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노승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너와 노석명의 관계가 증명하고 있었잖아. 그걸 눈치 못 챌 수가 있나?”노승아와 노석명의 관계에 대해 그는 이미 조사를 한 적 있었다. 노석명이 그와 온지유에게 손을 댄 건 오로지 노석명의 야망 때문은 아니었다. 온지유의 신분 때문이기도 했다.그리고 노승아도 이유 중 하나였다.“확실히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죠. 하지만 제 발로 걸어들어왔으니 절대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항상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죠. 온지유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말이에요... 오빠는 항상 고고했죠. 난 그런 오빠를 반드시 끌어내려 내 노예로 만들 거예요!”여이현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심지어 다소 혐오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더 많은 사람들이 방으로 쳐들어왔다. 그 사람들이 노승아를 둘러쌀 때야 노승아는 여이현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었다.하긴 여이현은 어떻게든 온지유를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쳐들어올 수 있겠는가.여이현은 천천히 일어났다. 조금 전 그녀가 뿌린 약은 여이현에게 아무런 효과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일어서는 여이현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여이현은 그저 노승아를 인질로 삼고 싶은 생각만 할 뿐 과거의 일은 더는 여이현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다만 여이현이 노승아를 끌고 노석명의 앞으로 갔을 때 노석명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Y 국의 사람들이 전부 내 발아래에 있지. 고작 법로의 딸을 인질로 삼아 날 협박하다니. 그 협박이 나한테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노석명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는 인질이 된 노승아를 애초에 걱정하지도 않았다.노승아는 당연히 이런 노석명의 태도를 예상했었다. 그랬기에 노석명에게 애초에 아무런 희망을 품지 않았다. 희망을 품지 않으면 실망도 없으니까.그러나 여이현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노석명의 거짓말을 들춰냈다.“노석명 씨, 정말로 이 여자가 노석명 씨 딸 노승아가 아니라 법로의 딸 율이라고 생각해요?”노석명의 표정이 굳어
여이현의 옆엔 부하도 있었고 거기에다 여이현은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다.노석명의 공격은 여이현을 다치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싸운다면 분명 부상자가 생길 것이다.노석명은 애초에 노승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이현도 더는 노승아를 인질로 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놓아주지는 않았다.상황이 좋지 않음을 발견한 노석명은 얼른 흰 손수건을 흔들며 여이현에게 대화를 시도했다.“여이현, 네가 여기까지 온 건 평화와 해독제, 그리고 사람을 찾기 위함이겠지. 넌 우리 Y 국 사람들이랑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도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도 큰 원한도 없고 말이야. 네가 원하는 걸 내가 줄 수 있어. 지금 당장. 난 너랑 적이 되고 싶지 않거든.”노석명의 목적은 그저 Y 국이었고 이곳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현재 아무런 약점도 없는 여이현과 적이 된다면 싸워서 밀리게 되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여이현의 안중엔 애초에 노석명이 없었다.“난 온지유를 원해요.”해독제가 뭐라고.전쟁이 뭐라고.죽는 것이 뭐라고.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온지유였다. 무사히 그의 눈앞에 서 있기만 한다면 다른 건 전부 필요 없었다.노승아는 그런 여이현을 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그녀는 참 멍청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녀의 심장은 여이현을 보며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고 이었다. 하지만 여이현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바로 온지유였다.여이현은 온지유를 위해 모든 걸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이현의 안중에 지나가는 개 한 마리보다 못했다.노석명과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의 정체를 들춰냈다.“여이현, 지금 당창 철퇴하지 않으면 평생 온지유를 볼 수 없을 거야.”“그럼 일단 그쪽부터 죽여야겠네요.”여이현은 싸늘하게 말했다. 진심이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노승아의 어깨에 총을 가져다 댔다.“아악!”노승아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아무리 그간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고 해도 이런 엄청난 고통은 처음이었다. 이 순간 그녀는 정
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손짓 한 번에 그의 병사들이 나서며 신무열과 법로를 부축했다.신무열은 Y 국의 핵심 인물이었다. Y 국은 아직 안정이 필요한 나라였고 만약 전쟁을 멈추지 못한다면 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다.그는 이내 용경호와 성재민에게 지시를 내렸다.“주위를 샅샅이 뒤져서 인명진 씨랑 온지유를 찾아와.”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인명진에겐 핸드폰이 없었고 온지유에게 다친 곳은 없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노석명이 도망가버렸기에 최악의 상황에서 노석명이 먼저 온지유를 찾았을 수도 있었다.여이현은 그 최악의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이미 사람들을 시켜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온지유 씨에겐 절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용경호와 성재민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신무열은 여이현의 두 눈에서 견고함을 보아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여이현에게서 신무열은 온지유를 향한 깊은 애정과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신무열에게서 여이현은 뭔가를 눈치채게 되었다. 거기에다 인명진이 온지유를 대하는 태도까지 결합하면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신무열 씨, 여기는 신무열 씨가 맡으세요. 전 전쟁을 좋아하지 않거든요.”여이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신무열도 모든 걸 알게 되어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저도 전쟁을 좋아하지 않아요.”그는 전쟁을 싫어했고 전쟁 때문에 부상자가 생기는 것도 싫었다. 매번 Y 국 인구수가 줄어들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Y 국의 현 상황에 그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노석명이 도망쳐버리고 중요한 순간에 여이현이 나타나 주었다. 이 모든 건 전부 온지유 덕분이었다. 온지유가 아니었으면 Y 국엔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그는 여전히 Y 국에 남아 있었다. 다만 노승아를 찾아가 중요하게 할 일이 있었다.노승아는 온지유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 뿐 아니라 온지유를 사칭하면서 조금 전에는 그와 함께 죽으려는 생각까지 했다. 대
