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요!”구지윤은 당황한 듯 외쳤다.“엄마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그녀가 마침내 입을 여는 것을 보고 곽경천은 마음을 조금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천천히 고민해 보고 무슨 생각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네 생각을 존중할게.”구지윤은 곽경천이 설명을 해주고 심지어 사과까지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하지만 보상 같은 건 절대로 받을 수 없었다.그런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를 노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고 이 모든 일을 거래로 만들어버릴 것 같았다.곽경천의 삶 속에서 구지윤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첫사랑이자 첫 번째로 좋아한 사람에게 첫 경험을 준 것이었다. 후회는 없었다.구지윤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저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보상도 필요 없어요. 이번 일은 없었던 거로 해주세요. 도련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구지윤이 이토록 착하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자, 그리고 여자로서 가장 소중한 첫 경험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곽경천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짜증이 피어올랐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지윤아, 아무리 나라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어.”구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구지윤은 방으로 돌아와 욕조에 몸을 담갔다.머릿속에서는 곽경천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그가 말했다.‘아무리 나라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어.’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곽경천이 오늘 밤 보여준 태도는 그의 말대로 절반은 걱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어떤 말은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면 마치 예언처럼 가슴 깊이 새겨진다.문득문득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 당시 느꼈던 서러움과 슬픔이 함께 되살아났다.구지윤은 그 말을 마음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그 후 며칠 동안 구지윤은 곽경천을 피해 다녔고 곽경천도 그녀를 피하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은 며칠간 서로 마주치지 않았다.어느 날 방과 후, 곽
곽진명은 구지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이가 든 그로서는 앞으로 곽씨 가문의 영광을 유지하거나 더 높은 경지로 올리기 위해서는 곽경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곽씨 가문의 번영뿐만 아니라 윤아름과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아오는 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윤아름과 여동생을 찾게 된다면, 곽씨 가문은 충분히 강력해져야만 다시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강력한 가문과의 계약 결혼이 곽경천의 운명이었다.구지윤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자격이 부족했고 운이 좋지 않았다.곽경천이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곽진명이 잠시 동정심에 허락한다 해도 언젠가 곽씨 가문이 몰락하게 된다면 곽진명이 경험했던 비극을 똑같이 구지윤에게 물려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남자로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도 못하는 것 말이다.그는 구지윤을 위해서라도, 그녀가 자신과 어울리는 평범한 가정에서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곽진명은 구지윤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아무튼 이 일은 우리 곽씨 가문이 너한테 잘못한 거야. 경천이가 보상을 제안했다던데 내 생각에도 괜찮은 방법이다. 네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나서 나중에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 평범한 행복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떤 때라도 곽씨 가문은 언제나 네 뒤에 있을 거야.”서재의 노란 조명이 구지윤의 얼굴을 비추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매우 연약해 보였다.“회장님, 제가 아스테리아로 유학 가는 건 도련님의 뜻인가요?”곽진명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인정했다.그러자 구지윤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마음속이 쓰리고 아픈 감정이 몰려왔다.곽진명은 그런 그녀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아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곽경천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해 터득하는 것이 너무 늦었다.구지윤이 분명 오래전부터 곽경천을 좋아했지만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이런 일은 벌어지기 전에 방
