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지가 앉아 있는 창가 쪽 테이블에 도착한 박태준은 주저하지 않고 신은지 옆자리에 앉았다.박태준을 뒤따라 온 나유성은 죽일 듯이 박태준을 노려보며 어머니 옆에 앉았다. “이모, 안녕하세요.” 박태준은 나유성 어머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나유성 어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아는 동생이랑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구나, 너희끼리 맛있게 먹으렴.” “……”나유성 어머니는 배를 만지며 말했다. “나이 들면 소화가 잘 안돼서 말이야… 고기는 젊은 사람들이 먹어야지.”잠시 후, 나유성 어머니가 떠나자 세 사람만 남았다. 분위기는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박태준은 신은지 옆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양식 별로 안 좋아해, 우리 한식 먹으러 가자.”아침에 케이크 한 조각만 먹어 배가 고픈 신은지는 박태준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양식 안 좋아하면서 왜 왔어?”방금 전 박태준은 일부러 나유성 어머니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모가 부르셨잖아. 어른이 부르는데 안 오면 안 되지.” “그럼 한식은 너 혼자 먹으러 가.” 신은지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네가 스테이크를 먹고 싶으면 내가 같이 먹어줄게.”“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억지 아니야.” 박태준은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잘라먹으며 말했다. 나유성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은지는 지금까지 나유성에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혹시 나유성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항상 온화한 태도를 유지했다. 신은지는 박태준에게 신경질적이었지만 그 속에 애교가 섞여 있었다. 나유성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고 답답했다. 특히 신은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나유성이다. 만약 그 당시 나유성이 주저하지 않고 신은지를 도와줬더라면 오늘 신은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나유성일 것이다.한때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하
“어제는 네가 임신 안정기였기 때문에 안에다 안 했어.” 즉, 박태준은 경험이 부족했던 것이다. 3년 동안 여자와 관계를 하지 않은 박태준은 어젯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참지 못하고… “임신 안정기도 100% 안전할 수는 없어. 박태준,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해?” 신은지는 박태준을 째려보며 말했다. “내가 동성친구는 아니잖아?” 박태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너 지금 비꼬는 거야? 유성이가 네 칭찬하니까 진짜인 줄 알고 헛소리만 하네.” 나유성이 박태준을 칭찬한 적이 있었나? 박태준과 나유성은 만났다 하면 눈에 불을 켰다. 두 사람이 멱살 잡고 싸우지 않으면 다행인데, 나유성이 박태준을 칭찬했다니?”“나유성이 내 칭찬을 했다고?”“유성이가 너 잘생기고 여자 복도 넘친다고…”“다들 나유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만 하니까 욕도 못 하겠네.” 잠시 후, 박태준은 차에서 내려 약국으로 향했다.“혹시 사후 피임약 있습니까?”박태준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번화를 물어보려고 한 어린 약국 직원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있어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72시간 안에만 사용하면 모두 효과 있어요.” 박태준은 포장지에 있는 설명서를 비즈니스 계약서를 보는 것보다 더욱 자세하게 읽어보고 말했다.“뭐가 다릅니까?”약국 직원은 다른 점에 대해 설명해 줬다. “부작용도 있습니까?”“……” 직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태준은 피임약 하나 사는데 30분을 넘게 직원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었다. 그 사이 다른 직원은 벌써 손님을 4~5명이나 받았다. 직원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차라리 박태준이 빨리 약을 사서 가길 바랐다.“사후 피임약은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관계 전에 피임을 잘 해야죠. 사후 피임약은 정말 부득이한 경우에만 복용하는 거예요.” 직원은 박태준에게 말했다. 박태준은 설명서에 부작용이 가장 적고 가장 비싼 약을 고르고 말했다. “콘돔 있습니까?”“네.” 직원은 계산대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콘돔은
다음날. 신은지가 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한 동료가 신은지를 붙잡고 말했다. “은지 씨, 얘기 들었어? 백 선생님께서 죄를 인정하셔서 다음 달에 판결이래.” “백진희가 죄를 인정했다고?”신은지는 백진희가 강태만을 찾아가서 난리를 피우길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백진희가 죄를 인정하다니, 보아하니 강 씨 집안 친분에 따라 편을 드는 듯했다. “백 선생님이 왜 그러셨을까? 퇴직을 눈앞에 두고 명예를 잃은 거지.” 신은지는 웃으며 말했다. “누가 알겠어? 아마 나이가 있어서 그냥 다 포기한 거 아닐까?” 신은지는 백진희가 죄를 인정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강이연이 만만한 상대였다면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지는 강태민이 자신을 찾아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신은지 씨, 혹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습니까?”깔끔한 캐주얼 차림의 강태민은 복잡한 표정으로 신은지에게 말했다. 신은지는 지난번에 강태민을 만났을 때보다 머릿속이 더욱 복잡했다. 지난번 강태민은 강이연의 둘째 큰아버지이자 신은지의 엄마를 죽인 용의자였다.하지만 오늘은... 신은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자 강태민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후.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괜찮으시면 이 근처 카페 가서 이야기해요.” 잠시 후, 두 사람은 고급스러운 카페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룸 안에 자리를 잡았다.신은지는 밀크티, 강태민은 레몬차를 주문했다. 신은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신은지의 핸드폰에는 카톡이 여러 개 와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신은지는 말했다. “이연이가 어려서 철이 없어요. 제가 이연이한테 남포로 돌아가서 과거를 회상하라고 했습니다. 이연이가 남포 가기 전에 은지 씨에게 직접 사과할 겁니다.” 강태민은 말했다. “사과는 필요 없어요. 강이연 씨 사과는 아무나 받을 수 없죠.” 신은지는 강태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말했다. “정말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진실을 밝히세요. 죄를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것
