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가 차 옆에 거의 도착할 때쯤 정선아는 이를 갈면서도 다음 계획을 생각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쫓아갔고, 달래고 사과해서 다시 끌고 왔다.파티가 성황리에 진행되는 가운데, 흰색 셔츠에 검은색 양복바지를 입은 직원들이 쟁반을 들고 잘 차려입은 남녀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정민아의 등장으로 잠시 조용해졌던 현장 분위기는 금세 원래로 돌아갔다.“언니, 어머니는 저기 계셔. 가자.”그녀는 정민아를 끌고 빠르게 주소월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잇달아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내주면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저 여자가 왜 왔어?”“재수 없어. 진작에 알았으면 오지 말걸. 제발 좀 멀리 가. 몸에 그런 병이 있을지도 몰라.”“그만해.”옆에 있던 파트너가 열변을 토하는 여인을 팔꿈치로 쳤다.“아무리 그래도 연우 도련님 부인이야. 오늘 연우 도련님도 왔는데 혹시 들으면 큰일 나겠어.”여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코웃음을 쳤다.“이게 뭐 어때서? 주변에 연우 도련님이 저 여자를 싫어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들었다 해도 절대 도와주지 않을걸.”정선아는 이 말을 듣고 속이 얼마나 후련했는지 모른다. 주소월의 난처한 얼굴을 보니 더 기뻤다. 하지만 그녀는 싹싹하고 착한 딸 모습을 하고, 주소월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어머니, 화내지 마세요. 어떤 사람들은 함부로 지껄이기 좋아해요. 저 여자들과 똑같이 굴지 마세요.”주소월은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원래 정민아를 데리고 가서 친정 친척들에게 소개하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친척들이 개의치 않는다 해도 그녀는 데리고 갈 면목이 없다.“민아야,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먼저 저쪽 휴게실에 가서 좀 쉬자.”그녀는 꾸짖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내뱉지 못했다. 정민아는 성깔이 보통이 아니고 난리를 칠 때면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싫어서 달래야만 했다. 어차피 휴게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모든 것은 파티가 끝난 후에 다시 얘기하면 된다.하
주소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고연우가 정민아를 위해 나섰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연우 도련님이 아내를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어떻게 된 거지?정선아도 울음을 멈추고 고연우를 바라보았고, 눈에는 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공 비서랑 같이 병원에 가서 상처를 처치해.”정선아의 상처는 무척 보기 끔찍했다. 험상궂게 찢어진 부분은 없었지만 손바닥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병원에 갈 필요 없어요. 유리에 긁혀서 상처가 좀 났을 뿐이니까 여기 의사가 처치하면 돼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한쪽 손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그녀는 불쌍한 척하며 동정을 얻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고연우는 공민찬에게 눈짓한 후 정민아를 끌고 가버렸다.남자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약간 뜨거웠다. 피부가 서로 닿자 화끈거리는 느낌이 모공을 통해, 혈관을 따라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정민아는 이런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싫은 기색을 내며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손을 뒤로 뺐다.고연우가 손에 힘을 주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내며 말했다.“조용히 따라와.”정민아는 그가 왜 자기를 위해 나서주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물었다.“왜 도와줘?”남자는 덤덤하게 그녀를 보더니 아무것도 아닌 듯 말했다.“네 이름이 아직 우리 고씨 집안 호적에 있어. 그 자리에 정민아가 고연우 아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나서지 않으면, 네가 거기 서서 우리 집안 체면을 깎아 먹게 내버려둬?”“네가 나를 싫어한다는 걸 누구나 다 알잖아. 그러니까 내가 고연우 아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어도 너의 체면은 깎이지 않아. 그 사람들은 그저 너를 안타깝게 생각할 뿐이지. 억지로 나같이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시골 처녀와 결혼했다고.”고연우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자, 정민아는 아예 그의 팔짱을 끼고 금실 좋은 부부처럼 딱 붙어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내가 정씨 가문의 아가씨이지만 사람들은 나를 배은
휴게실로 다가오던 정민아도 곧 주소월이 화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부잣집 도련님들이 한창 휴게실에 앉아 휴대폰으로 미러링해서 정민아가 속옷만 걸친 채 침대에 누워있는 선정적인 사진들을 보면서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있었다.정선아는 정민아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꼬기 시작했다.“언니, 어떻게 이런 걸로 엄마의 속을 뒤집을 수 있어? 이 사진들이 혹시라도 유포된다면 어떡해...”그녀는 곧장 입술을 깨물더니 태도를 180도 바꾸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저 사람들 진짜 너무했어! 어떻게 저런 몰카를 찍을 수 있지?”정민아는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손을 들어 정선아의 얼굴을 만지면서 애써 웃었다.“동생아, 이 상황이 재밌니? 그러면 내가 더 재밌는 걸 보여줄까?”주소월은 정민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민아야, 너 먼저 돌아가! 내가 저놈들한테 전부 지우라고 할게. 너는...”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최대한 자상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마! 내가 꼭 사진을 돌려 받아줄게.”정민아를 데리고 온 후, 주소월이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민아는 정선아의 머리채를 잡더리 휴게실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가버렸고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빨랐는지 그 누구도 미처 말리지 못했다.정선아는 정민아의 무력에 의해 문 앞 바닥에 넘어졌고 싸맨 상처가 터지면서 고통이 밀려와 짧은 비명을 질렀다.주소월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 휴게실 문을 두드렸고, 휴게실 소파에 앉아 한창 재밌게 떠들던 부잣집 도련님들도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그들은 방금 전까지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정민아가 자기들을 향해 걸어오자, 놀라움과 흥분을 금치 못했다.이때, 그중 한 남자가 옆이 트인 드레스 사이로 길고 균형 잡힌 정민아의 다리를 감상하다가 다소 건방진 태도로 말을 건넸다.“민아 씨가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연우 도련
