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그때... 지윤이는 그렇게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구지윤은 곽경천을 차단했고 떠나면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곽씨 가문과의 관계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곽경천과의 관계도 완전히 끊으려는 듯했다.십수 년의 정을 이렇게 쉽게 끊어낼 정도로 구지윤은 정말로 냉정했다.곽경천은 눈을 감으며 지친 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홍승희에게 인사도 잊은 채 방을 떠났다.홍승희는 곽경천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걱정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문득 구지윤이 곽씨 가문에서 멀어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계절은 지나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곽경천은 여느 때처럼 일에 몰두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스테리아의 한 대표가 곽씨 가문의 해운 회사와 협력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아스테리아는 L국에서 매우 먼 곳으로 중간 비용을 계산해 보면 이 항로는 수익을 내기 힘들었고 심지어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아스테리아 시장을 개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 곽경천은 그들의 현장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침 아스테리아는 한겨울이었고 그는 하루 넘게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아스테리아의 날씨는 영하 수십 도였고 L국보다 훨씬 추웠다.그는 추위를 몹시 싫어하는 구지윤이 어째서 이처럼 얼어붙을 듯한 아스테리아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첫날은 간단히 협력사 대표를 만나고 대화를 마친 후 술자리 제안을 거절한 곽경천은 차를 몰아 프린스턴 대학교로 향했다.그 학교는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간단한 방문 등록 후 그는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자 기숙사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왜 여기에 서 있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운에 맡겨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하늘에서 내리던 작은 눈송이는 어느새 커다란 눈송이로 변해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그녀는 여전히 가끔 곽경천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나무도, 눈도, 심지어 희미한 뒷모습조차도 그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나 정말 미쳤나 봐.’구지윤은 속으로 생각했다.곽경천은 구지윤을 서둘러 내보내고 싶어 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그 남자를 점점 더 그리워하게 되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몇 년 동안 곽경천을 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스스로 다짐했다.반드시 그 남자를 잊어야 한다고.설령 완전히 잊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yuan?”옆에 있던 남학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직도 몸이 안 좋은 거야?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주 있는 일이야. 약 먹고 자면 나아질 거야.”그녀는 아스테리아의 추운 날씨에 익숙해지지 못해 감기와 열병이 일상처럼 되어버렸다.자주 아프다 보니 몸도 눈에 띄게 야위었다.다행히 겨울이라 헐렁한 패딩 덕분에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방금도 그녀는 수업을 듣던 중 갑작스레 열이 올라 혼자 기숙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하여 교수는 같은 과 남학생에게 그녀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라고 시켰고 처음에는 남학생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걸었지만 후반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남학생에게 의지해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yuan, 너희 한국 여자들은 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남학생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작은 체구에 큰 에너지가 숨어 있네.”하지만 구지윤은 미소를 지을 힘조차 없어 보였고 이를 눈치챈 남학생이 말했다.“yuan, 내가 기숙사까지 업어줄까?”이 말에 구지윤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어.”하지만 남학생은 결국 기숙사 관리 아줌마에게 부탁해 구지윤을 방까지 데려다주었다.기숙사에 도착하니 다른 학생들은 모두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갔고 구지윤 혼자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기숙사
목걸이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네잎클로버의 로즈골드 테두리에는 작은 맞춤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가까이에서 보다가 구지윤은 그 위에 ‘JY'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렇게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주운 목걸이의 이니셜이 자기 이름과 같은 것이다.구지윤은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하여 목걸이를 학교의 분실물 센터에 맡겼다.이런 고급스러운 목걸이에는 모두 고유 번호가 적혀 있기 때문에 그 번호로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약 3일 후, 학교 분실물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명품 회사에서 받은 정보에 따르면 목걸이의 주인은 바로 구지윤 본인이었고 신분증 번호까지 일치한다고 했다.구지윤은 어리둥절한 채로 목걸이를 찾아왔다.이 목걸이를 자신이 직접 산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곧 공식 홈페이지에 문의해보았다.하지만 돌아오는 건 구매자의 정보는 제공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데이터베이스에는 목걸이 주인의 정보만 남아 있었다.어쩔 수 없이 구지윤은 그 목걸이를 보관해 두었다.대학에서의 4년은 빠르게 흘러갔다.첫 3년 동안은 홍승희가 아스테리아에 와서 함께 설을 보냈고 마지막 해에는 구지윤이 귀국하여 홍승희와 새로 산 작은 집에서 명절을 보냈다.20일간의 방학 동안 구지윤은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아스테리아로 돌아가기 전날이 되어서야 그녀는 익숙한 쇼핑몰과 학교를 잠깐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사실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들과의 교류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L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 구지윤은 어머니에게서 곽경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3년 전, 그는 회사에서 퇴직했으며 외부에는 일에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알려졌다고 했다.그렇게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일하며 연구를 시작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국
