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매번 용서해 보려고 해도 입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고, 다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었다.법로와 노석명이 저질렀던 일들과 여태 온지유가 봐왔던 장면들은 영화처럼 뇌리에서 되새겨지며 지워지지 않았다.법로는 온지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말이 없어도 전달되었다.신무열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다 온지유를 향해 말했다.“지유야, 지금 이 시각에도 아버지가 나쁜 사람으로 보여?”하늘 아래 모든 부모는 거의 다 자식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보살펴 줄 것이다.아들과 딸 앞에서의 법로도 물론 악인이 아니었다.입장이 달랐다 하더라도 온지유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사람을 해치지 않고 힘든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교육 받아왔던 온지유는 법로의 행위를 인정할 수 없었다.매번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아파왔다.그러면 생각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그만 해주시겠어요? 무열 씨도 쭉 법로의 곁에 있었으면 아시잖아요. 어떤일을 해왔는지.”“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들을 구해주는 너인데, 아버지도 그냥 잘못을 저지른 아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되겠어?”온지유가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신무열이 앞질렀다.온지유는 말문이 막혔다.몇 초 뒤 온지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게 많은 생명이 법로의 손에서 죽어갔어요. 나더러 그런 사람을 잘못을 저지른 아이라고 생각하라니요,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피비린내 나는 장면들을 온지유는 생생히 기억 해 낼 수 있었다. 온지유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게다가 Y국이 깨어나기 전까지 여이현과 법로는 대치하고 있었다. 온지유도 화국인이었고 말이다.온지유는 차창에 기대고 낮게 중얼거렸다.“지금은 좀 지쳤어요.”온지유는 눈을 감았다. 손을 잡고 있는 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얌전했다....S국.최근 전쟁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S국은 연합 한 주위 작은 나라들을 한 번에 쓸어 엎으려 큰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
여이현은 대통령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여이현은 가면을 쓰지 않았다.지금의 그는 S국 대통령의 셋째 아들로, 가면을 쓰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여이현이 다시 나타난 셈이 된다.한때 화국의 고위 지도자였던 여이현이 S국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을 일이다.그러나 여이현은 그런 것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조금 전 여이현은 이미 온지유와 재회한 것이 분명했다.“네가 온지유와 무슨 약속을 했든, 무슨 계획을 세웠든 상관없어. 하지만 넌 이제 S국의 사람이 되었으니 내 말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우려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다 이뤄줄 테야!”대통령은 그 말을 남기고 헬리콥터에 올랐다.그가 여기 온 것은 직접 여이현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할 말은 다 했다. 여이현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았다. 그저 휴대폰을 꽉 쥐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갔다....온지유는 S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찍은 사진과 영상을 공개했다.영상 속의 소녀는 폐허 앞에서 고깃덩이를 찾아 줍고 있었다.온지유는 마이크를 들고 소녀에게 물었다.“고기를 가져가 먹으려고 하는 거야?”“아니요.”소녀의 갈색 눈동자는 차분하게 깜빡였다. 소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아니요, 이건 제 부모님이에요.”소녀는 울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겨우 일곱 여덟 살의 어린아이였다.영상과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노석명 연합군은 큰 비난을 받았다.평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다.S국 대통령 역시 성명을 발표했다.S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평화를 갈망하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국민들의 고통을 심히 이해하고 있다고.그가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평화를 갈구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전쟁이 계속된다면 그는 지구를 자연의 품으로 돌려놓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네티즌들은 그 발언
온지유는 별이가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별이는 온지유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러시다면 저희 쪽에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후에 아이의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도 아이를 데리고 가서 신분 등록을 하고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거예요.”“알겠습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별이와 함께 대사관에서 서류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서류 발급은 불과 몇 분 만에 끝났다.온지유가 별이와 함께 대사관을 나서는 순간 햇살이 그들 위로 내리쬐며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겹쳐진 두 그림자를 본 온지유는 잠시 정신이 팔렸다. 