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범의 눈엔 남자의 부드러움과 아버지의 자애로움이 담겨 있었다.조진범은 진안영이 그를 위해 낳은 아이를 좋아했다.그는 자신이 직접 아이와 진안영을 보살피고 함께 지내고 싶었다.그는 이렇까지 가족을 그리워한적이 없었다.어쩌면 나이가 든 원인일지도.진안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조진범은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안영아, 나 너무 후회해."진안영은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따듯한 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어 마치 얇은 유리막을 덮어놓은 듯 반짝거렸다.그녀는 잔잔히 웃음을 지었다."그때 먼저 이혼을 말한 게 후회가 되나요? 당신이 아니어도 내가 이혼하자고 말했을 거예요. 우리 결혼은 이미 더이상 되돌릴 수 없었어요... 시간 문제였어요."조진범은 고개를 숙여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아현은 이미 눈을 떴다.태어난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20cm 외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빠의 냄새는 마음에 들었는지 한 손가락으로 조진범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환하게 웃었다.아현의 두 손과 발이 허공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조진범은 마음이 녹아내려 아현에게 더 다가갔다.한참후 조진범이 진안영에게 물었다."언제 임신한 걸 알았어?"진안영은 생각에 잠겼다가 사실을 털어놓았다."이혼 협의서에 싸인할 때 알았어요. 그날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임신한 게 확실했죠."싸인하던 날...조진범은 받아들일 수 없어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왜 나한테 알리지 않은 거지? 말했다면 우리는 어쩌면..."진안영은 그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다."어쩌면 이혼하지 않아도 됐다고요? 하지만 진범 씨, 그때 나는 정말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었어요. 아이가 생겼다고 해도 당신을 떠났을 거라고요. 나도 멍청하지는 않아요. 당신에게서 100억 위자료와 집까지 받았어요. 이 정도면 아이를 키우기엔 충분해요."조진범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는 화가 나서 진안영의 말을 맞받아쳤다."나 몰래 아이를 낳으려 한거지?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한동안 침묵이 길어졌다.조진범은 차열쇠를 내려놓고 아이의 엉덩이를 씻어내고 연고를 발라준 후 살짝 두드렸다.그리고 진안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2시간이면 돼."진안영은 더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밖엔 여전히 하늘에 구멍이 뚤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그녀는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조심하라고 그에게 당부의 인사를 보냈다.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조진범은 듣지 못한듯 싶었다.그는 검은색 바람막이를 걸쳤다.잠시후 진안영은 창가에서 그가 건물을 나와 차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았다.진안영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건물 아래서 조진범이 차문을 열려던 때 그는 진안영의 눈빛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빗속에서 그의 바람막이가 모두 젖었다.하지만 조진범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그는 빗속에서 진안영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진안영이 그를 기다린다는 점은 확실했다...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조진범은 마음이 울렁거렸다.그는 차문을 열고 들어갔다.조진범은 직접 운전하여 천기저귀를 찾으러 다니지 않고 이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고급 의류 공장에게 연락하여 최고급 순면으로 아이의 천기저귀를 만들게 했다.이 비서는 전화를 받고 어안이 벙벙해 속으로 생각했다.'지금 새벽 시간이고 밖엔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어디서 기저귀를 만든단 말인가!'하지만 어떤 어려움도 이 비서를 막을 순 없었다.1시간 후, 조진범은 공장으로 직접 운전하여 아현의 기저귀 생산 진도를 감시했다.기저귀 제작이 끝나고 한 고급 세탁점에 연락하여 아무런 화학물질도 남지 않게 깨끗하여 세탁을 했다.일을 마치고 조진범은 천기저귀 2박스를 차 트렁크에 싣고 병원으로 갈 준비를 했다.이 비서는 우산을 들고 눈앞에서 사라지는 검은색 차량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기저귀를 만드는데 1억이 넘게 들었다.뜨거운 아빠의 사랑에 진아현은 태어나자마자 복에 겨우는구자!...새벽
조진범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밖에 걸친 바람막이는 이미 절반 이상이 젖었다.그는 자연스럽게 진안영의 말에 대답했다."밖에 비가 계속 내려서 오다가다 조금 맞았을 뿐이야. 조금 있다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면 돼."조진범은 아이에게 냉기가 갈까봐 걸쳤던 바람막이를 벗어던졌다.안엔 새하얀 셔츠와 정장바지였다.깔끔한 옷을 입은 조진범의 수려한 외모는 더한층 빛났다.조진범은 간호사의 눈길을 무시하고 박스를 열어 깨끗한 천기저귀를 꺼냈다.그리고 자신의 손을 깨끗이 씼고 어린 딸을 안아 들고 익숙하게 기저귀를 갈아주었다...진아현은 편히 잠을 자다가 잠을 깨어 기분이 언짢았는지 아빠의 품에서 칭얼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그리고 두 다리를 힘있게 뻗었다.불빛 아래서 조진범의 눈길은 너무나 부드러웠다.그는 딸의 모습에 애간장이 녹을 지경이었다.옆에서 간호사가 그런 조진범의 모습에 칭찬을 퍼부었다."대표님은 참 대단하시네요. 야밤에 이렇게 많은 천기저귀를 가져오시다니. 이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인데요."조진범은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그는 오랫동안 아이를 안지 못했기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아이를 품안에 안아 사랑스러운 얼굴을 쳐다보았다.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았다...진아현은 그의 품에서 가만히 있으며 검은 눈동자로 조진범을 바라보았다.아빠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간호사는 아이와 장난을 쳤다."대표님, 따님이 너무 귀여워요."간호사는 조진범에게 아양을 떨었다.그녀는 진안영이 그의 전부인임을 알고 있었고 조진범의 결혼도 취소된 걸 알고 있었다.조진범은 지금 엄연한 솔로인 것이다.조진범 같은 특출난 사업가가 이를 모를리가 없었다.그는 진안영에게 눈길을 돌렸다.진안영도 간호사의 뜻을 알아차리렸지만 자신의 신분으로 뭐라 얘기하기도 어려웠다.하여 침대맡에서 육아 서적을 꺼내들어 어색함을 지워보려했다.조진범은 가볍게 웃었다.자리를 비켜달라는 조진범의 말에 간호사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조진범의 권력에 복종하