구지윤은 정신이 혼미한 채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반쯤 감긴 눈으로 홈 화면을 확인하자 한 줄의 문자가 보였다.[구지윤, 나 너 보러 왔어.]“쿵.”핸드폰이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머리가 한 대 얻어맞은 듯 울리기 시작했고 과거의 악몽들이 몰려왔다.구지윤은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이 꽉 잠긴 듯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아...”그녀는 온 힘을 다해 겨우 뭔가 막힌듯한 소리를 냈다.그 순간, 쿵 소리와 함께 몸에 커다란 통증이 밀려왔다.눈을 깜빡였을 때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고요함이 감돌았다.구지윤은 허둥지둥 핸드폰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렇게 이성을 잃어갈 때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구지윤의 알람 소리였다.소리가 나는 곳을 더듬어 보다가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놓여 있는 핸드폰을 발견했다.알람을 끄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핸드폰에는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알고 보니 방금 그저 악몽을 꾼 것이었다.구지윤은 이미 번호를 바꿨고 연락처에도 육선재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게다가 육선재는 육씨 가문의 어르신에게 L국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여기까지 올 리가 없었다.점차 정신이 돌아오자 구지윤은 침대 옆의 가구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잠시 후, 그녀는 일어나야 한다는 책임감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제대로 쉬지 못해 몸이 무거웠고 일어설 때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신 후,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구지윤은 당황스러웠다.곽경천, 윤혜인, 그리고 홍승희 외에는 이 집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홍승희는 지금 L국에 있었고 윤혜인은 아침에 찾아올 일이 없었다. 하지만 곽경천은 구지윤네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구지윤은 문득 어젯밤에 비밀번호를 바꾼 게 생각났다.‘근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웬일로 여기 온 거지?
악몽이 다시 덮쳐오자 구지윤의 손발은 완전히 굳어버렸다.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의 팔을 세게 물었고 그 덕에 잠시나마 의식을 되찾았다.혼란 속에서 구지윤은 간신히 테이블 쪽으로 기어가 힘겹게 핸드폰을 잡았다.그러고는 번호를 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보세요, 저 신고하려고 그러는데요...”그러나 문밖에서 들리는 육선재의 악몽 같은 목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구지윤은 테이블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몸을 작게 말아 떨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회사 동료에게서 온 전화였다.그녀는 급하게 벨 소리를 끄려고 했지만 이미 육선재는 그 소리를 들은 후였다.육선재는 구지윤이 집 안에 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곧이어 그가 문을 허리띠로 세게 때리며 짜증 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구지윤, 네가 아무 말 안 한다고 내가 못 찾을 것 같아?”그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루는 숨을 수 있겠지. 그런데 평생 날 피해 다닐 수 있겠어?”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갈 정도로 구지윤은 세게 힘을 주었다.문밖에서는 육선재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구지윤, 우리가 했던 그 숫자 세는 게임 기억나지?”그는 끔찍하게 웃으며 말했다.“열까지 센 다음에도 문을 안 열면 나 아주 화낼 거야. 내가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구지윤은 그 게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육선재가 열까지 세면 그녀는 마치 개처럼 기어 나와야 했다. 기어 나오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지윤은 온몸에 특제 소스를 뒤집어쓰게 되었다.때로는 토마토소스, 때로는 간장, 그리고 때로는 고추장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쏟아부었다.그 후 육선재는 카메라로 그녀의 모습을 엉망으로 찍어 커다란 사진으로 인화하고 그 사진을 강제로 보게 하며 구지윤을 조롱했다.그에게 있어서 구지윤을 육체적으로 때리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고문하고 그녀의 의지를 깎아내리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었다.구지윤을 복종하는 동물로 길들이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신도 더 오래 살 것 같았다.구지윤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살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해.’이곳에서 설령 죽는다 해도 육선재는 그 죄를 피할 방법이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언젠가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날까지.결국, 윤혜인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곽경천에게 구지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면서 구지윤은 구조될 수 있었다.