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주는 인명진이 무언가 알고 있으며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홍혜주의 물음에 인명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소식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비밀이라고 하기 어려워.”인명진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첫눈에 율이를 알아본 것이다.그가 노승아와 손을 잡은 것도 사실은 율과 여이현을 갈라놓기 위해서였다.그는 단지 이 기회를 타서 율의 곁으로 가고 싶었을 뿐이다.하지만 그의 부주의로 율은 흉터남에게 잡혀갔다. 그러는 바람에 홍혜주도 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에게 독약을 주입했다.“그래? 알겠어. 일찍 쉬어.”홍혜주는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객실로 가버렸다.내일 그녀는 온지유 곁에 있어 줘야 할 뿐만 아니라 사적인 일들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한편, Y국에서.신무열과 법로는 의사당에 있었다.법로는 벽에 걸린 지도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도의 북쪽에 빨간 펜으로 원을 하나 그렸다. 그와 동시에 또 지도의 남쪽에 두 개의 긴 화살표를 그렸다.“이 노석명이라는 반역자는 Y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화국까지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 누구 마음대로!”“원으로 그려놓은 지역에 사람을 배치하도록. 이곳은 반드시 지켜내야 해. 연합군이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그리고 화살표 쪽에도 두 개의 병력을 배치해 적을 유인하도록 하게.”신무열은 법로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는 지도 앞으로 걸어가 S국의 국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노석명이 싸움을 원한다면 S국을 끌어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화국이라면... 한번 시도해볼 수는 있어요.”지금의 화국은 백 년 전의 화국이 아니었지만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화국을 완전히 뒤엎을 수는 없더라도 화국으로 하여금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하여 Y국의 국제지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지금의 Y국은 국제적으로 너무 낮은 지위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법로
법로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온지유가 율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부터 가면을 쓰려 하지 않았다.지금 법로는 기분이 아주 나빠 보였다.신무열은 법로의 뜻대로 온지유를 설득해볼 수도 있고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었지만, 법로가 벌인 일 중 일부는 그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신무열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아버지께서 직접 안배하세요.”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S국, 대통령 청사.좀 전에 대통령이 치료해주라고 한 남자는 이미 깨어났다. 그의 얼굴에 있는 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약을 바르고 흰 붕대를 감아서인지 마치 백색 천으로 싸인 미라같아 보였다.대통령은 침대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한테 성질을 쓰고 있는 거야?”그가 항상 남자의 주변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여기서 눈을 굴리며 누워있을 기회없이 하늘나라로 직행했을 것이다.“아닙니다.”너무 오래동안 말을 해본적이 없어서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사포처럼 거칠었다.대통령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 마음이 없었다면 네가 이런 태도일 리가 있겠니? 넌 몸이나 잘 챙겨. 아주 심하게 다쳤더군. 네가 목숨을 지키고,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돌아가고 싶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이야.”남자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몇 초 동안의 망설임 끝에 천천히 “알겠어요.”라고 대답했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떠 있는 둥글고 밝은 달은 마치 커다란 원반 같아 보였다.내일은 한 가족이 함께 모이는 추석날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온지유는 아침 일찍부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핸드폰을 들어보니 아버지 온경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비록 법로가 그녀의 친아버지라는 신분이 밝혀졌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양육의 은혜가 낳아준 은혜보다 크다고 생각했다.그녀의 부모님은 영원히 온경준과 정미리일뿐이다.전화를 받자마자 온경준의
온지유가 아직 집에 있을 때 회사의 주주들이 전화를 걸어 재촉하기 시작했다.배진호의 전화는 물론 집 전화까지 끊임없이 울렸다.각기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말투와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대표님께서 당신에게 재산을 넘긴 건 우리 같은 주주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일이에요. 게다가 그건 공증도 받지 않았다고요.”“당신이 대표님의 유일한 상속인이 아니라는 건 잘 알 테고 어서 삼킨 걸 뱉어내야 할 겁니다!”“당신이 회사로 오지 않으면 우리가 수려원으로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겠군요.”심지어 목소리는 갈수록 늘어나며 거칠어졌다.온지유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업무 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히 회사에서 해야죠. 여러분은 나와 내 남편의 가족도 아닌 데다 우리 동의 없이 여기까지 들어올 권리는 없을 텐데요?”말을 마친 온지유는 배진호와 도우미에게 눈짓을 보냈고 두 사람은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온지유는 아침밥조차 먹기 싫어졌다.“지금 여진 그룹으로 출발해요. 배 비서님, 고모님도 부르세요.”“네.”배진호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홍혜주는 무심결에 온지유의 뒤에 서 있었다.