“날 구해준 사람이 정말로 너 맞아?”노승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이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픽 웃었다.여이현은 노승아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190 CM 넘는 그는 꼭 눈앞에 웅장한 산이 있는 것처럼 압박감이 들었다. 특히 여이현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녀를 내려다보는 여이현의 모습은 마치 높은 왕좌에 올라앉은 사람처럼 위엄이 느껴졌다.노승아는 이런 여이현을 빤히 보았다. 너무도 낯설었다.예전의 여이현은 그녀를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모습도 그녀의 앞에서 보인 적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녀는 여이현에 대해 모르는 것도 없었다.더는 속일 수 없으니 이제는 본색을 드러내는 수밖에.더구나 여이현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챘던 상황에서도 그녀에게 눈에 띄게 차갑게 대하지 않았던가. 그녀도 이젠 포기할 때가 되었다.“내가 구했든 아니든 너한테 중요하긴 해? 여이현, 어차피 너 마음속엔 온통 온지유 뿐이잖아. 그런데 너랑 온지유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아?”노승아는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누군가는 노승아에 대한 처벌이 너무도 잔인하다고 했지만 여이현은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지켜볼 뿐이다.그와 온지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노승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았다....한편 온지유 쪽.인명진은 그녀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온몸에 힘이 빠진 온지유는 심지어 헛구역질도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온지유는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헛구역질하던 그녀는 결국 토하기 시작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인명진은 너무도 걱정스러웠다.“지유야, 여이현 씨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어. 얼른 기운 차려야 해. 안 그러면 노석명이 뒤쫓아 올 거야!”이곳에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인명진은 온지유를 데리고 얼른 도망치고 싶었다.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하나의 생각뿐이다. 반드시 온지유를 살려내는 것.그걸 온지유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하지만 그녀와 법로의 관계가 떠올랐
만약 이곳에서 죽는대도 이건 온지유의 운명이었다. 온지유는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인명진은 점점 작아지는 온지유의 목소리를 눈치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온지유, 정신 차려. 노석명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살아남아야 해. 제발 살아줘. 여기서 살아남으면 내가 어떻게든 해독제를 만들어 줄게. 그러면 전부 다 괜찮아질 거야!”그는 거의 울부짖었다. 눈가에 눈물도 맺혔지만 온지유은 이미 눈을 감아버린 상태였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젠장!”인명진은 이를 빠득 갈면서 욕설을 날렸다. 머릿속에 노석명의 얼굴만 떠올랐다.그는 노석명을 증오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찾아가 노석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노석명이 망가뜨린 사람은 아주 많았다. Y 국에서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살면서 자신의 딸마저 법로의 딸인 것처럼 꾸며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그럼에도 노석명은 온지유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만약 노석명이 온지유를 납치해서 실험하지 않았더라면, 독을 먹이지 않았더라면 온지유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다.한순간 인명진에게 단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그것은 바로 노석명을 찾아가 노석명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다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도망이었다. 그가 죽어도 괜찮았지만 온지유가 죽어서는 안 되었다.그는 온지유를 업은 채 계속 달렸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이다....한편 노석명 쪽.그는 비록 도망쳤으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김명무는 대충 치료를 해준 뒤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노석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넌 네가 지금 바로 달려가면 걔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김명무는 바로 달려가 노승아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노승아가 Y 국으로 온 순간부터 그는 노승아를 따라다니며 경호했다. 그랬기에 노승아의 원래 얼굴이 어떤지도 알고 있었다. 아주 예뻤다.설령 노승아가 율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도 김명무는 여전히 노승아의 성형 전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노승아는 결국 죽었다. 여이현의 눈앞에서.잔인한 체벌에 노승아는 그 짧은 시간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그녀는 친모의 손에 이끌려 노석명에게 보내지게 되었고 노예 수용소에서 한동안 생활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은 너무 고통스럽고 잔인했다.죽는 그 순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낳아준 친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그녀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죽기 전 그녀가 했던 말이 여전히 여이현의 귓가에 맴돌았다.“여이현,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넌 항상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 나도 알고 있어. 네가 지금 온지유를 위해 나한테 복수하고 있다는 거. 내가 죽어도 너희 둘은 행복하게 살지 못할 거야. 내가 저주할 거니까! 너랑 온지유는 절대 행복하게 살 수 없어!”노승아에게 내린 체벌은 목숨을 잃을 정도가 아니었다.그러나 노승아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을 줄은 몰랐다.여이현은 그럼에도 냉담하게 말했다.“용경호, 노석명이 실험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노석명을 찾아서 이 시체를 선물로 줘.”“대장님, 노승아 씨가 한 말을 너무 마음에 담지 마시길 바랍니다. 죽음이 닥쳐오니 두려움에 헛소리하는 겁니다. 죽기 전 다들 한 마디씩 내뱉은 말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그럼 세상 사람 전부가 예언가가 아니겠습니까?”여이현의 옆에 있던 용경호는 어두워진 여이현의 안색을 발견하곤 행여나 노승아가 한 말을 신경 쓸까 봐 얼른 몇 마디 보탰다.사실 그는 노승아가 이런 식으로 죽어버리는 건 너무 가벼운 벌이라고 생각했다.노승아가 한 짓이 수도 없이 많았고 심지어 도망치기도 했다.이런 범죄자라면 시체를 뜯어 짐승에게 먹이로 던져줘도 시원찮았다.하지만 그들은 군인이었고 이런 일을 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픽 웃었다.“당연하지.”노승아가 죽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노석명의 귀에도 들려왔다. 여이현은 애초에 노승아의 죽음을 숨길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더 소식을 퍼뜨리고 있었다.