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신은지를 향해 돌진했다. 전화를 받고 있던 신은지가 차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신은지를 향해 돌진하던 차는 어딘가 부딪혀 유리 파편들이 신은지에게 날아와 몸에 박혔다. 이때, 신은지는 깨진 유리창 너머로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신은지는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현장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미치광이 같은 운전자는 신은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신은지는 등 뒤에서 누군가 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틀거리며 몇 걸음 내딛던 신은지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펑’차는 신은지를 향해 돌진했다. 바닥에 쓰러진 신은지는 팔꿈치와 무릎에 피가 흘렀다. 하지만 아픈 와중에서 정신을 바짝 차렸다. 잠시 후, 정신이 든 신은지는 주변의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빨리 119에 신고해요! 피가 너무 많이 나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마침 이때, 한 인플루언서가 사고 현장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 지금 동성로에서 참혹한 사고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운전자는 분명히 피해자에게 고의로 돌진했습니다. 브레이크 등이 전혀 켜지지 않은 것을 똑똑히 봤습니다. 이것은 분명 원한에 의한 살해가 아니면 사회에 대한 원한입니다.” 신은지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핸드폰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방금 전 차가 돌진할 때 누군가 신은지를 밀쳐냈었다. 때문에 신은지는 다행히도 차에 부딪히지 않았다. 하지만 넘어질 때 깨진 유리 파편에 팔과 다리가 긁혀 상처가 생겼다. 신은지는 생명의 은인이 누군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은 보이지 않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은지를 살려준 사람은 여자였다. 옷차림과 화장한 것으로 봤을 때 신은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게다가 몇 백만 원 상당의 명품 가방을 들고 있었던 것을 보면 부자인 것 같았다. 여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신은
그야말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우정이다. 인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각박한 현실에서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이 있다니,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기자는 카메라를 신은지에게 돌렸다. 그리고 마이크를 건네며 말했다. “신은지 씨, 강이연 씨가 온몸을 던져 본인을 구해주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때, 신은지와 눈이 마주친 강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강이연은 신은지가 자신이 고의로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아도 상관없었다. 강이연은 신은지가 화를 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화를 내는 신은지를 보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대중들의 반응을 기대했다. 이때, 신은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감동했습니다. 저랑 이연이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으로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목숨 바쳐 저를 구해줄 거라고 생각해도 못했어요.” 신은지는 강이연의 연기에 맞장구쳤다. ‘강이연, 누가 이기는지 한 번 해보자.’ 신은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강이연은 신은지의 손을 잡고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지야, 내가 잘못했어. 네가 민호 오빠 많이 좋아했잖아. 그때 민호 오빠도 결혼 생각이 있어서 너한테 서프라이즈로 소개해 주려고 했었어. 내가 분명히 오빠한테 네 연락처도 주고, 방이름도 알려줬는데 왜 다른 방으로 가서 오해를 받았는지 모르겠어.” 강이연은 잘못을 반성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신은지를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다. 설마 강이연은 강민호를 구해주려는 걸까? 하지만 강이연의 말은 모두 헛소리이기 때문에 신은지는 떳떳했다. 신은지는 단지 강민호의 팬이라고 했을 뿐, 이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 신은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박태준을 쳐다봤다. 박태준은 표정은 ‘빨리 해명해, 네가 강민호를 언제 좋아했다고 그래?’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 하지만 신은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은지 씨가 불러서 강민호 씨가 그 방에서 나온 건가요?” 기자는 말했
강이연은 이불 아래 핸드폰을 숨겨놓고 동영상 촬영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 강이연은 박태준과 신은지가 말하는 틈을 타 이불 속에 핸드폰을 숨겼다. 그리고 카메라만 살짝 보이도록 빼놓았다. 카메라 겉에 하얀색 천으로 덮었기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은지는 동영상 녹화를 일시정지 시켰다. 그리고 강이연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말했다. “나보고 여론의 힘을 빌려 경인에 남게 해달라는 거야? 강이연,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경인이 내 것도 아닌데 내가 너를 억지로 쫓아낼 수 있겠어?”“……” 할 말을 잃은 강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이연의 강태민은 어릴 때부터 강이연을 매우 아꼈다. 만약 박태준이 아니었다면 강태민은 절대 강이연을 남포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강이연은 목숨을 바쳐 신은지를 구했다. 때문에 여론의 힘을 빌리면 강태민은 분명 화가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목적을 달성한 강이연은 더 이상 성취의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신은지는 깁스를 한 강이연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 “그냥 말로 하면 되지 기어코 다리까지 부러뜨릴 필요 없지 않아?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신으지는 전예은과 대학시절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 강이연보다 더욱 안 좋은 사이였다. “정말 고마워.” 강이연은 신은지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애써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신은지는 진심을 다해서 말했다. “아, 맞다. 다음에는 디테일에 신경 좀 써. 사고 현장에서는 피를 많이 흘렸는데 단지 다리 깁스만 하는 건 너무 허술하지 않아?”강이연은 붉어진 두 눈으로 박태준을 쳐다보고 울먹이며 말했다.“박 대표님…”강이연의 롤 모델은 임수연이다. 남자들은 섹시한 외모의 강이연의 애교 한방이면 넘어갔다. 박태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강이연에게 대답하지 않고 신은지에게 말했다.“언제 갈 거야? 나 배고파.” 신은지도 배가 고팠다. 신은지는 강 씨 집안과 상극인지 의심이 됐다. 매번 강 씨 집안사람을 만날 때마다 좋은 일이 없었다.
