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로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온지유가 율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부터 가면을 쓰려 하지 않았다.지금 법로는 기분이 아주 나빠 보였다.신무열은 법로의 뜻대로 온지유를 설득해볼 수도 있고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었지만, 법로가 벌인 일 중 일부는 그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신무열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아버지께서 직접 안배하세요.”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S국, 대통령 청사.좀 전에 대통령이 치료해주라고 한 남자는 이미 깨어났다. 그의 얼굴에 있는 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약을 바르고 흰 붕대를 감아서인지 마치 백색 천으로 싸인 미라같아 보였다.대통령은 침대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한테 성질을 쓰고 있는 거야?”그가 항상 남자의 주변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여기서 눈을 굴리며 누워있을 기회없이 하늘나라로 직행했을 것이다.“아닙니다.”너무 오래동안 말을 해본적이 없어서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사포처럼 거칠었다.대통령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 마음이 없었다면 네가 이런 태도일 리가 있겠니? 넌 몸이나 잘 챙겨. 아주 심하게 다쳤더군. 네가 목숨을 지키고,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돌아가고 싶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이야.”남자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몇 초 동안의 망설임 끝에 천천히 “알겠어요.”라고 대답했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떠 있는 둥글고 밝은 달은 마치 커다란 원반 같아 보였다.내일은 한 가족이 함께 모이는 추석날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온지유는 아침 일찍부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핸드폰을 들어보니 아버지 온경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비록 법로가 그녀의 친아버지라는 신분이 밝혀졌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양육의 은혜가 낳아준 은혜보다 크다고 생각했다.그녀의 부모님은 영원히 온경준과 정미리일뿐이다.전화를 받자마자 온경준의
온지유가 아직 집에 있을 때 회사의 주주들이 전화를 걸어 재촉하기 시작했다.배진호의 전화는 물론 집 전화까지 끊임없이 울렸다.각기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말투와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대표님께서 당신에게 재산을 넘긴 건 우리 같은 주주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일이에요. 게다가 그건 공증도 받지 않았다고요.”“당신이 대표님의 유일한 상속인이 아니라는 건 잘 알 테고 어서 삼킨 걸 뱉어내야 할 겁니다!”“당신이 회사로 오지 않으면 우리가 수려원으로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겠군요.”심지어 목소리는 갈수록 늘어나며 거칠어졌다.온지유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업무 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히 회사에서 해야죠. 여러분은 나와 내 남편의 가족도 아닌 데다 우리 동의 없이 여기까지 들어올 권리는 없을 텐데요?”말을 마친 온지유는 배진호와 도우미에게 눈짓을 보냈고 두 사람은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온지유는 아침밥조차 먹기 싫어졌다.“지금 여진 그룹으로 출발해요. 배 비서님, 고모님도 부르세요.”“네.”배진호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홍혜주는 무심결에 온지유의 뒤에 서 있었다.그렇게 그들은 집을 나섰다.계속 그들을 지켜보던 인명진은 그들이 떠나자 수려원을 나섰다....여진 그룹.주주와 고위층 인사들이 전부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어 온지유를 둘러쌌다.“당신은 이미 대표님과 이혼했어요. 이제 대표님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고요. 게다가 전에 어르신께서 당신에게 준 주식도 있잖아요.”“내놓으세요. 우리도 좋게 해결하고 싶으니까, 억지로 다른 방법을 쓰게 만들지 말란 말입니다.”“모두 내 체면과 여씨 가문을 봐서 너그럽게 넘기려는 거야.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들어 괜히 고집부려서 일 크게 만들지 말고.”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진숙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걸어 나왔다.여진숙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온지유가 입을 떼기도 전에 배진호가 준비한 서류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재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장 아끼던 사람이었다. 만약 여이현이 살아 있었다면 온지유가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겪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배진호가 온지유의 곁에 서 있는 이유는 단지 여이현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이현을 대신해 온지유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자신의 결백도 지켜야 했다.배진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대표님께서는 생전에 이미 모든 재산을 온지유 씨에게 양도하셨습니다. 여기가 그 양도 날짜입니다. 당시 온지유 씨는 출산 중이었지만 아이를 잃고 말았습니다. 온지유 씨는 대표님 곁에 수년을 함께하며 일해 온 사람입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한 권리가 있습니다.”“지유야, 나 찾았니?”배진호가 말을 마친 순간 온지유가 대답할 틈도 없이 약간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멀리서 여희영이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짙은 와인색 단발머리를 단정히 한 채 우아하고도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여희영에게 다가가 인사했다.“고모님, 와주셨군요.”그녀는 먼저 인사를 한 뒤 다시 주주들을 향해 말했다.“여진 그룹의 재산을 제가 상속받는 게 여러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재산 전부를 여씨 가문 사람에게 넘기겠습니다. 여러분이든, 여씨 가문의 다른 분들이든, 서로 분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알아서 해결하세요.”온지유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지유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니?”여희영은 완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배진호에게서 온지유가 자신을 찾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다소 의아했지만 여진 그룹까지 오게 된 이유가 재산을 전부 자신에게 넘기기 위함이라니 상상조차 못 했다.이 재산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남긴 것인데.누구에게 얼마나 줄지는 여이현의 자유였고 온지유가 여이현 곁에서 보낸 세월을 생각하면 그녀가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었다.여진숙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여희영과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나빠져 연락도 하
