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여이현을 밀어내며 말했다.“당신은 당신 일을 하세요. 아이만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나는 어떻게 돼도 좋다는 거야?”여이현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온통 온지유에게로 향했고 그 속에는 붉은 기운이 서서히 퍼져갔다.눈 속에 슬픔이 피어올랐다.여이현은 온지유가 분노하고 그를 원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다. 운명과 싸울 수 없었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날 수도 없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힐 듯했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의 이마에 있는 흉터는 그렇게 선명했다. 머리에는 이미 흰머리가 돋아 있었다.심장이 쓰라렸다.온지유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다 당신만의 이유가 있겠죠. 나는 당신을 막을 수 없고 도울 수도 없어요. 지금은 내 아이를 찾으러 가고 싶을 뿐이에요.”지금 온지유는 빨리 별이의 곁으로 돌아가 어미로서 5년의 공백을 메우고 싶을 뿐이었다.여이현의 가슴은 통증으로 요동쳤다.온지유가 그를 원망하고 그에게 화를 내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여이현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목에 피비린내가 차올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그는 억지로 숨을 가라앉히며 말했다.“먼저 뭘 좀 먹어. 필요한 걸 가지고 곧 돌아올게.”그는 죽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는 급히 방을 나섰다.문을 나서는 순간 여이현은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도련님, 약을.”남자가 빠르게 다가와 작은 약병에서 세 알을 꺼내 여이현에게 건넸다.여이현은 약을 삼키고 벽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남자는 말했다.“대통령 측에서 더 많은 경호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도련님도 먼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대통령은 온 힘을 다해 그가 후계자로 남길 원했고 지금 여이현이 빠지거나 대립하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을 테다.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나는 떠나지 않아.”온지유가 이미 외면한 지금 그가 다시 떠난다면 온지유는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 없이 남자를 응시했다.남자는 말을 이었다.“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도련님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겁니다.”온지유는 남자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련님은 대통령에게 구출된 뒤 3년 넘게 침대에서 혼수상태로 지내셨습니다. 당시 심장 가까이에 총알이 박혀 있었고 몸 곳곳에 골절상까지 입으셨으며 멀쩡한 부분이 없었습니다.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서도 도련님은 마취의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1년 넘게 재활과 수술을 이어갔습니다.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도련님은 항상 당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당신을 위해 대통령과 대립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제로 플랜을...”“신헌!”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이현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앞에 있던 남자는 반사적으로 군인같이 반듯한 자세로 일어섰다.여이현이 데리고 다니는 부하들은 모두 그와 같았다.방금 남자가 말한 이야기는 아직 온지유의 귀에 맴돌고 있었다. 여이현에게도 이유가 있어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 추측은 했지만, 그가 그렇게 오랜 시간 혼수상태였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오랜 재활과 수술을 견뎌낸 그도 분명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나가!”여이현은 다가와서 다시 한번 명령했다.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를 응시했지만,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둘은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그...”“먼저 말해.”둘은 잠시 멈칫하며 다시 침묵했고, 또다시 동시에 입을 열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여 온지유에게 먼저 말할 것을 권했다.온지유는 잠시 침묵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이현 씨가 무언가 목적이 있어 그런 일을 한다는 걸 알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건 나를 위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겠지. 이현 씨 계획은 뭐였어? 이제 상태가 좋아졌으니 아이를 내 곁에 보내고, 당신은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혼자서 마지막을 맞이할 생
