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매번 용서해 보려고 해도 입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고, 다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었다.법로와 노석명이 저질렀던 일들과 여태 온지유가 봐왔던 장면들은 영화처럼 뇌리에서 되새겨지며 지워지지 않았다.법로는 온지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말이 없어도 전달되었다.신무열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다 온지유를 향해 말했다.“지유야, 지금 이 시각에도 아버지가 나쁜 사람으로 보여?”하늘 아래 모든 부모는 거의 다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보살펴 줄 것이다.아들과 딸 앞에서의 법로도 물론 악인이 아니었다.입장이 달랐다 하더라도 온지유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사람을 해치지 않고 힘든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교육 받아왔던 온지유는 법로의 행위를 인정할 수 없었다.매번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아파왔다.그러면 생각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그만 해주시겠어요? 무열 씨도 쭉 법로의 곁에 있었으면 아시잖아요. 어떤일을 해왔는지.”“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들을 구해주는 너인데, 아버지도 그냥 잘못을 저지른 아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되겠어?”온지유가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신무열이 앞질렀다.온지유는 말문이 막혔다.몇 초 뒤 온지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게 많은 생명이 법로의 손에서 죽어갔어요. 나더러 그런 사람을 잘못을 저지른 아이라고 생각하라니요,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피비린내 나는 장면들을 온지유는 생생히 기억 해 낼 수 있었다. 온지유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게다가 Y국이 깨어나기 전까지 여이현과 법로는 대치하고 있었다. 온지유도 화국인이었고 말이다.온지유는 차창에 기대고 낮게 중얼거렸다.“지금은 좀 지쳤어요.”온지유는 눈을 감았다. 손을 잡고 있는 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얌전했다....S국.최근 전쟁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S국은 연합 한 주위 작은 나라들을 한 번에 쓸어 엎으려 큰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
여이현은 대통령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여이현은 가면을 쓰지 않았다.지금의 그는 S국 대통령의 셋째 아들로, 가면을 쓰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여이현이 다시 나타난 셈이 된다.한때 화국의 고위 지도자였던 여이현이 S국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을 일이다.그러나 여이현은 그런 것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조금 전 여이현은 이미 온지유와 재회한 것이 분명했다.“네가 온지유와 무슨 약속을 했든, 무슨 계획을 세웠든 상관없어. 하지만 넌 이제 S국의 사람이 되었으니 내 말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우려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다 이뤄줄 테야!”대통령은 그 말을 남기고 헬리콥터에 올랐다.그가 여기 온 것은 직접 여이현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할 말은 다 했다. 여이현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다. 그저 휴대폰을 꽉 쥐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갔다....온지유는 S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찍은 사진과 영상을 공개했다.영상 속의 소녀는 폐허 앞에서 고깃덩이를 찾아 줍고 있었다.온지유는 마이크를 들고 소녀에게 물었다.“고기를 가져가 먹으려고 하는 거야?”“아니요.”소녀의 갈색 눈동자는 차분하게 깜빡였다. 소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아니요, 이건 제 부모님이에요.”소녀는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겨우 일곱 여덟 살의 어린아이였다.영상과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노석명 연합군은 큰 비난을 받았다.평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다.S국 대통령 역시 성명을 발표했다.S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평화를 갈망하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국민들의 고통을 심히 이해하고 있다고.그가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평화를 갈구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전쟁이 계속된다면 그는 지구를 자연의 품으로 돌려놓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네티즌들은 그 발언
온지유는 별이가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별이는 온지유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러시다면 저희 쪽에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후에 아이의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도 아이를 데리고 가서 신분 등록을 하고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거예요.”“알겠습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별이와 함께 대사관에서 서류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서류 발급은 불과 몇 분 만에 끝났다.온지유가 별이와 함께 대사관을 나서는 순간 햇살이 그들 위로 내리쬐며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겹쳐진 두 그림자를 본 온지유는 잠시 정신이 팔렸다. 자신의 아이가 곁에 있었다면 역시 이렇게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온지유의 아이도 아마 지금쯤 별이만큼 컸을 것이다.아이를 생각하자 온지유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금까지도 여이현은 아이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다.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여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랜 시간 연결음이 울리고, 온지유가 포기할 무렵 전화 너머에서 여이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유야.”여이현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였다.봐라, 전화는 분명 연결이 되는데 그날 이후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당신 계획이 뭔지도 모르겠고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아. 이현 씨는 이현 씨의 입장과 임무가 있을 테고 나도 거기에 화를 낼 일은 아니었어. 하지만 아이의 행방은 알려줘. 나는 그 아이의 엄마야. 나에겐 내 아이의 행방을 알 권리가 있어.”그녀의 아이. 온지유는 아이를 잠깐 봤을 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별이를 입양하려는 것도 자신도 엄마이기에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었다.“알겠어, 지유야. 난 네가 행복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야. 아이는...”“또 아이가 죽었다고만 말하려는 거야?”온지유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여이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전화는 다시 끊어졌다.‘뚜둑’ 하는 통화 종료음이 휴대폰에서 들려왔다. 온지유는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
온지유의 친부가 Y국의 법로라는 사실이 폭로되었다.또한 Y국의 내란과 법로부하들의 방화, 약탈, 노예 수용소를 설립하고 생체 실험을 한 일들이 모두 천하에 드러났다.온지유는 ‘악마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전 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평화를 외치던 여성 기자가 사실은 악마의 딸이었다니. 아버지라는 사람이 얼마나 고약한지 좀 봐!”“그나마 우리 화국이 평화를 위해서 Y국과의 문제를 추궁하지 않은 거야.”“맞아! 그렇지 않았으면 Y국은 진작에 멸망했을걸!”“어이없네. 본인 아버지는 악마인데 자신은 정의의 여전사가 되고 싶다니.”“경성에 있다는 건 법로가 일부러 보낸 스파이 아니야?”“온지유는 예전에 여이현의 아내였어. 여이현이 Y국에서 죽은 것도 온지유가 죽인 걸 거야!”“스파이는 죽어라! 온지유는 기자로서의 자격이 없고 여기서 위선을 보여줄 자격도 없어!”“빨리 화국에 신고하자! 화국군대가 온지유를 체포해 처벌하게 해야 해!”“죽여버려!”...이런 발언들을 온지유는 샅샅이 다 보았다.온지유는 그동안 정의를 외치고 평화를 호소하고자 했다. 그랬기에 국제 포럼도 늘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도가 성과를 내기 전 오히려 자신이 먼저 단두대에 오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사람들은 이 글들을 칼처럼 휘두르며 그녀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비록 지난 5년간 생사를 많이 겪으며 이 세상에서 목숨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런 말들에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신무열은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율아, 사람들이 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Y국으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언제나 네 자리가 있으니까.”온지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신무열을 바라보았다. 온지유의 검은 눈동자에는 혼란과 의문 그리고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율아, 나는 네가 돌아오길 바라지만 절대 이런 비열한 수단을 쓰진 않을 거야. 만약 그런 수단을 썼다면 우리는 5년 전에 네가 S국으로 와 종군 기자가 되는 걸 도와주지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