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만 비웃음이 서려 있는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지자 모두 문 쪽을 바라봤다. 사람들 틈으로 바라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도혜선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탁 치며 감탄했다. 맙소사, 이 연극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도혜선의 등장은 자리에 있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몇 개월 전 이 여자가 신호연의 결혼 기념 축하 파티의 오프닝을 박살 내며 신호연을 서울에서 유명인사로 떠오르게 했다. 신호연의 화려한 양다리를 모두에게 밝혀 큰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이 사건은 신 대표를 이혼 법정에까지 서게 했다. 그는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어마어마한 외도였으니 말이다.그런 사람이 오늘 또 만월 잔치 현장에 왔으니 좋은 마음으로 축하를 해주려 온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시한폭탄에 신호연이 이번에는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할까?나도 상당히 놀랐다. 전에 이미 오지 않기로 얘기 끝난 줄 알았는데, 왜 또 온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더 흥미진진한 연극이 바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도혜선이 이번엔 어떤 시한폭탄을 터뜨릴지 힌트를 주지 않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눈길을 돌리자 도혜선의 뒤에는 중년의 여성이 따라 들어오고 있음을 발견했다.나이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도혜선의 친구 같지는 않은 여성이었다.차림새가 매혹적이면서도 저급해 보이는 게 ‘풍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다만 유행 지난 ‘풍류’에 더 어울렸다.도혜선의 뒤에서 굳은 허리를 씰룩거리며 따라오고 있었고 얼굴에 띤 미소는 긴장한 듯 뒤틀려 있었다. 비비크림을 덕지덕지 발라 주름 사이로 껴 있는 모습이 쭉 밀면 때처럼 밀려 나올 것 같았다.길쭉한 눈에서 탐욕을 뿜어내며 주위를 둘러보는 게 마치 화려한 연회장의 스케일에 놀란 듯싶었다.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 어디서 본듯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도혜선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저 구닥다리 여인은 어디서
나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인제야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분명히 신연아의 친모일 것이다.이 여인 역시 만만치 않은 여인임을 짐작게 했다. 입으로는 ‘얼마나 힘들게 찾았는데’라고 하면서도 위화감이 드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찾긴 뭘 찾았단 말인가?당시 신연아를 낳고 신 씨 가문에 버릴 때는 전혀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 텐데 버린 지 수십 년 동안 한번도 찾지 않더니 이제 와서 힘들게 찾아다녔다는 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신 씨 가문이 그 옛집에서 나온 지 채 몇 년이 되지도 않았고 동네 떠들썩하게 이사를 갔는데 모를 수가 있을까? 슬쩍 엿듣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일을 힘들게 찾아다녔다니 거짓말도 유분수였다.이 여인의 옷차림을 보니 밖에서 제대로 살아온 것 같지 못한데 이제서야 돈줄을 찾은듯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신 씨 가문, 특히 김향옥에게는 골칫덩어리 그 자체일 것이다.나는 저도 모르게 화가 나 치를 떨고 있는 김향옥을 바라봤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노인네에게 동정심이 들었다.솔직히 말하자면 김향옥은 몇 년간 콩이한테만은 최선을 다해 진심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도혜선에게 박수를 보냈다. 어디서 이런 늙은 여편네를 찾아내오는 것인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이것이 이들 가문에 내린 진정한 벌이었다. 눈앞의 신 씨 가문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릴 벌, 그것도 쉽게 끝낼 수 없는 천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조금 전까지 사건의 초점이었던 나는 어느새 구경꾼이 되어있었다. 나는 흥미진진하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구경했다.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니 마음 놓고 구경하는 기분이 역시 즐거웠다.더군다나 쉽게 지나칠 구경이 아니었다. 어쩐지 김향옥이 그토록 치를 떨더라니, 그녀의 남편과 가정을 빼앗아갈 원수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신연아는 더더욱 당황한 얼굴이었다.갑자기 이 늙은 노인네한테 양팔이 잡혀 아무리 밖으로 끌어내려 몸부림쳐도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신연아는 안 그래도 사람에게 등급을 나누는 버릇이 있었는데
