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도 전혀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브람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지유는 느끼고 있었다. 브람의 눈빛에 도는 서늘한 한기는 마치 지옥에서 걸어나온 염라대왕 같다는 것을.브람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전쟁 때를 제외하고 누구도 그의 앞에서 이렇듯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럼 두 사람이 절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야 할 거야...”“지유를 죽이려거든 저도 죽이세요!”브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이현은 화를 내며 말허리를 잘라버렸다.여이현은 아주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확고함은 눈빛 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느껴졌다.브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심기가 불편한 듯 입술을 일자형으로 만들었다.그는 여이현을 몇초간 빤히 보다가 결국 손을 놓았다.브람이 떠난 뒤 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잡았다.“이현 씨, 아니면 일단 S 국으로 돌아가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지유야, 난 일단 원래 하려던 일을 전부 끝내고 싶었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난 네 앞에 나타날 수 없었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난 절대 널 두고 갈 수 없어. 왜냐하면... 넌 지금 날 밀어내고 있으니까.”이 말을 꺼낼 때 여이현은 마치 목에 무언가가 막혀버린 것처럼 아프고 꺼내기 함들었다.심지어 누군가 날카로운 것으로 그의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기도 했다.온지유는 그를 위해서, 그의 안전만 생각하고 밀어내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녀와 헤어져 있던 5년 동안 너무도 고통스럽고 괴로웠다.눈을 뜬 뒤로 그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전부 온지유를 위해서 말이다.그런데 온지유가 헤어지자고 하니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온지유는 목이 너무도 아팠다.손을 뻗어 여이현의 얼굴을 만졌다. 손끝이 그의 이마에 있는 흉터에 닿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여이현이 버텨온 고통들이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그 수많은 고통스러운 밤을 그가 어떻게 버텨왔는지 모른다.그가
지금 신무열은 일단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며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그가 한 말은 별이에게 효과가 있었다.하지만 음식을 먹는 것 외에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신무열은 그런 아이를 보며 순간 망설이더니 인명진에게 연락했다.인명진은 빠르게 그의 전화를 받았다.“네, 도련님.”“지유가 나한테 아이를 맡겼어요. 하지만 이 아이가 말을 하지 않네요. 내가 보기엔 분명 뭔가가 있어요. 혹시 요즘 S 국에 있어요? 그런 거라면 와서 한번 아이를 봐줘요. 문제가 있는지.”온지유가 S 국에서 종군 기자로 일하면서 인명진도 따라 이사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작은 진료소를 열어 근처 주민들의 병을 치료했다.인명진이 온지유를 향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던지라 법로는 인명진의 신분을 바꾸어 평범한 사람으로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인명진은 평소에서 진료소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자주 시간을 내서 온지유를 보러 왔다. 하지만 온지유도 바빴던지라 매번 만날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매번 먼저 연락하면서 온지유가 있는지 물었다.온지유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지만 온지유는 답장하지 않았다. 바쁘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매번 문자 보내면 방해가 될 것 같아 문자도 줄였다. 하지만 신무열이 그를 부르면 그는 바로 달려갔다.여하간에 신무열은 온지유의 오빠였으니까.인명진은 정확히 반 시간 후 신무열 앞에 나타났다. 별이를 본 순간 인명진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신무열은 그런 인명진의 모습을 바로 눈치챘다.“왜요. 뭐 문제 있어요?”인명진은 이상하게도 눈앞에 있는 아이가 어린 시절 온지유와 너무도 닮아 보였다. 그때의 온지유는 어둠 속에서만 살던 그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던지라 어린 시절 온지유의 모습을 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는 자주 온지유의 모습을 떠올렸다. 특히 온지유의 두 눈을 그는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온지유가 낳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의사가 진단을 내렸다. 여이현
인명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저도 소집 당해서 오늘에야 나올 수 있었어요.”신무열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내 말을 이었다.“일단 나와 아이만 유전자 검사 해줘요.”“네.”다만 인명진이 별이의 피를 뽑으려고 할 때 별이는 심하게 거부했다. 이를 악물고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아이의 모습은 꼭 궁지에 몰린 작은 맹수 같았다.별이는 빠르게 이곳저곳 도망쳤다.신무열은 참을성 있게 아이를 달랬다.“우리는 그저 검사만 해보려는 거야. 네가 어디 아픈 데 없나. 우리는 지유의 절친한 친구야. 다른 악의는 없어.”“거... 짓... 말!”별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신무열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다만 그는 이미 검사해보겠다고 마음먹었던지라 빠르게 별이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별이는 누군가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신무열이 고개를 드니 그곳엔 온지유가 있었다.온지유의 뒤엔 키가 190cm가 넘는 남자도 있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매에 신무열은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여이현 씨?”