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고 집 침대에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걸 알아채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며칠 동안 박태준이 잘못될까 봐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비몽사몽 상태인 그녀는 몸을 좌우로 뒤틀며 휴대폰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었다.이때 박용선이 굳은 얼굴로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죽었어.”강혜정은 박용선은 어두운 표정과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죽... 죽었다고?”박용선은 얼굴이 창백해진 강혜정을 보고 놀라 그녀의 손을 얼른 잡았다.“혜정아, 왜 그렇게 놀라?”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박용선의 소매를 꽉 움켜쥔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박용선은 그녀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다급하게 침대 옆 서랍을 열고 약을 찾았다.“여보, 여보, 진정해! 죽었으면 죽었지, 그걸로 너무 화내지 마!”그는 한 손으로 약을 찾고 다른 한 손으로 강혜정을 부축하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왕 씨 아주머니를 불렀다.“아줌마, 아줌마! 빨리 물 한 잔 따라줘요!”강혜정은 눈물까지 뚝뚝 떨구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주치의가 최고의 전문의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 태준이의 상태도 너무 심각하지 않다고 했는데 어떻게 수술에 실패할 수 있지? 내 휴대폰 어디 있어? 당장 은지한테 연락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야겠어!”“태준이의 수술이 실패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다음 주 월요일에 예정되어 있던 거 아니었어?”“당신이 아까 태준이가 잘못됐다고...”강혜정은 그제야 박용선이 말한 사람이 박태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그럼, 누가 죽었다는 거야?”“기도윤이 죽었대.”공예지의 사망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시작되었고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기도윤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강혜정은 이불을 젖히고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거실로 뛰쳐나가면서 왕 씨 아주머니를 급하게 불렀다.“아줌마, 아줌마! 내가 작년에 사놨
신은지는 화이트 하프 기장의 캐주얼 스웨터에 화이트 와이드 팬츠를 입고 팔에 코트를 걸친 채 크고 작은 트렁크들을 들고나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빈손으로 출국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예상외로 아무도 없었다.진유라는 그 광경에 박태준이 정말로 모든 기억을 잃은 후, 신은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닌지 궁금해서는 급하게 신은지한테로 뛰어가 손을 잡으면서 다급하게 물었다.“박태준은?”“그...”진유라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신은지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그녀와 더 멀어지게 되었다.당황한 얼굴로 신은지가 끌려간 방향으로 응시하자, 박태준이 한 손으로 신은지의 가는 허리를 꼭 끌어안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진유라를 노려보고 있었다.진유라도 똑같이 박태준을 노려보다가 아무 기억도 없는 그와 실랑이를 벌여도 의미 없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돌려 신은지에게 물었다.“은지야, 어떻게 된 거야? 태준 씨가 왜 날 노려봐?”진유라는 황당한 표정으로 박태준의 머리를 가리키며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동작을 취했다.신은지도 얼른 박태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제지했다.“태준아, 괜찮아. 여기는 내 제일 친한 친구 진유라야.”그러고 나서 그녀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이 손 좀 놔봐, 사람들이 우리 둘만 쳐다보잖아.”박태준은 그제야 신은지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손을 내리고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면서 말했다.“아무리 네 친구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 네 손을 잡는 건 용납 못 해! 넌 내 아내니까 오직 나만 네 손을 잡을 권리가 있어!”진유라와 곽동건은 180도 달라진 박태준의 태도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신은지도 치료를 받고 난 후, 박태준이 그녀를 향한 소유욕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고 있었기에 사태를 더 크게 키우지 않으려고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네 말이 다 맞아!”박태준은 그제야 환하게 웃으면서 투정 섞인 말투로 신은지에게 불쾌한 심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은지야,
진유라가 미리 신은지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네 사람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종업원이 그들을 각진 테이블로 안내했다.그녀는 박태준과 신은지가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종업원에게 테이블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원형 테이블로 바꿔줄 수 있나요?”종업원이 원형 테이블로 안내하자, 진유라는 입꼬리가 휘어질 정도로 웃으면서 신은지의 오른쪽에 앉았다.한참 후 그녀는 곽동건과 박태준이 공적이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신은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낮은 소리로 물었다.“태준 씨가 너한테 왜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거야? 난 사람이 갑자기 변해서 독이라도 타 먹인 줄 알았잖아!”“아마도 태준이가 수술을 마친 후 눈을 뜨고 본 첫 번째 사람이 나여서 그럴 거야. 게다가 회복하는 동안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나한테 너 의지하는 거 아닐까?”진유라는 턱을 치켜들어 박태준을 가리키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설마... 태준 씨가 널 엄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켁!”물을 마시던 신은지는 진유라의 터무니 없는 소리에 놀라 사레가 들렸고 연신 기침하느라고 얼굴까지 빨개졌다.