도혜선은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뻗어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해월에게 눈짓하고는 우리 셋은 몸을 돌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브라운호텔을 나오자마자 우리는 샤부샤부 가게로 달려갔다. 분위기는 거의 날아갈 듯했다.해월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혜선에게 어디서 신연아의 숨겨진 엄마를 찾아왔는지 물었다. 도혜선은 의기양양해서 그 여인을 찾은 전 과정을 이야기해줬다.알고 보니 그녀는 이미 전부터 친구에게 신연아 친모를 찾아달라 부탁했고 이렇게 쓰일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몇 개월이나 수소문한 끝에 한 달 전 지방에서 이 여인을 찾아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여인은 몇 번이나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늙은 남자들을 후리고 다녔지만, 여태껏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고 한다.도혜선은 신호연의 초대장을 받자마자 사람을 시켜 강숙자를 데려오게 했고 어제 방금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도혜선은 좋은 술과 안주들로 하룻밤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강숙자는 아침부터 자신의 ‘출세’한 딸을 보기 위해 한시바삐 준비했다는 것이다.도혜선의 말을 듣고 난 뒤 나와 해월은 박장대소했다. 이제 시끌벅적해질 것이다, 아마 앞으로 신 씨 가문은 조용할 날이 없겠지.도혜선은 신 씨 가문에 시한폭탄 하나를 숨겨둔 것과 같았다. 언제든 폭발할 수 있기도 멈출 수 있기도 한 폭탄.나는 도혜선에 감탄하면서도 여지를 남기며 말했다. “언니 정말 대단해, 언니야말로 받은 대로 갚아주는 사람이야. 난 언니한테 잘못한 게 없기 망정이지!”“그만해, 그게 무슨 양심 없는 소리야. 너 대신 복수한 건데. 안 그랬음 나 이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 아니거든!”그녀는 나를 흘겨보며 한소리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고... 사실 너한테 항상 미안했어. 그래서 신호연한테 제대로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너 대신 화풀이라도 해주게.”“언니 그렇게 말하지 마. 사실... 나도 언니한테 미안한 일이 많아, 언니가 신연아한테...”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혜선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내 말이 끝나자 도혜선은 테이블을 쿵 치더니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지아야, 내가 말했지! 역시 네가 제일 똑똑하다니까. 그럼 이대로 하자, 조용히 힘을 모으고 있다가 한꺼번에 놀라게 해주는 거야! 해보자니까, 무조건 성공할 거야!”해월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 저 갑자기 뭐가 통한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도와드릴지 알 것 같아요!”우리 셋은 박장대소하며 웃었다.“전부터 머릿속에 아이디어만 있었는데 예전엔 조건이 부족했던 것뿐이야. 시기상조여서 신호연과 신연아한테만 그럭저럭 복수할 정도였지.” 나는 진지하게 도혜선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 굳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날 도발했으니, 내가 물러터졌다고 생각하나 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피할 수도 없었다니까!”“그놈들은 용서할 가치도 없어. 넌 진짜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미연이도 얘기했었잖아. 지아야 내가 말하는데, 마음이 약하면 언젠가는 당하게 돼 있어!” 도혜선이 재료들을 샤부샤부 냄비에 쓸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피할 일이 아니야. 네가 조용히 지내고 싶으면 그들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어. 그것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그래야 편히 지낼 수 있을 거야.”“맞아요, 저들한테 똑똑히 보여주죠. 대표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게!” 해월이 맞장구를 쳤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사람은 이미 나보다 더 독하게 마음을 먹은 듯했다.“지금 상황을 보면 저들은 몰래 한패가 되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그들이 먼저 도발하고 나섰으니 그대로 갚아주지 않으면 나 자신한테 미안해져서 안되겠어.”도혜선이 바로 업무 분담에 나섰다. “그럼 전희는 내가 맡을게!”우리 셋이 드디어 함께 뭉쳤다. 대략적인 계획은 이미 세워졌다고 볼 수 있었다.가게에서 나오자 이미 어둑해졌다. 도혜선은 나를 집까지 데
