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아는 결국 죽었다. 여이현의 눈앞에서.잔인한 체벌에 노승아는 그 짧은 시간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그녀는 친모의 손에 이끌려 노석명에게 보내지게 되었고 노예 수용소에서 한동안 생활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은 너무 고통스럽고 잔인했다.죽는 그 순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낳아준 친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그녀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죽기 전 그녀가 했던 말이 여전히 여이현의 귓가에 맴돌았다.“여이현, 내가 널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넌 항상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 나도 알고 있어. 네가 지금 온지유를 위해 나한테 복수하고 있다는 거. 내가 죽어도 너희 둘은 행복하게 살지 못할 거야. 내가 저주할 거니까! 너랑 온지유는 절대 행복하게 살 수 없어!”노승아에게 내린 체벌은 목숨을 잃을 정도가 아니었다.그러나 노승아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을 줄은 몰랐다.여이현은 그럼에도 냉담하게 말했다.“용경호, 노석명이 실험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노석명을 찾아서 이 시체를 선물로 줘.”“대장님, 노승아 씨가 한 말을 너무 마음에 담지 마시길 바랍니다. 죽음이 닥쳐오니 두려움에 헛소리하는 겁니다. 죽기 전 다들 한 마디씩 내뱉은 말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그럼 세상 사람 전부가 예언가가 아니겠습니까?”여이현의 옆에 있던 용경호는 어두워진 여이현의 안색을 발견하곤 행여나 노승아가 한 말을 신경 쓸까 봐 얼른 몇 마디 보탰다.사실 그는 노승아가 이런 식으로 죽어버리는 건 너무 가벼운 벌이라고 생각했다.노승아가 한 짓이 수도 없이 많았고 심지어 도망치기도 했다.이런 범죄자라면 시체를 뜯어 짐승에게 먹이로 던져줘도 시원찮았다.하지만 그들은 군인이었고 이런 일을 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픽 웃었다.“당연하지.”노승아가 죽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노석명의 귀에도 들려왔다. 여이현은 애초에 노승아의 죽음을 숨길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더 소식을 퍼뜨리고 있었다.
노석명은 권력을 갈망했다. 오래전부터 살면서 그는 깨달은 게 있었다. 바로 여진숙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게다가 노승아는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 한번 남자에게 빠지면 앞뒤 가리는 것이 없었다.원래는 마지막까지 노승아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이현과 신무열이 나타나 그의 계획을 망가뜨려 버렸다.‘안 돼,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 난 반드시 내가 원하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말 거야.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난 계속 도망만 치면서 살지 않을 거야!'노석명은 전화를 끊은 후 바로 결정을 내렸다.Y 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동맹군에게 빌붙으면 된다.다만 그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어도 뒤에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고개를 돌리니 김명무는 따라오지 않고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멍하니 서 있는 김명무의 모습에 노석명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뭘 멍청하게 서 있는 거야! 죽고 싶어?”노승아를 향한 김명무의 마음을 그는 바로 눈치챘었다.남자가 큰일을 하려면 시답잖은 감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게다가 지금 그를 따라는 사람은 김명무 뿐이었다.김명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는 아이의 모습처럼.“장로님, 용서해주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전 장로님과 함께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전 아가씨 찾으러 갈 겁니다.”노석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김명무의 말을 듣고 있다고 총을 꺼냈다. ‘쿵!'미처 피하지 못한 김명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노석명은 이내 멈추지 않고 쓰러진 김명무를 향해 한 발 더 쐈다. 지금 이 순간 노석명의 눈빛은 아주 싸늘했다. 김명무는 짙은 피비린내를 맡게 되었고 눈앞도 빨간 액체로 가려졌다.어떻게든 일어서보려고 했지만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그저 눈을 뜬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점점 숨소리가 약해졌다.다만 아쉬웠던 것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노승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다. 노승아를 지키는 임무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더는 자신에게