그렇게 그들은 집을 나섰다.계속 그들을 지켜보던 인명진은 그들이 떠나자 수려원을 나섰다....여진 그룹.주주와 고위층 인사들이 전부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어 온지유를 둘러쌌다.“당신은 이미 대표님과 이혼했어요. 이제 대표님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고요. 게다가 전에 어르신께서 당신에게 준 주식도 있잖아요.”“내놓으세요. 우리도 좋게 해결하고 싶으니까, 억지로 다른 방법을 쓰게 만들지 말란 말입니다.”“모두 내 체면과 여씨 가문을 봐서 너그럽게 넘기려는 거야.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들어 괜히 고집부려서 일 크게 만들지 말고.”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진숙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걸어 나왔다.여진숙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온지유가 입을 떼기도 전에 배진호가 준비한 서류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재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장 아끼던 사람이었다. 만약 여이현이 살아 있었다면 온지유가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겪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배진호가 온지유의 곁에 서 있는 이유는 단지 여이현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이현을 대신해 온지유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자신의 결백도 지켜야 했다.배진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대표님께서는 생전에 이미 모든 재산을 온지유 씨에게 양도하셨습니다. 여기가 그 양도 날짜입니다. 당시 온지유 씨는 출산 중이었지만 아이를 잃고 말았습니다. 온지유 씨는 대표님 곁에 수년을 함께하며 일해 온 사람입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한 권리가 있습니다.”“지유야, 나 찾았니?”배진호가 말을 마친 순간 온지유가 대답할 틈도 없이 약간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멀리서 여희영이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짙은 와인색 단발머리를 단정히 한 채 우아하고도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여희영에게 다가가 인사했다.“고모님, 와주셨군요.”그녀는 먼저 인사를 한 뒤 다시 주주들을 향해 말했다.“여진 그룹의 재산을 제가 상속받는 게 여러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재산 전부를 여씨 가문 사람에게 넘기겠습니다. 여러분이든, 여씨 가문의 다른 분들이든, 서로 분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알아서 해결하세요.”온지유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지유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니?”여희영은 완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배진호에게서 온지유가 자신을 찾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다소 의아했지만 여진 그룹까지 오게 된 이유가 재산을 전부 자신에게 넘기기 위함이라니 상상조차 못 했다.이 재산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남긴 것인데.누구에게 얼마나 줄지는 여이현의 자유였고 온지유가 여이현 곁에서 보낸 세월을 생각하면 그녀가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었다.여진숙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여희영과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나빠져 연락도 하
여진숙은 날카로운 눈빛을 내비치며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그녀의 태도는 여희영과 한바탕 싸울 기세였다.하지만 여희영은 여진숙의 그런 모습에 전혀 굽히지 않았다.“외부인에게 넘긴다고요? 내가 지금 외부인인가요?”온지유는 재산을 여희영에게 넘겼음에도 여진숙이 이토록 큰 반응을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모님, 제가 고모님을 부른 건 다른 사람들과 다투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럴 생각도 없으니 화내지 마세요. 이 재산을 고모님께 드릴지 여부는 제 권한이에요.”온지유는 배진호에게 눈짓을 보냈고 배진호는 그녀의 뜻에 따라 준비된 서류 원본을 여희영에게 건넸다.여희영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 없이 서류를 건네받았다.온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제 할 일이 있어요. 회사 경영에는 큰 관심도 없고요. 고모님, 이현 씨는 이 회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여씨 가문을 지키길 바랐어요. 고모님이 가장 적합한 분이세요.”“배 비서님, 휴가 관련해서는 고모님께 상의하세요.”온지유는 몹시 지쳐 보였다.그녀는 이미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결정했다. 이곳을 떠나는 이유는 이 도시가 여이현과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특히 이 회사는 더욱 그랬다.온지유는 이 회사를 지키려다 오히려 추억 속에 갇힐까 봐 두려웠다.온지유가 당부를 마치고 뒤돌아섰다.홍혜주가 그녀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배진호는 마음이 놓였다.이제 모든 서류가 여희영의 손에 있었고 배진호는 여희영이 모든 절차를 완료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여희영은 여씨 가문 사람이었기에 다른 주주들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진숙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성난 얼굴로 여희영 앞에 서서 말했다.“희영 씨, 왜 굳이 온지유 편을 들겠다는 거죠? 당신 속셈 모를 줄 알아요? 여씨 가문의 모든 권력을 차지하려는 거잖아. 온지유랑 짜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말해봐요.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조건을 걸었길래 당신이 이렇게 돕는 거야?”여진숙의 분노에 차 있는 모습에도 여희영