눈앞의 그는 진짜 여이현이 맞았다.온지유는 아무리 그에게 화가 나 있더라도 눈앞의 이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여이현이 그녀 앞에서 죽음으로 속죄하는 것을 절대 바라지 않았다.그의 부하는 이미 모든 사정을 설명했고 여이현 또한 직접 해명해 주었다.온지유는 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는 여이현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온지유는 여이현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으며 말했다.“이현 씨,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 솔직히 말해서 난 이현 씨 아버지가 이현 씨를 구해준 데에 정말 감사해.”만약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여이현은 진작 차가운 강물 속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온지유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그를 안아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세상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이 훌륭하게 성장하길 바란다.더군다나 그의 친아버지가 대통령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그들의 위치는 다르다.특히 온지유는 이제 법로의 딸로 밝혀졌고 ‘악마의 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이현 씨, 별이를 내가 경성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온지유는 자신과 여이현 사이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떠올리면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별이가 그녀의 아이라면 전쟁 지역에서 데리고 나와 평화로운 지역에서 성장하고,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다.말은 없었지만 온지유는 그가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온지유는 그가 망설이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여이현의 답변을 기다렸다.하지만 여이현이 아직 입을 열기도 전에 문밖에서 그의 부하가 보고를 했다.“도련님, 대통령께서 오셨습니다! 대통령께서 그 여자를 데리고 나오라고 명하십니다!”대통령은 온지유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그 여자’라고 부름으로써 온지유를 모욕하려 했다.그러나 이에 온지유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녀도 이제 어머니가 되었고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법로의 잔혹한 행위들 만큼은 도저히
그런데 지금 여이현이 그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그가 했던 일을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다.여이현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손을 뻗어 온지유를 등 뒤로 숨겼다.“별로 듣고 싶어 하는 표정이 아니니 그럼 하던 일 계속하시죠. 괜히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말고요.”여이현의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도련님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그리고 이 모든 건 여이현이 등 뒤에 숨긴 여자 온지유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다.브람은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신 순간 여이현은 온지유를 완전히 등 뒤로 숨겼다.여이현의 눈빛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이었다.브람은 잔인한 사람이었지만 여이현은 건강을 회복했고 또 그가 제일 아끼고 있던 아이였던지라 당연히 여이현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었다.“보아하니 죽는 한이 있어도 저 여자와 떨어지지 않겠다는 거구나. 그래, 네 짝이 되려면 그 자격이 되어야겠지. 우리 S 국의 국모 자리는 그렇게 쉽게 앉을 수 있는 건 아니란다!”브람은 시선을 돌려 온지유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사랑했기에 당연히 여이현과 함께 있고 싶어 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오로지 여이현의 아내일 뿐 S 국의 국모 같은 건 아니었다.그녀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전 그딴 자리 원한 적 없어요.”“저도 그딴 자리 물려받고 싶지 않아요...”하필 이런 때 여이현이 한마디 보탰다.여이현이 내뱉은 말과 냉정하고도 확고한 태도를 보니 브람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두 사람이 지금 나한테 사랑의 맹세라도 하는 거니? 왜, 지금 나더러 지금 증인이 되어달라는 거냐?”여이현은 이미 전부터 브람에게 분명하게 생각을 말했었다. 생각이 다르니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고 말이다.하지만 그때의 그는 온지유를 찾아내지 못했고 온지유도 그가 죽지 않았다는 걸 몰랐다. 브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이현이 온지유를 잊을 줄 알았고 점차 자신의 제안도 받아들일 거로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보니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
온지유도 전혀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브람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지유는 느끼고 있었다. 브람의 눈빛에 도는 서늘한 한기는 마치 지옥에서 걸어나온 염라대왕 같다는 것을.브람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전쟁 때를 제외하고 누구도 그의 앞에서 이렇듯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럼 두 사람이 절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야 할 거야...”“지유를 죽이려거든 저도 죽이세요!”브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이현은 화를 내며 말허리를 잘라버렸다.여이현은 아주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확고함은 눈빛 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느껴졌다.브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심기가 불편한 듯 입술을 일자형으로 만들었다.그는 여이현을 몇초간 빤히 보다가 결국 손을 놓았다.브람이 떠난 뒤 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잡았다.“이현 씨, 아니면 일단 S 국으로 돌아가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지유야, 난 일단 원래 하려던 일을 전부 끝내고 싶었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난 네 앞에 나타날 수 없었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난 절대 널 두고 갈 수 없어. 왜냐하면... 넌 지금 날 밀어내고 있으니까.”이 말을 꺼낼 때 여이현은 마치 목에 무언가가 막혀버린 것처럼 아프고 꺼내기 함들었다.심지어 누군가 날카로운 것으로 그의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기도 했다.온지유는 그를 위해서, 그의 안전만 생각하고 밀어내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녀와 헤어져 있던 5년 동안 너무도 고통스럽고 괴로웠다.눈을 뜬 뒤로 그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전부 온지유를 위해서 말이다.그런데 온지유가 헤어지자고 하니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온지유는 목이 너무도 아팠다.손을 뻗어 여이현의 얼굴을 만졌다. 손끝이 그의 이마에 있는 흉터에 닿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여이현이 버텨온 고통들이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그 수많은 고통스러운 밤을 그가 어떻게 버텨왔는지 모른다.그가
