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던 송씨 아주머니는 고연우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잔뜩 긴장한 채 말했다.“대표님, 아가씨께서는 이미 주무셨어요.”고연우는 송씨 아주머니를 힐끗 쳐다보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2층으로 향했다. 거실을 지나칠 때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장의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고연우는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진 채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식탁에도 있나요? 정민아가 내가 지나가는 모든 곳에 이것을 놓은 건가요?”송씨 아주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한참 동안의 침묵이 자나고 고연우는 입가에 어이없는 웃음을 떠올렸다. 정말로 자신과 이혼할 생각인지 궁금했다.고연우는 싸늘한 얼굴로 계단을 올라갔다. 방에 도착해보니 정민아가 문을 잠가버린 것을 확인한 순간 억눌렸던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고연우는 화를 참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정민아가 손잡이를 붙잡은 채 서 있었다. 방 안으로 들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무슨 일이야?”고연우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진심인 거야?”“응.”“그럼 내가 이혼을 반대하면 어떻게 할 거야?”고연우의 웃음이 커질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정민아는 원래 쉽게 이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연우가 정민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민아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최민영과 두 집안의 관계 때문이었다.고연우가 동의하지 않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정민아는 차분하게 말했다.“최민영이 곧 귀국할 거야. 내가 이혼해 주면 너희들도 행복해질 거 아니야? 너도 나를 싫어하잖아.”고연우는 정민아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다른 여자와 엮는 모습을 보며 불쾌감을 느꼈다.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자들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더 솔직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어.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욕망만 채우면 되는 거지. 결혼까지 했는데 질리기 전에 이혼하면 나의 손해 아닌가?”고연우의 시선은 정
고연우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거부하는 여자한테 끝까지 강요할 남자가 아닌 데다가 자기를 자극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눈치챘다.그의 미간은 무수한 폭풍이 몰아칠 것 같았고 우수에 찬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흐트러진 옷, 목과 팔에 남은 선명한 키스 자국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까지 더 해져 마치 방금 참혹한 추행을 당한 사람 같았다.고연우는 곧바로 마음속에 일렁이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손을 뻗어 침대 옆 서랍을 열었고 그 속에 들어있는 여러 개의 약병을 보자마자 마음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정민아, 너 정말 많이 컸네...”여태껏 여자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살아온 그였기에 그녀의 말과 서랍 속의 약병들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했고 이내 약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고연우는 곧장 약물 연구소로 가서 성분 분석을 의뢰했고 가정 배경을 이용해 결과를 보다 빨리 받을 수 있었다.“두 약병 각각 항우울제와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약입니다.”연구원은 그중의 한 알약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그리고 이 약에는 흥분하게 도와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장기간 복용한다면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약은 그저 일시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할 수 있기에 성 불감증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것을 권장합니다.”“...”고연우는 어두운 얼굴로 연구소를 나왔고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으며, 창문을 열고 약들을 길가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는 지금 정민아의 얼굴을 보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목을 조를까 봐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했고 혼자 밖에 있기도 싫어서 박태준에게 연락했다.“술 마시러 나와.”엔조이 클럽, 고연우가 다른 사람들을 부르지 않은 관계로 남자 두 명이 큰 방에서 술을 마시는 꼴이 되었다.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연우와 워낙 말수가 적은 박태준이 함께 있으니 방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반쯤 취하고 나서야
이 일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정선아가 수년간 힘들게 쌓아왔던 착한 딸 이미지가 망가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그녀는 정민아의 말에 눈을 부릅뜨면서 말했다.“넌 염치도 없어? 엄마 아빠의 호의를 무시할 때는 언제고, 이런 사소한 일로 고자질을 하겠다고? 겉과 속이 다른 너의 모습이 너무 역겨워.”그러나 정민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태연하게 답했다.“설마 내가 칼이라도 들고 너와 맞서 싸울 줄 알았어? 꿈 깨, 법치 사회에서 내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이유는 없잖아.”“...”정선아는 법치 사회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휴대폰을 꺼내 드는 그녀에게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안돼!”...병원.정철진과 주소월이 병원에 도착하자, 정선아는 서럽게 울었고 연신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상처 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엄마, 아빠, 언니한테 해코지하려고 간 게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간 것뿐이에요. 저 정말 너무 억울해요!”주소월도 정선아의 가련한 모습에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다가 곧 뜨거운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정민아가 그들을 비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주소월은 정선아를 가볍게 밀어내면서 물었다.“말해 봐, 왜 이렇게 된 거야?”정선아는 자기의 상처 난 손을 급하게 뒤로 감추면서 답했다.“언니와는 상관없어요, 제가 중심을 잃고 실수로 넘어진 거예요.”정민아는 그저 조용히 정선아의 가식적인 연기를 지켜보면서 정철진의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반응에 따라 앞으로 최씨 가문과의 대적에서 그녀가 집안에 얼마나 기댈 수 있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예전 같았으면 주소월도 정선아의 말을 무조건 믿었겠지만, 며칠 전 쓰러진 척 연기를 하던 정선아가 생각나서 ‘엄마는 너를 믿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그리고 정선아는 자기가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눈치를 살피는 법을 배웠기에 곧장 주소월