자신의 아이가 곁에 있었다면 역시 이렇게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게다가 온지유의 아이도 아마 지금쯤 별이만큼 컸을 것이다.아이를 생각하자 온지유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금까지도 여이현은 아이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다.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여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랜 시간 연결음이 울리고, 온지유가 포기할 무렵 전화 너머에서 여이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유야.”여이현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였다.봐라, 전화는 분명 연결이 되는데 그날 이후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당신 계획이 뭔지도 모르겠고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아. 이현 씨는 이현 씨의 입장과 임무가 있을 테고 나도 거기에 화를 낼 일은 아니었어. 하지만 아이의 행방은 알려줘. 나는 그 아이의 엄마야. 나에겐 내 아이의 행방을 알 권리가 있어.”그녀의 아이. 온지유는 아이를 잠깐 봤을 뿐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별이를 입양하려는 것도 자신도 엄마이기에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었다.“알겠어, 지유야. 난 네가 행복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야. 아이는...”“또 아이가 죽었다고만 말하려는 거야?”온지유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여이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전화는 다시 끊어졌다.‘뚜둑’ 하는 통화 종료음이 휴대폰에서 들려왔다. 온지유는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
온지유의 친부가 Y국의 법로라는 사실이 폭로되었다.또한 Y국의 내란과 법로부하들의 방화, 약탈, 노예 수용소를 설립하고 생체 실험을 한 일들이 모두 천하에 드러났다.온지유는 ‘악마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전 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평화를 외치던 여성 기자가 사실은 악마의 딸이었다니. 아버지라는 사람이 얼마나 고약한지 좀 봐!”“그나마 우리 화국이 평화를 위해서 Y국과의 문제를 추궁하지 않은 거야.”“맞아! 그렇지 않았으면 Y국은 진작에 멸망했을걸!”“어이없네. 본인 아버지는 악마인데 자신은 정의의 여전사가 되고 싶다니.”“경성에 있다는 건 법로가 일부러 보낸 스파이 아니야?”“온지유는 예전에 여이현의 아내였어. 여이현이 Y국에서 죽은 것도 온지유가 죽인 걸 거야!”“스파이는 죽어라! 온지유는 기자로서의 자격이 없고 여기서 위선을 보여줄 자격도 없어!”“빨리 화국에 신고하자! 화국군대가 온지유를 체포해 처벌하게 해야 해!”“죽여버려!”...이런 발언들을 온지유는 샅샅이 다 보았다.온지유는 그동안 정의를 외치고 평화를 호소하고자 했다. 그랬기에 국제 포럼도 늘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도가 성과를 내기 전 오히려 자신이 먼저 단두대에 오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사람들은 이 글들을 칼처럼 휘두르며 그녀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비록 지난 5년간 생사를 많이 겪으며 이 세상에서 목숨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런 말들에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신무열은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율아, 사람들이 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Y국으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언제나 네 자리가 있으니까.”온지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신무열을 바라보았다. 온지유의 검은 눈동자에는 혼란과 의문 그리고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율아, 나는 네가 돌아오길 바라지만 절대 이런 비열한 수단을 쓰진 않을 거야. 만약 그런 수단을 썼다면 우리는 5년 전에 네가 S국으로 와 종군 기자가 되는 걸 도와주지
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이 아직 이곳에 있다는 것을 걱정했다. 그 사람들은 신무열에게도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온지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표정은 어두웠다.“무열 씨가 먼저 떠나요.”“네가 여기 있는데 내가 널 두고 혼자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신무열은 온지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는 온지유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게다가 Y국과 화국의 현재 관계를 생각해 보면 화국이 신무열을 곤란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특히 여이현의 죽음은 이미 보고와 심사를 거친 것이었다.온지유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온지유는 스파이가 아니었지만 화국도 국민들에게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조사를 받아야 했고, 그렇다면 최근의 통화 기록도 포함될 것이다.온지유가 끌려가려 하자 별이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결국 온지유는 몸을 낮추어 별이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별아, 너는 아저씨랑 잘 있어. 난 이 아저씨들이랑 먼저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아저씨 말 잘 들어야 해. 알겠지?”온지유는 별이에게 신신당부한 뒤 신무열을 올려다보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무언의 눈빛은 더 강렬하게 신무열에게 전해졌다.신무열은 진중하게 말했다.“걱정 마. 내가 이 아이를 잘 돌볼게.”온지유의 성격을 잘 아는 신무열은 그녀가 꼭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온지유는 어영부영 자리를 떠나기보다는 명확한 해결을 원했다.이 아이가 온지유의 가장 큰 걱정거리라면 신무열은 아이의 출처가 어디이든 일단 온지유를 위해 잘 돌보기로 결심했다.