지금 신무열은 일단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며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그가 한 말은 별이에게 효과가 있었다.하지만 음식을 먹는 것 외에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신무열은 그런 아이를 보며 순간 망설이더니 인명진에게 연락했다.인명진은 빠르게 그의 전화를 받았다.“네, 도련님.”“지유가 나한테 아이를 맡겼어요. 하지만 이 아이가 말을 하지 않네요. 내가 보기엔 분명 뭔가가 있어요. 혹시 요즘 S 국에 있어요? 그런 거라면 와서 한번 아이를 봐줘요. 문제가 있는지.”온지유가 S 국에서 종군 기자로 일하면서 인명진도 따라 이사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작은 진료소를 열어 근처 주민들의 병을 치료했다.인명진이 온지유를 향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던지라 법로는 인명진의 신분을 바꾸어 평범한 사람으로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인명진은 평소에서 진료소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자주 시간을 내서 온지유를 보러 왔다. 하지만 온지유도 바빴던지라 매번 만날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매번 먼저 연락하면서 온지유가 있는지 물었다.온지유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지만 온지유는 답장하지 않았다. 바쁘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매번 문자 보내면 방해가 될 것 같아 문자도 줄였다. 하지만 신무열이 그를 부르면 그는 바로 달려갔다.여하간에 신무열은 온지유의 오빠였으니까.인명진은 정확히 반 시간 후 신무열 앞에 나타났다. 별이를 본 순간 인명진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신무열은 그런 인명진의 모습을 바로 눈치챘다.“왜요. 뭐 문제 있어요?”인명진은 이상하게도 눈앞에 있는 아이가 어린 시절 온지유와 너무도 닮아 보였다. 그때의 온지유는 어둠 속에서만 살던 그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던지라 어린 시절 온지유의 모습을 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는 자주 온지유의 모습을 떠올렸다. 특히 온지유의 두 눈을 그는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온지유가 낳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의사가 진단을 내렸다. 여이현
인명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저도 소집 당해서 오늘에야 나올 수 있었어요.”신무열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내 말을 이었다.“일단 나와 아이만 유전자 검사 해줘요.”“네.”다만 인명진이 별이의 피를 뽑으려고 할 때 별이는 심하게 거부했다. 이를 악물고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아이의 모습은 꼭 궁지에 몰린 작은 맹수 같았다.별이는 빠르게 이곳저곳 도망쳤다.신무열은 참을성 있게 아이를 달랬다.“우리는 그저 검사만 해보려는 거야. 네가 어디 아픈 데 없나. 우리는 지유의 절친한 친구야. 다른 악의는 없어.”“거... 짓... 말!”별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신무열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다만 그는 이미 검사해보겠다고 마음먹었던지라 빠르게 별이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별이는 누군가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신무열이 고개를 드니 그곳엔 온지유가 있었다.온지유의 뒤엔 키가 190cm가 넘는 남자도 있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차가운 눈매에 신무열은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여이현 씨?”“네, 맞아요.”여이현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녀와 여이현이 이곳으로 오기까지 고작 2시간 걸렸다. 온지유가 얼른 빨리 아이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빠르게 달려온 것이다.하지만 신분 탓에 그는 마스크를 쓰고 올 수밖에 없었다.별이는 온지유를 본 순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다.온지유도 그러했다.그녀는 몸을 굽히며 별이의 손을 잡은 후 품에 꽉 끌어안았다.“별아,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신무열과 인명진은 바로 눈치챘다. 온지유가 이미 별이의 신분을 알게 되었음을 말이다. 별이는... 그러니까 온지유와 여이현의 아이였다.여이현이 죽지 않았으니 아이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인명진은 그제야 자신이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인명진은 신무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 의미를 알아챈 신무열은 바로 자리를 비켜주며 세 사람만