휴게실의 광경에 고연우의 눈이 커졌고 잠시 말문까지 막혔다.“정민아.”주소월도 눈앞의 광경에 놀라 다리에 힘이 빠졌고 하마터면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민아야...”얼굴에 피가 묻은 채, 한 손에 깨진 술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리모컨을 들고 있는 정민아의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멀리 튕겨 나간 정선아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고연우는 차가운 눈으로 정민아를 노려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당장 술병 내려놔.”그러나 정민아는 턱을 치켜들며 그에게 TV를 가리켰다.고연우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TV로 향했고 이내 정민아가 술병에 처참하게 맞아댄 남자와 침대에서 뒹구는 야한 사진을 보았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무덤덤하게 눈을 돌려 피가 흐르는 그녀의 팔을 보면서 말했다.“뒷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공 비서랑 병원에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그러나 정민아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빈정댔다.“연우 도련님은 정말 마음이 넓은 사람인가 봐. 내가 다른 남자랑 침대에서 뒹구는 사진을 보고도 너무 태연한 반응을 보이잖아.”고연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사진 속 사람이 네가 아니니까.”그 사진들은 정교한 보정 기술을 거쳤기에 정민아의 몸을 자세히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그러나 고연우가 단번에 합성 사진이라는 것을 알아채자, 정민아는 조금 의아했다.“사진 속의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거 어떻게 알았지?”고연우는 그녀의 뒤쪽 허리 아랫부분의 흉터가 갑자기 떠올라 입술을 오므리더니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만지작거렸다.곧이어 정민아는 소파에 앉아 겁에 질린 얼굴로 목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싸늘하게 물었다.“얘기해 봐, 이 사진들은 어떻게 된 거지?”그 남자는 순간 정민아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기를 더 심하게 찔러댈까 봐 두려워졌고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민아 씨, 먼저 이 술병부터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그러나 곧이어 사악한
말을 마친 사연희는 주소월의 반응을 신경 쓰지도 않고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고 모여있던 구경꾼들은 자발적으로 그녀와 정민아에게 길을 내줬다.정민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누군가를 찾았다.마침, 멀지 않은 곳의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서은혁은 그녀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고, 이내 그녀를 향해 눈을 지그시 깜박거리더니 안정통로로 들어갔다.사연희도 곧장 정민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뭘 봐? 누구 있어?”“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고연우와 공민찬도 휴게실에서 빠져나왔고 긴 다리를 이용해 몇 걸음 만에 그녀들을 따라잡았다.정민아는 두 남자가 계속 뒤따라오는 것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서 물었다.“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고연우가 말을 꺼내기 전에 공민찬이 먼저 다급하게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술을 드셔서 운전을 못 하시는데 제가 뒷수습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아시다시피 여기는 대리운전을 부르기도 힘들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두 분이 같이 가시면 안 될까요?”정민아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조리 있게 말했지만, 그녀는 눈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내가 저지른 일은 왜 공 비서가 뒷수습해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대표님을 살뜰히 챙겨서 먼저 들어가요.”공민찬은 갑자기 유리 조각에 목이 찔려 피를 철철 흘리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녀에게 한마디라도 잘못해서 심기를 건드리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아니에요, 목덜미에 피가 철철 흐르는 남자를 간단하게 치료라도 해주고 병원에 보내야 하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외부에 발설하지 못하도록 입막음도 해야 해서 제가 해결하는 게 빨라요.”고연우는 얼굴을 심하게 찡그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맞은 남자가 웬일로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빨리 보내달라고 애원하던데, 그의 친구들도 아직 어안이 벙벙해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지.”“이런 사소한 일은 제가 처