곽경천이 몇몇 인맥을 동원해 북안도에서 그녀를 구출해 온 것이다.하지만 육선재는 절대 이혼하려 하지 않았다.그에게 있어서 구지윤을 때리는 것만이 유일한 쾌락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전혀 만족을 주지 못했기에 육선재는 구지윤을 놓아줄 리가 없었다.구지윤은 매일 공포 속에 살았지만 어느 날 곽경천이 그녀에게 이 일이 해결되었다고 말했다.육선재가 마침내 이혼을 승낙한 것이다. 그 후로 그녀는 육선재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육씨 가문의 어르신이 육선재를 감금했고 더 이상 구지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곽경천에게 했다고 했다.하지만 고요한 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육선재가 그녀를 찾아 서울까지 온 것이다구지윤은 테이블 아래서 몸을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다섯, 넷, 셋...”밖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음산한 카운트다운 소리가 들려왔고 구지윤은 순식간에 문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육선재는 허리띠로 문을 두드리느라 지쳐 난간에 기대어 있던 상태였다. 곧 구지윤이 문을 열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역시 우리 와이프 말을 참 잘 듣는다니까.”몸이 떨렸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차분한 척했다.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구지윤은 이제 더 이상 육선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여기는 서울이지 북안도가 아니다. 육선재가 이곳에서 그녀를 때리기라도 한다면 틀림없이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구지윤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선재 씨, 우리 이미 이혼했어요. 난 당신의 아내가 아닙니다.”그 말을 들은 육선재는 입
육선재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경찰관님, 제 전처는 예전에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앓았고 해외에서 오래 치료받았었어요. 빨리 병원에 데려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입으로는 연민을 담은 말을 했지만 구지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으나 구지윤은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두고 봐, 내가 어떻게 너를 망가뜨리는지!’공포가 마치 붉은 개미 떼처럼 사방에서 기어와 구지윤의 온몸을 갉아먹기 시작했다.그녀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갔고 마치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육선재의 사악한 이미지가 구지윤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허리띠를 만지작거리며 육선재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계속해서 작은 행동들로 그녀를 자극하며 도발하고 있었다.“쨍그랑!”구지윤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녀는 칼을 떨어뜨린 채 손을 들어 올리며 육선재의 의아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비참하게 울음을 터뜨렸다.“경찰관님, 제 전남편은 가정폭력 전력이 있어요. 해외에서 이미 접근금지 명령을 신청한 적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방금 저를 위협했어요. 제가 칼을 든 건 자기방어를 위해서였어요. 정말 다행히도 제때 오셨네요...”비록 슬피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구지윤은 논리적이고도 뚜렷하게 중요한 요점을 명확히 전했다.그러자 순식간에 육선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는 구지윤이 이렇게 똑똑해질 줄은 몰랐고 이전에 해외에서 자주 써먹던 수법이 전혀 통하지 않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를 악물더니 육선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감히 날 고발해? 간땡이가 부었구나?!”“아아아!!!”구지윤은 크게 소리쳤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무엇인가 두려운 것을 본 것 같았고 충격에 휩싸인 듯 몸을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러고는 머리를 감싸 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때리지 마요. 제발 때리지 마요...”그 모습은 명백히 오랜 시간 학대를 당한 사람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이 모습에 더
구지윤은 몸에 전해지는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곽경천은 복잡한 심정이 담긴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차갑지만 어딘가 미묘한 표정이었다.곧 그가 경찰관에게 말했다.“제 여동생입니다. 제가 함께 병원에 가서 상처를 확인하겠습니다.”서류에 사인을 한 후, 그는 구지윤에게 손을 내밀었다.구지윤은 잠시 당황한 듯 그 손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곽경천은 허리를 살짝 굽혀 구지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곧 구지윤의 목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붉은 자국에 시선이 닿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걸을 수 있겠어?”구지윤은 작은 손이 곽경천의 손에 감싸 쥐어 있어 그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 받을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걸을 수 있어요.”그러자 곽경천은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옷을 단정히 해주며 서서히 코트의 단추를 잠가 주었다.차 안에서 병원으로 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차 안을 감쌌다.병원에서 상처를 검사받고 나온 후, 곽경천은 결과 자료를 들고 자신의 비서에게 넘기며 말했다.“최고의 변호사를 구해. 반드시 그 사람이 저지른 일에 대해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니까.”그 말을 듣고 나서야 구지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던 두려움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그리고 마음도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비서가 떠난 후, 곽경천은 차 안의 온도를 조절한 후 구지윤에게 따뜻한 설탕물을 건넸다.그렇게 구지윤은 몇 모금 마시면서 조금씩 진정되었다.이때, 곽경천이 말했다. “혜인이가 너한테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작업실의 전화를 받고 나한테 전화해서 네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어.”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설명해 주었다.구지윤이 묻기도 전에 곽경천은 그녀가 궁금해할 일을 이미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육씨 가문 어르신이 돌아가셨어. 그래서 육선재가 서울에 올 수 있었던 거야.”육씨
