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혜는 취해 있었다.정지혜는 몸매가 드러나는 섹시한 원피스를 입고 두 팔을 벌려 캠핑카 앞을 막으며 마지막으로 차 안에 있는 남자를 붙잡으려 애썼다.검은 롤스로이스 안에서 조진범은 조용히 바깥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조진범은 사실 정지혜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할 뻔한 사이였고 비록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도 조진범은 차에서 내려 정지혜를 한 번쯤은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정지혜는 기뻐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정지혜는 참지 못하고 조진범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 조진범을 만지려 했지만 조진범의 눈 속에 담긴 차가운 무관심이 정지혜를 멈추게 했다. 정지혜는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정지혜는 어두운 밤 속의 저택을 한 번 바라보고 이내 시선을 다시 조진범의 얼굴로 돌렸다. 정지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시 이곳으로 이사한 거죠? 진범 씨, 사실 처음부터 당신은 진안영 씨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던 거죠? 당신의 자존심 때문에 진안영 씨가 당신에게 실망할까 봐 두려웠던 거잖아요. 이제 진안영 씨가 당신의 아이를 낳았으니 당신은 아이를 핑계로 떳떳하게 진안영 씨에게 다가가서 다시 잡으려 하는 거고요. 하지만 우리 결혼할 예정이었잖아요. 나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C성으로 가서 그 사람과 며칠이나 함께 있었다니.”“조진범 씨, 정말 웃기지 않나요? 저는 그저 당신들 사이의 희생양일 뿐이에요.”...조진범은 고개를 숙여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한 대를 뽑아 불을 붙였다.연한 청색의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자 조진범은 정지혜를 보며 가볍게 말했다.“정지혜, 너 많이 취했어. 기사에게 너를 집에 데려다주라고 할게.”“저 안 취했어요.”정지혜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조진범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정말 당신을 좋아해요! 진범 씨, 왜 나를 받아주지 않는 거예요? 왜 당신이 저버렸던 여자를 다시 잡으려고 하는 거죠? 진범 씨, 당신은 내가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생각하
조진범은 말했다.“아기 엄마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겠대요. C성에서 더 머물고 싶다고 하더군요. 내가 두 곳을 오가야 할 것 같아요... 가끔은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요.”고용인은 미소 지으며 동의했다.조진범은 잠시 앉아 생각에 잠긴 뒤 천천히 2층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진범은 업무를 미리 처리해 두고 금요일에 C성으로 가서 아기와 아이 엄마를 잠시라도 보려는 생각이었다. 이틀만 머무르더라도 말이다.새벽 두 시.서재에서 나온 조진범은 고요하게 깊어지는 밤의 정적을 느꼈다.조진범은 저택의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 안방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 안은 조진범과 진안영이 함께 살던 곳이었다. 조진범은 침실 한가운데에 서서 살며시 넥타이를 풀었다.조진범은 상사병이라도 걸린 듯 마음이 미칠 것만 같았다.조진범은 몰랐다. 조진범이 C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지혜가 먼저 그곳에 갔다는 것을.C성.진안영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6월의 날씨, 진안영은 흰색 셔츠에 은은한 회색 얇은 울 숄을 걸치고 있었다. 출산 후의 연약함이 몸에 남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성숙한 여인의 풍미가 느껴졌다.진안영의 차분한 모습과 비교하니 정지혜는 오히려 더욱 초췌하고 창백해 보였다.정지혜는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저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정지혜는 고급스럽게 커피를 홀짝이며 커피 원두의 산지와 출처에 관해 설명했다. 진안영은 그런 정지혜의 태도를 차분히 들어주고 있었다.잠시 후, 정지혜가 말을 마쳤다.정지혜는 맞은편의 진안영을 바라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진안영 씨, 당신도 잘 알겠지만, 학벌이든 외모든 집안이든 저는 당신보다 모두 뛰어나요... 저는 당신보다 진범 씨에게 훨씬 더 어울리는 여자예요. 그러니 진안영 씨도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내 약혼자에게 더 이상 얽매이지 마세요.”...진안영은 조용히 커피를 저었다.정지혜의 몰아붙임에도 불구하고 진안영은 반박하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정 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저는
조진범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신경 씌어.”정지혜는 믿을 수가 없었다.진안영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신경 쓰면서 감싸고 있는 조진범을 정지혜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조진범은 고개를 돌려 진안영을 보며 말했다.“안영아 먼저 들어가. 잠깐 얘기하고 집으로 갈게.”‘집으로 갈게?’정지혜는 어리둥절 해졌다.‘조진범이 지금 진안영이 사는 곳을 집이라 말했다고? 그럼 한때 약혼자였던 나는 뭐야?’정지혜는 떠나는 진안영을 자상하게 부축까지 해주는 조진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조진범이 얼마나 진안영을 만나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는지 정확히 표현되었다.그럼 정지혜는 뭐야?진안영이 떠나고 나서야 조진범의 시선이 정지혜에게 돌아갔다.담배를 피울 수 없는 커피숍이라 조진범은 담뱃갑을 탁자 위에 놓고 정지혜를 냉정한 표정으로 쳐다봤다.B시에서 보여줬던 따뜻함이 완전히 뒤바뀐 것 같았다.정지혜가 C시로 찾아온 건 조진범의 심기를 건드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조진범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여긴 왜 왔어? 우린 이미 파혼했고 서로 건드리지 말기로 하지 않았었나? 안영이는 왜 찾아온 거야?”“그래서 신경 쓰여요?”아까부터 왜 이것만 집요하게 물어보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진범의 대답은 한결같았다.어쩌면 B시에 있을 때 조진범이 정지혜를 대하는 태도가 온화해서 그녀의 착각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젠 더는 정지혜한테 그 어떤 미련도 남기게 하고 싶진 않았다 조진범은 솔직하게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안영이와 재결합할 생각이야. 안영이는 아직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겠지만 그래도 언젠간 내 옆에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더는 나한테 미련 가지지만. 미안해.”정지혜는 이성을 잃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진안영한테 무슨 짓을 할지 안 두려운가 봐요? 그리고 당신의 한 달밖에 안 된 귀여운 딸까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조진범은 정지혜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여자라고는 한평생 때