정민아는 사실 비아냥거리는 것도, 일부러 고연우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것도 아닌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뿐이었다.그녀가 한 말을 다시 한번 곰곰이 되새기던 고연우는 생각할수록 그 말들이 귀에 거슬렸을 뿐만 아니라 죽이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내려.”곧이어 그는 시간을 한번 체크하더니 무반응인 정민아에게 차갑게 말했다.“5초 줄 테니까 당장 내 차에서 내려! 그렇지 않으면, 내일 네 그 망할 가게가 문을 닫게 될 거야.”그러나 정민아는 협박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확실해?”“당장 꺼져!”정민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리자, 그는 차가운 얼굴로 조수석에서 내리더니 운전석에 올랐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정민아는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는 차를 보면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에 연락했다.“안녕하세요, 음주 운전을 신고하려고요. 검은색 벤틀리에 번호판은 XXX이고 방금 XX로를 벗어났어요.”신고를 마친 후, 그녀는 곧장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유유자적하게 주변 거리를 거닐었다.사연희의 집 주위에는 야시장이 있었고 각종 음식, 옷, 액세서리와 장난감을 파는 상인들과 손님들로 엄청나게 붐볐다.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정민아는 그중에서도 손님이 가장 많은 만둣가게에 들어가 만둣국 한 그릇을 주문했다.추운 겨울에 따뜻한 국물이 몸을 타고 들어가자, 온몸의 한기가 다 가시면서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둣국을 깨끗하게 비운 후, 택시를 잡아탔다.“아저씨, 신림동으로 가주세요.”신림동은 경인 시에서 부자 동네로 유명했고,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적은 동네인 관계로 십만 원을 더 내야만 했다.정민아는 택시 뒷좌석에 기대어 앉아 은행 카드 잔액을 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3월이면 그녀와 사연희가 가게 월세를 각각 3천만 원을 내야 했지만, 그녀의 계좌에는 3천2백만 원밖에 남지 않았고 2월에 나오는 월급과 배당금을 다 끌어모아도 나머지 8백만 원을 채우기에는
정민아는 송씨 아주머니의 애정 어린 배웅을 받으면서 집을 나섰고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고연우의 회사가 아닌 자기의 작업실로 향했다.30분 후, 차는 정민아의 사무실 부근에 도착했고 고연우는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공민찬에게 연락했다.“공 비서, 나 데리러 와.”공민찬은 이른 아침부터 정민아의 가게 근처로 데리러 오라는 말에 그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예상하고는 부랴부랴 그쪽으로 향했다.곧이어 그는 고연우가 정민아에게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운전 면허증도 취소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연우가 언짢은 표정을 짓자, 공민찬은 혹시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봉변을 당할까 봐 계속 눈치를 살폈고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곧이어 회의 내내 입에 담기도 어려운 심한 말을 들으면서 사죄하는 임원들을 보면서 공민찬은 다시 한번 자기의 판단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폭풍 같았던 회의가 끝난 후, 공민찬은 고연우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병원에 가서 사모님의 정신과 진료 기록을 받아왔는데, 혹시...”고연우는 서류를 뒤적이던 행동을 멈추더니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공 비서, 당신한테 주어진 업무가 적은 거야, 아니면 능력에 비해 월급을 높게 받는 게 양심에 찔린 거야? 왜 시키지도 않은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그는 혹시라도 월급이 깎일까 봐 진단서를 품에 꼭 안은 채 도망갈 준비를 했다.이때, 고연우가 그를 불러세웠다.“잠깐.”“저한테 따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가져와.”“네... 알겠습니다.”공민찬은 공손하게 진단서를 건넸고 고연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그러면 저는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18살부터 아팠다고?”“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경인 시의 모든 병원을 수소문해 봤는데 그 이전의 정신과 진단을 받은 기록은 없었습니다.”“발병 원인이 뭐래?”공민찬은
서은혁의 신분을 확인한 정민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서은혁은 코를 만지작거리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내가 우연이라고 말하면 믿을 건가요?”“당신은 허약한 몸 때문에 시골에 내려가서 산 게 아니라, 당신의 부모님께서 당신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어렸을 때 외국 고모의 집으로 보낸 거잖아요.”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변명도 하지 않고 자기의 거짓말을 빠르게 인정했다.“미안해요...”“정말 미안하다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고 혹시라도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모른척하고 지나가세요. 난 당신 누나를 제외하고 서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다 싫어요.”곧이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레스토랑 직원을 불렀다.“저기요, 이것들 포장해 주세요.”사실 서은혁은 정민아가 자기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죄책감은 아니더라고 최소한의 미안한 감정은 남아있을 거로 확신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졌다.정민아가 포장한 음식들을 들고 가게에 다시 돌아오자, 사현희와 백아영은 이미 퇴근하고 없었다. 그녀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컴퓨터를 켜고 미완성인 디자인 원고를 보다가 사색에 잠겼다.몇 년 전, 서현란은 두꺼운 영어 사전을 품에 안고 정민아를 향해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었다.“민아야, 너 알아? 나 사실 남동생이 있어. 물론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 살아서 크리스마스 때만 간간이 얼굴을 보지만 엄청나게 잘생겼어! 내가 나중에 너한테 정신으로 소개해 줄게, 난 두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거든. 네가 우리 집에 시집온다면 다들 널 공주님처럼 총애할 거야!”“근데 너보다 두 살 어려. 연하라도 상관없지? 괜찮지?”그러나 당시의 정민아는 남동생이 있다는 서현란의 말을 믿지 않았었다.그녀는 경인에 와서 사귄 첫 번째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인 서현란이 자기 때문에 곤란해질까 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항상 친한 척하지 않았었고 일부러 떨어져서 걸어 다녔었다.그러던 어느 해의 새해 전날, 골목을 지나던 정민아를 나이에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