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서는 유선우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다시 빼앗아온 뒤, 계속하여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건 그 사람들 업무가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일을 더 시킬 필요는 없어요... 시간이 지나다 보면 결국 불평불만이 나오기 마련이고요. 그리고 유선우 씨 전에는 이렇게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여전히 담담한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선우는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한참 뒤 싱긋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그래? 그럼 나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데?”조은서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서류를 내려놓으며 답했다.“사람이 아니었죠.”유선우는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애정이 어린 키스였지만 조은서는 여전히 그의 스킨쉽을 거절했다.“이안이가 봐요.”유선우도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는 그윽한 눈으로 조은서를 바라보았다.“방금 정희 아주머님께서 나한테 만두 끓여주셨어.”조명 아래 비친 그녀의 작은 얼굴에는 맑은 빛깔이 감돌았고 조은서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더욱 담담한 말투로 그의 말에 답했다.“오후에 아주머니께서 만두를 많이 빚으셨더라고요. 집에 있는 정원사와 경비원들도 모두 드셨는걸요.”그러자 유선우는 조은서의 귀를 살짝 깨물며 밉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 약 올리려고 작정했지?”그들의 관계는 이미 아이만 낳기 위한 계약관계를 훨씬 넘어버렸다. 물론 조은서도 과도하게 친밀해진 그들의 관계를 알아차렸다...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유선우는 내심 서운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맹세했다.“걱정하지 마.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떠나도 돼. 붙잡지 않을게.”말을 마치고 유선우는 이안이와 놀아주기 위해 자리를 떴다.이안이는 핑크 곰 인형을 단정하게 바닥에 놓아두고 종이와 펜을 가져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아직 4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이지만 제법 잘 그렸다.그러나 유선우는 그 곰 인형을 가져와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갑자기
서로를 부둥켜안은 두 사람은 감격에 겨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오빠!”조은서는 조은혁을 꽉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어쩌다가 먼저 나오게 된 거야?”그러자 옆에 있던 심정희가 눈물을 훔치며 한마디 거들었다.“네 생일이라고 먼저 나왔잖니.”하지만 조은서는 유선우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조은혁도 예정보다 먼저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고 싶었다...하여 유선우는 이를 위해 일찍이 진이 정원을 떠났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조은혁도 마찬가지이다.심정희는 오랜만에 돌아온 조은혁을 위해 특별히 소금을 챙겨왔다.과거, 조은혁은 이런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심정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소금을 가져와 어깨너머에 조금 뿌렸다... 소금을 다 뿌리고 심정희는 조은혁의 손을 꼭 쥐여주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네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나도 이제야 네 아버지를 볼 면목이 있겠다.”조은혁은 그저 묵묵히 심정희를 끌어안으며 그녀를 위로해주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심정희는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물을 닦았다.“먼저 네 아버지 보러 가자. 그동안 네가 무척 보고 싶었을 거야.”아버지 소리에 조은혁의 마음도 축축이 젖어갔다.바로 그때, 이안이가 집안에서 뛰쳐나와 귀여운 목소리로 삼촌을 불렀다.조은혁은 곧바로 허리를 숙여 이안이를 안아 들었다.조그마한 아이는 조은서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고 6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며 마음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 어느새 무정한 냉혈인간이 되어버린 조은혁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따뜻하고 부드럽기 그지없었다.이안이는 하늘에서 조씨 가문에게 내려준 가장 큰 위로이다.그러나 이안이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조은혁 역시 진즉 알고 있었다. 그는 이안이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매우 아꼈다....조은혁은 단독으로 묘원을 찾아갔다.금빛 찬란한 햇빛이 그의 몸에 흩뿌려졌지만 조
밤이 오자 조은서는 조은혁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조은혁은 조은서가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지내기로 했고 그곳은 부지가 매우 좋고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하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계책일 뿐이다.밤이 어둑어둑 깊어지고 그들의 차는 아파트 입구에 멈춰 섰다. 조은혁은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그는 여동생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6년 동안 떨어져 지내고 조은서가 엄마가 됐다 할지라도 그들의 감정은 줄곧 변하지 않았다. 조은혁의 마음속 조은서는 여전히 오빠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어린 소녀이다.“오빠.”조은서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지금은 그들 남매 두 사람만이 한 공간에 있기에 유선우와 박연준을 포함한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다.조은혁은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그해, 아버지께서 조금 거친 방법으로 회사를 인수하시며 간접적으로 상대방이 파산하게 되었어. 그 사람은 빚을 가득 짊어지고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그 사람의 자녀는 길거리를 떠돌게 되었지... 아버지께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특별히 그 남매를 지원해주기로 했고 후에 남매 중 오빠가 출세하며 국내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어.”조은서는 잠깐 멈칫하더니 곧바로 그 사람의 정체를 눈치챘다.“박연준!”그러자 조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고 입에 문 담배를 다시 꺼내려는데 손가락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역사는 항상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고 그와 조은서도 이제 서로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박연준, 네가 이겼다.’한참 뒤, 그는 고개를 돌려 조은서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비록 그동안 계속 감옥 안에 갇혀있었지만 난 단 한 번도 진실을 포기한 적이 없어. 며칠 전, 유선우가 믿을 만한 소식을 들고 왔는데... 당시 아버지 옆에서 일하던 비서가 사실 박연준의 비서래.”조은서는 시트에 기대앉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도무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조씨 가문을 무너뜨린 사람이 박연준이