조은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건가?유선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애인이 셀카 한 장을 보냈다.아주 젊은 여자였는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들을 입고 있으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선우 씨, 생일 선물 고마워요.」조은서는 눈이 아플 때까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선우 곁에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런 여자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아픈 외에, 남편의 취향을 알게 되어 놀랐다.그녀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유선우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등 뒤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우가 물기에 살짝 젖은 채로 나왔다. 새하얀 샤워 가운은 선이 분명한 복근과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는데 더욱 섹시해 보였다.“언제까지 볼 거야.”그는 조은서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 그녀를 힐긋 보더니 옷을 입기 시작했다.유선우는 아내에게 불륜을 들켜서 미안하다거나, 마음이 찔린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태도가 그의 경제 수입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조은서는 결혼 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유선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가정주부니까.조은서는 그 사진으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따지고 들 수 없었다.나가려는 유선우를 본 조은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우 씨,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유선우는 천천히 벨트를 매고 조은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마도 아까 침대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반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또 하려고?”이건 사랑이 아닌 그저 관계일 뿐이다.유선우는 조은서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고,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니까.시선을 거둔 유선우는 침대맡에 놓인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손에 차며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오 분 정도밖에 없어. 운전기사가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조은
6년이다. 조은서는 유선우를 6년 동안 좋아했다.힘이 빠진 조은서는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유선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금요일 저녁, 조은서의 친정에는 큰일이 생겼다.조씨 가문의 장남인 조은혁이 JH 그룹의 경제 범죄 사건 때문에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 충분한 시간이다.그날 밤, 조은서의 아버지는 급성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고 상황이 긴급해 수술이 필요했다.조은서는 병원 복도에 서서 계속 유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유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은서가 포기하려고 할 때, 유선우가 문자를 보냈다.여전히 짧은 문자였다.「H시에 있어. 일이 있으면 진 비서에게 연락해.」조은서가 또 전화를 걸자 유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조은서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선우 씨, 지금 우리 아빠가...”유선우는 그런 조은서의 말을 끊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얘기했다.“돈이 필요한 거잖아? 몇 번을 말해. 돈이 급한 거면 진 비서를 찾아가라고. 조은서, 듣고 있어?”...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YS의약 그룹 대표 타워랜드 대절, 이성 친구를 위한 불꽃 축제」화면 속에는 불꽃이 예쁘게 터지고 있었다.젊은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서의 남편인 유선우는 바로 그 휠체어 뒤에서 핸드폰을 쥔 채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조은서는 눈을 깜빡였다.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지금 어디예요?”유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조사받는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대충 대답했다.“바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 진 비서한테 연락해.”유선우는 울먹이는 조은서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옆의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꽤 다정했다.조은서는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었다.아, 유선우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구나.등 뒤에서는 새엄마인 심
3일 후, 유선우는 B시로 돌아왔다.저녁, 어둠이 드리워진 별장에 검은색 차량이 들어와 시동을 껐다.운전기사가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린 유선우는 문을 닫았다. 물건을 들려고 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내가 직접 올려갑니다.”거실에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몰려왔다.“며칠 전, 장인어른께서 쓰러져서 사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위층에 계십니다.”조씨 가문의 일은 유선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조금 무거운 심정으로 짐을 들고 올라와 침실 문을 여니 조은서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짐을 내려놓은 유선우는 넥타이를 풀면서 침대 옆에 앉아 조은서를 쳐다보았다.결혼 후, 조은서는 항상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물건 정리라거나, 디저트 만들기라거나. 만약 그녀의 예쁜 외모와 몸매가 아니었다면 유선우에게는 진짜 가정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한참이 지나도 조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출장을 다녀온 유선우는 피곤했다. 