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정민아는 정철진의 전화를 받고 집에 불려 갔다.어젯밤에 푹 자려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놓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부재중 전화와 읽지 않은 카톡 알림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대부분 정선아와 주소월 이름이었는데, 뒤지다가 뜻밖에 정철진의 이름이 보였다.정철진은 가부장적이고 일을 1순위에 두고, 집안의 사소한 일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겨 그를 찾으면, 몽둥이를 휘두르고 막무가내로 진압했다. 그래서 자녀와의 관계도 깊지 않았는데, 만나면 근황 몇 마디 묻는 것 외에 평소에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그녀는 퇴근 후에야 친정으로 갔다. 문 앞에 도착하니 안에서 정선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아버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화내지 마세요.”정철진은 목소리가 높아 화를 내면 성난 사자처럼 기세가 압도적이었다.“너와 민아는 자매이고 가족이야. 이게 무슨 행위인지 알아? 등에 비수를 꽂는 것이고 배신이고 행동거지가 잘못된 거야. 군대에서 이러면 파면되고, 심각하면 군사 법정에 서야 해.”“흑흑!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정선아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었다.“의사가 제 이마에 흉터가 남을 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요. 그 두 사람이 언니한테서 돈을 뜯어내고, 라이브 방송을 열어 언니의 명성을 깎아내릴 줄은 몰랐어요.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그녀가 얼마나 애처롭게 울고, 얼마나 성의 있게 사과하는지 정민아가 조금이라도 착했다면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오죽하면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겠는가. 정씨 집안에서 정철진이 가장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은 간난신고 끝에 태어난 남동생도, 어릴 때부터 그들과 떨어져 지낸 친딸도 아닌, 말을 잘하고 애교가 많은 정선아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울자 ‘엄격한 아버지’ 정철진의 말투는 누그러졌다.“가족은 뒤에서 수작을 부려 모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마음을 합쳐야 해.”문 앞에서 정민아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려고 인스타를 열었
고연우는 정선아가 팔짱을 끼려고 내민 손을 피하고, 걸어가면서 물었다.“아버지는 좀 어떠셔?”“아직 응급조치 중이에요. 아버지는 워낙 고혈압이 있어서 전에도 의사 선생님이 자극을 받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는데...”고연우는 먼저 주소월한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넨 후 의사에게 정철진의 상태를 물었다. 그에게 사람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는지, 어찌할 바를 모르던 두 사람은 버팀목을 찾은 듯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다.정신을 차린 주소월은 그제야 정민아가 생각이 났다. 병원에 온 후,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멀찍이 서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그녀의 무관심에 마음이 상해 마지막 죄책감마저 털어낸 주소월은 쌀쌀하게 말했다.“먼저 가.”이름을 부르지 않았기에 딴생각을 하고 있던 정민아는 일시적으로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주소월은 책망과 원망이 섞인 말투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네 아버지를 한 번 더 기절시키고 싶어 여기 있는 거야? 우리 집안에서 너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어서 우리를 이렇게 원망하는데? 시골에 있는 너를 경인시로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최고의 교육을 받게 했는데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 네 아버지가 만약...”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정선아도 그녀를 안고 같이 울었다.주위 사람들은 정민아를 보며 소곤거렸다. 순간 그녀는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는 신세가 됐다.복도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정민아와 사람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 것처럼 갈려져 그들은 그녀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했고 그녀도 배척을 당해 그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기견처럼...고연우는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어 딱 봐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쳤다.“이모님, 지금 너무 상심하셔서 정서가 불안정하니 선아와 함께 저쪽에 가서 좀 쉬세요.”사람은 극도로 분노한 상황에서 아무 말이나 하
