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눈꺼풀을 힘겹게 올렸다. 입술 사이와 코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거실은 불을 켜지 않은 상태였고 창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만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어두운 불빛이 연기에 가려져 시야가 흐릿했다.그의 목젖이 움직이고 짧은소리가 흘러나왔다.“보내.”전화를 끊은 진영웅은 바로 기사 내용을 전송했다.암흑 속에서 휴대폰을 바라보니 눈이 불편했다. 하지만 박태준은 불을 켜는 것조차 귀찮아 그대로 보기로 했다. 스마트한 가구들이어서 카톡을 사용하여 어플 하나만 다시 열면 불을 켤 수 있는데 말이다.신은지가 전예은을 때리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사진 속에는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린 장면만 있을 뿐 뒤에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기사는 전예은을 옹호하며 신은지를 비판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중에 그들이 호텔 방을 잡은 내용도 들어있었는데 그녀가 몸으로 사모님의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적혀있었다.단어 선택이 비교적 완곡햇지만, 박태준은 이 기사가 그를 시험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기사는 더욱 자극적이었을 것이다.진영웅의 전화가 걸려 왔다.“대표님, 이대로 내보낼까요?”박태준은 생각에 잠겼다. 짧은 머리 아래 자리 잡은 그의 오관은 휴대폰의 불빛에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녀가 몸을 팔아 이 결혼을 해서 사모님이 되었다고 생각해?”진영웅: “...”박태준의 태도를 종잡을 수 없었던 진영웅은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비록 그도 예전에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고 옆에서 2년을 봐온 그이기에 박태준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소경이 아니라면 누구나 박태준이 사모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하지만 요즘 박태준에게서 언뜻 보이는 참회의 눈빛은 사실이 전혀 겉보기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박태준은 침묵하고 있는 진영웅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쉰 목소리에는 씁쓸한 웃음이 담겨있었다.“결혼을 강요한 사람은 나야.”진영웅: “...”그는 박태준이 한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그
신은지의 물음에 보드 가드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저희가 받은 지령은 보호하는 거예요.”보호?신은지는 박태준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필요 없어요. 어디에서 왔으면 거기로 돌아가요.”그러는 사이 그녀는 이웃이 문을 열고 이쪽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하지만 보디가드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감정이 없는 로봇 같았다.“우리가 필요 없다면 대표님이 대신 오시겠다고 했어요.”신은지: “...”식욕이 확 떨어졌다.그녀는 하는 수없이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박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그녀는 머리끝까지 치민 화를 쏟아냈다.“박태준, 밖에 있는 사람을 당장 치워.”“그들이 너를 보호해야 해.”상대는 금방 잠에서 깬 듯이 잠긴 목소리였다.신은지는 입술을 깨물었다.“필요 없어.”“오늘 기사가 떠서 너의 얼굴을 모두가 알아볼 거야. 그중에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도 있어. 네가 있는 거기는 안전하지 않아.”박태준이 이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것인데 신은지를 더 자극하고 말았다.“그때 나와 호텔에서 나오던 모습을 찍힌 사진을 매체에 보낼 때는 이런 좋은 마음이 아니었잖아?”그때 후폭풍으로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하면서도 빚쟁이의 독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보디가드는 물론 그녀를 위해 말을 해주는 이 하나 없었다.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잠겨있던 그의 목소리는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누가 말했어?”신은지가 비꼬며 말했다.“당연히 너의 보물단지가 아닐까?”어젯밤에 그렇게 많은 눈들이 지켜봤던 일도 아주 꽁꽁 잘 숨겨둔 이유가 그 보물단지 때문이지 않은가.그렇지 않으면 달랑 박태준이 건넨 초대장을 들고 경매에 참석한 전예은이 네티즌들에 의해 제삼자란 딱지를 평생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전화 저편에서 냉소가 흘러나왔다.잠시 말이 없던 박태준이 입을 열었다.“보디가드에 관한 일은 의논할 것도 없어. 내가 거기로 옮겨
어젯밤에 그는 병원을 찾아 상처를 치료받았다. 하지만 신은지에게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마스크를 벗어봐요. 제가 한번 상처를 봐야겠어요.”신은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여기서요? 다른 곳에서 보면 안 될까요?”뒤에 두 명의 보디가드는 박태준의 사람이었다. 그들이 본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본 거나 다름없다.“옷을 벗으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밍기적거려요? 호텔 방이라도 잡아요?”“안 될 것도 없죠...”신은지는 그의 마스크를 벗겼다. 그녀가 행동으로 옮겼을 때 이미 반응한 그가 거부하려 손을 들었지만, 다시 내려놓았다.그러다 만약 힘 조절을 실패해서 그녀에게 상처 입을 것 같았다.마스크를 벗은 그의 얼굴에 상처가 드러났다. 하루밤 사이 더 충격적으로 변해 있었다.입술을 깨문 신은지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병원으로 가죠.”이건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상이었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혹시라도 보이지 않는 내상도 있으면...만약 지체하여 다른 문제가 생긴다면 후회해도 늦어버리게 된다.진선호는 내키지 않았다.“밥 먹으려는 게 아니었어요? 난 지금 아무렇지도...”그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은지의 불만스런 눈빛에 다시 이내 말을 바꿨다.“식사를 먼저하고 가는 게 어때요? 이미 예약까지 했어요.”우아한 환경의 레스토랑에 앉아 지난날을 돌아보고 미래를 말하려 하지 그 누가 사람도 많고 큰 소리로 외쳐야 간신히 소통할 수 있는, 의자마저도 서로 쟁취해야 하는 병원 급진에 가고 싶겠는가.신은지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밥이 목숨보다 더 중요해요?”그녀는 진선호의 손에 들려진 차키를 아무렇게나 낚아챘다.“조수석으로 가요.”방금 그가 걸어올 때 발이 불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 몸으로 어떻게 운전한 거예요? 아무 데나 들이받으면 어쩌려고요?”진선호는 그녀를 졸졸 따라 걸으며 그녀의 훈계를 듣고 있었다.신은지가 운전석에 먼저 올라탔다. 그가 조수석의 문을 열려는데 두 보디가드도 다가와