조은서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조용히 차 안에 남아 오늘 밤 접한 소식들을 천천히 곱씹었다.깊은 밤, 이제 집에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그때, 차 앞에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오늘 밤 조은서와 조은혁이 토론하던 대상... 박연준이었다.그는 깊은 밤에도 여전히 단정한 옷차림에 신사적인 모습이다.올백 머리에 영국식 양복 차림.박연준은 차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조은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는데 현재의 그는 아마 모든 위장을 벗어던진 후일 것이다... 현재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조은서는 박연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이윽고 그녀는 갑자기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박연준은 흰 스포츠카가 자신을 향해 맹렬히 다가오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전혀 피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은 복잡함의 극치에 달아올랐다….최근 몇 년간 그의 몸부림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그는 조은서를 사랑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사실 그는 몇 번이나 조씨 가문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지만 차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조은서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좋아해서는 안 될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그는 가장 저급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조승철이 죽고 그는 원래 조은서의 곁에서 사라져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이윽고 귀가 째지는 듯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차 안에 앉아있는 조은서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핸들을 꽉 잡고 있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조은서는 여전히 차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속에는 이제 낯선 감정만 남아있었다.그 순간, 조은서는 박연준의 사랑을 눈치챘다.하지만 박연준에 대한 조은서의 마음은 오직 원망만이 남아버렸다...*조은서가 진이 정원에 돌아올 땐 이미 밤 열 시가 다 되어갔다.심정희는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조은서에
유선우는 그녀를 종일 기다렸지만 결국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마음속으로는 내심 실망했지만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조은서의 생일이니까. 이윽고 그는 조은서에게 드레스룸에 가족, 친구들과 지인이 준 많은 선물이 놓여 있다고 알려주었다...조은서도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샤워하고 열어볼게요.”그러자 유선우는 갑자기 조은서의 몸을 끌어당기더니 그녀의 옷을 사이에 두고 유혹하기 시작했다.“같이 씻자.”하지만 조은서는 가볍게 거절했다.“안돼요. 생리 왔어요.”유선우는 그윽한 눈빛으로 조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그녀를 가로 안아 욕실로 향했다. 물론 생리가 올 때 강박적으로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다... 게다가 오늘 생일이라 그저 조은서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유선우가 잘할수록 조은서는 점점 더 아쉬워졌다.하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어떤 사람들은 한번 놓치면 평생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샤워를 마치고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자 조은서는 드레스룸에 쌓인 선물을 열어보기로 했다. 일부 선물은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성진그룹 사모님이 주신 명주 손수건이다.마지막까지 선물을 풀자 제왕록의 비취 팔찌가 들어있었다.이토록 귀중한 물품은 B시 전체를 뒤져본다고 해도 몇 가지 없기에 조은서는 선물을 보자마자 곧바로 선물을 보낸 사람을 알아챘다.함은숙이 보낸 것이다.조은서는 갑작스러운 인물에 잠깐 멈칫했고 뒤이어 드레스룸에 들어온 유선우 역시 팔찌를 발견했다.그 역시 팔찌를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곧바로 누가 보내준 것인지 눈치채고 물건을 아무 데나 던져놓은 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갖고 싶지 않으면 내일 다시 돌려보낼게.”조은서는 고개를 쳐들고 물끄러미 유선우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별장에 갇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유선우만을 기다리던 그 날 밤을 떠올렸다... 유선우가 찾아갔을 땐 이미 보름이나 지난 뒤였고 하염없이 그를 기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유선우는 본가에 다녀왔다.경비원은 문을 열어다가 뜻밖의 인물에 잠깐 넋을 잃고 말았다. 왜냐하면, 유선우는 이미 3년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검은색 벤틀리 차가 주차장에 천천히 멈춰 섰다.유선우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은 뒤, 주위의 모든 것을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오래된 냉랭함과 함께 낡은 주택은 이미 생기를 잃어버렸고 주택 주위에는 무겁고 살기가 가득한 기운이 맴돌았다... 어르신께서는 생전 분명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가장 좋아하셨는데 말이다.