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우의 말은 물질적이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만족을 뜻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아주 쉽게 다른 의미로 들릴 수 있었다. 최민영 가까이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의 대화를 온전히 듣지는 못했지만 대략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최민영은 고연우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중2병에 걸렸을 시절에도 고연우는 저렇게 유치한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최민영은 고연우가 다른 사람과 경쟁할 줄 아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정민아는 이를 갈며 손에 쥔 나이프와 포크를 꽉 잡았다. “고연우, 입 좀 다물어.” “무슨 입을 다물어? 네가 나를 부른 이유가 최민영을 화나게 하려고 한 거 아니야?” 고연우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그 말투는 매우 비꼬았다. “이러면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지.” “...” 정민아는 자신이 고연우를 너무 화나게 해서 이상해진 게 아닐지 의심했다. 그렇지 않으면 고연우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다른 여자들이 어떻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지 봤어?” 고연우는 정민아의 말에 자극을 받아서 무슨 말을 가리지 않고 했고, 마음속에 생긴 이상한 충동이 점점 강해지며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고연우가 그 말을 내뱉을 때,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정민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고연우는 갑자기 정민아를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요즘 세상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키스하는 것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고연우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정민아의 자극이 너무 강했는지 고연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고연우는 오히려 조금 긴장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췄다. 정민아는 고개를 들고 얼굴에 분노를 담은 채 고연우를 바라보았다. “자리로 돌아가.” 고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민아의 성격상 좋은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고연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최민영은 참지 못하고 갑자기
고연우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정민아가 미련 없이 떠나버린 뒷모습이었다.고연우가 회사로 돌아왔을 때 사무실에선 공민찬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고기반찬 두개와 채소 반찬 하나, 그리고 국이 담긴 정갈한 도시락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자기 대표님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 공민찬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고 대표님.” 고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지시했다“나도 도시락 하나 시켜줘.” “아, 고대표님...” 공민찬은 밥알에 걸려 기침하며 '사모님과 함께 식사하러 간 게 아닌가요?'라는 말을 삼켰다. 너무 급하게 말을 바꿔서 말이 꼬였다.“무슨 맛으로 드릴까요?” 고연우는 오후의 업무도 미리 정리해 두었고 조퇴할 기세였다. 그런데 나갔다가 겨우 30분도 안 돼서 다시 시무룩해져서 돌아왔고, 분명히 사모님에게 쫓겨나서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고연우는 냉담하게 공민찬을 바라보았다.공민찬은 즉시 진지해지며 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무슨 반찬을 드릴까요?” “상관없어.” 그 직후 고연우는 ‘쿵’ 소리를 내며 사무실 문을 닫았다.공민찬은 고연우에게 여주볶음, 갈비, 연근과 녹두탕을 주문했다. 모두 열을 식히고 화를 누그러뜨리는 음식이었다.고연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대표팀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지만 크게 잘못하지 않는 이상 혼나는 일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 공민찬은 이메일을 받았고 내용을 확인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공민찬은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면서 어떻게 이 문제를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사무실의 내선 전화가 울렸다.“커피 한 잔 가져와.” 공민찬은 신속하게 행동하여 고연우가 손에 있는 서류를 처리하기도 전에 커피를 가져왔다. 고연우는 한 모금 마신 후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뭘 넣은 거야?” 커피의 풍미 속에 박하의 시원함이 섞여 있었다.“박하요. 열을 식히고 더위를 해소하며 기운을 순환시킵니다.” 고연우가 커피잔을
고연우가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삼촌. 저도 이젠 유부남이라 만약 민영이를 혼자 보러 가면 민영의 이미지에도 좋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최민영의 부친은 고연우가 거절할 줄 몰랐던 터라,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헛웃음을 몇 번 지으며 말했다.“삼촌이 실수했네. 너와 정씨 집안의 그 아이와 아직 이혼하지 않은 걸 깜빡했네. 지난 2년 동안 힘들었겠어.” 고연우는 최민영의 부친이 시험해 보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민아는 좋은 사람이에요. 저희는 이혼하지 않을 겁니다.” “...” 이제 최민영의 부친은 이 주제를 더는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고연우의 태도를 보니 최민영의 희망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은 몰라보지만 정씨 가문의 양녀가 꽤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고연우 부인 자리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으니 말이다.가볍게 가정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눈 후 대화는 오늘의 본 주제로 돌아왔다. 비록 그 자리가 거의 확정된 상태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임명 통지가 아직 내려지지 않았기에 마음이 불안했다. 그동안 자신이 다녀본 인맥도 다 동원했기에 오늘 고연우와 만난 것도 자신을 도와달라는 뜻이었다.옆 방에서 정민아는 차를 마시면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고연우는 거절하지 않았지만 확답도 하지 않았다. 이 점은 정민아의 예상 밖이었다. 고씨 집안과 최씨 집안은 이익 공동체로서 두 집안의 인연은 이전 세대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고연우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동의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최민영의 부친이 그 자리에 앉으면 고연우도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정민아만 놀란 것만이 아니라 최민영의 부친도 놀랐다. 최민영의 부친은 정씨 가문의 양녀가 고연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심했다. 다른 사람들은 정민아와 최씨 가문의 원한을 잘 모르지만, 최민영의 부친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서씨 가문의 저택 건너편에서 정민아가 그들 일행을 바라보던 눈빛은 마치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늑대새끼와 같았다.몇 년 전, 당시 괴롭힘에