서은혁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정민아가 자기의 양복바지를 정리해 주는 모습과 거대한 창문을 통해 행인들이 흩날리는 눈송이를 맞으며 바쁘게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왠지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홀린 듯이 감상하면서 말했다.“너무 예뻐요.”그러나 정민아는 감정 없는 돈벌이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카드로 할래요? 아니면 카카오 페이로 할래요?”서은혁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당신...”이때 가게 입구에서 고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민아.”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정민아는 인상을 찌푸렸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무슨 일이야?”고연우의 안색도 까칠한 그녀의 태도에 덩달아 어두워졌다.정민아는 고연우에게 이혼을 제안한 후로는 한 번도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고, 방금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는 행동은 두 사람 사이에 더욱 있을 수 없었다.고연우는 그 장면이 질투가 났는지 허스키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서은혁 씨가 손이 없는 것도 아닌데 네가 옷매무새를 정리해 줄 필요가 있어?”“나한테 그만한 돈을 냈냈으니까.”정민아는 짧게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 서은혁에게 물었다.“입고 온 옷은 포장해 줄까요?”“그래요, 가게에 다른 옷도 있어요? 중요한 날에 입어야 할 양복을 눈 오는 날에 입어서 더럽히면 안 되니까요.”고연우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더욱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난 너한테 돈을 안 줬어? 그런데 내 옷매무새는 한 번도 정리해 주지 않는 거지?”그러나 정민아는 그에게 똑같은 말로 되갚아 주었다.“넌 손이 없어?”서은혁이 말하려는 순간, 공민찬이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은혁 도련님, 제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드리고 깔끔하게 다려 줄게요. 기성복이 한 벌 더 필요하다고 하셨죠? 제가 골라 드릴게요. 남자의 옷 취향은 남자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니까 분명히 마음에 들 거예요.”
공민찬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칸막이를 올렸다.‘이게 무슨 소리지? 대표님께서 그쪽으로 증명까지 해야 한다는 건가? 밤 생활이 능하지 못한 남자들이 대부분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더니 어쩐지 대표님도...’고연우는 정민아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물었다.“내 스킬이 마음에 안 들어?”정민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반문했다.“열 번 중 여덟 번은 누워 있는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어?”“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어? 누가 침대에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쳤었지? 또 혼자 만족했다면서 매정하게 나가던 사람이 누구였지? 정민아, 앞으로 가만 안 둬.”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고 고연우가 말했다.“내려.”“왜?”정민아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묻자, 고연우가 차 밖에 서서 내려보면서 답했다.“네 병을 고쳐주려고, 그래야 네가 모든 남자가 너한테 관심 있다는 생각을 버릴 거 아니야...”고연우가 일부러 서은혁을 겨냥해서 한 말이었지만, 애당초 두 사람을 싫어하는 정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고연우는 정민재를 데리러 호텔에 온 거였고 그녀가 계속 차에 앉아 있는 걸 보더니 몸을 돌려 호텔로 들어갔다.정민아는 그의 훤칠한 뒷모습을 보다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려고 뒤따라갔다.고연우는 8503호 앞에 서서 노크했고 정민아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몰래 그 광경을 지켜봤다.곧이어 방문이 열리더니 소년미 넘치는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연우 형, 그 여자 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정민아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민재라는 걸 알고는 눈살을 찌푸렸다.그 시각, 정민재는 화난 새처럼 털을 바짝 세우면서 말을 쏟아냈다.“늦게 입양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선아 누나를 집에서 쫓아내요? 솔직히 말해서 나가야 할 사람은 그 여자잖아요! 우리 가족 모두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안 나가는 이유가 뭐죠? 매일 밖에서 남자를 유혹하고 선아 누나와 부모님 사이를 이간질하더니