여희영은 여진숙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분명 여희영은 키가 크지 않았지만 여진숙 앞에 서자 마치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진숙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노승아와의 관계를 여씨 가문 모두가 알고 있었다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웃음거리에 불과했던 셈이다.그러니 여호산이 그녀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온지유를 여이현의 배우자로 선택한 것도 당연했고 여재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여희영이 그녀를 항상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온지유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하하하.”여진숙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 모습은 이제 더는 어느 귀부인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다.여희영은 더는 그녀를 볼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서서 회의실을 나섰다.그녀는 온지유를 찾았지만 이미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이미 여진 그룹을 떠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홍혜주가 그녀의 곁에서 혹여 마음의 상처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며 따라가고 있었다.차에 앉아 있는 온지유에게 여희영의 전화가 걸려왔다.“고모님.”온지유는 전화를 받았다.여희영은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네가 힘들어하는 거 알아.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해. 네가 내게 넘겨준 재산 난 서명하지 않을 거야. 여전히 네 이름으로 남겨둘 테니 마음을 추스른 후에 네가 여진 그룹을 다시 맡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현이가 내 꿈에라도 찾아오면 내가 뭐라 하겠어?”온지유의 마음이 순간 무거워졌다.꿈에 찾아오다니...여이현은 이제 세상을 떠났고, 주변 사람들은 점차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그렇다면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흐릿해질 때 그녀도 여이현을 잊게 되는 걸까?안 돼.절대 잊을 수 없다.여이현을 잊어서는 안 된다.온지유는 목이 꽉 메어와 겨우 말을 내뱉었다.“회사는 고모님이 맡아 주세요. 저에겐 중요한 일이 있어요. 이현 씨가 생전에 위화부대에 있
온지유의 말에 온경준과 정미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한 번 나갔다 오더니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지? 설마?’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러나 목에 뭔가 걸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검은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문제의 본질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결국 온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 저는 두 분의 친딸이 아니지만 두 분께서는 저를 친딸처럼 키워주셨어요.”말을 마치자마자 온지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온경준과 정미리는 당장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이미 다시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온지유는 그들에게 여섯 번 절을 올렸다.온지유의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두 분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제가 평생 갚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온지유로서 살아갈 거고 두 분께서 저에게 주신 사랑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두 분은 영원히 저의 부모님이에요. 이건 제 모든 저축입니다.”온지유는 그동안 두 분의 계좌에 생활비를 꾸준히 송금해 왔지만 부모님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그녀가 집에 올 때마다 필요한 걸 사주고 용돈까지 챙겨주며 그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항상 걱정했다.그러나 이번에 온지유는 모든 돈을 한 번에 드리기로 결심했다.혹시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부모님께 돈을 드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유야! 나도 너희 아빠도 돈이 있어. 이걸 왜 다 우리한테 주는 거야?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니? 제발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마!”정미리는 당황한 나머지 온지유의 어깨를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가 마치 유언을 남기듯 말하는 것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여이현의 죽음이 큰 충격을 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멈출 순 없다고 생각했다.살아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미리는 애써 그녀를
온지유가 결혼을 원치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정미리는 무엇보다 온지유가 자신을 잘 돌보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나중에 혼자 지내게 되더라도 자식이 필요하면 입양을 하면 되고 원치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온지유는 그런 부모님의 마음에 깊이 감동했다. 비록 혈연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님이었고 온지유에게 진정한 가족을 만들어 주었다.그녀가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겪을 때 부모님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빛으로 이끌어 주었다.온지유는 눈가가 시큰해졌지만 부모님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버지, 어머니, 저 결심했어요. 이현 씨는 자신의 직업을 위해 생을 마감했어요. 이현 씨가 마치지 못한 일들을 제가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싶어요. 만약 제가 그곳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 또한 나라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니 후회는 없을 거예요.”온지유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돌아온 날 밤 컴퓨터로 필요한 서류를 제출했고 기자로 일했던 경험 덕분에 답신도 곧바로 받았다.