도 신경 써 주셨는데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죄송할 뿐이에요.”곽진명은 구지윤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숙하고 통찰력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상대방의 의도를 바로 간파할 수 있는 이런 현명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많은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구지윤은 서류 봉투에 담긴 곽진명이 준 블랙카드를 공손하게 내밀며 말했다.“회장님, 학비는 제가 이미 모아둔 것이 있어요. 대학을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으니 이 돈은 다시 가져가 주세요.”이 말에 곽진명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카드는 삼촌이 주는 작은 성의야. 네가 이걸 받지 않으면 삼촌을 마음속으로 원망하는 것처럼 느껴질 거야.”구지윤이 다시 거절하려고 하자 곽진명이 말을 이어갔다.“난 빚을 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네가 이 돈을 받아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구나.”곽진명은 여전히 구지윤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구지윤은 잠시 생각한 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카드를 받기로 했다.다만 이 돈은 사용하지 않고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돌려줄 생각이었다.다음 날, 구지윤은 홍승희에게 아스테리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홍승희는 크게 놀
딸의 미래에 대해 홍승희도 당연히 그녀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다. 하여 더는 구지윤의 결정을 막지 않았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우리 딸, 이제 네가 스스로 결정하는 나이가 됐구나. 엄마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가 스스로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구지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엄마, 건강 잘 챙기세요. 저 꼭 성장해서 엄마의 버팀목이 되어줄게요...”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곽진명은 구지윤의 유학 절차를 모두 마쳤다. 구지윤은 곧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녀는 친한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외출하여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홍승희가 아직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구지윤은 평소처럼 홍승희를 찾으러 갔다.혹시 도울 일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본채에 도착한 그녀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곽경천과 마주쳤다.그는 소파에 앉아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술을 마셨는지 조금 지쳐 보였다.구지윤은 곽경천 옆을 지나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에게 더 이상 그를 신경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의 보상은 그녀를 다른 나라로 보내는 것이었으니 그가 마음속으로 구지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며칠이 지나면서 처음에 느꼈던 심장이 도려내는 듯한 고통은 이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구지윤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고 홍승희와 함께 이리저리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잘 견디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이런 경험은 그녀를 자존심이 강하고 민감하며 조숙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구지윤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더 이상 경계를 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곽진명의 말은 그녀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계층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주방에 가서 홍승희를 찾지 못한 구지윤은 그대로 돌아가려 했다.몇 걸음 걸었을 때, 그녀는 소파에 기댄 채 목을 젖히고 앉아 있는 곽경천이 목을 불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곽경천은 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네잎클로버 목걸이를 꺼냈다.그의 소꿉친구가 여자들은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보석을 좋아한다고 사라고 권유했었다.곽경천은 한눈에 이 네잎클로버 목걸이에 마음이 들었다. 네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하니 말이다.며칠 동안 그는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구지윤에게 줄 핑곗거리를 찾지 못했다.컵 안의 얼음물을 다 마시고 곽경천은 내일, 반드시 이 목걸이를 그녀에게 주리라 다짐했다.다음 날, 회사 일을 마무리한 곽경천은 구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뚜뚜뚜...”상대방의 번호가 없는 번호로 나와 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렸다.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없는 번호였다.잠시 생각한 후, 곽경천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빨간 도돌이표가 화면에 떴다.곽경천은 자신이 구지윤에게 차단당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이 며칠 동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민망함을 피하려고 그녀와 일부러 거리를 둔 것이 전부였다.‘도대체 왜...’그는 답답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책상 위에 네잎클로버 목걸이가 예쁜 상자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곽경천은 잠시 그 목걸이를 응시하더니 상자를 힘차게 덮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어린 소녀의 마음을 추측할 여유가 그의 삶에는 없었다.일어나 회의에 참석하려던 순간, 곽경천은 다시 쓰레기통 속 목걸이 상자를 힐끗 바라봤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상자를 주워들었다.행정실의 쓰레기통은 방금 새것으로 교체된 것이라 목걸이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처음으로 산 목걸이를 가장 깊숙한 서랍에 넣어두고는 잊어버리기로 했다.그 후,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되며 곽경천은 약 20일간 집에 머무르지 못할 만큼 바빴다.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회사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곽경천은 그 자리에서 술을 꽤나 마셨다.차에 탄 그는 온몸이 피곤함에 휩싸였다.운전기사가 물었다.“아파트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곽경
“네!”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모르셨어요?”전에 곽경천과 홍승희의 관계가 굉장히 좋아 보였기 때문에 도우미는 그가 구지윤이 아스테리아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의아했다.그녀는 곽경천이 진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덧붙였다.“이미 한 달이나 됐어요. 딸이 올해 설에도 안 온다면서 승희 씨한테 같이 설 쇠자며 아스테리아 행 비행기 표까지 사 줬다던데요.”도우미가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곽경천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우미는 곽경천이 이렇게 침착하지 않은 모습을 처음 본지라 멍하니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물컵을 집어 들었다.곽경천은 서둘러 홍승희가 살고 있는 집사 거처에 달려가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돌렸다. 홍승희는 밤에 무슨 일이 있을까 봐 항상 문을 잠그지 않고 두었고 본관과 가까운 곳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구지윤이 예전에 살았던 작은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전에 늘 작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던 소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방 안에 있던 가구들마저 모두 치워져 있었고 침대조차 없었다.