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천은 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네잎클로버 목걸이를 꺼냈다.그의 소꿉친구가 여자들은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보석을 좋아한다고 사라고 권유했었다.곽경천은 한눈에 이 네잎클로버 목걸이에 마음이 들었다. 네 잎 클로버는 행복을 상징한다고 하니 말이다.며칠 동안 그는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구지윤에게 줄 핑곗거리를 찾지 못했다.컵 안의 얼음물을 다 마시고 곽경천은 내일, 반드시 이 목걸이를 그녀에게 주리라 다짐했다.다음 날, 회사 일을 마무리한 곽경천은 구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뚜뚜뚜...”상대방의 번호가 없는 번호로 나와 곽경천은 미간을 찌푸렸다.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없는 번호였다.잠시 생각한 후, 곽경천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빨간 도돌이표가 화면에 떴다.곽경천은 자신이 구지윤에게 차단당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이 며칠 동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민망함을 피하려고 그녀와 일부러 거리를 둔 것이 전부였다.‘도대체 왜...’그는 답답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책상 위에 네잎클로버 목걸이가 예쁜 상자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곽경천은 잠시 그 목걸이를 응시하더니 상자를 힘차게 덮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어린 소녀의 마음을 추측할 여유가 그의 삶에는 없었다.일어나 회의에 참석하려던 순간, 곽경천은 다시 쓰레기통 속 목걸이 상자를 힐끗 바라봤다.그러고는 몸을 숙여 상자를 주워들었다.행정실의 쓰레기통은 방금 새것으로 교체된 것이라 목걸이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처음으로 산 목걸이를 가장 깊숙한 서랍에 넣어두고는 잊어버리기로 했다.그 후,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되며 곽경천은 약 20일간 집에 머무르지 못할 만큼 바빴다.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회사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곽경천은 그 자리에서 술을 꽤나 마셨다.차에 탄 그는 온몸이 피곤함에 휩싸였다.운전기사가 물었다.“아파트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곽경
“네!”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모르셨어요?”전에 곽경천과 홍승희의 관계가 굉장히 좋아 보였기 때문에 도우미는 그가 구지윤이 아스테리아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의아했다.그녀는 곽경천이 진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덧붙였다.“이미 한 달이나 됐어요. 딸이 올해 설에도 안 온다면서 승희 씨한테 같이 설 쇠자며 아스테리아 행 비행기 표까지 사 줬다던데요.”도우미가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곽경천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우미는 곽경천이 이렇게 침착하지 않은 모습을 처음 본지라 멍하니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물컵을 집어 들었다.곽경천은 서둘러 홍승희가 살고 있는 집사 거처에 달려가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돌렸다. 홍승희는 밤에 무슨 일이 있을까 봐 항상 문을 잠그지 않고 두었고 본관과 가까운 곳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구지윤이 예전에 살았던 작은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전에 늘 작은 책상에 앉아 글을 쓰던 소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방 안에 있던 가구들마저 모두 치워져 있었고 침대조차 없었다.순간, 곽경천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구지윤이 정말로 떠났는데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도련님?”뒤에서 홍승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제야 몸을 돌린 곽경천은 그녀와 마주쳤다.“도련님,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러자 곽경천은 문가에 서서 곧바로 물었다.“아줌마, 지윤이 어디 갔어요?”곽경천은 아직도 도우미가 한 말을 믿기 어려웠다.구지윤이 이곳 대학에 다닐 거라 말했던 말을 곽경천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홍승희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도련님, 지윤이는 학교 다니러 갔잖아요.”“그건 알아요.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는 겁니다.”“아스테리아로요.”그 말을 들은 순간, 곽경천의 차가운 눈동자가 더욱 날카로워지며 그의 몸에서는 한기가 퍼져 나왔다.“지윤이가... 어떻게 아스테리아로 가게 된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그때... 지윤이는 그렇게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구지윤은 곽경천을 차단했고 떠나면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곽씨 가문과의 관계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곽경천과의 관계도 완전히 끊으려는 듯했다.십수 년의 정을 이렇게 쉽게 끊어낼 정도로 구지윤은 정말로 냉정했다.곽경천은 눈을 감으며 지친 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홍승희에게 인사도 잊은 채 방을 떠났다.홍승희는 곽경천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걱정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문득 구지윤이 곽씨 가문에서 멀어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계절은 지나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곽경천은 여느 때처럼 일에 몰두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스테리아의 한 대표가 곽씨 가문의 해운 회사와 협력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아스테리아는 L국에서 매우 먼 곳으로 중간 비용을 계산해 보면 이 항로는 수익을 내기 힘들었고 심지어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아스테리아 시장을 개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번에 곽경천은 그들의 현장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침 아스테리아는 한겨울이었고 그는 하루 넘게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아스테리아의 날씨는 영하 수십 도였고 L국보다 훨씬 추웠다.그는 추위를 몹시 싫어하는 구지윤이 어째서 이처럼 얼어붙을 듯한 아스테리아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첫날은 간단히 협력사 대표를 만나고 대화를 마친 후 술자리 제안을 거절한 곽경천은 차를 몰아 프린스턴 대학교로 향했다.그 학교는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매우 크고 아름다웠다.간단한 방문 등록 후 그는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여자 기숙사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왜 여기에 서 있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운에 맡겨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하늘에서 내리던 작은 눈송이는 어느새 커다란 눈송이로 변해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그녀는 여전히 가끔 곽경천의 그림자를 보곤 했다.