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호는 신은지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면서도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괜찮아요. 작은 상처일 뿐이에요. 이틀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가슴에 붙여놓은 거즈가 피로 흠뻑 젖었는데 상처라도 남았어요?” 신은지가 허리를 굽혀 진선호가 몸에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을 들추려 하자 그가 그녀의 손을 막으며 말했다. "그렇게 막 걷어 올리면 어떻게 해요. 내가 바지를 입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 진성호의 손바닥은 뜨거웠고 정상 체온이 아니었다. 신은지는 자신의 손을 그의 이마에 얹었다. “열이 있네요. 다치고 나서 약을 언제 바꿨어요?” 꼭대기 층은 원래 많이 더운 데다가 에어컨 없이 선풍기 하나만 돌아가고 있었다. 다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이곳에 고작 몇 분 밖에 있지 않았던 신은지도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진선호는 몸이 매우 허약했고 기력이 없어 지난 이틀 내내 반쯤 혼수상태였다. 만약 휴대전화 벨 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여전히 혼수상태였을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몇 마디 했을 뿐인데 그의 목소리는 힘이 빠지는 듯했고 눈꺼풀은 이미 내려앉아 금방 잠에 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 안 됐어요. 3, 4일? 일주일 정도요.” 신은지는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나서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거즈에 베인 핏자국 크기로 보아 진선호의 부상은 가볍지 않을 것 같았다. 신은지는 옆에 있던 티셔츠를 들어 그에게 던졌다. “입어요. 병원에 데려다 줄게요.” 티셔츠가 진선호의 얼굴을 덮었지만 그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병원, 안 가요.” 화가 난 신은지는 그의 얼굴에서 티셔츠를 치우고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이렇게 화상을 입어서 상처가 다 곪았을 거예요.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도 넘는 다 큰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굴면 좋아요?” 신은지는 숨을 들이마시고 등을 돌렸다. ”옷 입어요.” 진선호는 뜨거운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잡으며 약하지만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지 씨, 난
“잠시만요.”신은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고, 진선호는 그녀가 이 상황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다. 진선호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신은지가 1초라도 더 늦게 말하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에서 죽을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진선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은지 씨, 당신은 이 감정에 자신이 없는 거죠?” 끝까지 갈 자신이 없어서 말할 때 그 소속감이 소유감이 부족했다. 신은지는 안전벨트를 풀며 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사람을 불러서 부축해 달라고 할까요?” 진선호는 기침을 두어 번 하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건들거리며 말했다. ”동네방네 내가 여기 왔다고 스피커로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신은지는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반쯤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입 놀릴 힘은 남아있나 봐요.” 신은지는 허리를 굽혀 진선호를 부축해 차에서 내리게 해줬다. "잠깐 소파에 앉아 있어요. 내가 가서 방을 치워줄게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으니 1층에서 지내요.” 몸이 아파서 그런 것인지 신체적인 박태준과 신은지의 화해 소식에 충격이 컸는지 진선호의 정신상태는 오락가락하는 듯했다. 진선호는 한참 뒤에 대답했다. "좋아요.”"당신의 상처를 다시 꿰매야 하는데, 내가 박씨 가문 주치의에게 오라고 할까요? 그 의사는 입이 무거워요.” 상류층 집안의 주치의가 되려면 입이 무거워야 한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치료받으면 어때요?” 신은지의 제안에 진선호는 웃음이 나왔지만 힘이 없어 입꼬리가 아래로 늘어졌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싶어요.” 침대 시트를 깔고 있던 신은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상처에 물을 안 묻히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서 있을 수 있겠어요?” 진선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연스럽게 손을 땅에 늘어뜨리고 혀를 내밀며 말했다. “은지 씨.…” 진선호의 말투에 장난
신은지는 믿지 않았지만 박태준의 말에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다쳤어?” 박태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회사에서 쉬지 않고 일하고 돌아왔는데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에게 밥을 먹여주는 걸 봤어. 네 생각에는 많이 다치지 않았을 것 같아?” 신은지는 다른 남자를 이용해 남자친구를 질투하게 만들려는 일 따위에 취미가 없다. 어찌 되었든 신은지는 박태준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일로 서로 오해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신은지가 서둘러 설명했다. "의사가 올 때 마취약을 안 가져와서 진선호 씨 손에 난 상처만 봐주고 갔어. 그래서 손에 힘이 없어서…” 진선호는 그녀의 설명에 덧붙여 말했다. "맞아요. 손을 들지도 못해요.” 박태준이 진선호를 바라보았다. 몇 초간의 짧은 침묵이 흐른 후, 그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30분 줄 테니 우리 집에서 나가요.” 박태준은 말을 마치고 신은지를 끌고 떠났다. 진선호는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쨌든 서로 아는 사이에 이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아요. 어쩔 수 없이 은지 씨에게 밥을 먹여달라고 한 거예요. 이틀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요.” 진선호의 목소리는 거칠고 건들건들하며 했지만 신은지는 그의 눈에서 아련하고 쓸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선호의 웃음도 마치 물속에 닿기만 해도 부서지는 거품 같았다. 신은지가 방에서 끌려 나가자 그녀의 향기도 점차 사라졌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진선호의 미간은 차가움과 피로감 무력감이 선명하게 보였다. 잠시 후, 진선호는 쓸쓸하고 공허한 감정에서 벗어나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힐끗 보며 가볍게 웃고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정말 그냥 날 방치했네. 배고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앞에 우람하고 건장한 남자가 나타났다."박 사장님이 밥을 먹여주라고 하셨어요.” …… 박태준은 곧장 신은지를 끌고 2층