박태준은 신은지의 기침 소리에 곽동건과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등을 두드리면서 진유라를 계속 노려보았다.“우리 은지한테 무슨 말을 했죠?”진유라는 사나운 표정을 따져 묻는 박태준에게 화를 내려는 순간 신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태준아, 유라랑 오래간만에 얘기하는 중이니까 끼어들지 마! 유라는 날 해칠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은 더욱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진유라는 신은지가 편을 들어주는 것에 치밀어 올랐던 화가 가라앉았고 눈시울까지 붉어져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은지야, 어떻게 네 남편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두 사람 당장 헤어져!”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진유라의 모습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고도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하지만 박태준도 이에 질세라 패기 넘치는
박태준은 신은지가 징그러운 곱창구이를 망설임 없이 먹던 장면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고 최대한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완곡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용기 내 한 말이었다.신은지도 곧 박태준이 자기의 이마, 콧등과 눈을 바라보면서도 입술을 피하는 것을 발견하고 서운함을 느끼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태준아, 이제 나 싫어?”“아니야.”박태준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신은지의 물음에 답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고 뒤이어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고 가까이 다가갔다.신은지의 몸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박태준은 무의식적으로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신은지는 이미 그의 얼굴을 잡을 채 까치발을 들고 키스하기 위해 부드러운 입술을 점점 가까이 들이밀고 있었다.박태준은 또다시 신은지가 곱창구이를 먹던 장면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키스를 피하려고 몸을 뒤로 젖혔다.신은지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실망과 섭섭함이 섞인 말투로 그에게 따졌다.“나 싫어하지 않는다면서!”“응...”“그럼, 내 키스 피하지 말고 똑바로 서 있어!”“...”신은지의 붉은 입술이 또다시 가까이 다가오자, 박태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그의 뇌리에 또 곱창구이가 스치면서 키스하고 싶던 마음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박태준은 몇 초 고민하다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은지야, 우리 먼저 돌아가서 양치질부터 하는 게 어때?”신은지는 이제 눈썹까지 축 늘어뜨리며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그동안 내 키스를 거부한 적이 한 번도 던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나에 대한 감정이 식은 게 분명해.”박태준이 수술을 하고 회복하던 어느 날, 너무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깬 신은지는 정오에 발코니의 소파에 앉아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박태준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신은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탐구하고 있었고 방금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 상태였던 그녀는 무의
강혜정은 신은지를 보자마자 굳어 있던 얼굴이 환하게 변햇고 양 팔까지 벌리면서 그녀를 환영했다.“은지야, 빨리 엄마한테 와!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설마 태준이 이 나쁜 자식이 또 네 속을 썩인 거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혜정은 매서운 눈빛으로 박태준을 노려보았다.“...”강혜정과 신은지는 친모녀처럼 서로 손을 잡고 마주보면서 웃었고 쉴새 없이 그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다정한 두 여자와는 달리 박용선과 박태준은 어색한 듯 한마디도 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박태준은 몇 번이나 손을 뻗어 신은지를 붙잡으려 했지만, 강혜정이 그의 손을 찰싹 때리면서 꾸짖었다.“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걸을 때마다 은지가 옆에서 손을 잡아줘야 해? 은지랑 할 말 많으니까 네 아버지 손이나 잡고 따라와.”“...”박태준은 강혜정의 말에 박용선을 힐끗 쳐다보았다.박용선은 옆으로 늘어뜨렸던 손을 바지 주머니에 자연스럽게 집어넣으면서 아무 말 없이 박태준의 옆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박태준도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아버지, 어머니! 나 설마 주워온 자식이에요?”그제야 조용히 걷고 있던 박용선이 입을 열었다.“넌 우리 집이 고아원인 줄 알아? 줍긴 뭘 주워! 그리고 만약 우리가 자식을 주웠다면 너같이 하루종일 애만 썩이는 아들 말고 말 잘 듣는 착한 애를 주웠겠지.”박태준은 박용선의 직언에 마음이 상했지만,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조용히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다음날 회사로 바로 복귀해야 했던 박태준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신은지와 말 한마디 하지도 못하고 박용선과 함께 위층 서재로 가서 그동안의 업무를 인수인계 받았다.물론 수술이 끝난 후 회복하는 중에도 간간히 통화로 업무얘기를 주고 받아 대체적인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통화로는 말 못한 많은 중요한 일들이 남아있었다.천재적인 사업능력을 갖고 있는 박태준은 박용선과의 통화 몇 번에 웬만한 회사 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