정민아는 오랜만에 왔기에 좀 더 있고 싶었지만 고연우가 불량 학생을 잡는 교감 선생님처럼 냉랭한 얼굴로 앞에 버티고 서 있으니 술맛이 다 떨어졌다. 그녀는 키 높이 의자에서 내려와 퉁명스럽게 말했다.“너 때문에 도망갔잖아.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어.”모델남은 뜨지 못했지만 눈썰미는 있어서 고연우를 보자마자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들이 대화하는 틈을 타서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문을 열자마자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와 옷깃과 바짓가랑이로 들어왔다. 정민아는 추위에 떨며 손으로 앞섶을 여몄다.“추워?”“응.”어느 순간 정민아는 그가 옷을 벗어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지만 곧바로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남자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빈정댔다.“아니면 아까 그 남자를 찾아가서 옷을 벗어달라고 해봐. 무척 더운 것 같던데. 옷을 입지 않아도 얼어 죽지 않을걸.”이 괴상야릇한 말투는 비웃는 효과를 극대화했다.“쟤가 너한테 잘못한 게 있어?”“아니.”“다른 사람을 비웃는 데서 쾌감을 느껴? 고연우, 왜 사람이 그렇게 못됐어?”모델은 몸매로 밥 벌어먹는 직업이고, 일거리를 얻기 위해 자기를 고용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앞에서 몸을 보여주는 것은 정상적인 오디션 절차일 뿐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피라미드 최상단에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던 고연우는 이런 것을 모른다.“그 사람이 뭘 하려는지 정말 몰라?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성깔이 보통이 아니어서 아무나 물어뜯는 정민아가 누군가를 감싸는 걸 처음 본 고연우는 굳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정민아, 그동안 먹은 밥이 한 톨도 머리에는 작용하지 않았나 보지? 너랑 자고 기회를 얻으려는 거잖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명백한 의도를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목에 달고 있는 그 물건이 쓸모없으면 아예 뜯어버려.”“고연우.”정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마주 섰다.미남미녀가 서로 마주 보는 화면은 청춘 드라마 포스터처럼 아름다웠지만,
“허! 3살짜리 아이도 아는 안전 상식을 넌 몰라? 이 한밤중에 술을 마신 여자가 감히 낯선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타겠다고?”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추파를 던지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처럼 평범하게 생긴 여자는 그런 걱정이 없어.”“남자는 흥분하면 못생긴 여자가 아니라 짐승한테도 덮칠 수 있어. 예쁘게 생기면 더 쉽게 남자의 흥미를 끌 뿐이지, 남자가 예쁜 여자만 건드리는 것은 아니야. 상대를 가리지 않는 사람도 많아. 너의 어리석음으로 남자의 저열한 근성에 도전하지 마.”차 안은 곧 조용해졌고, 엔진과 에어컨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만 들렸다.어두움 때문인지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에 처량함과 쓸쓸함이 극에 달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쥐고 무의식적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딱딱 소리와 함께 화면이 켜졌다 꺼졌다 하면서 어두컴컴한 차 안에서 눈을 어지럽혔다.고연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아저씨는 그저 화가 치밀어 기절한 것이고 큰 문제는 없대. 내가 병원을 떠날 때 이미 깨어나셨어. 하룻밤 경과를 지켜보고 내일 퇴원할 수 있대.”정민아는 관심이 없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뒤로 그녀의 휴대폰 화면은 더 이상 켜지지 않았다.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1시가 넘었다. 이 시간에 송씨 아주머니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거실에는 작은 등이 켜져 있었다. 늦게 돌아온 정민아가 불을 켜지 않고 어둠을 더듬으며 위층에 올라가다가 걸려 넘어질까 봐 특별히 켜둔 것이다.정민아는 따뜻한 노란색 불빛을 보며 마음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 불빛은 그녀의 황폐한 전반생에 현란한 빛깔을 더했다. 알고 보니 수많은 불빛 속에 그녀를 위해 켜진 불도 있었다.정민아의 눈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기가 감돌았는데, 신발을 갈아 신고 고개를 든 고연우가 마침 이 장면을 포착했다. 여인의 또렷한 이목구비는 순간적으로 생동감 넘쳤고, 속세를 초월한 선녀가 갑자기 하늘에서 속세로 내려온 것 같았다.그는 정민