“에이, 오늘 온 사람 중에 진짜 밥 먹으러 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다들 신호연의 혼외자를 보러 온 거죠. 오늘 일은 신연아가 어떤 상황에서 아이를 낳았는지 알고 있던 전희가 짠 판이에요, 그가 전희에게 농락당한 거죠.”“전희가 한 짓이었군요?”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탄식했다, 이세림이 저지른 일인 줄 알았는데.“전지훈이 정식으로 신예의 주주가 되었어요. 100억을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큰 프로젝트도 가져왔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 신호연의 어깨가 하늘까지 치솟았어요.”“어쩐지 신호연이 나한테 지금 수중에 큰 프로젝트가 두 개 있다고 하더라니, 사실이었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서강훈은 조금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요, 저런 소인배에게 이런 행운을 주시다니.”“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나는 비꼬았다.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만약 그의 프로젝트가 전부 전지훈이 갖고 온 거라면 너무 잘된 일이라고 혼자 기뻐했다. 나는 오늘 전희가 함정을 만들어준 덕분에 이 세 세력이 서로 파멸로 이끌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어 그녀에게 정말 고마웠다.내가 계획과 목표가 생겼다고 속으로 기뻐하고 있을 때, 계획보다 변화가 더 빠르다고, 누군가 내 계획보다 한발 빨랐다.이튿날 내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연회에서 이청원이 나에게 소개해 준 화윤 그룹 여정훈, 여 대표님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일로 나를 찾는 전화를 받았다.요 며칠 자질구레한 일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나는 이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얼른 장영식의 사무실에 그를 찾으러 갔는데 장영식이 자리에 없었다. 비서가 그가 프로젝트 관련해서 미팅하러 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해월을 데리고 화윤 그룹으로 갔다. 화윤 그룹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동철의 전화를 받았다. 이동철이 요즘 너무 바빠 나도 그를 못 본 지 이틀이나 되었다. 그는 중요한 일로 나를 만나야 한다고 했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여 대표
이동철은 자신도 이런 추측을 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그러면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은 누구예요? 인증, 물증, 목격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배현우 씨도 두 눈으로 직접 봤잖아요.”“어떻게 이럴 수 있지?”나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혼잣말했다. 내 머릿속에 갑자기 배현우가 예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가 나에게 한 말을 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임윤아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나에게 그녀는 중요하지 않아.”이제 보니 배현우의 이 말에 다른 숨은 뜻이 있었던 것 같았다.보아하니 배현우가 아직 나에게 숨기는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는 나에게 단서들이 이어지면 알려주겠다고 했고 또 지금 이동철이 한 말들을 보니 그들이 찾은 단서들이 전부 연결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러면 이재승에 관한 일은 어떻게 됐어요? 단서 찾았어요?” 나는 한발 물러나며 이재승에 관한 일을 물어보았다. 그는 이세림의 아빠이기 때문에 나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이세림이 그녀의 부모님에게 다정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감각한 것 같았다. 매번 그들을 언급할 때마다 퉁명스러웠는데 나는 조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가 아무리 매정하다고 해도 자기 부모님께까지 무관심하리라 믿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와 지내는 동안, 배희진의 마음속에서의 그녀의 지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그때 배현우가 다쳤을 때 응급실 문 앞에서 그녀가 배희진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 배희진의 매서운 눈빛 하나에도 그녀가 벌벌 떨었다. 나에게 배희진의 마음속에 그녀가 헤라보다도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이동철이 얼른 입을 열었다.“찾았어요. 이재승, 이 사람은 조사하기 쉬웠고 웬만한 자료는 전부 인증이 가능해요. 저에게 자세한 보고서가 있는데 돌아와서 드릴게요. 금방 평택에서 돌아와서 드릴 기회가 없