정민아의 표정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고연우는 정민아가 평소처럼 비꼴 줄 알았지만, 정민아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입안의 물을 뱉고 다시 고개를 들어 입을 반쯤 벌린 채 고연우에게 보여주었다.이상할 정도로 순종적인 태도였다.고연우는 침묵했다.“...”정민아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자 고연우는 이상하게 긴장하며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방금 한 말은 정민아가 많이 아파 보였기에 무심코 튀어나왔지만, 곧 후회했다. 그 말이 추하게 들렸기 때문이다.정민아는 고연우의 복잡한 감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린 채 물었다. 입을 벌린 채 말하니 목소리가 또렷하지 않았다.“심각해?”고연우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게 살펴보았다.“조금 붉어졌어.”식당의 밝은 조명이 두 사람을 비추며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분위기는 점점 묘해졌다.정민아는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너 생각에 최민영의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될까?”최민영의 아버지는 최지운이다. 최지운이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그 자리에 올라 승진하는 것이다.이렇게 대놓고 염탐하다니 고연우는 이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정민아가 이렇게 순종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고연우는 순간 밀려오는 설렘이 찬물을 끼얹은 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고연우는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너무 신경 쓰이는 거야?”“당연하지. 내가 최민영의 남자를 빼앗았으니 최씨 가문이 출세하면 가장 먼저 나를 없애려 들겠지.”고연우는 콧방귀를 뀌며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럴 리 없어.”“출세하지 않을 거라는 거야? 아니면 나를 없애지 않을 거라는 거야?”정민아는 포기하지 않고 고연우에게 확실한 답변을 요구했다.정민아의 집요함에 고연우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최민영은...”고연우는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오늘 오후에 본 자료가 떠올랐고 거기에 적혀 있던 최민영이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을 깨달았다.고연우가 갑자기 침묵하자 정민아는 눈썹을 살짝 치켜
최씨 가문에서.최지운이 집에 돌아온 후 최민영은 자랑스러운 말투로 다가가서 말했다.“아빠, 오늘 일은 잘 끝내셨어요? 아빠께서 굳이 나서지 않으셔도 연우 씨가 도울 거라고 했잖아요. 집에서 편하게 공문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믿지 못하고 직접 나가셨죠.”최민영의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면서 최지운은 한숨을 쉬며 말을 꺼냈다.“귀국한 후에 민아 씨를 만난 적 있어?”최민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불쾌한 표정이 드러났다.“갑자기 왜 정민아를 언급하죠?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네요.”“앞으로 민아 씨와 더 자주 만나고 관계를 가까이하도록 해.”최민영은 소리치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왜 그러세요? 저보고 정민아랑 친해지라고요? 정민아만 아니었으면 저와 연우 씨는 이미 결혼했을 거예요. 지금처럼 아빠가 비서한테 부탁해서 연우 씨와 만날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었을 거라고요.”“그 일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연우 씨가 명확하게 동의하지 않았어.”“...그럴 리 없어요. 아빠가 너무 작게 말씀하셔서 연우 씨가 못 들은 건 아니에요?”최민영이 여전히 현실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며 최지운은 최민영의 환상을 가차 없이 깨버렸다.“고연우가 민아 씨와 이혼하지 않겠다고 직접 말했어.”“그럴 리가 없어요.”최민영은 즉각 부인했지만 자신감이 없었다. 최민영은 귀국하였던 동안 고연우의 태도를 보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최민영은 귀국하면 고연우가 당연히 정민아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할 줄 알았지만, 두 사람은 거의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아빠로서 최지운은 최민영이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민아 씨와 친해지기 싫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들이 이혼하기 전까지는 민아 씨를 괴롭히거나 논쟁을 일으키지 마. 고씨 가문과의 관계는 끊어져서는 안 돼.”“아빠, 정민아를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정민아가 우리 두 집의 관계에 영향을 줄 리 없어요.”최지운은 최민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무 자신만만해하지 말고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