별장 안의 고용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이윽고 유선우는 홀에 들어섰고 그의 구두가 깨끗한 마룻바닥을 밟으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는데 커다란 홀 안에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가 더욱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작은 법당 안에는 어르신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어르신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유선우는 미련이 가득한 듯 손가락으로 할머니의 사진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속삭였다.“아버지께서 돌아오셨어요.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니 이제 마음 놓으세요.”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사진 속의 찬란한 웃음뿐 세상을 뜬 사람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어르신의 사진을 보노라니 마음 한편이 쓰라려 왔다.그는 어르신께 향을 피우며 이안이가 100살까지 장수할 수 있도록 보우해달라고 부탁했다.그러고 나서 찬란하면서도 환히 빛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축축이 젖어 든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할머니께서도 제 선택을 존중하겠죠?”“선우야!”그때, 함은숙이 다급히 2층에서 뛰어 내려왔다.그녀는 계단 위에 서서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자기 아들이 정말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유선우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떨려왔다.유선우도 고개를 들어 함은숙을 바라보았지만, 함은숙의 감격에 비해 그의 눈빛은 낯선 사람을 쳐다보는 것 마냥 냉담하기 그지없었다.그는 자단 상자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앞으로
...YS 병원.이안이는 병원에 실려 온 뒤, 급히 AB형 혈액을 수혈해야 했는데 오늘 아침 도시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하며 AB형 혈액은행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유선우와 조은서 모두 AB형이 아니었기에 지금 당장 차를 호출한다 해도 족히 1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각, 이안이는 이미 어지럼증이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언제든지 쇼크가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응급상황이기에 유선우는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당장 헬기 띄워!”“제가 AB형입니다.”말이 끝나자마자 입구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는데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허민우였다.허민우 의사와 유 대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기에 그가 나타난 순간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들은 감히 말을 꺼낼 수도 없었고 쉽사리 동의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유선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다들 빨리 피 뽑을 준비해.”허민우는 항상 해마다 건강검진을 받았기에 매우 건강하여 그 자리에서 500mL의 피를 추출했다. 그리고 추출 후 간호사는 곧바로 이안이에게 가져가 수혈했다...500mL의 피가 오늘따라 더욱 진귀하게 느껴졌다.주삿바늘이 뽑히고 허민우는 옷소매를 다시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며 묵묵히 유선우를 바라보았다...그건 유선우도 마찬가지였다.한참 뒤, 허민우가 먼저 가볍게 말을 꺼냈다.“얘기 좀 나누시죠.”복도 끝 흡연 구역.오랫동안 서로를 미워하며 지내다가 유선우는 허민우는 오늘에야 나란히 서서 평화롭게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허민우는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았는데 이번만큼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공기 중에 피어오르고 그의 목소리 속에는 씁쓸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당신은 말할 것도 없고 저마저도 유문호 씨가 제 아버지라고 생각해왔어요.”그러자 유선우의 주먹에 점점 힘이 실렸다.허민우는 계속하여 씁쓸하게 말을 이어갔다.“어릴 적 매주 우리를 보러 왔고 올 때마다 장난감을 사 들고 오셨었는데. 게다가 절 엄청나게 귀여워하며
VIP 병실은 벽면이 모두 연분홍으로 되어있어 매우 아늑하다.이안이는 여전히 매우 허약했고 흰 베개에 몸을 기대어 누워있더니 처음으로 걱정되었는지 조은서에게 물었다.“엄마, 저 혹시 죽어요?”조은서는 마음속으로 너무 속상했지만 아이 앞에서는 애써 감정을 참아내고 미소까지 지으며 이안이를 달래주었다.“당연히 아니지.”여전히 어지럼증이 심한 이안이는 엄마에게 몸을 기대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 저는 왜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못 가요? 엄마, 만약 엄마 아빠가 남동생 한 명 더 낳으면 걔는 꼭 건강해야 해요. 그리고 남동생은 조금 더 예쁘게 낳아야 해요. 그러면 이안이가 없어도 엄마, 아빠한테는 예쁜 아이가 남아있잖아요.”이 말들은 대체 어디에서 배워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조은서는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울먹이는 목소리로 급히 심정희에게 이안이를 맡겨두고 복도로 뛰쳐나왔다...그녀는 진정이 필요했다. 아니면 정말 당장이라도 미쳐버릴지 모른다.문 앞에 서 있던 유선우가 조은서를 가로막았고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갔다... 따뜻한 햇볕, 따뜻한 물, 하지만 이것들로 조은서의 마음속 두려움을 안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선우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안이 병세가 또 악화했어요. 이안이... 아마 그 아이 기다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유선우는 조은서의 어깨를 꼭 쥐고는 낮은 목소리로 진정하라고 타일렀다.하지만 조은서는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조금 전 의사의 선포는 그녀의 앞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의 문을 닫아버린 것과 같은데 대체 어떻게 진정하란 말인가. 게다가 그 어린 아이가 자기 입으로 자신이 죽는 것 아니냐고 묻는데 대체 어떻게...사실 아이들도 다 알고 있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어깨에 기대 그의 어깨를 죽일 듯이 꽉 물었다.“선우 씨, 이안이가 사실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다고요...”유선우는 계속하여 조은서를 꽉 끌어안아 주며 그녀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