온지유에게는 떠나기 전까지 남은 3일 동안 주변 사람들을 정리하고 인사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한 후 S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려 했다.온경준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고 정미리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마지막에 온경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새는 언젠가 둥지를 떠나 날아가겠지. 지유야, 네가 결정을 내렸으니 너의 일을 잘 해내. 다만 시간이 되면 꼭 아빠랑 엄마에게 전화해 줘. 그렇지 않으면 네 엄마는 네 걱정에 밤잠을 설치게 될 거야.”온지유가 떠나 있던 동안 정미리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녀가 아이를 낳을 때도 곁에 있어 주지 못했기에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그들의 소중한 온지유는 정말 가여웠다. 아이도 지키지 못했고 남편도 떠나보냈으며 이제 자신의 출생 비밀까지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전쟁 지역으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온경준은 생각할수록 감정을 억
젊은 남자가 먼저 달려들었다.인명진이 넋을 놓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기습을 한 것이다.몽둥이가 그대로 등에 내리꽂혔다.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은서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당황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명진을 부축했다.“원장님, 괜찮으세요? 왜 저 대신 맞으신 거예요!”몸을 곧게 세운 인명진은 그 와중에도 덤덤히 답했다.“은 선생님 대신 맞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저를 향해 오던 거였어요.”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확인한 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충격이 상당했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과거 법로의 약인 이었던 그는 이런 고통에 익숙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그는 천천히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고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짓눌렀다.젊은 남자는 그 눈빛에 움찔했지만 순간뿐이었다.“다 너 같은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다면 내 동생은 지금도 멀쩡했을 거라고! 돌팔이 의사! 더러운 병원도 다 망해버려야 해!”은서우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나섰다.“당신은 어떻게 우리 병원의 잘못이라고 확신해요?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게 잘못인가요?”남자는 주먹을 꽉 쥐고 은서우를 노려보았고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아니면 또 누가 있지? 간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름 후로 수술을 잡았어. 하지만 병세가 악화해서 수술을 앞당겼지.”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자의 말을 들었다.은서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명진을 바라봤다.그녀는 인명진이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우린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려서 수술비를 마련해서 딸을 수술실로 보냈어.”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잘 된 거 아닌가요? 병세가 악화했다면 이식을 빨리 진행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죽었을 거예요.”눈이 붉
“모르겠어요. 본인 말로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면서 급히 떠났어요.”은서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았다.‘세상에 이렇게 우연이 반복될 수 있나?’오히려 그 인턴은 들통날 걸 알고 단서를 끊어 그들이 더는 추궁할 수 없도록 미리 도망친 것처럼 보였다.은서우의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인명진은 담담했다. 그는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고마워요. 수고했어요.”그는 곧 은서우를 잠시 바라보고는 뒤돌았고 은서우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그때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은서우를 불러 세웠다.“은 선생님, 언제부터 원장님이랑 그렇게 친했어요? 그리고 요즘 다들 원장님이 선생님을 차기 부원장으로 키우려고 한다던데 진짜예요?”은서우는 순간 당황했다.인명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 일을 떠벌일 순 없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간호사가 다른 질문을 이을까 봐 급히 자리를 떠났다.복도로 나왔을 때 인명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무도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인명진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은서우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조용히 그에게 다가갔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인명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면 돼요. 이름이랑 신분이 가짜일 리는 없잖아요.”그가 인턴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달은 은서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엉터리 의사, 거기 서!”깜짝 놀란 은서우가 뒤를 돌아보니 며칠 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환자의 가족들이었다.한 쌍의 부부와 젊은 남성이 함께였는데 그들의 손에는 벽돌이나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은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