그리고 구지윤은 그런 홍승희의 딸이었다. 그녀의 순수한 몸을 자신의 아들이 차지했다면 곽진명은 최소한 홍승희에게도 예의를 갖추어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구지윤은 곽진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생각한 듯 급히 해명했다.“회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술집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로 의도치 않은 사고였어요. 저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도련님을 탓하지 말아 주세요.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곽진명은 그녀가 정말로 어머니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네 뜻을 따르마. 많이 속상했겠구나.”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에요, 회장님. 속상하지 않아요. 회장님께서 저희를 이렇게 잘 돌봐주시고 엄마에게도 신경 써 주셨는데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죄송할 뿐이에요.”곽진명은 구지윤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숙하고 통찰력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상대방의 의도를 바로 간파할 수 있는 이런 현명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많은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구지윤은 서류 봉투에 담긴 곽진명이 준 블랙카드를 공손하게 내밀며 말했다.“회장님, 학비는 제가 이미 모아둔 것이 있어요. 대학을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으니 이 돈은 다시 가져가 주세요.”이 말에 곽진명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카드는 삼촌이 주는 작은 성의야. 네가 이걸 받지 않으면 삼촌을 마음속으로 원망하는 것처럼 느껴질 거야.”구지윤이 다시 거절하려고 하자 곽진명이 말을 이어갔다.“난 빚을 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네가 이 돈을 받아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구나.”곽진명은 여전히 구지윤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구지윤은 잠시 생각한 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카드를 받기로 했다.다만 이 돈은 사용하지 않고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돌려줄 생각이었다.다음 날, 구지윤은 홍승희에게 아스테리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홍승희는 크게 놀
딸의 미래에 대해 홍승희도 당연히 그녀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했다. 하여 더는 구지윤의 결정을 막지 않았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우리 딸, 이제 네가 스스로 결정하는 나이가 됐구나. 엄마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가 스스로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구지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엄마, 건강 잘 챙기세요. 저 꼭 성장해서 엄마의 버팀목이 되어줄게요...”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곽진명은 구지윤의 유학 절차를 모두 마쳤다. 구지윤은 곧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녀는 친한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외출하여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홍승희가 아직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구지윤은 평소처럼 홍승희를 찾으러 갔다.혹시 도울 일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본채에 도착한 그녀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곽경천과 마주쳤다.그는 소파에 앉아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술을 마셨는지 조금 지쳐 보였다.구지윤은 곽경천 옆을 지나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에게 더 이상 그를 신경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의 보상은 그녀를 다른 나라로 보내는 것이었으니 그가 마음속으로 구지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며칠이 지나면서 처음에 느꼈던 심장이 도려내는 듯한 고통은 이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구지윤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고 홍승희와 함께 이리저리 떠돌며 살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스트레스를 잘 견디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이런 경험은 그녀를 자존심이 강하고 민감하며 조숙한 사람으로 만들었다.구지윤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더 이상 경계를 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곽진명의 말은 그녀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계층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주방에 가서 홍승희를 찾지 못한 구지윤은 그대로 돌아가려 했다.몇 걸음 걸었을 때, 그녀는 소파에 기댄 채 목을 젖히고 앉아 있는 곽경천이 목을 불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곽경천은 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네잎클로버 목걸이를 꺼냈다.그의 소꿉친구가 여자들은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보석을 좋아한다고 사라고 권유했었다.곽경천은 한눈에 이 네잎클로버 목걸이에 마음이 들었다. 네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하니 말이다.며칠 동안 그는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구지윤에게 줄 핑곗거리를 찾지 못했다.컵 안의 얼음물을 다 마시고 곽경천은 내일, 반드시 이 목걸이를 그녀에게 주리라 다짐했다.다음 날, 회사 일을 마무리한 곽경천은 구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뚜뚜뚜...”상대방의 번호가 없는 번호로 나와 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렸다.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없는 번호였다.잠시 생각한 후, 곽경천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빨간 도돌이표가 화면에 떴다.곽경천은 자신이 구지윤에게 차단당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이 며칠 동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민망함을 피하려고 그녀와 일부러 거리를 둔 것이 전부였다.‘도대체 왜...’그는 답답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책상 위에 네잎클로버 목걸이가 예쁜 상자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곽경천은 잠시 그 목걸이를 응시하더니 상자를 힘차게 덮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어린 소녀의 마음을 추측할 여유가 그의 삶에는 없었다.