정민아의 오만한 이미지는 고연우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고연우는 정민아가 곤란해한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정민아가 남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연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공민찬은 그가 신경 쓸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여기며 반쯤 탄식하며 자문자답했다.“이렇게 많은 술을 다 마시면 병원에 가서 주사라도 맞아야 할지도 모르겠네요.”고연우는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을 갑자기 멈추고 차가운 눈길로 공민찬을 쳐다보았다.“그렇게 걱정된다면 네가 대신 마셔줄래?”공민찬은 으쓱하며 속으로 작은 반항심이 꿈틀거렸다. 정민아가 자기 아내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 불편한 것도 아닌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저의 주량은 맥주 한 병입니다. 사모님께서 계신 방에서는 오십 도가 넘는 위스키를 주문하셨어요.”“그럼 조용히 해.”고연우는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술을 삼키지 않고 입 안에 머금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지만, 고연우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모두가 조용해지고 화풀이를 당할지 봐 다가서지 않았다.공민찬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시 중얼거렸다.“여자는 이런 상황에서 가장 외롭고 무력하죠. 만약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준다면 마치 백마 탄 왕자처럼 보일 거예요.”고연우의 마음이 불안해지면서 입 안의 술도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고연우는 술을 삼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고씨 가문에 있기 아까운 인재야.”공민찬이 말했다.“별말씀을요.”고연우는 어이없었다.“하.”고연우의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알아차린 다른 사람들은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논의해야 할 일들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원래는 공민찬이 결제를 마치고 흩어질 예정이었으나, 고연우가 자리에 앉아 떠나겠다고 말하지 않자, 다른 사람들도 먼저 끝내자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 남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숨쉬기조차 어려울 만큼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렀다.
“유성아… 날 가져.”“신연지, 날 똑바로 봐. 내가 누구야?”전등이 켜지고 신연지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박태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여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겁도 없이 내 침대로 뛰어들다니.”“그런 거 아니야. 방을 잘못….”신연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이날 밤 순결을 잃었다.모든 게 끝난 뒤, 박태준은 싸늘하게 그녀에게 카드를 던졌고 분노한 신연지는 남자의 귀뺨을 후려쳤다.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었나?”그 말은 신연지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박태준, 돈은 필요 없어. 내 순결을 망쳤으니 결혼으로 갚아!”3년 후, 신당동의 한 호화저택.신연지는 따분한 얼굴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명 발레리나 전예은이 무대에서 추락하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서 부상을 입은 여자를 안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각종 채널에서 보도되고 있었다.잠깐 비친 옆모습이었지만 그와 3년을 동거한 신연지는 한눈에 박태준을 알아보았다.어젯밤 침대에 누워 오늘 일찍 돌아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던 남자였다.그녀는 식어버린 음식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만드느라 오후 시간을 다 썼건만, 같이 먹어줄 사람은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다가가서 반찬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물집이 잡힌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쓰레기통에 붓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싸기 시작했다.그녀와 박태준은 계약결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계약한 3년이 드디어 끝났다. 전예은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과 정확히 맞물렸다.비록 아직 정확한 계약기간까지는 3개월이 남았지만 전예은이 돌아왔으니 계약을
“신연지, 이혼 서류 보냈던데 대체 뭐하자는 거야?”박태준의 목소리를 확인한 신연지는 순식간에 잠이 확 깨 대답했다. “거기 적힌 대로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따가 출근하면 내 사무실로 와서 이 쓰레기들 도로 가져가. 저녁 여덟 시까지는 시간 줄 테니까 짐 싸들고 집에 돌아오고.”그의 말에 신연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박태준, 당신 미쳤어?”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말투를 바꿔 차분하게 말했다.“전예은 씨가 불륜녀로 낙인 찍힐까 봐 그러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결혼한 거 부모님하고 가까운 지인들만 알고 세상 사람들은 모르잖아. 사람들은 당신을 여자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순애보로 기억한다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귀국했으니 잘된 거 아니야?”하지만 박태준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 전예은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뉴스에 났는데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 서류가 외부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전예은은 불륜녀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그는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참 신나서 떠들던 신연지는 뒤늦게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자식.’호텔과 본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느긋하게 씻고 조식을 챙겨 먹은 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박태준과 결혼한 뒤, 그녀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박태준의 비서로 재경에 입사했다.하는 일로 따지면 사실 비서라기보다는 하녀에 가까웠다.평소에는 박태준의 삼시세끼와 옷 세탁 등 자질구레한 일을 책임지고 최저시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회사에서는 그녀가 박태준의 아내이자 재경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륜녀로 불려야 할 여자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고 정실 부인인 그녀는 매일 신분이 들킬까 봐 차를 타고 와도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걸어서 출근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한 신연지는 곧장 자리로 가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