“네, 맞아요.”여이현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녀와 여이현이 이곳으로 오기까지 고작 2시간 걸렸다. 온지유가 얼른 빨리 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빠르게 달려온 것이다.하지만 신분 탓에 그는 마스크를 쓰고 올 수밖에 없었다.별이는 온지유를 본 순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다.온지유도 그러했다.그녀는 몸을 굽히며 별이의 손을 잡은 후 품에 꽉 끌어안았다.“별아,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신무열과 인명진은 바로 눈치챘다. 온지유가 이미 별이의 신분을 알게 되었음을 말이다. 별이는... 그러니까 온지유와 여이현의 아이였다.여이현이 죽지 않았으니 아이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인명진은 그제야 자신이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인명진은 신무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 의미를 알아챈 신무열은 바로 자리를 비켜주며 세 사람만
온지유는 별이의 손을 꼭 잡고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녔다.그녀는 결심했다. 종군 기사를 그만두고 별이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로. 때가 되면 별이를 학교에 보내고 그녀는 다른 직업을 찾아 돈을 벌면 된다.여이현은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인명진은 비록 모든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의 눈빛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었다.여이현이 죽으면 그에게 기회가 차려질 줄 알았다. 하지만 5년 동안 노력했지만 온지유는 여전히 그를 남자로 보지 않았다.현재 여이현이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까지 살아있으니 그에게 더욱 기회는 없었다.그래도 그는 온지유가 행복하길 바랐다.신무열은 온지유의 편이었다. 온지유가 누구를 선택하든 그는 늘 온지유를 응원했다.“미리 경고하는 데 절대 그 사랑이 원망으로 바뀌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만약 지유랑 여이현의 사이를 방해하기라도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인명진은 온지유에게 집착했던지라 신무열은 인명진이 이성을 잃고 그들을 건드릴까 봐 걱정되었다.그에겐 동생이라곤 온지유 한 명뿐이었다. 온지유는 5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이현을 잊지 못했다. 더구나 죽은 줄 알았던 아이까지 살아있으니 그는 당연히 온지유가 이젠 행복하길 바랐다.인명진은 순간 실소를 터뜨렸다.“만약 정말로 여이현을 해치고 싶었던 거라면 이미 5년 전에 손을 썼을 겁니다.”여이현이 떠난 5년 동안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온지유의 마음을 얻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줄은 몰랐다.애초에 그는 온지유의 마음을 얻어야 자신도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진료소는 S 국에 있었고 그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온지유가 그를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언제든 그녀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온지유를 위해서라면 온지유와 여이현에 사이에 어떤 커다란 장애물이 있던지 그가 전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이현은 온지유 앞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지유야, 우리 재혼하자. 같이 경성으로 돌아가는 거야.”이것이 여이현이 내린 결정이었다.가족끼리 단란하게 모여 사는 것은 온지유가 꿈에 그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이 되려고 하니 온지유는 믿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뻗어 무의식적으로 여이현의 얼굴을 만지며 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 했다.온지유는 순간 목이 막혔다.그런데 그 순간 별이는 갑자기 발작 증세를 보이더니 고통스러운 얼굴로 변했다.“별아!”온지유는 소리를 질렀다.별이의 갑작스러운 상태에 온지유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은 별이의 엄마로서 아이를 걱정하고 있다.온지유는 얼른 별이를 안았다. 온몸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인명진은 빠르게 다가왔다.“지유야, 일단 나한테 넘겨. 내가 치료해 볼게!”온지유는 아이를 인명진에게 넘겼다.하지만 여이현은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별이가 브람 곁에 있을 때 정해진 시간에만 밥을 먹고 하루에 무조건 특별히 제작한 우유를 먹는다는 것이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다음 순간 온지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지유야, 아무래도 별이를 데리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사흘만 기다려줘. 내가...”“별이한테 약이 필요한 거지? 이현 씨, 나도 같이 갈래!”별이의 상태를 보니 천식 발작이 아닌 어떠한 약물 반응 같았다.게다가 여이현이 내뱉은 말을 들어보니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힐끗 보더니 몇 초간 침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5년이나 지났던지라 온지유는 더 이상 예전의 온지유가 아니었다.다만 이번엔 제때 나타나지 못했기에 결국 온지유도 브람의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 만약 온지유를 S 국으로 데리고 간다면 브람이 무조건...그 순간 귓가에 온지유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이현 씨, 나 버릴 생각은 하지 마!”“...알았어.”온지유의 확고한 눈빛에 여이현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자신이 아무리 온지유