온지유가 떠나자 신무열은 별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누가 널 여기로 보낸 거지? 말을 못 하는 건 같지는 않은데.”그는 온지유와 함께 지내는 동안 이 아이가 말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처럼 보였다.하지만 아이는 늘 깊은 생각에 잠겨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무엇보다도 이 아이가 온지유 곁에 온 것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마침내 온지유의 머리를 덮고 있던 자루가 벗겨졌다.차 안에는 오렌지색 실내등이 켜져 있었고 안에 있는 남자들 모두가 총을 들고 있었다.온지유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의 옆머리에는 약간의 백발이 섞여 있었다.그쪽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남자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입을 열었다.“왜 우리가 널 잡아서 노석명과 맞바꾸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굴렸다.그들이 자신을 노석명과 맞바꾸려는 게 아니라면 대체 목적이 무엇일까?그녀가 보도한 내용이 연합군의 이익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까? 이들이 연합군이라면 그녀를 잡아 Y국과 거래하려는 걸까?온지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녀는 아직 신무열과 법로를 한 가족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방금의 말은 일부러 이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풀어주길 바랐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말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그렇다면 두 사람의 짐이 되기도 싫었다.“그게 아니라면 날 죽여요.”온지유는 몸을 뒤로 기대며 말을 던졌다. 그녀는 이미 각오를 한 상태였다.여이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를 끌어들일 수도 없었다.“안심해. 시간문제일 뿐이니까.”말을 마치고 남자는 온지유의 목을 손날로 내리쳤다.온지유는 곧바로 기절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해변에 도착했다.그들은 온지유를 차에서 끌어냈다. 온지유를 조각내어 바다에 던져 상어의 먹이로 만들 속셈이었다.하지만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탕! 탕!”주변 사람들이 연달아 쓰러지고 남자는 뒤를 돌아봤다. 여이현이 총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도련님, 저는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이현이 그의 무릎에 총을 쏘았다.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고 여이현은 손짓을 하여 부하들이 그를 끌고 가게 했다.해변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가운데 여이현은 온지유를 꼭
여이현은 그녀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사건의 당사자는 바로 온지유였다.온지유에게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고집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그녀가 매우 화가 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잠시 침묵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사람들은 내 친부의 부하들이야. 여진숙은 내 친모가 아니고 여재호도 내 친부가 아니었어. 내 아버지는 S국의 대통령이야. 그때 내가 강에 빠졌을 때 나를 구한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였어. 난 오랫동안 상처를 치료했고, 그 후에 아버지가 나에게 많은 것을 마련해 주었지... 지유 야, 그때 나는 아버지와 거래를 했어. 꼭 그에게 약속해야만 했던 일들이 있었어.”여이현이 죽지 않았음에도 그녀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온지유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이현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여전히 가슴이 저려왔다.온지유는 지금 바로 그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결국 참아냈다.아이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내 아이는? 이현 씨, 나도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내게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어. 우리 애, 진짜 죽은 게 맞아?”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꽉 잡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지유야, 그 아이는 이미 네 곁으로 보냈어. 나는 아이를 네 곁에서 잠시 머물게 한 뒤 이쪽 일을 정리할 계획이었어. 그런데...”여이현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이 모든 세월 동안, 그는 온지유에게 미안한 일만 해왔다.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왜 그걸 이제서야 말해? 알아? 나 그 아이를 거의 버릴 뻔했어!”온지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친아들이 바로 별이었다는 것을.그래서 별이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었다.별이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던 것, 별이가 했던 말들이 다 이해되었다.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여이현의 손을 붙잡고 세게 물었다.하지만 여이현은 눈썹 하나