나무도, 눈도, 심지어 희미한 뒷모습조차도 그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나 정말 미쳤나 봐.’구지윤은 속으로 생각했다.곽경천은 구지윤을 서둘러 내보내고 싶어 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시간이 흐르면 잊혀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그 남자를 점점 더 그리워하게 되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몇 년 동안 곽경천을 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스스로 다짐했다.반드시 그 남자를 잊어야 한다고.설령 완전히 잊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yuan?”옆에 있던 남학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직도 몸이 안 좋은 거야?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주 있는 일이야. 약 먹고 자면 나아질 거야.”그녀는 아스테리아의 추운 날씨에 익숙해지지 못해 감기와 열병이 일상처럼 되어버렸다.자주 아프다 보니 몸도 눈에 띄게 야위었다.다행히 겨울이라 헐렁한 패딩 덕분에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방금도 그녀는 수업을 듣던 중 갑작스레 열이 올라 혼자 기숙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하여 교수는 같은 과 남학생에게 그녀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라고 시켰고 처음에는 남학생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걸었지만 후반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남학생에게 의지해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yuan, 너희 한국 여자들은 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남학생이 장난스럽게 물었다.“작은 체구에 큰 에너지가 숨어 있네.”하지만 구지윤은 미소를 지을 힘조차 없어 보였고 이를 눈치챈 남학생이 말했다.“yuan, 내가 기숙사까지 업어줄까?”이 말에 구지윤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어.”하지만 남학생은 결국 기숙사 관리 아줌마에게 부탁해 구지윤을 방까지 데려다주었다.기숙사에 도착하니 다른 학생들은 모두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갔고 구지윤 혼자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기숙사
목걸이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네잎클로버의 로즈골드 테두리에는 작은 맞춤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가까이에서 보다가 구지윤은 그 위에 ‘JY'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렇게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을까.주운 목걸이의 이니셜이 자기 이름과 같은 것이다.구지윤은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하여 목걸이를 학교의 분실물 센터에 맡겼다.이런 고급스러운 목걸이에는 모두 고유 번호가 적혀 있기 때문에 그 번호로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약 3일 후, 학교 분실물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명품 회사에서 받은 정보에 따르면 목걸이의 주인은 바로 구지윤 본인이었고 신분증 번호까지 일치한다고 했다.구지윤은 어리둥절한 채로 목걸이를 찾아왔다.이 목걸이를 자신이 직접 산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곧 공식 홈페이지에 문의해보았다.하지만 돌아오는 건 구매자의 정보는 제공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데이터베이스에는 목걸이 주인의 정보만 남아 있었다.어쩔 수 없이 구지윤은 그 목걸이를 보관해 두었다.대학에서의 4년은 빠르게 흘러갔다.첫 3년 동안은 홍승희가 아스테리아에 와서 함께 설을 보냈고 마지막 해에는 구지윤이 귀국하여 홍승희와 새로 산 작은 집에서 명절을 보냈다.20일간의 방학 동안 구지윤은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아스테리아로 돌아가기 전날이 되어서야 그녀는 익숙한 쇼핑몰과 학교를 잠깐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사실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들과의 교류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L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 구지윤은 어머니에게서 곽경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3년 전, 그는 회사에서 퇴직했으며 외부에는 일에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알려졌다고 했다.그렇게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일하며 연구를 시작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국
구지윤은 정신이 혼미한 채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반쯤 감긴 눈으로 홈 화면을 확인하자 한 줄의 문자가 보였다.[구지윤, 나 너 보러 왔어.]“쿵.”핸드폰이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머리가 한 대 얻어맞은 듯 울리기 시작했고 과거의 악몽들이 몰려왔다.구지윤은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이 꽉 잠긴 듯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아...”그녀는 온 힘을 다해 겨우 뭔가 막힌듯한 소리를 냈다.그 순간, 쿵 소리와 함께 몸에 커다란 통증이 밀려왔다.눈을 깜빡였을 때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고요함이 감돌았다.구지윤은 허둥지둥 핸드폰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렇게 이성을 잃어갈 때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구지윤의 알람 소리였다.소리가 나는 곳을 더듬어 보다가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놓여 있는 핸드폰을 발견했다.알람을 끄고 화면을 확인했지만 핸드폰에는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알고 보니 방금 그저 악몽을 꾼 것이었다.구지윤은 이미 번호를 바꿨고 연락처에도 육선재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게다가 육선재는 육씨 가문의 어르신에게 L국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여기까지 올 리가 없었다.점차 정신이 돌아오자 구지윤은 침대 옆의 가구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잠시 후, 그녀는 일어나야 한다는 책임감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제대로 쉬지 못해 몸이 무거웠고 일어설 때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신 후,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구지윤은 당황스러웠다.곽경천, 윤혜인, 그리고 홍승희 외에는 이 집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홍승희는 지금 L국에 있었고 윤혜인은 아침에 찾아올 일이 없었다. 하지만 곽경천은 구지윤네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구지윤은 문득 어젯밤에 비밀번호를 바꾼 게 생각났다.‘근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웬일로 여기 온 거지?