“네, 그럴게요.”인명진은 빠르게 대답했지만 온지유는 불만이 있어 보였다. 온지유가 말을 하려던 순간 인명진이 바로 그녀를 붙잡았다.“지유야, 지금 상황에서 네가 따라 들어간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거야. 그러니까 우리 이현 씨 말대로 여기서 기다리자. 걱정하지 마. 내가 여기 있는 한 어떤 약물이든 다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인명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 설령 그가 다시 약인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온지유는 인명진이 분명 자신을 도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별이가 너무도 걱정되었다. 고작 5살 된 아이가 이런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그녀는 정말이지 대신 아파주고 싶을 정도다.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가슴이 아파도 감정적으로 나서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감정이 아닌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했다.한편 여이현은 별이를 안고 브람을 찾아왔다.브람은 그가 찾아올 것을 예상하였지만 별이를 안고 찾아올 줄은 몰랐다.“아이를 데리고 갔으면서 왜 다시 안고 돌아온 거지? 넌 여기가 오고 싶으면 오고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는 곳일 줄 아는 거냐?”브람은 뒷짐을 지고 서서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그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여이현이 왜 자신에게 당당하게 대들었는지를. 알고 보니 이미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그런데...여이현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시고 얼른 약 주세요. 어차피 저 말고도 자식이 둘이나 더 있으시잖아요. 그러니 저는 포기하시고 그 두 사람한테 물려줄 생각 하세요.”브람에겐 다른 후계자가 있었다.“내가 누굴 후계로 선택하든 내 마음이다. 네가 이래라저래라할 처지가 못 된다고 생각하는데. 약을 받고 싶으면 그럼 내 말대로 해...”“그럼 이 아이는 지유가 데리고 가게 해주세요.”여이현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아주 차갑고도 확고한 목소리로 말이다.브람의 비웃음은 더 짙어졌다.“넌 네가 그런 조건을 내걸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니?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브람은 가만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여이현은 별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눈빛으로만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상황이 이렇게 되길 바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브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얼른 약을 주세요. 전 처음부터 지금까지 화국인이었어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건 단지 절 살려주셔서예요. 전 다시 돌아갈 거예요.”“대통령님, 화국인이 우리나라에 있다니요!”“대통령님, 제발 다시 생각해 주세요!”...이 말들은 전부 브람의 충신들이 한 말이었다.브람은 여이현을 보았다. 여이현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자신이 하는 행동이 잘못된 행동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이것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잊지 마라. 너는 뭐라 해도 여기서 태어난 아이다! 만약 내가 화국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너는 그때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거다! 여이현...”“당연히 잊지 않았죠. 하지만 아버지도 잊지 마세요. 전 화국의 대장일 뿐 아니라 화국의 군대가 S 국을 공격하는 걸 원치 않으신다면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제 아내와 아들이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전쟁을 일으킬 사유가 되거든요!”여이현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브람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다른 사람들은 브람을 설득하기 시작했다.“대통령님, S 국엔 이미 수많은 적이 있습니다. 화국은 지금까지 저희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만약 화국까지 적국으로 돌린다면... 지금 저희 국정으로는 어림도 없다고요!”“대통령님, 제발 나라와 국민을 위해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브람은 그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래, 여이현. 네 뜻대로 해주마.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하렴. 모든 일이 다 네 뜻대로 되는 건 아니란다.”브람의 눈빛은 점점 서늘하게 빛났다.지금 이 순간 여이현은 느끼게 되었다. 브람은 더는 그에게 약을
만약 여이현과 별이가 S 국에 남는다면 온지유는 혼자가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인명진은 지신에게 기회가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온지유는 혼자가 되겠지만 아마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것이 뻔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온지유가 즐겁고 행복하길 바랐다.인명진은 입술을 틀어 물며 앞으로 성큼 나섰다.“지유야,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그리고 법로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잊었어? 내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인명진의 말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법로는 연구와 실험을 좋아했던지라 인명진을 약인으로 만들었었다.그렇다면 법로에게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온지유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을 느꼈다.“이현 씨, 우리 일단 Y 국으로 가자!”“그래.”여이현은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지금의 그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은 온지유였다.인명진은 그들을 따라갔다.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온지유가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평생 이렇듯 그녀의 뒷모습만 봐도 상관없었다.별이가 깨어났다.여이현과 온지유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본 별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너무 기뻤다. 두 사람이 전부 자신의 곁에 있어 줘서.“꿈... 같... 아... 요...”별이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온지유는 그런 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별아, 괜찮아. 이젠 꿈이 아니라 전부 현실이 될 거야. 엄마는 이제부터 별이 곁에 늘 붙어 있을 거고 아빠도 있어. 나랑 별이 아빠가 자란 곳으로 돌아가서 우리 별이는 학교도 다닐 거야. 별이가 튼튼해지면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어.”“네.”S 국에서 Y 국으로 가기엔 거리가 좀 있었다.하지만 여이현은 항상 최단 경로로 계산해 움직였다. 온지유가 별이를 안고 법로의 앞에 나타났을 때 법로는 그 순간 모든 걸 눈치챘다. 거기다 신무열이 그에게 온지유의 아이와 여이현이 죽지 않았음을 알렸기에 그는 지금 온지유에게 약속했다.“걱정하지 말아라. 아이는 나한