일어나 회의에 참석하려던 순간, 곽경천은 다시 쓰레기통 속 목걸이 상자를 힐끗 바라봤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상자를 주워들었다.행정실의 쓰레기통은 방금 새것으로 교체된 것이라 목걸이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처음으로 산 목걸이를 가장 깊숙한 서랍에 넣어두고는 잊어버리기로 했다.그 후,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되며 곽경천은 약 20일간 집에 머무르지 못할 만큼 바빴다.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회사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곽경천은 그 자리에서 술을 꽤나 마셨다.차에 탄 그는 온몸이 피곤함에 휩싸였다.운전기사가 물었다.“아파트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곽경
“네!”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모르셨어요?”전에 곽경천과 홍승희의 관계가 굉장히 좋아 보였기 때문에 도우미는 그가 구지윤이 아스테리아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의아했다.그녀는 곽경천이 진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덧붙였다.“이미 한 달이나 됐어요. 딸이 올해 설에도 안 온다면서 승희 씨한테 같이 설 쇠자며 아스테리아 행 비행기 표까지 사 줬다던데요.”도우미가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곽경천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우미는 곽경천이 이렇게 침착하지 않은 모습을 처음 본지라 멍하니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물컵을 집어 들었다.곽경천은 서둘러 홍승희가 살고 있는 집사 거처에 달려가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돌렸다. 홍승희는 밤에 무슨 일이 있을까 봐 항상 문을 잠그지 않고 두었고 본관과 가까운 곳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구지윤이 예전에 살았던 작은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전에 늘 작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던 소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방 안에 있던 가구들마저 모두 치워져 있었고 침대조차 없었다.순간, 곽경천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구지윤이 정말로 떠났는데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도련님?”뒤에서 홍승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야 몸을 돌린 곽경천은 그녀와 마주쳤다.“도련님,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러자 곽경천은 문가에 서서 곧바로 물었다.“아줌마, 지윤이 어디 갔어요?”곽경천은 아직도 도우미가 한 말을 믿기 어려웠다.구지윤이 이곳 대학에 다닐 거라 말했던 말을 곽경천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홍승희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도련님, 지윤이는 학교 다니러 갔잖아요.”“그건 알아요.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는 겁니다.”“아스테리아로요.”그 말을 들은 순간, 곽경천의 차가운 눈동자가 더욱 날카로워지며 그의 몸에서는 한기가 퍼져 나왔다.“지윤이가... 어떻게 아스테리아로 가게 된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그때... 지윤이는 그렇게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구지윤은 곽경천을 차단했고 떠나면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곽씨 가문과의 관계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곽경천과의 관계도 완전히 끊으려는 듯했다.십수 년의 정을 이렇게 쉽게 끊어낼 정도로 구지윤은 정말로 냉정했다.곽경천은 눈을 감으며 지친 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홍승희에게 인사도 잊은 채 방을 떠났다.홍승희는 곽경천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걱정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문득 구지윤이 곽씨 가문에서 멀어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계절은 지나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곽경천은 여느 때처럼 일에 몰두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스테리아의 한 대표가 곽씨 가문의 해운 회사와 협력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아스테리아는 L국에서 매우 먼 곳으로 중간 비용을 계산해 보면 이 항로는 수익을 내기 힘들었고 심지어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아스테리아 시장을 개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 곽경천은 그들의 현장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침 아스테리아는 한겨울이었고 그는 하루 넘게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아스테리아의 날씨는 영하 수십 도였고 L국보다 훨씬 추웠다.그는 추위를 몹시 싫어하는 구지윤이 어째서 이처럼 얼어붙을 듯한 아스테리아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첫날은 간단히 협력사 대표를 만나고 대화를 마친 후 술자리 제안을 거절한 곽경천은 차를 몰아 프린스턴 대학교로 향했다.그 학교는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간단한 방문 등록 후 그는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자 기숙사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왜 여기에 서 있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운에 맡겨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하늘에서 내리던 작은 눈송이는 어느새 커다란 눈송이로 변해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지금 안전하지?”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하지만 2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