가녀린 팔다리를 지녀 살짝 밀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은서우였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인명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인명진도 수술이 늦게 끝나 자정을 넘길 때가 많았는데 병원을 나설 때 늘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바로 은서우였다.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홀로 남아 의료 관련 논문을 읽으며 밤을 새웠다.그렇기에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기회를 주고 싶었다.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는 은서우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소씨 가문이 끝없이 돈을 요구할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고 소태훈이 협박할 때도 울지 않았다.하지만 자신을 도와줬던 인명진 앞에서는 감정을 쉽게 다스리지 못했다.“제가 원장님을 실망하게 한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바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사직서 낼게요. 직접 신고하지 않으셔도 자수하겠습니다.”그 말을 듣자 인명진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누가 나가라고 했나요?”그 말에 두 사람 모두 순간 얼어붙었다.은서우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멍해졌고 인명진 역시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다.하지만 곧 깨달았다.그녀는 공범이 아니라 단순히 속아 넘어간 어찌 보면 불쌍한 희생양이었다.인명진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내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전문 지식 배경이 탄탄하다는 건 알겠어요. 지금 저한테는 조수가 필요합니다. 병원에서 은 선생님을 대신할 사람은 없어요.”은서우는 눈을 깜빡였다.갑자기 하늘에서 커다란 떡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있었고 인명진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그러니까 더 이상 자책하지 마세요. 은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지금 중요한 건 그 인턴을 찾는 거예요.”그 말에 은서우는 즉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상처 부위가 당겨져 갑작스러운 통증에 숨을 들이마셨다.그녀는 머리를 부딪친 것 외에도 팔꿈치와 무릎에 멍이 들었다.내상은 심하지
그때 은서우가 큰 소리로 외쳤다.“말할게요!”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손가락을 꼬아 쥔 채 눈을 자주 깜빡였다. 모든 몸짓과 표정이 지금 극도로 망설이고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인명진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자신이 몰래 사진 촬영을 했다는 사실까지 포함하여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털어놓았다.모든 걸 말하고 나니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반면 인명진은 그녀가 말하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의 반응을 알아차린 은서우는 너무 일찍 안도한 자신을 한탄했다.“죄송합니다. 고소하고 싶으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은 건 자신의 앞날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이상 인명진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컸다.한 번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계속해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이제 그녀의 운명은 인명진의 손에 달려 있다.인명진은 처음엔 정말 화가 났다.누구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몰래 사진을 찍혔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평범한 용도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면 문제가 심각했다.하지만 죄책감에 가득 찬 은서우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결국 수없이 맴돌던 말들은 삼켜지고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그 인턴은 어디 있죠?”“네?”은서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인명진은 다시 한번 천천히 물었다.“은 선생님한테 명령한 그 인턴 누구냐고요. 은 선생님이 주범이 아니라면 주범을 찾아서 직접 물어봐야겠죠.”그냥 묻힐 문제가 아니었다.어떤 의도로 몰래 촬영된 건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서우가 카카오톡을 추가한 인턴이 당사자임을 설명했다.“민지아라는 인턴이었어요. 얼마 전에 온 인턴인데 원장님은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어요.”그런데 예상과 달리 인명진은
환자의 가족이 갑자기 달려들어 은서우를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바닥에 넘어지며 이마가 복도에 있는 의자에 부딪혔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해졌다.인명진은 은서우를 부축하고 이마에 남은 선명한 붉은 자국을 보고 가족들을 노려보았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가족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뭐 하는 거냐고? 너 같은 엉터리 의사가 물을 자격이나 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내 딸은 적어도 몇 년은 더 살았을 거야! 내 딸이 죽은 건 다 네 탓이야!”인명진도 놀랐지만 품에 안긴 은서우의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람들이 다가오기 전에 은서우를 들어 올렸다.간호사들의 비명 속에서 그는 가족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차갑게 쳐다보며 지나갔다.“시위하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비키세요.”싸늘한 인명진의 시선에 그들은 움찔하며 결국 길을 열어주었다.인명진은 빠르게 은서우를 진료실로 옮겼다.그때 은서우가 깨어나면서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목소리는 여전히 약하고 가냘팠다.“원장님, 정말 아니에요. 저 믿어 주세요.”그녀의 창백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자 인명진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요?”