온지유는 별이의 손을 꼭 잡고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녔다.그녀는 결심했다. 종군 기사를 그만두고 별이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로. 때가 되면 별이를 학교에 보내고 그녀는 다른 직업을 찾아 돈을 벌면 된다.여이현은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인명진은 비록 모든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의 눈빛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었다.여이현이 죽으면 그에게 기회가 차려질 줄 알았다. 하지만 5년 동안 노력했지만 온지유는 여전히 그를 남자로 보지 않았다.현재 여이현이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까지 살아있으니 그에게 더욱 기회는 없었다.그래도 그는 온지유가 행복하길 바랐다.신무열은 온지유의 편이었다. 온지유가 누구를 선택하든 그는 늘 온지유를 응원했다.“미리 경고하는 데 절대 그 사랑이 원망으로 바뀌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만약 지유랑 여이현의 사이를 방해하기라도 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인명진은 온지유에게 집착했던지라 신무열은 인명진이 이성을 잃고 그들을 건드릴까 봐 걱정되었다.그에겐 동생이라곤 온지유 한 명뿐이었다. 온지유는 5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이현을 잊지 못했다. 더구나 죽은 줄 알았던 아이까지 살아있으니 그는 당연히 온지유가 이젠 행복하길 바랐다.인명진은 순간 실소를 터뜨렸다.“만약 정말로 여이현을 해치고 싶었던 거라면 이미 5년 전에 손을 썼을 겁니다.”여이현이 떠난 5년 동안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온지유의 마음을 얻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줄은 몰랐다.애초에 그는 온지유의 마음을 얻어야 자신도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진료소는 S 국에 있었고 그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온지유가 그를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언제든 그녀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온지유를 위해서라면 온지유와 여이현에 사이에 어떤 커다란 장애물이 있던지 그가 전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온지유는 여자아이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사고를 당하거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그녀는 다시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무슨 일인지 이모한테 말해 줄래? 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넌 엄마 아빠가 없어?”소녀는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는 떠났어요. 다들 아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엄마도 절 혼자 두고 떠나버렸어요. 어디로 간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절 돌보지 않아서 집에서 굶어 죽을 뻔했어요.”여자아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온지유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이야기를 듣고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아이를 짐스럽게 여겨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다.이렇게 어린아이가 집 주소와 전화번호는 물론 이름까지 모른다니 말이다.“이모,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어요. 아빠랑 엄마는 그냥 저를 사월이라고만 불렀어요.”소녀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속삭였다.“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런 거겠죠? 제가 좀 더 똑똑했으면 엄마가 절 버리지 않았을 텐데...”“아니야.”온지유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몰라 머뭇거렸다. 아이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잘못은 그녀의 부모에게 있었다.여자아이를 사월이라고만 부르며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으니,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더구나 아이를 낳았다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아이가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이유로도 아이를 버릴 권리는 없었다. 모든 아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진실을 그대로 말한다면, 소녀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길까 두려웠다. 아이에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했다.온지유는 여자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냈다.“아마도 네 엄마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일이
강원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 되었다.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가장 큰 백화점으로 갔다. 그리고 한참 구경하고 나서 백화점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이때 백화점 안에서 귀를 찌르는 화재 경보음이 들렸다.“불났나 봐. 빨리 나가자.”여이현은 별이를 훌쩍 안아 올리며 온지유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은 함께 출굴 나갔다.그들이 출구에 갔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백화점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밖으로 밀려 나왔다.여이현은 별이를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인파 속에서 흩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 말이다. 특히 별이는 아직 어린아이기 때문에 어른들 틈에서 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았다. 별이도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기에 여이현을 꼭 끌어안았다.이때 한쪽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된 온지유는 이런 소리에 유독 예민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자 혼자 울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는 별이 또래로 보였다.