온지유는 여이현을 밀어내며 말했다.“당신은 당신 일을 하세요. 아이만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나는 어떻게 돼도 좋다는 거야?”여이현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온통 온지유에게로 향했고 그 속에는 붉은 기운이 서서히 퍼져갔다.눈 속에 슬픔이 피어올랐다.여이현은 온지유가 분노하고 그를 원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다. 운명과 싸울 수 없었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날 수도 없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힐 듯했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의 이마에 있는 흉터는 그렇게 선명했다. 머리에는 이미 흰머리가 돋아 있었다.심장이 쓰라렸다.온지유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다 당신만의 이유가 있겠죠. 나는 당신을 막을 수 없고 도울 수도 없어요. 지금은 내 아이를 찾으러 가고 싶을 뿐이에요.”지금 온지유는 빨리 별이의 곁으로 돌아가 어미로서 5년의 공백을 메우고 싶을 뿐이었다.여이현의 가슴은 통증으로 요동쳤다.온지유가 그를 원망하고 그에게 화를 내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여이현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목에 피비린내가 차올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그는 억지로 숨을 가라앉히며 말했다.“먼저 뭘 좀 먹어. 필요한 걸 가지고 곧 돌아올게.”그는 죽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는 급히 방을 나섰다.문을 나서는 순간 여이현은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도련님, 약을.”남자가 빠르게 다가와 작은 약병에서 세 알을 꺼내 여이현에게 건넸다.여이현은 약을 삼키고 벽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남자는 말했다.“대통령 측에서 더 많은 경호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도련님도 먼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대통령은 온 힘을 다해 그가 후계자로 남길 원했고 지금 여이현이 빠지거나 대립하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을 테다.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나는 떠나지 않아.”온지유가 이미 외면한 지금 그가 다시 떠난다면 온지유는
온지유는 여자아이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사고를 당하거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그녀는 다시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무슨 일인지 이모한테 말해 줄래? 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넌 엄마 아빠가 없어?”소녀는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는 떠났어요. 다들 아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엄마도 절 혼자 두고 떠나버렸어요. 어디로 간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절 돌보지 않아서 집에서 굶어 죽을 뻔했어요.”여자아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온지유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이야기를 듣고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아이를 짐스럽게 여겨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다.이렇게 어린아이가 집 주소와 전화번호는 물론 이름까지 모른다니 말이다.“이모,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어요. 아빠랑 엄마는 그냥 저를 사월이라고만 불렀어요.”소녀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속삭였다.“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런 거겠죠? 제가 좀 더 똑똑했으면 엄마가 절 버리지 않았을 텐데...”“아니야.”온지유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몰라 머뭇거렸다. 아이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잘못은 그녀의 부모에게 있었다.여자아이를 사월이라고만 부르며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으니,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더구나 아이를 낳았다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아이가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이유로도 아이를 버릴 권리는 없었다. 모든 아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진실을 그대로 말한다면, 소녀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길까 두려웠다. 아이에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했다.온지유는 여자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냈다.“아마도 네 엄마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일이
강원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 되었다.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가장 큰 백화점으로 갔다. 그리고 한참 구경하고 나서 백화점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이때 백화점 안에서 귀를 찌르는 화재 경보음이 들렸다.“불났나 봐. 빨리 나가자.”여이현은 별이를 훌쩍 안아 올리며 온지유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은 함께 출굴 나갔다.그들이 출구에 갔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백화점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밖으로 밀려 나왔다.여이현은 별이를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인파 속에서 흩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 말이다. 특히 별이는 아직 어린아이기 때문에 어른들 틈에서 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았다. 별이도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기에 여이현을 꼭 끌어안았다.이때 한쪽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된 온지유는 이런 소리에 유독 예민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자 혼자 울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는 별이 또래로 보였다.