솔직히 이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었고 나는 심지어 침착함을 유지 할 수 없어 이청원을 추궁했다. “네. 저도 금방 들은 소식이에요. 소식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얼른 연락했어요. 수중에 있는 천우 그룹에 관한 프로젝트는 될수록 빨리 조심하시고 최대한 그들과의 관계를 끊는 편이 좋아요. 그래야 제때 손실을 멈출 수 있어요.”이청원의 말투는 아주 진지하고 엄숙했다. 나는 얼른 차를 길가에 세우고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들은 왜 조민성을 바꾸려는 거예요?”나는 이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조민성은 아시아 본사의 오랜 부하 직원이고 평판도 아주 좋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배현우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심성의껏 배현우를 지지했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배현우가 그의 조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배희진이 조민성까지 건드리다니?나는 이 말을 꺼내면서 내 일 때문에 조민성까지 영향받은 게 아닌지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어쨌든 배희진 이 여자는 속 좁은 소인배였고 조민성이 몰래 나를 도와준 것이 그녀의 지령을 어긴 것은 당연했다. 혹시 이 일이 배희진이 조민성을 처리한 도화선이 된 건 아닐까?나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갈피가 잡히지 않았고 호흡도 점점 가빠왔다. 보아하니 내 이기심때문에 배현우가 영향 받은 것이 확실했다. 당시 조민성도 이것을 걱정했었는데 그의 걱정이 진짜 사실이 될 줄이야. 내가 배현우를 보러 간 날, 이세림에게 들킨 후 조민성에게 한 전화에서 그의 말투가 좋지 않았는데 그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대표님, 그동안 대표님과 연락하면서 괜찮은 사람이고, 좋은 협력 파트너일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표님을 좋게 보고 있어서 저는 이번 흙탕물이 대표님에게 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마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거예요.전화에서 이청원의 말투는 아주 진지했다. 사실 나는 그와 나의 친분이 그렇게 두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진중한 건의를 해주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천우 그룹에서는 예정대로 대규모적인 인사변동이 일어났다. 천우 그룹은 조민성 대표를 사임했을 뿐만 아니라 임원들도 교체시켰다.변동의 틈을 타 배희진은 배현우의 상태를 대외적으로 폭로하고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 사진도 덧붙였다.보아하니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나는 소식을 들은 즉시 조 대표에게 전화했다. 조 대표의 태도는 여전히 평온하고 온화하였으며 이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회피하지 않았다.“조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였네요.”나는 너무 괴로운 마음에 진심으로 조민성에게 사과하였다. “지아 씨 일과 연관이 있는 건 맞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예요.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나를 조금도 탓하지 않는 조민성의 태도는 나를 더 죄책감에 휩싸이게 했다.“그... 현우 씨는...”“아직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이지만 언젠가는 꼭 깨어날 겁니다.”조민성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누구도 현우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어요.”“네, 대표님 말이 맞아요... 현우 씨 소식이 있으면 저한테 꼭 얘기해주세요.”나는 뻔뻔함을 무릅쓰고 말했다.“그래요!”나는 조 대표가 더 얘기할 기미가 없자 전화를 끊고 창가에 서서 경원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그의 곁을 지키면서 빨리 정신 차리라고 그이를 깨우고 싶었다. 이틀 후, 천우 그룹에 새로 부임한 기 대표의 면담 요청을 받았다. 기 대표는 아주 사무적인 태도로 천우 그룹과 신흥의 합작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후 우리가 받은 공지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퀄리티를 보존하며 기한 내에 완성해야 하되 준비 중이던 모든 것은 중단하라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라 전부터 공급 업체와 연락하여 재고를 너무 많이 준비해두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런 압박이 산처럼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 숨 막히는 듯했다. 장영식은 계속 나를 위로해주느라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