젊은 남자가 먼저 달려들었다.인명진이 넋을 놓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기습을 한 것이다.몽둥이가 그대로 등에 내리꽂혔다.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은서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당황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명진을 부축했다.“원장님, 괜찮으세요? 왜 저 대신 맞으신 거예요!”몸을 곧게 세운 인명진은 그 와중에도 덤덤히 답했다.“은 선생님 대신 맞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저를 향해 오던 거였어요.”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확인한 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충격이 상당했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과거 법로의 약인 이었던 그는 이런 고통에 익숙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그는 천천히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고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짓눌렀다.젊은 남자는 그 눈빛에 움찔했지만 순간뿐이었다.“다 너 같은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다면 내 동생은 지금도 멀쩡했을 거라고! 돌팔이 의사! 더러운 병원도 다 망해버려야 해!”은서우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나섰다.“당신은 어떻게 우리 병원의 잘못이라고 확신해요?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게 잘못인가요?”남자는 주먹을 꽉 쥐고 은서우를 노려보았고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아니면 또 누가 있지? 간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름 후로 수술을 잡았어. 하지만 병세가 악화해서 수술을 앞당겼지.”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자의 말을 들었다.은서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명진을 바라봤다.그녀는 인명진이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우린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려서 수술비를 마련해서 딸을 수술실로 보냈어.”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잘 된 거 아닌가요? 병세가 악화했다면 이식을 빨리 진행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죽었을 거예요.”눈이 붉
“모르겠어요. 본인 말로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면서 급히 떠났어요.”은서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았다.‘세상에 이렇게 우연이 반복될 수 있나?’오히려 그 인턴은 들통날 걸 알고 단서를 끊어 그들이 더는 추궁할 수 없도록 미리 도망친 것처럼 보였다.은서우의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인명진은 담담했다. 그는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고마워요. 수고했어요.”그는 곧 은서우를 잠시 바라보고는 뒤돌았고 은서우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그때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은서우를 불러 세웠다.“은 선생님, 언제부터 원장님이랑 그렇게 친했어요? 그리고 요즘 다들 원장님이 선생님을 차기 부원장으로 키우려고 한다던데 진짜예요?”은서우는 순간 당황했다.인명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 일을 떠벌일 순 없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간호사가 다른 질문을 이을까 봐 급히 자리를 떠났다.복도로 나왔을 때 인명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무도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인명진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은서우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조용히 그에게 다가갔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인명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면 돼요. 이름이랑 신분이 가짜일 리는 없잖아요.”그가 인턴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달은 은서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엉터리 의사, 거기 서!”깜짝 놀란 은서우가 뒤를 돌아보니 며칠 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환자의 가족들이었다.한 쌍의 부부와 젊은 남성이 함께였는데 그들의 손에는 벽돌이나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은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