조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옷장에서 가운을 가진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샤워를 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조은서처럼 나약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유선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미 그의 짐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원래의 부드러운 아내로 돌아올 것이라고.유선우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샤워실에서 나온 그가 원래 자리에 있는 캐리어를 봤을 때, 유선우는 조은서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유선우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잡지나 들었다.한참 지나서야 시선을 들어 조은서에게 물었다.“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날 밤은... 이미 진 비서를 혼냈어.”성의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조은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유선우와 시선을 맞추었다.거울 속의 유선우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우아한 자태를 가진 남자였다.한참을 보던 조은서는 눈이 뻐근해질 때야 입을 열었다.“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유선우는 놀라서 굳어버렸
“그래요, 우리 집이 어려우니까 매달 2천만 원씩 주고 있죠. 하지만 그 수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싸구려 여자로 느껴져요. 당신 욕구나 받아주고 받는 돈 같다고요!”...유선우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유선우는 조은서의 턱을 잡고 물었다.“당신처럼 남자한테 못 맞춰주는 여자가, 신음도 낼 줄 몰라서 고양이처럼 소리 내는 여자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다고? 당신이 날 떠나서 어떤 삶을 살 것 같아?”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손길이 아파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차갑게 조은서의 약지를 봤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약지를 본 그가 물었다.“결혼반지는?”“팔았어요.”조은서는 슬픈 말투로 얘기했다.“그러니까 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그말을 마친 조은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유선우는 그녀가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다. 만약 그날 밤이 없었다면, 그날 화려한 불꽃을 보지 못했다면, 이곳에 남아서 사랑도 없는 혼인 생활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봐버린 이상, 조은서는 더는 유선우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이혼하면 이것보다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유선우의 말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몇백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말을 마친 조은서는 천천히 자기 손을 빼냈다.그리고 캐리어를 꺼내 자기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유선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조은서의 여린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이혼하겠다니.유선우의 마음속에는 화가 피어올랐다.그리고 그는 바로 조은서를 안아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조은서 위에 유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선우는 조은서와 얼굴을 맞댔다. 눈과 눈, 코끝과 코끝이 닿았다. 뜨거운 기운이 둘 사이를 감쌌다.그러더니 유선우가 입술을 조은서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얘기했다.“
유선우의 이성의 끈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게다가 유선우 밑에 깔린 조은서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유선우는 조은서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몸은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매우 당연하게 이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어깨를 밀며 흐트러진 호흡으로 얘기했다.“선우 씨, 저 요즘 약을 안 먹어서 임신할지도 몰라요.”그 말을 들은 유선우는 그대로 굳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두 사람의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 그는 웃더니 얘기했다.“요근래 생각할 게 많았나 봐?”조은서의 반항은 유선우의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선우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서랍에서 아직 포장지를 뜯지 않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작은 상자에는 영어 자모 세 개가 적혀있었다.포장을 뜯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유선우는 신경 쓰지 않고 한 손으로 포장을 뜯고 몸을 숙여 조은서에게 입을 맞췄다. 조은서는 여전히 반항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결국 유선우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받았다.전화를 건 사람은 유선우의 어머니인 함은숙이었다.함은숙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선우야,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 돌아와 봐야 할 것 같아. 맞아, 그 애도 데려와. 할머님이 그 애가 만든 영양 찰떡이 먹고 싶으시대.”함은숙도 조은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말투는 차가웠다.유선우는 진유진의 몸을 한 손으로 누르며 그녀를 내리깔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곧 데리고 갈게요.”조은서는 힘이 풀려 침대에 퍼질러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유선우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조은서의 가녀린 뒷모습을 힐끔 보고 또 침대맡의 박스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먼저 나갔다.조은서가 내려갈 때, 유선우는 차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불빛이 없이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조은서는 흰 셔츠를 입고 긴 검은 치마까지 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