"펑!”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진선호가 머무는 방에서 났다. 박태준의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신은지는 그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방금 의사가 떠나면서 만약 진선호의 열이 계속 내리지 않으면 반드시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박태준은 손을 뻗어 신은지를 잡으려 했지만 너무 빨리 달려서 박태준이 손을 들었을 때 이미 그의 손에 닿지 않았다. 박태준의 매서운 눈빛은 그녀를 따라갔고,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진선호를 강제로 끌어내고 싶었지만 모두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참아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박태준을 보며 신은지는 자신이 평생 그를 걱정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태준은 차갑게 웃으며 그녀를 따라갔다. 진선호의 방 문은 열려있었다. 진선호는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기대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눈은 반쯤 감은 채 나른하게 앉아있었다. 음식이 바닥에 쏟아지고 그릇이 깨져 있었다. 키가 큰 경호원이 침대 옆에 서서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진선호를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진선호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흘끗 방문 앞에 서 있는 박태준을 바라보았다. "좀 세심하게 간호해 줄 사람을 보내서 밥을 먹게 해 줘요. 하마터면 목구멍에 구멍 뚫릴 뻔했어요.” 진선호는 입을 벌리며 말했다. "아, 못 믿겠으면 봐요.” "허!" 박태준은 비웃으며 말했다. "직접 찔러 죽일 수가 없어서 정말 아쉽네요.” “그래도 손님인데, 손님 대접이 조금 소홀한 것 아니에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죠. 마음에 안 들면 지금 떠나도 돼요.” 진선호가 말했다. "박 사장님 요즘 기분이 별로인가 봐요? 말이 곱게 안 나오네요.” "허...…”박태준은 어이없는 것 이상으로 분노와 미움이 거의 몸에서 뿜어 나올 지경이었다. 박태준과 신은지의 관계는 최근 가까스로 가까워졌고, 정당한 관계와 이미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게다가 오늘은 특별히 일찍 돌아오기까지 했다. 원래는 지금쯤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
신은지는 말을 잘 듣는 이상한 재주가 있다. 신은지 그녀는 도망칠 뿐만 아니라 문도 닫았다. 안방 침대 협탁에 콘돔 하나가 넣어져 있었다. 신은지는 오늘도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을 것이다. 박태준 그 기술은 아주 형편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신은지의 머릿속에는 고통이라는 한 가지 느낌만 남아 있었다. 토끼보다 더 빨리 달리는 여인을 보며 박태준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진선호는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은지 씨 의사표현이 이해가 안 돼요? 안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요. 박태준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질투하는 거예요? 은지는 지금 내 여자 친구예요. 설마 이 수갑으로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선호의 기분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네, 맞아요. 좀 질투가 나서요. 상처받은 내 마음과 건강을 위해서, 오늘 밤은 여기서 자요.” 박태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꿈도 꾸지 말아요.”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진영웅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사람들 중 열쇠를 열 수 있은 사람을 찾아 연락하라고 했다. "은지 씨 고등학교 시절 알고 싶지 않아요?" 진선호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그때도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한마디로 첫사랑?” 그 말에 박태준은 동작을 멈췄다. ”말해요.”…… 신은지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침대 협탁 위의 휴대전화의 진동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협탁 앞으로 걸어가서,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보았다. 강이연이었다. 신은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고 휴대전화 화면을 보니 강이연은 이미 10여 통의 전화를 했었다. 신은지가 샤워하는 데 10분 정도 걸렸으니 1분에 한 통씩 전화를 해 댄 것이다. 부재중 목록을 확인한 신은지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 할 때 전화가 또 왔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계속 전화가 올 것 같았다. 사람을 구하려 했던 열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요 며칠 동안 기자들이 가끔 병실에 가서 강이연을