조은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건가?유선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애인이 셀카 한 장을 보냈다.아주 젊은 여자였는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들을 입고 있으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선우 씨, 생일 선물 고마워요.」조은서는 눈이 아플 때까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선우 곁에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런 여자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아픈 외에, 남편의 취향을 알게 되어 놀랐다.그녀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유선우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등 뒤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우가 물기에 살짝 젖은 채로 나왔다. 새하얀 샤워 가운은 선이 분명한 복근과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는데 더욱 섹시해 보였다.“언제까지 볼 거야.”그는 조은서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 그녀를 힐긋 보더니 옷을 입기 시작했다.유선우는 아내에게 불륜을 들켜서 미안하다거나, 마음이 찔린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태도가 그의 경제 수입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조은서는 결혼 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유선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가정주부니까.조은서는 그 사진으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따지고 들 수 없었다.나가려는 유선우를 본 조은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우 씨,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유선우는 천천히 벨트를 매고 조은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마도 아까 침대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반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또 하려고?”이건 사랑이 아닌 그저 관계일 뿐이다.유선우는 조은서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고,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니까.시선을 거둔 유선우는 침대맡에 놓인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손에 차며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오 분 정도밖에 없어. 운전기사가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조은
6년이다. 조은서는 유선우를 6년 동안 좋아했다.힘이 빠진 조은서는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유선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금요일 저녁, 조은서의 친정에는 큰일이 생겼다.조씨 가문의 장남인 조은혁이 JH 그룹의 경제 범죄 사건 때문에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 충분한 시간이다.그날 밤, 조은서의 아버지는 급성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고 상황이 긴급해 수술이 필요했다.조은서는 병원 복도에 서서 계속 유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유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은서가 포기하려고 할 때, 유선우가 문자를 보냈다.여전히 짧은 문자였다.「H시에 있어. 일이 있으면 진 비서에게 연락해.」조은서가 또 전화를 걸자 유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조은서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선우 씨, 지금 우리 아빠가...”유선우는 그런 조은서의 말을 끊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얘기했다.“돈이 필요한 거잖아? 몇 번을 말해. 돈이 급한 거면 진 비서를 찾아가라고. 조은서, 듣고 있어?”...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YS의약 그룹 대표 타워랜드 대절, 이성 친구를 위한 불꽃 축제」화면 속에는 불꽃이 예쁘게 터지고 있었다.젊은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서의 남편인 유선우는 바로 그 휠체어 뒤에서 핸드폰을 쥔 채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조은서는 눈을 깜빡였다.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지금 어디예요?”유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조사받는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대충 대답했다.“바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 진 비서한테 연락해.”유선우는 울먹이는 조은서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옆의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꽤 다정했다.조은서는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었다.아, 유선우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구나.등 뒤에서는 새엄마인 심
3일 후, 유선우는 B시로 돌아왔다.저녁, 어둠이 드리워진 별장에 검은색 차량이 들어와 시동을 껐다.운전기사가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린 유선우는 문을 닫았다. 물건을 들려고 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내가 직접 올려갑니다.”거실에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몰려왔다.“며칠 전, 장인어른께서 쓰러져서 사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위층에 계십니다.”조씨 가문의 일은 유선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조금 무거운 심정으로 짐을 들고 올라와 침실 문을 여니 조은서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짐을 내려놓은 유선우는 넥타이를 풀면서 침대 옆에 앉아 조은서를 쳐다보았다.결혼 후, 조은서는 항상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물건 정리라거나, 디저트 만들기라거나. 만약 그녀의 예쁜 외모와 몸매가 아니었다면 유선우에게는 진짜 가정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한참이 지나도 조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출장을 다녀온 유선우는 피곤했다. 