“난 그런 적 없어요... 경한 씨, 제발 믿어줘요. 나 아니에요.”방민아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방민아가 유진을 해친 게 된다면 더는 육경한과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민아는 육경한이 유진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을 위해 정관 수술까지 하겠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올 수가 없었다.“그런 적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 조사에 맡기죠.”육경한이 이렇게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멈추고는 한마디 보충했다.“그리고 최근에 방씨 가문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민아 씨 아버지가 80%의 수익을 가져갔어요. 그때 도와준 은혜를 수천조로 갚았는데 그걸로 부족해요?”방민아가 계속 따라붙으려는데 보디가드가 막아섰다. 그뿐만이 아니라 경찰이 오기전까지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온몸에 힘이 풀린 방민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 빌어먹을 년이 어쩌다 경한 씨의 와이프가 된 거지? 그 자리는 내 자리여야 하는데.’방민아는 새로 한 매니큐어가 부러질 정도로 바닥을 박박 긁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어떻게 다시 육경한의 와이프 자리를 꿰찰지, 어떻게 빌어먹을 소원과 짐승만도 못한 유진에게 복수할지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이 이끄는 대로 걸어간 유진은 이내 아주머니를 가둬놓은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는 누렇게 뜬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소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침대맡으로 다가가 통곡했다.“아주머니...”유진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연신 불러댔다.“할머니... 할머니... 일어나봐요...”“아직 숨은 쉬고 있어.”뒤에 나타난 육경한이 이렇게 귀띔했다.소원이 고개를 들어 손을 아주머니의 코밑에 갖다 댔다. 호흡이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흥분한 소원이 유진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유진아, 엄마 구급차 불렀어. 아주머니 선한 사람이니까 하느님
방민아가 육경한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말했다.“경한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소원 씨 안 건드릴게요. 다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주면 안 돼요? 소원 씨가 경한 씨 마음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자꾸만 경한 씨를 뒤흔드는 게 질투 나서 그랬어요. 이제 잘못한 거 알았고 앞으로 소원 씨 존재도 묵인할 테니까 제발 나 버리지 마요...”방민아의 말에 소원은 넋을 잃고 말았다. 육경한만 동의하면 일부다처제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다만 방민아는 원할지 몰라도 소원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역겨운 상황이었다. 조선시대가 망한 지 언젠데 있는 집 딸인 방민아가 남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구시대의 여인상을 보이는 게 너무 우스웠다. 게다가 소원은 한평생 육경한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육경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다리를 들자 방민아는 어쩔 수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나 와이프 있는 남자예요. 방민아 씨, 앞으로 말 가려서 해요.”육경한의 눈매는 여전히 차갑기만 했지만 ‘와이프’라는 말을 내뱉는 육경한의 말투에서 방민아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온도를 느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갑자기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민아와 함께 있을 때는 늘 차분하고 덤덤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는데 말이다.살아났다는 말이 제일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낸 것처럼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육경한으로 다시 태어났다.그런 육경한을 보며 방민아는 너무 불안했다. 전에는 본 적 없는 아예 다른 모습이었다.소원은 방민아가 사랑과 전쟁을 패러디하는 걸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살인미수범인 방민아를 감싸면 어쩌나 걱정할 뿐이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생각 따윈 상관없었다. 아까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소원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경원 별장인데 신고 좀 하려고요. 누군가 제 아들을 해치려고 했어요. 네.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뺏어가려는 거죠. 어림도 없어요.”방민아의 머릿속엔 온통 소원이 육경한을 뺏어가는 장면으로 가득해 이성을 잃었다.“내 남편 뺏어갈 생각하지 마요. 소원 씨는 그저 뻔뻔한 세컨드일 뿐이에요.”“하하하...”소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방민아 씨, 남편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르지 않나요? 결혼 등기는 했어요? 왜 아는 사람이 없죠?”방민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미우 그룹 안주인이라고 생각해 차분하게 말했다.“곧 등기하러 갈 거예요. 경한 씨가 다음 주에...”“다음 주에도 등기는 못 할 거예요.”소원이 단칼에 잘라버렸다.“왜요? 소원 씨가 못한다면 못하는 거예요? 봐요. 내 남자 뺏어가려는 거 맞잖아요. 하하. 내가 잘 캐치한 거 맞죠?”이성을 잃은 방민아는 꼴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웠다.“내가 오늘 등기했거든요.”소원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방민아에게 떨어졌고 방민아는 환청이라도 들리는 줄 알았다. 