박태준은 나유성이 신은지에게 다정하게 휴지를 건네는 장면이 몹시 거슬렸다.게다가 그는 아직 나유성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몰랐지만, 얼굴만 보고도 자기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박태준은 자연스럽게 나유성과 신은지의 가운데 서면서 그녀의 옷에 묻은 붉은 얼룩을 보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은지야, 집에 갈아입을 옷 있어? 올라가서 갈아입자.”고개를 푹 숙인 채 옷에 묻은 얼룩을 닦고 있던 신은지는 박태준이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좋아.”나유성도 박태준을 차가운 얼굴로 바라보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강혜정은 신은지를 데리고 위층 옷방으로 향했고 거실에는 박태준, 나유성과 고연우가 남게 되었다.고연우가 박태준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태준아,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경인에 돌아오기 전, 신은지는 박태준에게 그의 주변 사람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는 고연우와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의 의형제 사이었지만, 이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그에게는 그저 낯선 사람에 불과했다.박태준은 자기를 여기저기 훑어보는 고연우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고연우는 박태준의 다리를 한번 차면서 말했다.“얘가 뭐라는 거야? 형이라고 불러야지.”“뭐라고?”고연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네가 내 동생이니까 당연히 날 형이라고 불어야지! 예전에는 날 형이라면서 깍듯이 모시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기억상실을 핑계 삼아 발뺌하려는 거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면서 패기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절대 그럴 일 없어! 당신이 내 동생이었으면 몰라도 내가 당신을 형이라고 불렀을 리가 없어! 딱 봐도 반듯한 얼굴에 싸움 한 번 못 해본 것 같은 도련님이 내 앞에서 무슨 형님 타령이야!”고연우를 화내기는커녕 웃는 듯 마는 듯하면서 박태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훑어보았다.“상처가 많은 사람이 형이라면 네
박태준은 그녀가 말머리를 돌리는 게 못마땅했다.“아까 소개할 때 나한테 하지 않은 말이 없어?”“없어.”나유성과 복잡하게 뒤엉킨 관계에 대해서는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가 지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그에게 알려서 두 사람의 형제애에 영향을 줄 필요가 없다.박태준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 나유성이라는 사람이 널 좋아해.”“...”신은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꼬집으며 뾰로통하게 말했다.“나유성과 말도 몇 마디 안 했는데, 말도 안 되는 상상하지 마.”“너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울분을 토해냈다.“너도 걔를 유성이라고 친근하고 부르고.”“너랑 유성이 절친이고,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도 살아계실 때 그 집안과 가깝게 지냈었어. 그러니 성까지 붙여서 이름을 부를 수 없잖아. 사람들이 나를 교양 없다고 욕할 거야.”“외할아버지와 어머니도 걔를 알아? 그 집안과도 사이가 좋았다고? 왜 전에는 말하지 않았어?”“...”“그럼, 나와 걔 중에 누구랑 먼저 만났어?”박태준이 또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자, 신은지는 급히 탁자 위의 보양탕을 들었다.“먼저 만났다고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 난 지금 네 아내야. 계속 다른 남자와 연관 지으면 앞으로 손님방에 가서 잘 거야.”“어머니가 몸에 좋다고 특별히 너를 위해 끓인 거야. 얼른 먹어.”박태준은 보양탕이 한 그릇밖에 없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너는 왜 없어?”신은지 때문에 강혜정에게 매를 맞았던 과거의 기억이 사라졌기에 그의 첫 반응은 엄마가 TV에 나오는 눈가림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아들을 편애한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신은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어머니가 특별히 너를 위해 끓인 거라고 하셨어. 빨리 먹어. 곧 식을 거야.”이건 아마 박태준의 몸에 맞추어 의사가 특별히 처방한 약선요리일 것이다. 방금 들고 올 때 은은한 약 냄새가 났다.강혜정이 평소에 잘해주기 때문에 신은지는 이걸 받지 못한 것을 대수롭지 않
신은지가 막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리더니 박태준이 손을 뻗어 그녀를 욕실로 끌어당겼다.수증기가 없는 욕실에 마주 서니 탈의한 박태준의 몸에 이리저리 얽혀 있는 흉터가 한눈에 보였다.이전보다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생생한 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신은지는 폐창고에서 억지로 봤던 그 동영상이 생각나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학대를 당하면서도 고집스럽게 기민욱에게 순종하지 않던 박태준의 모습이 떠오른다.이 흉터들을 수없이 보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그의 모습을 수없이 떠올렸어도, 신은지는 매번 바늘에 쿡쿡 찔린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그래서 그녀는 슬쩍 보고 이내 시선을 돌렸다. 계속 보면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박태준이 의심할 것 같았다.의사는 그의 기억이 천천히 회복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가 이 대목을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하지만 박태준은 신은지의 이 행동을 오해했다. 그는 입술을 오므린 채 속상하고 억울한 눈빛을 지었다.“너도 내 몸에 있는 흉터들이 싫어?”이 흉터들은 은지가 아내라는 것을 알기 전에 생긴 것이다. 부부라면 서로 사랑할 것이다. 그래서 단 한 번도 그녀가 싫어할 것이라는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고연우의 귀띔도 있고, 그녀가 얼핏 보고 재빨리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고 이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신은지가 의아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무슨 허튼소리 하는 거야?”“너 방금 내 몸을 힐끗 보고 무슨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1초도 멈추지 않고 시선을 돌렸잖아.”“...”박태준의 이런 반응이 어이없었던 신은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분명 마음 아파했는데, 그의 눈에는 싫어하는 것으로 보였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욕실 안은 서로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30초를 기다렸는데도 그녀가 대답이 없자 박태준이 조급해했다.“왜 말이 없어?”“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그는 이전에 이 흉터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샤워한 후 목욕 수건만 두르고 그녀의 앞에서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