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우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거부하는 여자한테 끝까지 강요할 남자가 아닌 데다가 자기를 자극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눈치챘다.그의 미간은 무수한 폭풍이 몰아칠 것 같았고 우수에 찬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흐트러진 옷, 목과 팔에 남은 선명한 키스 자국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까지 더 해져 마치 방금 참혹한 추행을 당한 사람 같았다.고연우는 곧바로 마음속에 일렁이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손을 뻗어 침대 옆 서랍을 열었고 그 속에 들어있는 여러 개의 약병을 보자마자 마음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정민아, 너 정말 많이 컸네...”여태껏 여자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살아온 그였기에 그녀의 말과 서랍 속의 약병들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했고 이내 약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고연우는 곧장 약물 연구소로 가서 성분 분석을 의뢰했고 가정 배경을 이용해 결과를 보다 빨리 받을 수 있었다.“두 약병 각각 항우울제와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약입니다.”연구원은 그중의 한 알약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그리고 이 약에는 흥분하게 도와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장기간 복용한다면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약은 그저 일시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할 수 있기에 성 불감증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것을 권장합니다.”“...”고연우는 어두운 얼굴로 연구소를 나왔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으며, 창문을 열고 약들을 길가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는 지금 정민아의 얼굴을 보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목을 조를까 봐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했고 혼자 밖에 있기도 싫어서 박태준에게 연락했다.“술 마시러 나와.”엔조이 클럽, 고연우가 다른 사람들을 부르지 않은 관계로 남자 두 명이 큰 방에서 술을 마시는 꼴이 되었다.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연우와 워낙 말수가 적은 박태준이 함께 있으니 방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반쯤 취하고 나서야
이 일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정선아가 수년간 힘들게 쌓아왔던 착한 딸 이미지가 망가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그녀는 정민아의 말에 눈을 부릅뜨면서 말했다.“넌 염치도 없어? 엄마 아빠의 호의를 무시할 때는 언제고, 이런 사소한 일로 고자질을 하겠다고? 겉과 속이 다른 너의 모습이 너무 역겨워.”그러나 정민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태연하게 답했다.“설마 내가 칼이라도 들고 너와 맞서 싸울 줄 알았어? 꿈 깨, 법치 사회에서 내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이유는 없잖아.”“...”정선아는 법치 사회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휴대폰을 꺼내 드는 그녀에게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안돼!”...병원.정철진과 주소월이 병원에 도착하자, 정선아는 서럽게 울었고 연신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상처 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엄마, 아빠, 언니한테 해코지하려고 간 게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간 것뿐이에요. 저 정말 너무 억울해요!”주소월도 정선아의 가련한 모습에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다가 곧 뜨거운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정민아가 그들을 비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주소월은 정선아를 가볍게 밀어내면서 물었다.“말해 봐, 왜 이렇게 된 거야?”정선아는 자기의 상처 난 손을 급하게 뒤로 감추면서 답했다.“언니와는 상관없어요, 제가 중심을 잃고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정민아는 그저 조용히 정선아의 가식적인 연기를 지켜보면서 정철진의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반응에 따라 앞으로 최씨 가문과의 대적에서 그녀가 집안에 얼마나 기댈 수 있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예전 같았으면 주소월도 정선아의 말을 무조건 믿었겠지만, 며칠 전 쓰러진 척 연기를 하던 정선아가 생각나서 ‘엄마는 너를 믿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그리고 정선아는 자기가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눈치를 살피는 법을 배웠기에 곧장 주소월
서은혁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정민아가 자기의 양복바지를 정리해 주는 모습과 거대한 창문을 통해 행인들이 흩날리는 눈송이를 맞으며 바쁘게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왠지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홀린 듯이 감상하면서 말했다.“너무 예뻐요.”그러나 정민아는 감정 없는 돈벌이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카드로 할래요? 아니면 카카오 페이로 할래요?”서은혁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당신...”이때 가게 입구에서 고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민아.”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정민아는 인상을 찌푸렸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이야?”고연우의 안색도 까칠한 그녀의 태도에 덩달아 어두워졌다.정민아는 고연우에게 이혼을 제안한 후로는 한 번도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고, 방금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는 행동은 두 사람 사이에 더욱 있을 수 없었다.고연우는 그 장면이 질투가 났는지 허스키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서은혁 씨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닌데 네가 옷매무새를 정리해 줄 필요가 있어?”“나한테 그만한 돈을 냈냈으니까.”정민아는 짧게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 서은혁에게 물었다.“입고 온 옷은 포장해 줄까요?”“그래요, 가게에 다른 옷도 있어요? 중요한 날에 입어야 할 양복을 눈 오는 날에 입어서 더럽히면 안 되니까요.”고연우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더욱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난 너한테 돈을 안 줬어? 그런데 내 옷매무새는 한 번도 정리해 주지 않는 거지?”그러나 정민아는 그에게 똑같은 말로 되갚아 주었다.“넌 손이 없어?”서은혁이 말하려는 순간, 공민찬이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은혁 도련님, 제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드리고 깔끔하게 다려 줄게요. 기성복이 한 벌 더 필요하다고 하셨죠? 제가 골라 드릴게요. 남자의 옷 취향은 남자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니까 분명히 마음에 들 거예요.”