여자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인파 속에 있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댔다. 커다란 발이 이미 그녀의 발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온지유는 단호하게 여이현의 손을 놓았다.“별이 데리고 먼저 나가. 우린 밖에서 합류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여자아이 쪽으로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올리면서 말했다.“네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여아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 온지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과정에 그녀의 팔에 난 상처들이 드러났다.온지유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설마 아동 학대인가?’어찌 됐든 지금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앞으로 걸어가서 무사히 출구로 빠져나갔다.백화점 밖으로 나간 그녀는 우선 여이현과 별이부터 찾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별아, 너 괜찮아?”온지유는 후다닥 달려가서 별이부터 살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별이도 같은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나들이 가지 말고 아빠가 좀 더 쉬는 게 어때요? 저는 아빠가 푹 쉬시는 게 더 좋아요.”별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쉴 시간도 있어. 그러니까 마음껏 나가 놀아도 괜찮아.”여이현의 미소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는 온지유와 별이에게 말했다.“두 사람이 간 다음 인사팀에 연락해서 새 비서를 뽑으라고 했어. 어제 드디어 괜찮은 사람을 뽑아서 오늘부터 출근했어. 내 일의 일부를 맡겨놨으니까 이제 좀 숨 돌릴 수 있을 거야.”“다행이네요.”온지유는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여이현의 일이 바쁜 걸 한 번도 탓한 적 없었다. 여이현도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남편이 집안일에 손을 보태는 것을 희망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도 내심 좋았다.“밥 먹고 나서 짐 정리하자.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 하윤이는 데려갈까? 아니면 집에 둘까?”온지유는 잠시 고민했다.온하윤은 너무 어려서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괜히 데려갔다가 제대로 못 쉬면 문제였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고 말이다.이런 생각에 온지유는 온하윤을 집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이현도 마찬가지다.“밥 먹고 나서 다솔 씨한테 하윤이를 봐줄 수 있는지 연락할게. 도우미가 있는 데다가 우리 금방 돌아올 테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쉬는 시간 며칠 짜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게 바로 그가 강원시에 가기로 결정한 이유다.권다솔이라면 온지유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권다솔은 아이를 좋아하고 인내심도 있었다.식사를 끝낸 다음 그들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이도 옆에서 손을 보탰다. 그는 자신의 옷을 챙기고 나서 여이현에게서 받은 장난감도 가져왔다.“엄마, 이것도 가져가면 안 돼요?”“당연히 되지.”온지유는 장난감을 트렁크 안에 넣었다.“트렁크 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뭐든 가져도 돼.”놀러 가는 거면 당연히 기분이 최우선이었다. 이 정도 소원은 얼
두 사람이 함께 요리를 하니 속도가 훨씬 빨랐다. 온지유는 칼질을 책임지고 여이현은 볶는 걸 책임졌다. 그러자 요리도 금방 완성되었다.온지유가 완성된 음식을 가지고 나가려는 순간 여이현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요즘 수고했어. 내가 잘못했어. 일만 하느라 집안일은 너한테 다 맡겼네.”“그렇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이제 부부야. 가족끼리 그 정도 도울 수도 있는 거지.”온지유는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더군다나 일하러 간 거잖아. 노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당연히 이해해야지 노발대발 화를 낼까 봐?”여이현은 한 회사의 리더다. 그 책임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사람을 집에서도 부려 먹을 수는 없었다.온지유의 눈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행복감을 느꼈다.“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그는 저도 모르게 온지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은 당장이라도 닿을 거리에 있었다.똑똑똑.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깨졌다.온지유는 옷을 정리하고 나서 문을 열러 갔다.“별아, 깼어?”“네!”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도울게요.”“아니야, 다 됐어. 넌 수저만 챙겨서 오면 돼.”온지유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벌써 이렇게 사람 마음 헤아릴 줄 아는 걸 봐서는 커서도 아주 스윗한 사람이 될 것이다.“엄마 도와 음식이라도 나를래요.”그는 발꿈치를 들고 그릇을 내리고는 조심조심 밖으로 걸어갔다.식사 전 온지유는 거실에 가서 한창 잘 자고 있는 온하윤을 힐끗 봤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여이현이 사 온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오늘의 꿈은 사탕 맛인 듯했다.온지유는 손을 뻗어 이불을 정리해 줬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식탁 옆으로 걸어갔다.밥 먹을 때 여이현은 좋은 소식을 알렸다.“요즘 날씨 좋으니까 나들이 겸 강원시에 다녀오자.”“정말요?”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좋아요! 좋아요!”그는 진심으로 나가서 놀고 싶었다. 하지만