“해외에서 쇼를 보다가 말이 잘 통하는 여성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준 거야.”사연희의 말에 정민아는 차를 운전하며 대답했다.“혼자 가. 외로우면 남자 파트너를 구하고.”사연희는 드레스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어디서 맞췄는지 묻게 하려는 건데, 그녀가 가면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사연희는 변비에 걸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건전하지 못한 얘기는 꺼내지도 마. 나는 일에 집중해야 해. 재수 없는 사내놈들은 내 돈벌이에 방해가 될 뿐이야.”고등학교 때 그녀의 절친이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사기를 당해 몸도 잃고 돈도 잃었다. 친구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기숙사 창문으로 뛰어내렸는데, 몸이 찌그러지고 머리가 터져 피투성이가 된 채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뒤로 사랑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버린 사연희는 공부에 전념했고 평생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그리고 단지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임무가 있어. 주문을 따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너에게 달려 있어.”만약 옷이 6점이라면 정민아를 모델로 세울 경우 직접 만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사연희의 목표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 세계 각지에 매장을 오픈하는 것인데, 지금 돈도 없고 이름도 없어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면서 지내고 있다.백아영이 보여준 그 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워서 눈길을 확 끌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벌써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가게 이름을 묻는 굉장한 장면을 상상했다.정민아가 그녀의 아름다운 상상을 사정없이 뭉개버렸다.“그냥 혼자 가. 주문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화가 나서 심장병이 올까 봐 걱정돼.”그녀가 사연희를 알게 됐을 때는 그 악몽 같은 삶에서 벗어난 뒤였다. 과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사연희는 그녀의 대인관계가 안 좋다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인 원인은 몰랐다. 그저 여자끼리 싸우기 좋아하는 미친년들이 그녀가 예쁘게 생겨서 질투하는 줄로만 알았다.이때 정민아의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 정선아 이
정민아가 차 옆에 거의 도착할 때쯤 정선아는 이를 갈면서도 다음 계획을 생각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쫓아갔고, 달래고 사과해서 다시 끌고 왔다.파티가 성황리에 진행되는 가운데, 흰색 셔츠에 검은색 양복바지를 입은 직원들이 쟁반을 들고 잘 차려입은 남녀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정민아의 등장으로 잠시 조용해졌던 현장 분위기는 금세 원래로 돌아갔다.“언니, 어머니는 저기 계셔. 가자.”그녀는 정민아를 끌고 빠르게 주소월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잇달아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내주면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저 여자가 왜 왔어?”“재수 없어. 진작에 알았으면 오지 말걸. 제발 좀 멀리 가. 몸에 그런 병이 있을지도 몰라.”“그만해.”옆에 있던 파트너가 열변을 토하는 여인을 팔꿈치로 쳤다.“아무리 그래도 연우 도련님 부인이야. 오늘 연우 도련님도 왔는데 혹시 들으면 큰일 나겠어.”여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코웃음을 쳤다.“이게 뭐 어때서? 주변에 연우 도련님이 저 여자를 싫어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들었다 해도 절대 도와주지 않을걸.”정선아는 이 말을 듣고 속이 얼마나 후련했는지 모른다. 주소월의 난처한 얼굴을 보니 더 기뻤다. 하지만 그녀는 싹싹하고 착한 딸 모습을 하고, 주소월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어떤 사람들은 함부로 지껄이기 좋아해요. 저 여자들과 똑같이 굴지 마세요.”주소월은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원래 정민아를 데리고 가서 친정 친척들에게 소개하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친척들이 개의치 않는다 해도 그녀는 데리고 갈 면목이 없다.“민아야,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먼저 저쪽 휴게실에 가서 좀 쉬자.”그녀는 꾸짖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내뱉지 못했다. 정민아는 성깔이 보통이 아니고 난리를 칠 때면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싫어서 달래야만 했다. 어차피 휴게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모든 것은 파티가 끝난 후에 다시 얘기하면 된다.하