공민찬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칸막이를 올렸다.‘이게 무슨 소리지? 대표님께서 그쪽으로 증명까지 해야 한다는 건가? 밤 생활이 능하지 못한 남자들이 대부분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더니 어쩐지 대표님도...’고연우는 정민아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물었다.“내 스킬이 마음에 안 들어?”정민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반문했다.“열 번 중 여덟 번은 누워 있는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어?”“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어? 누가 침대에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쳤었지? 또 혼자 만족했다면서 매정하게 나가던 사람이 누구였지? 정민아, 앞으로 가만 안 둬.”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고 고연우가 말했다.“내려.”“왜?”정민아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묻자, 고연우가 차 밖에 서서 내려보면서 답했다.“네 병을 고쳐주려고, 그래야 네가 모든 남자가 너한테 관심 있다는 생각을 버릴 거 아니야...”고연우가 일부러 서은혁을 겨냥해서 한 말이었지만, 애당초 두 사람을 싫어하는 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고연우는 정민재를 데리러 호텔에 온 거였고 그녀가 계속 차에 앉아 있는 걸 보더니 몸을 돌려 호텔로 들어갔다.정민아는 그의 훤칠한 뒷모습을 보다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려고 뒤따라갔다.고연우는 8503호 앞에 서서 노크했고 정민아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몰래 그 광경을 지켜봤다.곧이어 방문이 열리더니 소년미 넘치는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연우 형, 그 여자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정민아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민재라는 걸 알고는 눈살을 찌푸렸다.그 시각, 정민재는 화난 새처럼 털을 바짝 세우면서 말을 쏟아냈다.“늦게 입양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선아 누나를 집에서 쫓아내요? 솔직히 말해서 나가야 할 사람은 그 여자잖아요! 우리 가족 모두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안 나가는 이유가 뭐죠? 매일 밖에서 남자를 유혹하고 선아 누나와 부모님 사이를 이간질하더니
주소월은 지금 죄책감으로 인해 말할 때마다 정민아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평소 애지중지하던 정민재도 돌 볼 겨를이 없었다.그러나 주소월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정민재는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변명에 눈을 부릅뜨면서 격분했다.“엄마, 정민아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상황에서 그녀의 편을 드는 거죠? 제 얼굴에 난 상처를 봐요, 이게 그냥 시험한 거라고요?”그는 허리를 굽혀 자기의 멍든 얼굴을 주소월 앞에 들이대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정민아한테 맞아서 아들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반응일 수 있어요!”이때, 거실에서 정철진의 언짢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닥쳐! 사내놈이 조금 다친 걸로 무슨 호들갑이야!”정철진은 이내 퍼렇게 멍든 정민재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더 했다.“여자한테 맞아서 얼굴이 멍들고도 무슨 낯짝으로 떠들어!”“그러면 제가 어떡할까요? 아버지께서 남자는 여자를 때리면 안 된다고 교육하셨는데 맞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어요?”“...”“아버지도 왜 정민아의 편을 드시는 거죠? 시골뜨기 때문에 선아 누나를 쫓아내더니 이제는 저까지 집에서 쫓아내려고요?”정민재는 분노와 증오의 눈빛으로 정민아를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정민아가 사생아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어요, 아니면 왜 이렇게까지...”편애라는 두 글자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재떨이가 그의 광대뼈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부딪히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정철진은 화가 치밀어 올라 눈을 부릅뜨면서 말했다.“이놈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쓸데없는 말을 더 하면 나한테 맞을 줄 알아!”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정민아가 옆에서 담담하게 말했다.“참아요, 정민재를 때려죽이면 정씨 가문의 피를 이을 사람이 없어지잖아요.”그 순간, 주소월은 붉어진 눈시울로 정민아를 바라보면서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민아야, 너 우리가 그렇게도 미워?”정씨 가문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없는 정민아는 그녀의 물음에 화제를 돌렸다.“오늘 내로 밥은 먹을 수
정민아는 서은혁만 만나면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기에 그의 부름에도 계속 멈추지 않고 휠체어를 밀면서 앞으로 갔다.서은혁은 무슨 일인지 쫓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손수건을 꺼내 사진에 묻은 먼지를 꼼꼼하게 닦으면서 말했다.“누나, 저 왔어요.”그와 서현란은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아주 친했다. 그는 갑자기 뒤돌아 묘비의 중앙에 놓인 해바라기꽃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서은혁이 정민아를 다시 쫓아갔을 때, 그녀는 이미 산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민아 씨, 깁스는 언제 풀었어요?”“나한테 할 말이 있다더니, 설마 이거예요?”“아니요, 나랑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으려던 참이었어요.”정민아는 휠체어를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서은혁 씨, 당신 나 좋아해요?”서은혁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답했다.“네, 저...”“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나한테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네요.”그 순간, 서은혁이 실소를 터뜨렸다.