가녀린 팔다리를 지녀 살짝 밀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은서우였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인명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인명진도 수술이 늦게 끝나 자정을 넘길 때가 많았는데 병원을 나설 때 늘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바로 은서우였다.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홀로 남아 의료 관련 논문을 읽으며 밤을 새웠다.그렇기에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기회를 주고 싶었다.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는 은서우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소씨 가문이 끝없이 돈을 요구할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고 소태훈이 협박할 때도 울지 않았다.하지만 자신을 도와줬던 인명진 앞에서는 감정을 쉽게 다스리지 못했다.“제가 원장님을 실망하게 한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바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사직서 낼게요. 직접 신고하지 않으셔도 자수하겠습니다.”그 말을 듣자 인명진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누가 나가라고 했나요?”그 말에 두 사람 모두 순간 얼어붙었다.은서우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멍해졌고 인명진 역시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다.하지만 곧 깨달았다.그녀는 공범이 아니라 단순히 속아 넘어간 어찌 보면 불쌍한 희생양이었다.인명진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내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전문 지식 배경이 탄탄하다는 건 알겠어요. 지금 저한테는 조수가 필요합니다. 병원에서 은 선생님을 대신할 사람은 없어요.”은서우는 눈을 깜빡였다.갑자기 하늘에서 커다란 떡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있었고 인명진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그러니까 더 이상 자책하지 마세요. 은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지금 중요한 건 그 인턴을 찾는 거예요.”그 말에 은서우는 즉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상처 부위가 당겨져 갑작스러운 통증에 숨을 들이마셨다.그녀는 머리를 부딪친 것 외에도 팔꿈치와 무릎에 멍이 들었다.내상은 심하지
그때 은서우가 큰 소리로 외쳤다.“말할게요!”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손가락을 꼬아 쥔 채 눈을 자주 깜빡였다. 모든 몸짓과 표정이 지금 극도로 망설이고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인명진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자신이 몰래 사진 촬영을 했다는 사실까지 포함하여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털어놓았다.모든 걸 말하고 나니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반면 인명진은 그녀가 말하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의 반응을 알아차린 은서우는 너무 일찍 안도한 자신을 한탄했다.“죄송합니다. 고소하고 싶으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은 건 자신의 앞날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이상 인명진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컸다.한 번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계속해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이제 그녀의 운명은 인명진의 손에 달려 있다.인명진은 처음엔 정말 화가 났다.누구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몰래 사진을 찍혔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평범한 용도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면 문제가 심각했다.하지만 죄책감에 가득 찬 은서우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결국 수없이 맴돌던 말들은 삼켜지고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그 인턴은 어디 있죠?”“네?”은서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인명진은 다시 한번 천천히 물었다.“은 선생님한테 명령한 그 인턴 누구냐고요. 은 선생님이 주범이 아니라면 주범을 찾아서 직접 물어봐야겠죠.”그냥 묻힐 문제가 아니었다.어떤 의도로 몰래 촬영된 건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서우가 카카오톡을 추가한 인턴이 당사자임을 설명했다.“민지아라는 인턴이었어요. 얼마 전에 온 인턴인데 원장님은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어요.”그런데 예상과 달리 인명진은
환자의 가족이 갑자기 달려들어 은서우를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바닥에 넘어지며 이마가 복도에 있는 의자에 부딪혔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해졌다.인명진은 은서우를 부축하고 이마에 남은 선명한 붉은 자국을 보고 가족들을 노려보았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가족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뭐 하는 거냐고? 너 같은 엉터리 의사가 물을 자격이나 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내 딸은 적어도 몇 년은 더 살았을 거야! 내 딸이 죽은 건 다 네 탓이야!”인명진도 놀랐지만 품에 안긴 은서우의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람들이 다가오기 전에 은서우를 들어 올렸다.간호사들의 비명 속에서 그는 가족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차갑게 쳐다보며 지나갔다.“시위하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비키세요.”싸늘한 인명진의 시선에 그들은 움찔하며 결국 길을 열어주었다.인명진은 빠르게 은서우를 진료실로 옮겼다.그때 은서우가 깨어나면서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목소리는 여전히 약하고 가냘팠다.“원장님, 정말 아니에요. 저 믿어 주세요.”그녀의 창백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자 인명진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요?”“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미간을 찌푸린 인명진은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처음에는 은서우가 강인한 사람이라 좋은 후배로 키울 만한 인재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녀가 자신에게 약을 탄 걸 알고 실망했다. 