“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미간을 찌푸린 인명진은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처음에는 은서우가 강인한 사람이라 좋은 후배로 키울 만한 인재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녀가 자신에게 약을 탄 걸 알고 실망했다. 그 후 한동안 그녀를 믿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실망도 사라지고 그저 착잡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특히 은서우가 아까 자신을 지키려 앞서갔을 때 그는 더욱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분노가 가득한 가족들을 마주하면서도 자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건가?’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안명진은 찡그린 얼굴을 풀고 부드러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인명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은서우를 안아 들어 방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침대에 눕혔다.그는 빠르게 수건을 찾아 차가운 물에 적셔 은서우의 이마에 살며시 얹으며 그녀의 체온을 내리려 했다.아픈 은서우의 모습에 인명진의 마음은 복잡하게 얽혔다.침대 옆에 앉아 은서우를 지켜보는 그의 마음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그는 평소 은서우가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가끔 신비로운 느낌을 주긴 했지만 환자에게 보이는 그 집중력과 책임감은 가짜일 리 없었다.그는 또 두 사람이 함께 수술실에서 협력했던 장면을 회상했다. 그때 은서우는 침착하고 전문적이었는데 지금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는 은서우가 정말 나쁜 사람일지 아니면 숨겨진 사정이 있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인지 의문스러웠다.은서우는 고열에 혼미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원장님, 죄송해요. 저도... 저도 원하지 않았어요.”인명진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조용히 물었다.“그럼 왜 그런 거죠?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요?”하지만 은서우는 반쯤 잠든 상태로 계속 사과하는 말만 반복할 뿐 구체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다.시간이 흐르고 인명진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은서우의 체온도 조금 내려갔다.좁혀졌던 미간이 펴지고 호흡도 고르게 되자 인명진은 조바심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은서우의 상태가 점차 안정되는 걸 보며 결국 몸과 마음의 피로에 못 이겨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쳐 들어왔다.자연스럽게 깨어난 인명진은 먼저 은서우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얼굴이 아직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어젯밤처럼 아프고 걱정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그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혼자 교류회에 참석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고 나서 은서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아직 어지러웠던 탓에 그녀
인명진은 손을 들어 은서우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그의 손끝이 그녀의 뺨을 스치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은서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움과 쑥스러움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은 선생님, 오늘 좀 이상하신 것 같아요.”낮고 부드러운 인명진의 목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주문처럼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은서우는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에 두서가 없었다.“저... 원장님, 저는...”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인명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예상치 못한 강한 힘에 은서우는 가늘게 비명을 질렀다.“이제야 당신이 품고 있는 속셈을 알겠네요. 제 물컵에 약 탄 걸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그의 음성에는 분노와 실망이 섞여 있었다.은서우는 그가 알아챘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원장님, 아니에요. 저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요. 제발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은서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지만 인명진은 콧방귀를 뀌었다.“사정?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약까지 타려고 했죠? 은서우 씨, 제가 당신을 잘못 봤나 보네요.”“원장님, 정말 그게 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몰려온 인명진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약인으로서 각종 약에 대한 감지 능력과 면역력이 뛰어났다.처음 물이 입술에 닿았을 때 그는 바로 이질감을 느꼈다.눈치채지 못한 척 조용히 뱉어냈지만 그는 은서우의 행동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제가 그렇게 믿었는데 저한테 약을 탔네요. 정말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요?”인명진은 은서우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거침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은서우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인명진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원장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인명진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어 그대로 은서우를 방에서 쫓아냈다.그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뒤로한 채 단호하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