강이연은 비서와 눈이 마주치자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거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강이연은 깁스 한 다리를 어루만졌다.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눈에 독기가 가득한 강이연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신은지 때문에 다리가 부러졌으니 하나라도 얻는 게 있어야 한다. “그렇게 박태준이랑 결혼하고 싶습니까?” 비서는 어두운 눈빛으로 강이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내가 설마 너랑 결혼하고 싶겠어? 너 여기서 당장 나가. 그렇지 않으면 네가 아빠 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빠한테 다 말해버릴 거야.” “강이연 미친 거 아니야? 네가 사고를 낸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사고를 낸 운전기사를 찾아가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자기가 네 목숨을 구해줬으니 너는 무조건 자기 병수발을 들어줘야 한다는 거야? 병수발 안 들어주면 너는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고?”지금 이 시각, 신은지는 진유라 가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신은지는 턱을 괴고 투덜대는 진유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유라야, 그렇게 짜증 내면 피곤하지 않아?”“내가 짜증을 얼마나 냈다고 그래? 나 정말 아침에 병원 쫓아가서 강이연 뺨을 때리고 싶었다니까. 강이연이 한 짓은 엄연한 사이버 폭력이야.” 오늘 아침, 불쌍하게 병상에 누워 있는 강이연의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사진 속 강이연은 피범벅인 옷을 입고 불쌍하게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병원의 희미한 조명 때문에 강이연 몸에 묻은 피와 옷을 더욱 처량해 보였다. 댓글은 전부 신은지는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으로 가득했다. 또한 사람들은 사진과 함께 첨부된 동영상을 보고 사고 현장을 생생하게 봤다. “참 각박한 세상이야. 남을 돕지 말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야. 다치면 우리 가족들만 손해야.”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무슨 예술가야? 내가 다 창피해 죽겠네.” 신은지는 계속해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 진유라에게
진선호는 신은지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면서도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괜찮아요. 작은 상처일 뿐이에요. 이틀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가슴에 붙여놓은 거즈가 피로 흠뻑 젖었는데 상처라도 남았어요?” 신은지가 허리를 굽혀 진선호가 몸에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을 들추려 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막으며 말했다. "그렇게 막 걷어 올리면 어떻게 해요. 내가 바지를 입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 진성호의 손바닥은 뜨거웠고 정상 체온이 아니었다. 신은지는 자신의 손을 그의 이마에 얹었다. “열이 있네요. 다치고 나서 약을 언제 바꿨어요?” 꼭대기 층은 원래 많이 더운 데다가 에어컨 없이 선풍기 하나만 돌아가고 있었다. 다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이곳에 고작 몇 분 밖에 있지 않았던 신은지도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진선호는 몸이 매우 허약했고 기력이 없어 지난 이틀 내내 반쯤 혼수상태였다. 만약 휴대전화 벨 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여전히 혼수상태였을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몇 마디 했을 뿐인데 그의 목소리는 힘이 빠지는 듯했고 눈꺼풀은 이미 내려앉아 금방 잠에 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 안 됐어요. 3, 4일? 일주일 정도요.” 신은지는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나서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거즈에 베인 핏자국 크기로 보아 진선호의 부상은 가볍지 않을 것 같았다. 신은지는 옆에 있던 티셔츠를 들어 그에게 던졌다. “입어요. 병원에 데려다 줄게요.” 티셔츠가 진선호의 얼굴을 덮었지만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병원, 안 가요.” 화가 난 신은지는 그의 얼굴에서 티셔츠를 치우고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이렇게 화상을 입어서 상처가 다 곪았을 거예요.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도 넘는 다 큰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굴면 좋아요?” 신은지는 숨을 들이마시고 등을 돌렸다. ”옷 입어요.” 진선호는 뜨거운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잡으며 약하지만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지 씨, 난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