여자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인파 속에 있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댔다. 커다란 발이 이미 그녀의 발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온지유는 단호하게 여이현의 손을 놓았다.“별이 데리고 먼저 나가. 우린 밖에서 합류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여자아이 쪽으로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올리면서 말했다.“네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여아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 온지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과정에 그녀의 팔에 난 상처들이 드러났다.온지유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설마 아동 학대인가?’어찌 됐든 지금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앞으로 걸어가서 무사히 출구로 빠져나갔다.백화점 밖으로 나간 그녀는 우선 여이현과 별이부터 찾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별아, 너 괜찮아?”온지유는 후다닥 달려가서 별이부터 살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별이도 같은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나들이 가지 말고 아빠가 좀 더 쉬는 게 어때요? 저는 아빠가 푹 쉬시는 게 더 좋아요.”별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쉴 시간도 있어. 그러니까 마음껏 나가 놀아도 괜찮아.”여이현의 미소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는 온지유와 별이에게 말했다.“두 사람이 간 다음 인사팀에 연락해서 새 비서를 뽑으라고 했어. 어제 드디어 괜찮은 사람을 뽑아서 오늘부터 출근했어. 내 일의 일부를 맡겨놨으니까 이제 좀 숨 돌릴 수 있을 거야.”“다행이네요.”온지유는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여이현의 일이 바쁜 걸 한 번도 탓한 적 없었다. 여이현도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남편이 집안일에 손을 보태는 것을 희망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도 내심 좋았다.“밥 먹고 나서 짐 정리하자.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 하윤이는 데려갈까? 아니면 집에 둘까?”온지유는 잠시 고민했다.온하윤은 너무 어려서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괜히 데려갔다가 제대로 못 쉬면 문제였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고 말이다.이런 생각에 온지유는 온하윤을 집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이현도 마찬가지다.“밥 먹고 나서 다솔 씨한테 하윤이를 봐줄 수 있는지 연락할게. 도우미가 있는 데다가 우리 금방 돌아올 테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쉬는 시간 며칠 짜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게 바로 그가 강원시에 가기로 결정한 이유다.권다솔이라면 온지유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권다솔은 아이를 좋아하고 인내심도 있었다.식사를 끝낸 다음 그들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이도 옆에서 손을 보탰다. 그는 자신의 옷을 챙기고 나서 여이현에게서 받은 장난감도 가져왔다.“엄마, 이것도 가져가면 안 돼요?”“당연히 되지.”온지유는 장난감을 트렁크 안에 넣었다.“트렁크 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뭐든 가져도 돼.”놀러 가는 거면 당연히 기분이 최우선이었다. 이 정도 소원은 얼
두 사람이 함께 요리를 하니 속도가 훨씬 빨랐다. 온지유는 칼질을 책임지고 여이현은 볶는 걸 책임졌다. 그러자 요리도 금방 완성되었다.온지유가 완성된 음식을 가지고 나가려는 순간 여이현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요즘 수고했어. 내가 잘못했어. 일만 하느라 집안일은 너한테 다 맡겼네.”“그렇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이제 부부야. 가족끼리 그 정도 도울 수도 있는 거지.”온지유는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더군다나 일하러 간 거잖아. 노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당연히 이해해야지 노발대발 화를 낼까 봐?”여이현은 한 회사의 리더다. 그 책임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사람을 집에서도 부려 먹을 수는 없었다.온지유의 눈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행복감을 느꼈다.“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그는 저도 모르게 온지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은 당장이라도 닿을 거리에 있었다.똑똑똑.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깨졌다.온지유는 옷을 정리하고 나서 문을 열러 갔다.“별아, 깼어?”“네!”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도울게요.”“아니야, 다 됐어. 넌 수저만 챙겨서 오면 돼.”온지유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벌써 이렇게 사람 마음 헤아릴 줄 아는 걸 봐서는 커서도 아주 스윗한 사람이 될 것이다.“엄마 도와 음식이라도 나를래요.”그는 발꿈치를 들고 그릇을 내리고는 조심조심 밖으로 걸어갔다.식사 전 온지유는 거실에 가서 한창 잘 자고 있는 온하윤을 힐끗 봤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여이현이 사 온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오늘의 꿈은 사탕 맛인 듯했다.온지유는 손을 뻗어 이불을 정리해 줬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식탁 옆으로 걸어갔다.밥 먹을 때 여이현은 좋은 소식을 알렸다.“요즘 날씨 좋으니까 나들이 겸 강원시에 다녀오자.”“정말요?”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좋아요! 좋아요!”그는 진심으로 나가서 놀고 싶었다. 하지만