여진숙은 날카로운 눈빛을 내비치며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그녀의 태도는 여희영과 한바탕 싸울 기세였다.하지만 여희영은 여진숙의 그런 모습에 전혀 굽히지 않았다.“외부인에게 넘긴다고요? 내가 지금 외부인인가요?”온지유는 재산을 여희영에게 넘겼음에도 여진숙이 이토록 큰 반응을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모님, 제가 고모님을 부른 건 다른 사람들과 다투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럴 생각도 없으니 화내지 마세요. 이 재산을 고모님께 드릴지 여부는 제 권한이에요.”온지유는 배진호에게 눈짓을 보냈고 배진호는 그녀의 뜻에 따라 준비된 서류 원본을 여희영에게 건넸다.여희영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 없이 서류를 건네받았다.온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제 할 일이 있어요. 회사 경영에는 큰 관심도 없고요. 고모님, 이현 씨는 이 회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여씨 가문을 지키길 바랐어요. 고모님이 가장 적합한 분이세요.”“배 비서님, 휴가 관련해서는 고모님께 상의하세요.”온지유는 몹시 지쳐 보였다.그녀는 이미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결정했다. 이곳을 떠나는 이유는 이 도시가 여이현과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특히 이 회사는 더욱 그랬다.온지유는 이 회사를 지키려다 오히려 추억 속에 갇힐까 봐 두려웠다.온지유가 당부를 마치고 뒤돌아섰다.홍혜주가 그녀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배진호는 마음이 놓였다.이제 모든 서류가 여희영의 손에 있었고 배진호는 여희영이 모든 절차를 완료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여희영은 여씨 가문 사람이었기에 다른 주주들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진숙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성난 얼굴로 여희영 앞에 서서 말했다.“희영 씨, 왜 굳이 온지유 편을 들겠다는 거죠? 당신 속셈 모를 줄 알아요? 여씨 가문의 모든 권력을 차지하려는 거잖아. 온지유랑 짜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말해봐요.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조건을 걸었길래 당신이 이렇게 돕는 거야?”여진숙의 분노에 차 있는 모습에도 여희영
여희영은 여진숙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분명 여희영은 키가 크지 않았지만 여진숙 앞에 서자 마치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진숙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노승아와의 관계를 여씨 가문 모두가 알고 있었다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웃음거리에 불과했던 셈이다.그러니 여호산이 그녀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온지유를 여이현의 배우자로 선택한 것도 당연했고 여재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여희영이 그녀를 항상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온지유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하하하.”여진숙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 모습은 이제 더는 어느 귀부인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다.여희영은 더는 그녀를 볼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서서 회의실을 나섰다.그녀는 온지유를 찾았지만 이미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이미 여진 그룹을 떠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홍혜주가 그녀의 곁에서 혹여 마음의 상처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며 따라가고 있었다.차에 앉아 있는 온지유에게 여희영의 전화가 걸려왔다.“고모님.”온지유는 전화를 받았다.여희영은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네가 힘들어하는 거 알아.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해. 네가 내게 넘겨준 재산 난 서명하지 않을 거야. 여전히 네 이름으로 남겨둘 테니 마음을 추스른 후에 네가 여진 그룹을 다시 맡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현이가 내 꿈에라도 찾아오면 내가 뭐라 하겠어?”온지유의 마음이 순간 무거워졌다.꿈에 찾아오다니...여이현은 이제 세상을 떠났고, 주변 사람들은 점차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그렇다면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흐릿해질 때 그녀도 여이현을 잊게 되는 걸까?안 돼.절대 잊을 수 없다.여이현을 잊어서는 안 된다.온지유는 목이 꽉 메어와 겨우 말을 내뱉었다.“회사는 고모님이 맡아 주세요. 저에겐 중요한 일이 있어요. 이현 씨가 생전에 위화부대에 있
온지유의 말에 온경준과 정미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한 번 나갔다 오더니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지? 설마?’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러나 목에 뭔가 걸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검은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문제의 본질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결국 온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 저는 두 분의 친딸이 아니지만 두 분께서는 저를 친딸처럼 키워주셨어요.”말을 마치자마자 온지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온경준과 정미리는 당장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이미 다시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온지유는 그들에게 여섯 번 절을 올렸다.