권다솔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저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배진호도 지금은 그녀의 생각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여이현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배진호와 권다솔이 따로 회사를 차린 시간 동안 여진그룹에는 그밖에 없어서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온지유는 여이현 혼자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게 안타까웠다. 아이들도 유독 말을 잘 들었다. 온하윤은 물론 별이도 조용히 있어 줬다.그래도 여이현은 지금처럼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보다 가족이 중요했다. 오늘 오래간만에 쉬는 시간이 생겼으니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돌아가는 길에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이현은 선물을 잔뜩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온지유는 거실에서 아이를 보다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그녀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여이현을 보게 되었다.“오늘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이 꽃은...”온지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사이에 꽃은 무슨.”“만난지 아무리 오래돼도 이런 감성이 필요한 법이야.”여이현이 꽃다발을 건넸다. 이건 그가 직접 고른 꽃이다. 꽃 한 송이 한 송이 다 사랑을 품고 매력적인 색채를 뿜어냈다.소리를 듣고 별이가 달려와서 팔을 벌렸다.“아빠! 안아줘요!”여이현은 짐을 내려놓고 별이를 훌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거실에서 한참 빙빙 돌고 나서야 내려놓았다.“아빠가 선물 사왔어. 가서 볼래?”“아빠가 준 선물이라면 뭐든 좋아요.”별이가 곧장 대답했다.여이현이 산 것은 최신형 로봇 장난감이었다. 별이가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이기도 했다. 갖고 싶다고 말 하기도 전에 여이현이 먼저 사 온 것이다.그는 장난감을 꼭 붙들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아빠 사랑해요! 선물 너무 좋아요!”“좋으면 됐어. 네 여동생 것도 있어. 빠짐없이 챙겨왔거든.”여이현은 또 가방에서 인형 두 개를 꺼냈다. 아기에게 줄 만한 작은 인형이었다.인형을 본 온하윤은 꺄르르 웃었다
이튿날, 정미진은 또다시 권다솔을 만나러 왔다. 이번에는 보온병도 챙겼다.정미진은 보온병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정중하게 말했다.“다솔 씨, 이거 잘 챙겨. 내가 귀한 보약을 가져왔어. 동창한테서 받은 건데 홍경천을 담근 물이래. 이게 임산부한테 그렇게 좋다고 했어.”“홍경천이요?”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홍경천이라는 약재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산부에게 좋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그러나 깊이 생각하기에 정미진은 너무 열정적이었다. 자꾸만 마셔보라고 재촉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 정미진은 가져온 것을 전부 먹인 다음에야 시름을 놓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권다솔은 임신 후 유독 졸음이 많아져서 오후 세네 시쯤에는 꼭 낮잠을 자야 했다. 그래서 정미진도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정미진이 돌아간 뒤, 권다솔은 평소처럼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는 갑자기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눈을 떴다.그 통증이 점점 강해져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뜬 순간, 권다솔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침대 시트 아래로 짙은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그녀는 놀라서 잔뜩 잠긴 소리로 외쳤다.“누구 없어요? 아주머니, 저 너무 아파요... 빨리요...”방문이 열리는 순간 권다솔은 시야가 검게 변하며 의식을 잃었다. 그 순간 느껴진 것은 누군가의 넓은 품에 안겼다는 것뿐이었다.그 품에서 나는 차갑고 상쾌한 향기는 마치 눈 덮인 소나무처럼 그녀를 감쌌다.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권다솔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새하얀 천장이 보였고 코끝에는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스며들었다.그녀가 뒤척이자 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배진호였다.배진호는 곧바로 몸을 숙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깼어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이제 괜찮아요?”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제대로 쉬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난 진호 어머니예요. 다솔 씨 집에 있어요?”정미진은 도우미의 뒤를 힐끗거리며 말했다.도우미는 잠깐 멈칫하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정미진은 한 번도 이곳에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늘 출근하지 않은 권다솔은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와봤다. 정미진이 온 것을 보고는 잠깐 넋이 나갔다.“아주머니? 잠깐만요... 어서 문을 열어줘요.”권다솔은 도우미에게 당부하고 부랴부랴 준비하러 갔다. 이 집에는 손님이 자주 오지 않기에 찻잎을 찾는 것만 한참 걸렸다.곱게 자란 권다솔은 차 끓이는 법조차 몰랐다. 그녀는 한참 연구하고 나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끓인 것도 물도 차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아주머니, 이거 드셔보세요.”그녀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건넸다.정미진은 경멸의 표정을 숨기고 힐끗 보기만 했다.배진호의 부모는 차를 좋아했다. 그들보다 찻잎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권다솔이 끓인 차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녀는 보기만 해도 알았다.