올해 들었던 중에 가장 우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소원이 왜 경한 씨랑 결혼 등기를...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방민아는 심장이 떨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방민아의 얼굴이 잿빛이 되어가자 소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방민아가 갚아야 할 빚은 아직도 많았다.소원이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방민기 씨 애인하라고 한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네요. 남편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방민아는 마치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거짓말하지 마요.”방민아가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육경한의 팔을 부여잡고 캐물었다.“경한 씨,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요. 소원 씨가 나 속이는 거라고 좀 말해줘요...”육경한의 침묵에 방민아의 마음도 점점 싸늘해졌다. 진실은 눈앞에 보이는 그
소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방민아는 분명 소원의 아이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소원을 때릴 때 보인 표정은 정말 소원을 죽이고 싶은 표정이었다.육경한은 여자가 이렇게 자주 변하는 동물인지 몰랐다. 방민아도 예전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방민아 편을 든다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그 말은 경찰서 가서 얘기해요. 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방민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너 따위가 뭔데 감히 이딴 식으로 말해? 그냥 못 넘어가? 못 넘어가면 어쩔 건데.’방민아는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 생각해 얼른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하소연했다.“소원 씨, 우리 원수라도 졌어요? 내가 곧 경한 씨랑 결혼할 것 같으니까 아니꼬운가 본데 나 소원 씨 아이 최선을 다해 보살폈어요. 나를 모함한 것도 뭐라 안 했는데...”방민아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소원 씨는 엄마라 그러겠지만 나도 누군가의 딸이에요. 내가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 우리 아빠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방민아는 방민수까지 끌어들였다. 방민수가 나온 이상 육경한도 방씨 가문의 은혜를 저버리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육경한이 사면초가의 처지에 빠졌을 때 방씨 가문이 없었다면 미우 그룹도 서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울 때 손길을 건넨 사람을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기에 이 점만으로도 육경한은 방민아를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소원이 입을 열었다.“방민아 씨, 우리 원수 진 거 없어요. 오히려 너무 열정적으로 대해줬죠.”방민아는 소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 멈칫하는데 소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까도 오빠 방민기 씨의 애인이 되라고 열정적으로 소개해 줬잖아요.”“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방민아는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왜 헛소리에요?”소원이 말했다.“방민기 씨 애인으로 반년만 있으면 3개월 후에
방민아가 아무리 울고 불쌍한 척해도 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봐서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경한 씨, 아까 그 말 진심이 아니라 그저...”방민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숨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한참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유진이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린 나이에 이렇게 모함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방민아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악독한 걸로 치면 유진이 자기보다 백배, 천배 더 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방민아가 모르는 게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면 유진처럼 어린아이가 꿍꿍이가 있다 해도 어쩌지는 못했을 것이다.유진은 총명한 아이였기에 모든 수모를 꾹 참으며 목숨을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멍청했으면 진작 죽어서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방민아는 이를 악물고 해명했다.“경한 씨, 하늘에 맹세해요. 난 절대 그 누구에게도 유진이 해치라고 한 적 없어요. 게다가 유진이가 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유진이가 정말 거짓말한 거라면 어린 나이에 잘해준 사람 모함한 게 되잖아요.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해야죠.”육경한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정말 잘해줬다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나는...”방민아는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유진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방민아 손엔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그들도 딱히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이다.육경한이 그런 방민아를 보며 말했다.“방민아 씨, 그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 나요?”방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육경한을 바라봤다.육경한은 방민아가 진심으로 이 아이를 대해야만 결혼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고 방민아도 얼른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방민아가 아닌 다른 여자라도 그 제안을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다. 대답할 때만 해도 유진을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