그 후 한동안 그녀를 믿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실망도 사라지고 그저 착잡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특히 은서우가 아까 자신을 지키려 앞서갔을 때 그는 더욱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분노가 가득한 가족들을 마주하면서도 자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건가?’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안명진은 찡그린 얼굴을 풀고 부드러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인명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은서우를 안아 들어 방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침대에 눕혔다.그는 빠르게 수건을 찾아 차가운 물에 적셔 은서우의 이마에 살며시 얹으며 그녀의 체온을 내리려 했다.아픈 은서우의 모습에 인명진의 마음은 복잡하게 얽혔다.침대 옆에 앉아 은서우를 지켜보는 그의 마음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그는 평소 은서우가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가끔 신비로운 느낌을 주긴 했지만 환자에게 보이는 그 집중력과 책임감은 가짜일 리 없었다.그는 또 두 사람이 함께 수술실에서 협력했던 장면을 회상했다. 그때 은서우는 침착하고 전문적이었는데 지금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는 은서우가 정말 나쁜 사람일지 아니면 숨겨진 사정이 있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인지 의문스러웠다.은서우는 고열에 혼미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원장님, 죄송해요. 저도... 저도 원하지 않았어요.”인명진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조용히 물었다.“그럼 왜 그런 거죠?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요?”하지만 은서우는 반쯤 잠든 상태로 계속 사과하는 말만 반복할 뿐 구체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다.시간이 흐르고 인명진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은서우의 체온도 조금 내려갔다.좁혀졌던 미간이 펴지고 호흡도 고르게 되자 인명진은 조바심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은서우의 상태가 점차 안정되는 걸 보며 결국 몸과 마음의 피로에 못 이겨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쳐 들어왔다.자연스럽게 깨어난 인명진은 먼저 은서우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얼굴이 아직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어젯밤처럼 아프고 걱정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그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혼자 교류회에 참석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고 나서 은서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아직 어지러웠던 탓에 그녀
인명진은 손을 들어 은서우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그의 손끝이 그녀의 뺨을 스치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은서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움과 쑥스러움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은 선생님, 오늘 좀 이상하신 것 같아요.”낮고 부드러운 인명진의 목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주문처럼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은서우는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에 두서가 없었다.“저... 원장님, 저는...”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인명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예상치 못한 강한 힘에 은서우는 가늘게 비명을 질렀다.“이제야 당신이 품고 있는 속셈을 알겠네요. 제 물컵에 약 탄 걸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그의 음성에는 분노와 실망이 섞여 있었다.은서우는 그가 알아챘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원장님, 아니에요. 저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요. 제발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은서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지만 인명진은 콧방귀를 뀌었다.“사정?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약까지 타려고 했죠? 은서우 씨, 제가 당신을 잘못 봤나 보네요.”“원장님, 정말 그게 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몰려온 인명진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약인으로서 각종 약에 대한 감지 능력과 면역력이 뛰어났다.처음 물이 입술에 닿았을 때 그는 바로 이질감을 느꼈다.눈치채지 못한 척 조용히 뱉어냈지만 그는 은서우의 행동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제가 그렇게 믿었는데 저한테 약을 탔네요. 정말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요?”인명진은 은서우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거침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은서우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인명진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원장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인명진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어 그대로 은서우를 방에서 쫓아냈다.그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뒤로한 채 단호하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