아무런 기색도 없이 찻잔을 밀어낸 정미진은 덤덤하게 말했다.“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 사실 오늘은 그냥 널 보러 온 거야. 참, 아직 밥 안 먹었지?”권다솔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정미진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만들 기세를 보여줬다. 권다솔은 깜짝 놀라며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 옆에 있던 도우미도 얼른 나서서 만류했다.두 사람의 적극적인 만류 끝에서야 겨우 그녀의 의욕을 꺾을 수 있었다. 정미진은 조금 서운한 듯 웃으며 말했다.“요즘은 내가 밥 한 끼 하기도 어렵구나. 뭐, 괜찮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정미진은 거실에 앉아 권다솔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해 질 무렵 집을 떠났다. 도우미는 식탁을 정리하며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제가 보기에 어머님은 참 괜찮은 분 같아요. 저희 때 시어머니들은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다른 도우미도 거들며 말했다.“맞아요.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에 좋은 남편까지 있으니 사모님은 앞으로 행복
“부사장님, 왜 안 들어가세요?”권다솔은 깜짝 놀랐다. 언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직원을 바라보며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이거 대신 전해줘요.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요.”직원에게 서류를 건넨 권다솔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며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수많은 차와 정장 차림의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 하나 없는 것 같았다. 막연한 감각도 따라서 피어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배진호의 어머니 정미진이었다.“다솔 씨, 지금 시간 있어?”정미진의 목소리는 아주 무덤덤했다.“시간 되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15분 후, 권다솔은 넋을 잃은 채 산부인과 앞에 서 있었다.평일이다 보니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산부인과는 더욱 적을 수밖에 없다.간호사는 금방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권다솔 씨.”권다솔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정미진은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태도도 보기 드물게 부드러웠다.“가서 검사받아. 짐은 내가 대신 보관할게.”권다솔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정미진이 왜 그녀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왔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태도가 변했는지 전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의사는 보고서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축하드려요. 임신하셨네요.”정미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선생님, 확실한가요?”의사는 아예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직접 확인하세요. 초음파 사진에서 태아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잘 크고 있어요.”사진까지 나오자 정미진은 할 말이 없었다.병원에서 나온 다음 그녀는 직접 권다솔을 데려다줬다. 가는
배상준이 와인을 보고 지나치게 들뜬 모습을 보이자 정미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그만 좀 해! 평생 와인 처음 본 사람처럼 굴지 마. 작년에 친구가 준 와인도 있잖아?”정미진은 와인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니 배상준에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배상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최고급이야. 그거랑은 달라.”정미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그제야 배상준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된 후라 정미진은 권다솔에게 선물을 다시 가져가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했다.“뭐, 그럼 이건 받아 둘게. 진호 아빠는 다른 취미는 없고 술만 좋아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사전 준비는 꽤 철저했네.”권다솔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그녀는 손바닥을 꼭 쥐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어른들 댁에 올 때는 좋아하시는 걸 알아보고 준비하는 게 예의니까요.”정미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상준은 더 이상 정미진이 권다솔에게 계속 차갑게 굴지 않도록 나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 좀 해. 둘이 결혼한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좀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게 어때?”정미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배상준은 주눅 든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확실히 아내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그래도 그의 말이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정미진은 권다솔을 내쫓지는 않았고 함께 식사를 했다.그러나 그것뿐이었다.식사가 끝난 후 정미진은 권다솔을 문까지 배웅하며 말했다.“앞으로 별일 없으면 다솔 씨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 집은 당신처럼 귀한 아가씨를 모실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