박태준은 신은지를 바라봤다. 신은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품에 기대 있긴 했지만 시선은 진선호에게 꽂혀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진선호밖에 없었다. 박태준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떨어져 허리에 놓였다. 그는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시선을 다시 돌리려 했다. 박태준의 표정이 어두웠다. “가자.” 강태산은 재빨리 차를 두 사람 가까이에 세웠다. 손만 뻗으면 차 문을 열수 있는 거리였다. “아니...” 신은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태준은 그녀를 강제로 차에 태웠다. 진선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손을 뻗어 말리고 싶었으나 보디가드들이 그를 제지했다. 결국 눈 깜짝 할 사이에 신은지는 박태준의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차 안에는 강태산뿐만 아니라 진영웅도 있었다. 진선호의 목소리가 차 시동소리에 옅게 들려왔다. “박태준, 그 사람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기만 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진선호도 자신이 이 일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관계가 나쁘다 하더라도 혹은 두 사람이 이미 이혼을 생각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부부 사이 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리했다. 진선호는 그저 신은지가 원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만 끼어들 자격이 있었다.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더 잘 알았다. 방금 박태준의 눈에는 소유욕이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박태준이 이성을 잃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진선호도 같은 남자로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선호가 상상하고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태준은 그녀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지금 이 시각 두 사람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차 안에는 그 누구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고 숨 쉬는 소리마저 거의 안 들렸다. 신은지가 고개를 돌렸다. 박태준 이 눈을 감은 채 차 시트의 등을 기대고 자는척 하고 있었다. 얼굴에 그림자가 비칠 정도로 긴 속눈썹, 꽉 다문 입술, 각진 얼굴이 그의 차가움을 더 드러냈다. 진영웅이 백미로 이 상황을 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어느새 입술이 바로 그녀의 눈앞에 놓였다. 신은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뭐 하는 거야.”가깝게 붙어선 박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유성 쪽에 희망이 없으니 이제는 진선호로 갈아탄 거야?”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고 약간의 웃음기도 서려있었다. 그의 숨결이 느껴지자 신은지는 그와 조금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뒤쪽은 막다른 벽이었기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약 바르겠다며, 저쪽으로 가서 누워.”신은지가 소파 쪽을 가리키며 박태준을 밀어냈다. 지금 이대로는 너무 위험했다. 비록 전예은이 가고 나서 그가 다른 여자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어떤 일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박태준이 작게 웃더니 신은지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내가 묻잖아.”신은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신은지의 이성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몸부림을 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꽉 다문 입술은 박태준에게 어떠한 기회도 주지 않았다. 박태준은 신은지가 자신을 얼마나 거부하고 있는지, 그녀가 지금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자신이 손 하나 까딱 하는 것도 싫은 눈치였다. 조금 빨개진 눈과 코, 홍조를 띠는 볼 그리고 흰 피부까지 어느 것 하나 박태준을 유혹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사실 그녀가 거부한다 하더라도 박태준이라면 충분히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은지 역시 그걸 느끼고 있었다. 신은 지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경멸이 가득했지만 박태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녀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가만히 있어.”신은지가 이를 악 물었다.“만약 네가 내 입장이라면 가만히 있을 거야?”박태준이 웃었다.“그럴 수도.”이 짐승 같은 남자랑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은지야, 집에 있어?”나유성이었다. 신은지가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기뻐했다. 그녀는 박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박태준은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았