권다솔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저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배진호도 지금은 그녀의 생각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여이현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배진호와 권다솔이 따로 회사를 차린 시간 동안 여진그룹에는 그밖에 없어서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온지유는 여이현 혼자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게 안타까웠다. 아이들도 유독 말을 잘 들었다. 온하윤은 물론 별이도 조용히 있어 줬다.그래도 여이현은 지금처럼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보다 가족이 중요했다. 오늘 오래간만에 쉬는 시간이 생겼으니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돌아가는 길에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이현은 선물을 잔뜩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온지유는 거실에서 아이를 보다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그녀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여이현을 보게 되었다.“오늘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이 꽃은...”온지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사이에 꽃은 무슨.”“만난지 아무리 오래돼도 이런 감성이 필요한 법이야.”여이현이 꽃다발을 건넸다. 이건 그가 직접 고른 꽃이다. 꽃 한 송이 한 송이 다 사랑을 품고 매력적인 색채를 뿜어냈다.소리를 듣고 별이가 달려와서 팔을 벌렸다.“아빠! 안아줘요!”여이현은 짐을 내려놓고 별이를 훌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거실에서 한참 빙빙 돌고 나서야 내려놓았다.“아빠가 선물 사왔어. 가서 볼래?”“아빠가 준 선물이라면 뭐든 좋아요.”별이가 곧장 대답했다.여이현이 산 것은 최신형 로봇 장난감이었다. 별이가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이기도 했다. 갖고 싶다고 말 하기도 전에 여이현이 먼저 사 온 것이다.그는 장난감을 꼭 붙들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아빠 사랑해요! 선물 너무 좋아요!”“좋으면 됐어. 네 여동생 것도 있어. 빠짐없이 챙겨왔거든.”여이현은 또 가방에서 인형 두 개를 꺼냈다. 아기에게 줄 만한 작은 인형이었다.인형을 본 온하윤은 꺄르르 웃었다
이튿날, 정미진은 또다시 권다솔을 만나러 왔다. 이번에는 보온병도 챙겼다.정미진은 보온병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정중하게 말했다.“다솔 씨, 이거 잘 챙겨. 내가 귀한 보약을 가져왔어. 동창한테서 받은 건데 홍경천을 담근 물이래. 이게 임산부한테 그렇게 좋다고 했어.”“홍경천이요?”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홍경천이라는 약재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산부에게 좋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그러나 깊이 생각하기에 정미진은 너무 열정적이었다. 자꾸만 마셔보라고 재촉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 정미진은 가져온 것을 전부 먹인 다음에야 시름을 놓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권다솔은 임신 후 유독 졸음이 많아져서 오후 세네 시쯤에는 꼭 낮잠을 자야 했다. 그래서 정미진도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정미진이 돌아간 뒤, 권다솔은 평소처럼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는 갑자기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눈을 떴다.그 통증이 점점 강해져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뜬 순간, 권다솔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침대 시트 아래로 짙은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그녀는 놀라서 잔뜩 잠긴 소리로 외쳤다.“누구 없어요? 아주머니, 저 너무 아파요... 빨리요...”방문이 열리는 순간 권다솔은 시야가 검게 변하며 의식을 잃었다. 그 순간 느껴진 것은 누군가의 넓은 품에 안겼다는 것뿐이었다.그 품에서 나는 차갑고 상쾌한 향기는 마치 눈 덮인 소나무처럼 그녀를 감쌌다.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권다솔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새하얀 천장이 보였고 코끝에는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스며들었다.그녀가 뒤척이자 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배진호였다.배진호는 곧바로 몸을 숙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깼어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이제 괜찮아요?”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제대로 쉬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난 진호 어머니예요. 다솔 씨 집에 있어요?”정미진은 도우미의 뒤를 힐끗거리며 말했다.도우미는 잠깐 멈칫하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정미진은 한 번도 이곳에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늘 출근하지 않은 권다솔은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와봤다. 정미진이 온 것을 보고는 잠깐 넋이 나갔다.“아주머니? 잠깐만요... 어서 문을 열어줘요.”권다솔은 도우미에게 당부하고 부랴부랴 준비하러 갔다. 이 집에는 손님이 자주 오지 않기에 찻잎을 찾는 것만 한참 걸렸다.곱게 자란 권다솔은 차 끓이는 법조차 몰랐다. 그녀는 한참 연구하고 나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끓인 것도 물도 차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아주머니, 이거 드셔보세요.”그녀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건넸다.정미진은 경멸의 표정을 숨기고 힐끗 보기만 했다.배진호의 부모는 차를 좋아했다. 그들보다 찻잎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권다솔이 끓인 차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녀는 보기만 해도 알았다.