“늘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고백을 거절했어요?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하면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아니면 내가 완전히 포기 못 할까 봐 이러는 건가요?’“내가 혼자 착각하고 도를 넘을까 봐서요.”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서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날 거절하는 이유가 내가 당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유부녀라서인가요?”“이 정도로 내 내연남이 되고 싶어요?”“당신이 먼저 그 사람이랑 이혼할 수도 있죠.”서은혁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정민아에게 내밀었고 그녀 또한 한참 동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한편, 엔조이 클럽, 방 안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 최민영의 친구들은 그녀와 고연우를 부추기기 시작했다.“민영 언니, 연우 도련님이랑 러브샷 해요!”“러브샷! 러브샷!”비록 다들 고연우가 유부남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정민아와
패션 디자이너한테 옷차림이 못생겼다고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던 정민아가 고연우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그의 옷 스타일에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됐어, 내가 너한테 화내서 뭐 하겠어. 최민영처럼 수준이 떨어지는 여자와 약혼하겠다던 네 수준은 안 봐도 훤해.”정민아의 얼굴에는 조롱과 풍자가 가득했고, 고연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짜증을 억누르면서 침착하게 말했다.“약혼한 적은 없어. 그저 두 집 어른 사이에 그런 얘기만 오갔을 뿐이야.”그녀가 고연우와 최민영을 알았을 때부터, 두 사람은 모두가 인정하는 아름다운 한 쌍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누구도 옆에 다가갈 수 없었다.“넌 정말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졌네.”고연우는 정민아가 속으로 도대체 무슨 음탕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쁜 생각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는 차갑게 말했다.“당신이 왜 최민영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지금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니까 사고 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네가 사고를 친다고 해서 내가 뒷수습을 해주리라 기대하지 마.”“그럴 일 없어.”고연우의 얼굴은 홀가분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욱 무거워졌다.“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입구에서 기다려.”얼마 지나지 않아, 최민영이 정민아에게 다가왔고 클럽 불빛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도도한 표정으로 물었다.“연우랑 이혼한다며?”정민아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자, 갑자기 오래전 아무도 없던 골목길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해졌다.“고연우가 너한테 말했어?”아직 두 사람이 이혼한다는 소식이 공개되지 않았음에도 최민영이 귀국 첫날에 모든 걸 알고 있다니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런 쓸데없는 건 왜 묻지?”“글쎄, 이제 보니까 고연우도 내 청춘을 허비할 만한 가치가 없더라고. 내가 버린 쓰레기를 네가 주워서 쓰려고?”최민영은 자기가 오랫동안 사랑한 남자가 수모를 받는 걸 견딜 수
차 안.고연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사물함 속의 담배에 몇 번이나 향했지만 꾹 참으면서 담담하게 먼저 말을 건넸다.“최민영이랑 다시 만나지 마.”정민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최씨 가문을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말고 최민영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고연우는 그녀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아도 완고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좀 났다.“그때 가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마.”최씨 가문이 오늘의 이 위치까지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이제야 일을 막 시작한 정민아가 패기만으로 대항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정민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창밖만 바라보면서 무시했고, 신림동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차에서 내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송씨 아주머니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급히 하던 일을 멈추고 맞이했다.“아가씨, 당신...”정민아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송씨 아주머니는 정민아가 평소 온화한 성격은 아니더라도 예의가 발랐기에 처음 보는 낯선 모습에 조금 당황했고 뒤따라 들어오는 고연우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대표님, 아가씨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오는 내내 냉대를 받은 고연우도 기분이 상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계단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신경 쓰지 마요.”송씨 아주머니는 두 사람이 또 싸웠다는 것을 눈치채고 익숙한 듯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욕실 안.정민아는 물이 가득 찬 욕조 속에 천천히 몸을 담갔고 따뜻한 물을 만끽하면서 입술, 코, 눈, 머리까지 온몸을 물속에 집어넣었다.그녀는 물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다가 아까 최민영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서현란이 정말로 하늘에서 날 원망할까?’그러나 곧장 머릿속에 스치는 잡생각들을 집어던지고 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물속에서 입을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