노석명은 권력을 갈망했다. 오래전부터 살면서 그는 깨달은 게 있었다. 바로 여진숙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게다가 노승아는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 한번 남자에게 빠지면 앞뒤 가리는 것이 없었다.원래는 마지막까지 노승아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이현과 신무열이 나타나 그의 계획을 망가뜨려 버렸다.‘안 돼,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 난 반드시 내가 원하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말 거야.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난 계속 도망만 치면서 살지 않을 거야!'노석명은 전화를 끊은 후 바로 결정을 내렸다.Y 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동맹군에게 빌붙으면 된다.다만 그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어도 뒤에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고개를 돌리니 김명무는 따라오지 않고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멍하니 서 있는 김명무의 모습에 노석명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뭘 멍청하게 서 있는 거야! 죽고 싶어?”노승아를 향한 김명무의 마음을 그는 바로 눈치챘었다.남자가 큰일을 하려면 시답잖은 감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게다가 지금 그를 따라는 사람은 김명무 뿐이었다.김명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는 아이의 모습처럼.“장로님, 용서해주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전 장로님과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전 아가씨 찾으러 갈 겁니다.”노석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김명무의 말을 듣고 있다고 총을 꺼냈다. ‘쿵!'미처 피하지 못한 김명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노석명은 이내 멈추지 않고 쓰러진 김명무를 향해 한 발 더 쐈다. 지금 이 순간 노석명의 눈빛은 아주 싸늘했다. 김명무는 짙은 피비린내를 맡게 되었고 눈앞도 빨간 액체로 가려졌다.어떻게든 일어서보려고 했지만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그저 눈을 뜬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점점 숨소리가 약해졌다.다만 아쉬웠던 것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노승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다. 노승아를 지키는 임무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더는 자신에게
온지유가 깨지 않자 인명진은 계속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인명진은 온지유가 깨어날 때까지 몇 번이고 끈질기게 이름을 불렀다.마침내 온지유는 의식이 돌아오고 눈앞에 있는 인명진을 바라봤다.“명진 씨? 여기는... 어디죠?”인명진은 온지유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온지유와 다시 만났을 때는 단순히 기억을 잃고 과거를 잊은 것일꺼라고 착각했었지만 지금의 인명진은 더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온지유의 기억에는 왜곡이 있었다.“지금 우리는 동굴 안에 숨어 있어. 네가 갑자기 열이 나서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어. 율아, 나 좀 봐. 지금 네게 꼭 전해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있어.”인명진은 온지유가 깨자 약간 거리를 두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어깨로 전해오는 힘과 그의 진지함에 온지유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명진 씨,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인명진은 잠시 침묵한 뒤 신중하게 말했다.“율아, 사실 우리가 만난 건 네가 우리의 실험실에 왔기 때문이었어...”인명진은 과거의 사건을 온지유에게 상세히 설명했다.인명진이 실험실에서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온지유는 하얀 공주 같은 드레스를 입고 순진한 모습으로 수용소에 나타나 그와 홍혜주를 보호해 주었었다.노예 수용소에서 그녀의 존재는 매우 이질적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율이를 건드릴 수 없었다.율이는 마치 작은 천사처럼 수용소의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다.하지만 그녀 혼자서는 모든 사람을 보호할 수 없었다. 노예 수용소의 잔혹함 앞에서 율이의 힘은 한없이 초라했다.가끔 타인이 겪을 일을 목격한 충격으로 그 일을 자신이 겪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온지유의 잠재의식 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의학적으로는 이를 ‘공감’이라고 한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노예 수용소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다 그때 네가 불을 지른 덕분이야. 그 후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