주소월은 지금 죄책감으로 인해 말할 때마다 정민아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평소 애지중지하던 정민재도 돌 볼 겨를이 없었다.그러나 주소월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정민재는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변명에 눈을 부릅뜨면서 격분했다.“엄마, 정민아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 상황에서 그녀의 편을 드는 거죠? 제 얼굴에 난 상처를 봐요, 이게 그냥 시험한 거라고요?”그는 허리를 굽혀 자기의 멍든 얼굴을 주소월 앞에 들이대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정민아한테 맞아서 아들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반응일 수 있어요!”이때, 거실에서 정철진의 언짢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닥쳐! 사내놈이 조금 다친 걸로 무슨 호들갑이야!”정철진은 이내 퍼렇게 멍든 정민재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더 했다.“여자한테 맞아서 얼굴이 멍들고도 무슨 낯짝으로 떠들어!”“그러면 제가 어떡할까요? 아버지께서 남자는 여자를 때리면 안 된다고 교육하셨는데 맞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어요?”“...”“아버지도 왜 정민아의 편을 드시는 거죠? 시골뜨기 때문에 선아 누나를 쫓아내더니 이제는 저까지 집에서 쫓아내려고요?”정민재는 분노와 증오의 눈빛으로 정민아를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정민아가 사생아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어요, 아니면 왜 이렇게까지...”편애라는 두 글자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재떨이가 그의 광대뼈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부딪히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정철진은 화가 치밀어 올라 눈을 부릅뜨면서 말했다.“이놈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쓸데없는 말을 더 하면 나한테 맞을 줄 알아!”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정민아가 옆에서 담담하게 말했다.“참아요, 정민재를 때려죽이면 정씨 가문의 피를 이을 사람이 없어지잖아요.”그 순간, 주소월은 붉어진 눈시울로 정민아를 바라보면서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민아야, 너 우리가 그렇게도 미워?”정씨 가문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없는 정민아는 그녀의 물음에 화제를 돌렸다.“오늘 내로 밥은 먹을 수
정민아는 서은혁만 만나면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기에 그의 부름에도 계속 멈추지 않고 휠체어를 밀면서 앞으로 갔다.서은혁은 무슨 일인지 쫓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손수건을 꺼내 사진에 묻은 먼지를 꼼꼼하게 닦으면서 말했다.“누나, 저 왔어요.”그와 서현란은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아주 친했다. 그는 갑자기 뒤돌아 묘비의 중앙에 놓인 해바라기꽃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서은혁이 정민아를 다시 쫓아갔을 때, 그녀는 이미 산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민아 씨, 깁스는 언제 풀었어요?”“나한테 할 말이 있다더니, 설마 이거예요?”“아니요, 나랑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으려던 참이었어요.”정민아는 휠체어를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서은혁 씨, 당신 나 좋아해요?”서은혁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답했다.“네, 저...”“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나한테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네요.”그 순간, 서은혁이 실소를 터뜨렸다.“늘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고백을 거절했어요?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하면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아니면 내가 완전히 포기 못 할까 봐 이러는 건가요?’“내가 혼자 착각하고 도를 넘을까 봐서요.”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서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날 거절하는 이유가 내가 당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유부녀라서인가요?”“이 정도로 내 내연남이 되고 싶어요?”“당신이 먼저 그 사람이랑 이혼할 수도 있죠.”서은혁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정민아에게 내밀었고 그녀 또한 한참 동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한편, 엔조이 클럽, 방 안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 최민영의 친구들은 그녀와 고연우를 부추기기 시작했다.“민영 언니, 연우 도련님이랑 러브샷 해요!”“러브샷! 러브샷!”비록 다들 고연우가 유부남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정민아와
패션 디자이너한테 옷차림이 못생겼다고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던 정민아가 고연우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그의 옷 스타일에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됐어, 내가 너한테 화내서 뭐 하겠어. 최민영처럼 수준이 떨어지는 여자와 약혼하겠다던 네 수준은 안 봐도 훤해.”정민아의 얼굴에는 조롱과 풍자가 가득했고, 고연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짜증을 억누르면서 침착하게 말했다.“약혼한 적은 없어. 그저 두 집 어른 사이에 그런 얘기만 오갔을 뿐이야.”그녀가 고연우와 최민영을 알았을 때부터, 두 사람은 모두가 인정하는 아름다운 한 쌍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누구도 옆에 다가갈 수 없었다.“넌 정말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졌네.”고연우는 정민아가 속으로 도대체 무슨 음탕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쁜 생각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는 차갑게 말했다.“당신이 왜 최민영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지금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니까 사고 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네가 사고를 친다고 해서 내가 뒷수습을 해주리라 기대하지 마.”“그럴 일 없어.”고연우의 얼굴은 홀가분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욱 무거워졌다.“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입구에서 기다려.”얼마 지나지 않아, 최민영이 정민아에게 다가왔고 클럽 불빛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도도한 표정으로 물었다.“연우랑 이혼한다며?”정민아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자, 갑자기 오래전 아무도 없던 골목길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해졌다.“고연우가 너한테 말했어?”아직 두 사람이 이혼한다는 소식이 공개되지 않았음에도 최민영이 귀국 첫날에 모든 걸 알고 있다니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런 쓸데없는 건 왜 묻지?”“글쎄, 이제 보니까 고연우도 내 청춘을 허비할 만한 가치가 없더라고. 내가 버린 쓰레기를 네가 주워서 쓰려고?”최민영은 자기가 오랫동안 사랑한 남자가 수모를 받는 걸 견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