병원. 신은지는 올라가기 전에 아래층에서 도시락을 샀다. 기자는 아직 병실에서 떠나지 않았다. 신은지가 들어오자 강이연은 그녀가 혼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시선을 돌렸다. “은지, 이렇게 늦었는데 나를 보러 온 거야? 왜 너 혼자 왔어? 위험하게 이렇게 외진 곳에 혼자 오면 어떻게 해?” 만약 이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그들이 정말 친한 친구인 줄 오해할 것이다. "아니야. 그는 아래 주차장에 있어." 신은지가 봉투에서 하얀 테이크아웃 박스를 꺼냈는데, 아래층 허름한 식당에서 사 온 것이었다. "배고프다면서? 저녁 사 왔어 자, 먹여줄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밥 한 숟가락을 떠서 강이연 입 앞에 내밀었다. 보기에 요리는 신선하지도 만들어 놓은 지 얼마나 됐는지도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게 생겼다. 강이연은 신은지가 숟가락을 자신의 입에 넣을까 봐 입을 오므렸다. 강이연은 어려서부터 스타 셰프가 가장 신선한 재료로 만든 요리를 몇 백만 원이 넘는 식기에 담아 먹었다. 그런 강이연에게 신은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신은지는 몸을 앞으로 숙여 강이연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먹어? 기자들이 다 보고 있어.” "...…” "강태민 어르신께서 최근에 남포시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하지 않았어?” 강이연은 이를 악물고 먹기 싫은 것을 먹으며 말했다. "넌 정말 무자비해.” 눅눅한 기름 냄새가 강이연의 혀끝을 자극하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음식을 모두 뱉었다. 이런 쓰레기도 사람이 먹는 거야? 신은지는 분명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박태준이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올라와야 할 시간이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남자의 본능이다.특히 강이연처럼 예쁜 여자라면 남자들이 더욱 좋아해야 했다. 강이연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애쓰며 박태준을 유혹하는데 그가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강이연은 자신의 입 안 벽을 깨물어 눈물샘을 자극했다. 강이연이 고개를
돌아가는 길에 신은지는 혼자 길가의 포장마차에 앉아 꼬치를 먹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어쨌든 어릴 때부터 그녀가 알고 있던 아버지는 신진하였다. 엄마가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친아버지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생각이 달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은지는 이미 그 정서적인 욕구가 필요한 나이가 지났다. 하지만 강이연의 말 때문인지 신은지의 머릿속에는 왠지 모를 강태민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솔직히 신은지는 자신이 강태민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은지는 자신의 엄마를 많이 닮았고, 주변 사람들은 항상 모녀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었다. 푸르슴 한 하늘에 한 줄기 빛이 번쩍이더니, 이어서 세찬 천둥소리가 났다. 신은지는 어렸을 때 천둥소리를 무서워했다. 천둥소리가 들리면 엄마 앞에서 신은지는 더욱 많이 놀랐다. 그녀가 놀랄 때마다 심은하는 신은지 옆에서 달래주고 맛있는 것도 주며 주의를 돌렸지만 심은하가 죽고 신진하의 새 집에서 천둥소리에 놀라도 신은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는 점점 천둥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포장마차 안의 옆 테이블 사람들이 일어나 나가기 시작했고, 상인들도 물건을 옮기느라 바빴다. 여름의 비는 굵고 세찼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며 천둥 번개가 쳐서 하늘에 빛을 내뿜었다. 길 건너편에서 차를 세운 신은지는 비가 그친 뒤 차로 이동할 생각을 하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동영상을 찍으려고 했지만 화면을 몇 번이나 터치해도 반응이 없었다. 휴대전화 충전기는 차 안에 있었고 앉아 있는 자리 주변에도 콘센트가 없었지만 신은지는 가게에서 충전기를 빌리기 귀찮았다.여름 소나기는 빠르게 지나가는 편인데 오늘따라 비가 유난히 길게 오는 것 같았다. 휴대전화가 없어서 그런지 지루해서 그런지 정말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신은지는 비를 맞으며 달려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차 한 대가 포장마차 앞에 멈추어 섰다. 차가 익숙하다고
좁은 자동차 안에 신은지는 축축이 젖은 박태준에게 안겨 있어 차 안은 온통 비 냄새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공기 중에는 설명할 수 없는 끈적함과 심장이 멎는 듯한 모호함이 솟아올랐고, 차 안의 온도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박태준은 신은지의 허리를 감고 있던 자신의 손을 살짝 풀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신은지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입술 사이를 가로막았다. "비가 그쳤어.” “……” "집에는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는 부상자가 있어. 게다가 넌 나오기 전에 진선호 씨랑 한바탕 싸웠고. 이런 상황에 내일 아침에 집에 들어가면 좀 걱정되지 않겠어?” 신은지의 말은 아주 보잘것없는 핑계였다. 집에는 경호원이 있었고 급하면 주치의를 불러 그를 돌볼 수도 그리고 병원에 데리고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박태준은 신은지를 노려보며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서운 표정으로 고집스럽게 아무 말하지 않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좋아.” 주택 주차장에 주차된 차 안은 고요했다. 신은지는 차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지만 박태준은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며 박태준의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가늘게 뜬 어두운 눈빛을 희미하게 가렸다. 차 밖에서 문을 잡고 서 있던 신은지는 말했다. "안 내려?” "은지야...” 얇은 입술을 벌리고 연기를 내뿜은 박태준은 말했다. "먼저 들어가.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갔다. 박태준은 고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휴대전화를 보고 있던 고연우가 전화를 바로 받았다. "여자가 왜 너랑 자는 걸 그렇게 거부할까?” "사랑하지 않아서." 고연우은 박태준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매섭게 정곡을 찔렀다. "……" 박태준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자가 네 여자친구가 되겠다고 약속했으면?” "그럼 기술이 좋지 않은 거야.” 박태준은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