온지유의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두 분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제가 평생 갚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온지유로서 살아갈 거고 두 분께서 저에게 주신 사랑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두 분은 영원히 저의 부모님이에요. 이건 제 모든 저축입니다.”온지유는 그동안 두 분의 계좌에 생활비를 꾸준히 송금해 왔지만 부모님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그녀가 집에 올 때마다 필요한 걸 사주고 용돈까지 챙겨주며 그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항상 걱정했다.그러나 이번에 온지유는 모든 돈을 한 번에 드리기로 결심했다.혹시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부모님께 돈을 드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유야! 나도 너희 아빠도 돈이 있어. 이걸 왜 다 우리한테 주는 거야?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니? 제발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마!”정미리는 당황한 나머지 온지유의 어깨를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가 마치 유언을 남기듯 말하는 것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여이현의 죽음이 큰 충격을 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멈출 순 없다고 생각했다.살아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미리는 애써 그녀를
온지유가 결혼을 원치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정미리는 무엇보다 온지유가 자신을 잘 돌보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나중에 혼자 지내게 되더라도 자식이 필요하면 입양을 하면 되고 원치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온지유는 그런 부모님의 마음에 깊이 감동했다. 비록 혈연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님이었고 온지유에게 진정한 가족을 만들어 주었다.그녀가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겪을 때 부모님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빛으로 이끌어 주었다.온지유는 눈가가 시큰해졌지만 부모님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버지, 어머니, 저 결심했어요. 이현 씨는 자신의 직업을 위해 생을 마감했어요. 이현 씨가 마치지 못한 일들을 제가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싶어요. 만약 제가 그곳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 또한 나라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니 후회는 없을 거예요.”온지유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돌아온 날 밤 컴퓨터로 필요한 서류를 제출했고 기자로 일했던 경험 덕분에 답신도 곧바로 받았다.온지유에게는 떠나기 전까지 남은 3일 동안 주변 사람들을 정리하고 인사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한 후 S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려 했다.온경준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고 정미리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마지막에 온경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새는 언젠가 둥지를 떠나 날아가겠지. 지유야, 네가 결정을 내렸으니 너의 일을 잘 해내. 다만 시간이 되면 꼭 아빠랑 엄마에게 전화해 줘. 그렇지 않으면 네 엄마는 네 걱정에 밤잠을 설치게 될 거야.”온지유가 떠나 있던 동안 정미리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녀가 아이를 낳을 때도 곁에 있어 주지 못했기에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그들의 소중한 온지유는 정말 가여웠다. 아이도 지키지 못했고 남편도 떠나보냈으며 이제 자신의 출생 비밀까지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전쟁 지역으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온경준은 생각할수록 감정을 억
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싫어요. 그곳에 가면 돈 쓸 시간도 없을 거예요.”온경준은 다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유야, 너 아까 우리를 영원히 부모로 여긴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우린 가족이야.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게다가 그곳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돈 쓸 일이 생길 거야. 가난하고 다친 아이들이나 노인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니?”온경준의 낮고 잠긴 목소리에는 방금까지의 비통한 감정이 사라지고 대신 차분하면서도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온지유는 그들이 이런 부분까지 생각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정미리도 옆에서 거들었다.“그래, 받아. 이건 네 아빠와 내 작은 마음이야. 네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하늘도 너를 지켜줄 거야. 우리는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 알겠어요.”결국 온지유는 부모님이 주신 카드를 받아들었다.사실 처음에는 부모님께 숨기려고도 했었지만 혹시라도 그들이 걱정하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결국 마지막까지 온지유를 이해해 준 건 부모님이었다. 이 돈을 받지 않으면 부모님도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날 식사는 온화하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온경준과 정미리는 계속해서 온지유의 접시에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그곳에 가면 엄마 아빠한테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고 시간 되면 영상 통화도 자주 해. 돌아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돌아와. 속상한 일이 있으면 바로 말하고, 알았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비록 법로처럼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온지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였다.온지유는 전쟁 지역에 종군 기자로 가게 되었으니 챙겨갈 물건이 많지 않았다. 부모님은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당부하고 나서야 그녀를 배웅했다.온경준과 정미리는 그녀가 집을 떠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차에 오른 온지유는 곁에 있던 홍혜주에게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