아무런 기색도 없이 찻잔을 밀어낸 정미진은 덤덤하게 말했다.“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 사실 오늘은 그냥 널 보러 온 거야. 참, 아직 밥 안 먹었지?”권다솔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정미진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만들 기세를 보여줬다. 권다솔은 깜짝 놀라며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 옆에 있던 도우미도 얼른 나서서 만류했다.두 사람의 적극적인 만류 끝에서야 겨우 그녀의 의욕을 꺾을 수 있었다. 정미진은 조금 서운한 듯 웃으며 말했다.“요즘은 내가 밥 한 끼 하기도 어렵구나. 뭐, 괜찮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정미진은 거실에 앉아 권다솔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해 질 무렵 집을 떠났다. 도우미는 식탁을 정리하며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제가 보기에 어머님은 참 괜찮은 분 같아요. 저희 때 시어머니들은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다른 도우미도 거들며 말했다.“맞아요.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에 좋은 남편까지 있으니 사모님은 앞으로 행복
“부사장님, 왜 안 들어가세요?”권다솔은 깜짝 놀랐다. 언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직원을 바라보며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이거 대신 전해줘요.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요.”직원에게 서류를 건넨 권다솔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며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수많은 차와 정장 차림의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 하나 없는 것 같았다. 막연한 감각도 따라서 피어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배진호의 어머니 정미진이었다.“다솔 씨, 지금 시간 있어?”정미진의 목소리는 아주 무덤덤했다.“시간 되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15분 후, 권다솔은 넋을 잃은 채 산부인과 앞에 서 있었다.평일이다 보니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산부인과는 더욱 적을 수밖에 없다.간호사는 금방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권다솔 씨.”권다솔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정미진은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태도도 보기 드물게 부드러웠다.“가서 검사받아. 짐은 내가 대신 보관할게.”권다솔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정미진이 왜 그녀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왔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태도가 변했는지 전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의사는 보고서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축하드려요. 임신하셨네요.”정미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선생님, 확실한가요?”의사는 아예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직접 확인하세요. 초음파 사진에서 태아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잘 크고 있어요.”사진까지 나오자 정미진은 할 말이 없었다.병원에서 나온 다음 그녀는 직접 권다솔을 데려다줬다. 가는
배상준이 와인을 보고 지나치게 들뜬 모습을 보이자 정미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그만 좀 해! 평생 와인 처음 본 사람처럼 굴지 마. 작년에 친구가 준 와인도 있잖아?”정미진은 와인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니 배상준에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배상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최고급이야. 그거랑은 달라.”정미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그제야 배상준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된 후라 정미진은 권다솔에게 선물을 다시 가져가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했다.“뭐, 그럼 이건 받아 둘게. 진호 아빠는 다른 취미는 없고 술만 좋아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사전 준비는 꽤 철저했네.”권다솔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그녀는 손바닥을 꼭 쥐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어른들 댁에 올 때는 좋아하시는 걸 알아보고 준비하는 게 예의니까요.”정미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상준은 더 이상 정미진이 권다솔에게 계속 차갑게 굴지 않도록 나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 좀 해. 둘이 결혼한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좀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게 어때?”정미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배상준은 주눅 든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확실히 아내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그래도 그의 말이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정미진은 권다솔을 내쫓지는 않았고 함께 식사를 했다.그러나 그것뿐이었다.식사가 끝난 후 정미진은 권다솔을 문까지 배웅하며 말했다.“앞으로 별일 없으면 다솔 씨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 집은 당신처럼 귀한 아가씨를 모실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