주소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고연우가 정민아를 위해 나섰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연우 도련님이 아내를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어떻게 된 거지?정선아도 울음을 멈추고 고연우를 바라보았고, 눈에는 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공 비서랑 같이 병원에 가서 상처를 처치해.”정선아의 상처는 무척 보기 끔찍했다. 험상궂게 찢어진 부분은 없었지만 손바닥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병원에 갈 필요 없어요. 유리에 긁혀서 상처가 좀 났을 뿐이니까 여기 의사가 처치하면 돼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한쪽 손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그녀는 불쌍한 척하며 동정을 얻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고연우는 공민찬에게 눈짓한 후 정민아를 끌고 가버렸다.남자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약간 뜨거웠다. 피부가 서로 닿자 화끈거리는 느낌이 모공을 통해, 혈관을 따라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정민아는 이런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싫은 기색을 내며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손을 뒤로 뺐다.고연우가 손에 힘을 주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내며 말했다.“조용히 따라와.”정민아는 그가 왜 자기를 위해 나서주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물었다.“왜 도와줘?”남자는 덤덤하게 그녀를 보더니 아무것도 아닌 듯 말했다.“네 이름이 아직 우리 고씨 집안 호적에 있어. 그 자리에 정민아가 고연우 아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나서지 않으면, 네가 거기 서서 우리 집안 체면을 깎아 먹게 내버려둬?”“네가 나를 싫어한다는 걸 누구나 다 알잖아. 그러니까 내가 고연우 아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어도 너의 체면은 깎이지 않아. 그 사람들은 그저 너를 안타깝게 생각할 뿐이지. 억지로 나같이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시골 처녀와 결혼했다고.”고연우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자, 정민아는 아예 그의 팔짱을 끼고 금실 좋은 부부처럼 딱 붙어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내가 정씨 가문의 아가씨이지만 사람들은 나를 배은
휴게실로 다가오던 정민아도 곧 주소월이 화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부잣집 도련님들이 한창 휴게실에 앉아 휴대폰으로 미러링해서 정민아가 속옷만 걸친 채 침대에 누워있는 선정적인 사진들을 보면서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있었다.정선아는 정민아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꼬기 시작했다.“언니, 어떻게 이런 걸로 엄마의 속을 뒤집을 수 있어? 이 사진들이 혹시라도 유포된다면 어떡해...”그녀는 곧장 입술을 깨물더니 태도를 180도 바꾸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저 사람들 진짜 너무했어! 어떻게 저런 몰카를 찍을 수 있지?”정민아는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손을 들어 정선아의 얼굴을 만지면서 애써 웃었다.“동생아, 이 상황이 재밌니? 그러면 내가 더 재밌는 걸 보여줄까?”주소월은 정민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민아야, 너 먼저 돌아가! 내가 저놈들한테 전부 지우라고 할게. 너는...”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최대한 자상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마! 내가 꼭 사진을 돌려 받아줄게.”정민아를 데리고 온 후, 주소월이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민아는 정선아의 머리채를 잡더리 휴게실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가버렸고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빨랐는지 그 누구도 미처 말리지 못했다.정선아는 정민아의 무력에 의해 문 앞 바닥에 넘어졌고 싸맨 상처가 터지면서 고통이 밀려와 짧은 비명을 질렀다.주소월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 휴게실 문을 두드렸고, 휴게실 소파에 앉아 한창 재밌게 떠들던 부잣집 도련님들도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그들은 방금 전까지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정민아가 자기들을 향해 걸어오자, 놀라움과 흥분을 금치 못했다.이때, 그중 한 남자가 옆이 트인 드레스 사이로 길고 균형 잡힌 정민아의 다리를 감상하다가 다소 건방진 태도로 말을 건넸다.“민아 씨가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연우 도련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