박태준이 신은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신은지는 여전히 박태준을 매섭게 노려 보고 있었고 그녀의 몸에는 박태준이 거칠게 입을 맞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만약 그녀의 손에 칼이라도 들려 있었다면 바로 박태준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박태준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나유성의 손을 바라봤다. 방금 나유성은 지문으로 도어락을 열고 들어왔다. 나유상은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이었기에 박태준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읽어 낼 수 있었다.“미안, 그때 급해서 미처 지우지 못했어.”이건 확실히 나유성의 잘못이었기에 그는 얼른 도어락에서 자신의 지문을 삭제했다. 박태준은 들어와서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현관에 서서 당장이라도 나유성을 보낼 기세로 말했다.“이렇게 늦었는데 무슨 일이야?”“지나가던 길에 경비실에서 어젯밤에 일이 좀 있었다고 하는 걸 듣고 한번 올라와봤어.”사실은 오늘 아침 경비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어젯밤에 일을 싹 알려줬었다.“어딜 가던 길인데 하필 여기를 지나치게 되서."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유성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나유성이 말한 곳은 마침 이곳을 지나야 하는 게 맞았다. 신은지가 문 밖을 가리키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나가.”“신은지.”허태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경고를 하는 뜻임은 분명했다. 신은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새 그녀의 감정도 많이 격앙된 상태였다. 이제 그녀는 이 지옥 같은 혼인 생활을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는 것조차 아무렇지 않았다.“나가. 당장 꺼져.”박태준이 차가운 표정으로 신은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신은지가 미쳐 피하지 못했지만 나유성이 중간에서 박태준의 손을 막았다.“나가서 한 잔 할까?”“나유성?”박태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너 선 넘었어.”나유성은 천성이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그만큼 기세에서도 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너네 부부 사이의 일을 끼고 싶은 건 아니지만 오늘 밤 내가 여기에 남는다면 관
신은지의 차량이 멈추자 꽃집 알바생이 시선을 돌렸다. 알바생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비교해 보는 것 같았다. 이 차량이 맞다는 확신이 서자 알바생이 신 은지 쪽으로 다가왔다. 작업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이 출근했을 때부터 알바생이 저 큰 꽃다발을 들고 있었으니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신은지 차는 이미 작업실 주차장에 도착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인데 차를 돌릴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알바생이 걸어오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신 사모님 되십니까?” 차 문이 닫혀 있음에도 알바생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신은지는 차에서 내렸다.“박 사장님이 선물한 꽃다발입니다. 영수증에 서명해주세요.”알바생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동기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적은 데다가 일도 지루한 작업실에서 이 꽃다발은 그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들도 모두 어제 기사를 다 본 상태였다. 심지어 평소에 기사를 잘 보지 않는 동기마저 소문을 듣고 기사를 봤다. 평소에 조용하기만 하던 신은지가 재경그룹의 사모님 일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재경그룹이면 엄청난 재벌이다. 그들은 자신의 주위에 이런 훌륭한 인맥이 생길 줄은 몰랐다. 신은지는 사인을 하지 않았다. 꽃다발이 매우 컸기에 알바생은 한 손으로 들기 버거워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영수증에 사인을 받으려고 했다. 신은지는 동기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싫어 얼른 사인을 하고 말했다.“이건 버려 주세요.”알바생은 꽃다발을 그대로 차에 내려놓고는 인사를 하고 얼른 도망갔다. 손님이 주문한 꽃을 버릴 수는 없었다. 신은지는 동기들의 시선을 피해 다시 차에 올라타서 전화를 걸었다.“박태준, 이게 뭐 하는 짓이야?”박태준은 꽃집 알바생의 문자를 받았기에 꽃이 이미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근데 신은지의 화난 듯한 말투를 듣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안 기뻐?”“기쁘기는 무슨.”신은지는 거친 말이 튀여 나오
신은지와 같이 나온 동기들은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은지는 이제 그들의 시선에 익숙해질 지경이었다.“은지 씨, 귀 뒤에 키스 자국이 아직도 있네.”동기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짓궂게 말했다. 신은지는 연애도 한번 못 해 보고 바로 결혼을 했다. 그러니 아무리 담담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얼른 두 손으로 귀를 가렸다.“가리기는, 다 봤는데.”신은지는 오늘 아침 거울을 보며 그 자국들을 하나하나 화장품으로 가렸다. 게다가 목폴라까지 입고 목도리도 두르고 평소와 다르게 머리까지 풀었는데 그래도 들킬 줄은 몰랐다. 동기들은 모두 박태준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순식간에 작업실 문 앞에는 신 은지와 박태준밖에 남지 않았다.“타.”“자기를 너무 잘 모르는 거 아니야?”신은지는 이제 화도 안 났다.“어떤 여자가 자기를 덮치려고 했던 남자 차에 올라타?”박태준은 그녀가 아직도 어젯밤에 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미안해, 참을 수 없었어.”사과하는 것 같았으나 성의가 하나도 없는 말이었다. 신은지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서서 가려는데 박태준이 그녀를 불렀다.“어머니 유물은 안 챙길 거야?”신은지가 고개를 돌렸다. 차에 에어컨을 틀어 놓은 상태였기에 박태준은 셔츠만 입은 채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 하지만 그의 섹시한 겉모습은 그 비겁한 본성을 가릴 수 없었다“우리 엄마 유물이 왜 너한테 있어?”전에 신진하가 택배로 보내 준다고 해서 주소까지 다 보내 줬었는데 그 후로는 소식이 없었다. 유물이 남아 있는지를 떠나서 그가 정말로 보내줄 거라는 기대도 안 했기 때문에 신은지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었다. 비록 박태준이 좋은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일로 그녀를 속일 사람은 아니었다. 박태준이 마음만 먹으면 그 물건들을 찾아오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었기에 이런 쉬운 일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일단 타.”신은지는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