순간, 곽경천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구지윤이 정말로 떠났는데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도련님?”뒤에서 홍승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야 몸을 돌린 곽경천은 그녀와 마주쳤다.“도련님,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러자 곽경천은 문가에 서서 곧바로 물었다.“아줌마, 지윤이 어디 갔어요?”곽경천은 아직도 도우미가 한 말을 믿기 어려웠다.구지윤이 이곳 대학에 다닐 거라 말했던 말을 곽경천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홍승희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도련님, 지윤이는 학교 다니러 갔잖아요.”“그건 알아요.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는 겁니다.”“아스테리아로요.”그 말을 들은 순간, 곽경천의 차가운 눈동자가 더욱 날카로워지며 그의 몸에서는 한기가 퍼져 나왔다.“지윤이가... 어떻게 아스테리아로 가게 된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그때... 지윤이는 그렇게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구지윤은 곽경천을 차단했고 떠나면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곽씨 가문과의 관계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곽경천과의 관계도 완전히 끊으려는 듯했다.십수 년의 정을 이렇게 쉽게 끊어낼 정도로 구지윤은 정말로 냉정했다.곽경천은 눈을 감으며 지친 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홍승희에게 인사도 잊은 채 방을 떠났다.홍승희는 곽경천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걱정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문득 구지윤이 곽씨 가문에서 멀어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계절은 지나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곽경천은 여느 때처럼 일에 몰두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스테리아의 한 대표가 곽씨 가문의 해운 회사와 협력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아스테리아는 L국에서 매우 먼 곳으로 중간 비용을 계산해 보면 이 항로는 수익을 내기 힘들었고 심지어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아스테리아 시장을 개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 곽경천은 그들의 현장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침 아스테리아는 한겨울이었고 그는 하루 넘게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아스테리아의 날씨는 영하 수십 도였고 L국보다 훨씬 추웠다.그는 추위를 몹시 싫어하는 구지윤이 어째서 이처럼 얼어붙을 듯한 아스테리아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첫날은 간단히 협력사 대표를 만나고 대화를 마친 후 술자리 제안을 거절한 곽경천은 차를 몰아 프린스턴 대학교로 향했다.그 학교는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간단한 방문 등록 후 그는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자 기숙사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왜 여기에 서 있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운에 맡겨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하늘에서 내리던 작은 눈송이는 어느새 커다란 눈송이로 변해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그녀는 여전히 가끔 곽경천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나무도, 눈도, 심지어 희미한 뒷모습조차도 그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나 정말 미쳤나 봐.’구지윤은 속으로 생각했다.곽경천은 구지윤을 서둘러 내보내고 싶어 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그 남자를 점점 더 그리워하게 되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몇 년 동안 곽경천을 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스스로 다짐했다.반드시 그 남자를 잊어야 한다고.설령 완전히 잊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yuan?”옆에 있던 남학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직도 몸이 안 좋은 거야?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주 있는 일이야. 약 먹고 자면 나아질 거야.”그녀는 아스테리아의 추운 날씨에 익숙해지지 못해 감기와 열병이 일상처럼 되어버렸다.자주 아프다 보니 몸도 눈에 띄게 야위었다.다행히 겨울이라 헐렁한 패딩 덕분에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방금도 그녀는 수업을 듣던 중 갑작스레 열이 올라 혼자 기숙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하여 교수는 같은 과 남학생에게 그녀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라고 시켰고 처음에는 남학생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걸었지만 후반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남학생에게 의지해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yuan, 너희 한국 여자들은 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남학생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작은 체구에 큰 에너지가 숨어 있네.”하지만 구지윤은 미소를 지을 힘조차 없어 보였고 이를 눈치챈 남학생이 말했다.“yuan, 내가 기숙사까지 업어줄까?”이 말에 구지윤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어.”하지만 남학생은 결국 기숙사 관리 아줌마에게 부탁해 구지윤을 방까지 데려다주었다.기숙사에 도착하니 다른 학생들은 모두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갔고 구지윤 혼자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기숙사
목걸이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네잎클로버의 로즈골드 테두리에는 작은 맞춤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가까이에서 보다가 구지윤은 그 위에 ‘JY'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렇게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주운 목걸이의 이니셜이 자기 이름과 같은 것이다.구지윤은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하여 목걸이를 학교의 분실물 센터에 맡겼다.이런 고급스러운 목걸이에는 모두 고유 번호가 적혀 있기 때문에 그 번호로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약 3일 후, 학교 분실물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명품 회사에서 받은 정보에 따르면 목걸이의 주인은 바로 구지윤 본인이었고 신분증 번호까지 일치한다고 했다.구지윤은 어리둥절한 채로 목걸이를 찾아왔다.이 목걸이를 자신이 직접 산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곧 공식 홈페이지에 문의해보았다.하지만 돌아오는 건 구매자의 정보는 제공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데이터베이스에는 목걸이 주인의 정보만 남아 있었다.어쩔 수 없이 구지윤은 그 목걸이를 보관해 두었다.대학에서의 4년은 빠르게 흘러갔다.첫 3년 동안은 홍승희가 아스테리아에 와서 함께 설을 보냈고 마지막 해에는 구지윤이 귀국하여 홍승희와 새로 산 작은 집에서 명절을 보냈다.20일간의 방학 동안 구지윤은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아스테리아로 돌아가기 전날이 되어서야 그녀는 익숙한 쇼핑몰과 학교를 잠깐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사실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들과의 교류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L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 구지윤은 어머니에게서 곽경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3년 전, 그는 회사에서 퇴직했으며 외부에는 일에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알려졌다고 했다.그렇게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일하며 연구를 시작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국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