조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옷장에서 가운을 가진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샤워를 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조은서처럼 나약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유선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미 그의 짐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원래의 부드러운 아내로 돌아올 것이라고.유선우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샤워실에서 나온 그가 원래 자리에 있는 캐리어를 봤을 때, 유선우는 조은서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유선우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잡지나 들었다.한참 지나서야 시선을 들어 조은서에게 물었다.“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날 밤은... 이미 진 비서를 혼냈어.”성의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조은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유선우와 시선을 맞추었다.거울 속의 유선우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우아한 자태를 가진 남자였다.한참을 보던 조은서는 눈이 뻐근해질 때야 입을 열었다.“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유선우는 놀라서 굳어버렸
“그래요, 우리 집이 어려우니까 매달 2천만 원씩 주고 있죠. 하지만 그 수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싸구려 여자로 느껴져요. 당신 욕구나 받아주고 받는 돈 같다고요!”...유선우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유선우는 조은서의 턱을 잡고 물었다.“당신처럼 남자한테 못 맞춰주는 여자가, 신음도 낼 줄 몰라서 고양이처럼 소리 내는 여자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다고? 당신이 날 떠나서 어떤 삶을 살 것 같아?”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손길이 아파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차갑게 조은서의 약지를 봤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약지를 본 그가 물었다.“결혼반지는?”“팔았어요.”조은서는 슬픈 말투로 얘기했다.“그러니까 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그말을 마친 조은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유선우는 그녀가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다. 만약 그날 밤이 없었다면, 그날 화려한 불꽃을 보지 못했다면, 이곳에 남아서 사랑도 없는 혼인 생활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봐버린 이상, 조은서는 더는 유선우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이혼하면 이것보다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유선우의 말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몇백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말을 마친 조은서는 천천히 자기 손을 빼냈다.그리고 캐리어를 꺼내 자기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유선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조은서의 여린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이혼하겠다니.유선우의 마음속에는 화가 피어올랐다.그리고 그는 바로 조은서를 안아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조은서 위에 유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선우는 조은서와 얼굴을 맞댔다. 눈과 눈, 코끝과 코끝이 닿았다. 뜨거운 기운이 둘 사이를 감쌌다.그러더니 유선우가 입술을 조은서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얘기했다.“
유선우의 이성의 끈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게다가 유선우 밑에 깔린 조은서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유선우는 조은서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몸은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매우 당연하게 이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어깨를 밀며 흐트러진 호흡으로 얘기했다.“선우 씨, 저 요즘 약을 안 먹어서 임신할지도 몰라요.”그 말을 들은 유선우는 그대로 굳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두 사람의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 그는 웃더니 얘기했다.“요근래 생각할 게 많았나 봐?”조은서의 반항은 유선우의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선우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서랍에서 아직 포장지를 뜯지 않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작은 상자에는 영어 자모 세 개가 적혀있었다.포장을 뜯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유선우는 신경 쓰지 않고 한 손으로 포장을 뜯고 몸을 숙여 조은서에게 입을 맞췄다. 조은서는 여전히 반항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결국 유선우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받았다.전화를 건 사람은 유선우의 어머니인 함은숙이었다.함은숙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선우야,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 돌아와 봐야 할 것 같아. 맞아, 그 애도 데려와. 할머님이 그 애가 만든 영양 찰떡이 먹고 싶으시대.”함은숙도 조은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말투는 차가웠다.유선우는 진유진의 몸을 한 손으로 누르며 그녀를 내리깔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곧 데리고 갈게요.”조은서는 힘이 풀려 침대에 퍼질러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유선우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조은서의 가녀린 뒷모습을 힐끔 보고 또 침대맡의 박스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먼저 나갔다.조은서가 내려갈 때, 유선우는 차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불빛이 없이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조은서는 흰 셔츠를 입고 긴 검은 치마까지 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