악몽이 다시 덮쳐오자 구지윤의 손발은 완전히 굳어버렸다.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의 팔을 세게 물었고 그 덕에 잠시나마 의식을 되찾았다.혼란 속에서 구지윤은 간신히 테이블 쪽으로 기어가 힘겹게 핸드폰을 잡았다.그러고는 번호를 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보세요, 저 신고하려고 그러는데요...”그러나 문밖에서 들리는 육선재의 악몽 같은 목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구지윤은 테이블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몸을 작게 말아 떨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회사 동료에게서 온 전화였다.그녀는 급하게 벨 소리를 끄려고 했지만 이미 육선재는 그 소리를 들은 후였다.육선재는 구지윤이 집 안에 있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곧이어 그가 문을 허리띠로 세게 때리며 짜증 난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구지윤, 네가 아무 말 안 한다고 내가 못 찾을 것 같아?”그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루는 숨을 수 있겠지. 그런데 평생 날 피해 다닐 수 있겠어?”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갈 정도로 구지윤은 세게 힘을 주었다.문밖에서는 육선재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구지윤, 우리가 했던 그 숫자 세는 게임 기억나지?”그는 끔찍하게 웃으며 말했다.“열까지 센 다음에도 문을 안 열면 나 아주 화낼 거야. 내가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구지윤은 그 게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육선재가 열까지 세면 그녀는 마치 개처럼 기어 나와야 했다. 기어 나오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지윤은 온몸에 특제 소스를 뒤집어쓰게 되었다.때로는 토마토소스, 때로는 간장, 그리고 때로는 고추장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쏟아부었다.그 후 육선재는 카메라로 그녀의 모습을 엉망으로 찍어 커다란 사진으로 인화하고 그 사진을 강제로 보게 하며 구지윤을 조롱했다.그에게 있어서 구지윤을 육체적으로 때리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고문하고 그녀의 의지를 깎아내리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었다.구지윤을 복종하는 동물로 길들이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신도 더 오래 살 것 같았다.구지윤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살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해.’이곳에서 설령 죽는다 해도 육선재는 그 죄를 피할 방법이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언젠가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날까지.결국, 윤혜인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곽경천에게 구지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면서 구지윤은 구조될 수 있었다.곽경천이 몇몇 인맥을 동원해 북안도에서 그녀를 구출해 온 것이다.하지만 육선재는 절대 이혼하려 하지 않았다.그에게 있어서 구지윤을 때리는 것만이 유일한 쾌락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전혀 만족을 주지 못했기에 육선재는 구지윤을 놓아줄 리가 없었다.구지윤은 매일 공포 속에 살았지만 어느 날 곽경천이 그녀에게 이 일이 해결되었다고 말했다.육선재가 마침내 이혼을 승낙한 것이다. 그 후로 그녀는 육선재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육씨 가문의 어르신이 육선재를 감금했고 더 이상 구지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곽경천에게 했다고 했다.하지만 고요한 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육선재가 그녀를 찾아 서울까지 온 것이다구지윤은 테이블 아래서 몸을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다섯, 넷, 셋...”밖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음산한 카운트다운 소리가 들려왔고 구지윤은 순식간에 문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육선재는 허리띠로 문을 두드리느라 지쳐 난간에 기대어 있던 상태였다. 곧 구지윤이 문을 열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역시 우리 와이프 말을 참 잘 듣는다니까.”몸이 떨렸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차분한 척했다.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구지윤은 이제 더 이상 육선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여기는 서울이지 북안도가 아니다. 육선재가 이곳에서 그녀를 때리기라도 한다면 틀림없이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구지윤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선재 씨, 우리 이미 이혼했어요. 난 당신의 아내가 아닙니다.”그 말을 들은 육선재는 입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