온지유가 깨지 않자 인명진은 계속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인명진은 온지유가 깨어날 때까지 몇 번이고 끈질기게 이름을 불렀다.마침내 온지유는 의식이 돌아오고 눈앞에 있는 인명진을 바라봤다.“명진 씨? 여기는... 어디죠?”인명진은 온지유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온지유와 다시 만났을 때는 단순히 기억을 잃고 과거를 잊은 것일꺼라고 착각했었지만 지금의 인명진은 더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온지유의 기억에는 왜곡이 있었다.“지금 우리는 동굴 안에 숨어 있어. 네가 갑자기 열이 나서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어. 율아, 나 좀 봐. 지금 네게 꼭 전해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있어.”인명진은 온지유가 깨자 약간 거리를 두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어깨로 전해오는 힘과 그의 진지함에 온지유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명진 씨,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인명진은 잠시 침묵한 뒤 신중하게 말했다.“율아, 사실 우리가 만난 건 네가 우리의 실험실에 왔기 때문이었어...”인명진은 과거의 사건을 온지유에게 상세히 설명했다.인명진이 실험실에서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온지유는 하얀 공주 같은 드레스를 입고 순진한 모습으로 수용소에 나타나 그와 홍혜주를 보호해 주었었다.노예 수용소에서 그녀의 존재는 매우 이질적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율이를 건드릴 수 없었다.율이는 마치 작은 천사처럼 수용소의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다.하지만 그녀 혼자서는 모든 사람을 보호할 수 없었다. 노예 수용소의 잔혹함 앞에서 율이의 힘은 한없이 초라했다.가끔 타인이 겪을 일을 목격한 충격으로 그 일을 자신이 겪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온지유의 잠재의식 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의학적으로는 이를 ‘공감’이라고 한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노예 수용소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다 그때 네가 불을 지른 덕분이야. 그 후 네가
게다가 인명진은 온지유를 데리고 함께 망명 중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온지유를 속일 이유는 없었다. 모든 상황이 확실히 온지유가 바로 율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온지유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그녀가 바로 진짜 율이였다.자신이 신무열의 여동생이자 법로의 딸이라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Y국은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여이현과도 적대관계이다.온지유는 목이 멨다. 자신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율아, 나도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의 기억에 갇혀 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어.”인명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행복을 바랐다.온지유의 마음 속에는 여이현 밖에 없다는걸 알지만 인명진에게는 온지유만 행복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온지유는 불현듯 여이현이 자신에게 말했던 석이에 대해 떠올렸다. 드디어 석이가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석이는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거나 아예 다른 사람의 기억일 수도 있었다.온지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이 정도면 단순히 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란 말인가!온지유는 눈물을 흘렸다. 둘은 현재 연락할 수단도 없었고, 노석명의 추격도 피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여이현의 곁으로 가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인명진은 말없이 온지유의 곁을 지켰다. 그는 이 일을 통해 다시 한번 결심했다. 이제는 결코 온지유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만약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면 온지유의 곁에서 그 최후를 맞을 것이다.“나는 밖에 나가서 먹을 수 있는 열매라도 있는지 찾아볼게. 율아, 어디에도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알겠지?”“알겠어요...”온지유는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인명진과 함께 망명하는 이 상황에서 혼자 어디로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그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지금은 안전하게 숨어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한편 여이
여이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몇 초간의 침묵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 일은 지유가 결정할 일이에요.”신무열은 더 이상 여이현에게 신경 쓰지 않고 법로의 곁으로 가서 그의 얼굴의 가면을 벗겼다. 법로의 얼굴에는 길고 깊은 흉터가 있었다.그 흉텨는 어린 시절 딱 한 번을 본 뒤로 한 번도 가면밖에 드러난 적이 없었다.인명진은 Y국의 의원과 실험실 인력들을 모두 모아 법로를 빠르게 회복시키려 했다.세 시간이 더 지나서야 법로가 깨어났다.법로는 얼굴 위를 덮고 있던 가면의 무게가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무섭게 소리쳤다.“노석명은 어디 있지?”법로는 노석명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했다.심지어 자신의 가면까지 벗기다니!그 모습에 신무열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아직도 노석명을 만나고 싶은가 보죠? 주변에 쓸 만한 사람이 그리도 없으세요?”법로는 그제야 신무열을 바라보았다. 무사히 살아 있는 신무열을 보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율이는? 율이는 어디 있어?”법로는 이 상황에서도 딸을 잊지 않았다.신무열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지금 그 율이는 노석명의 딸을 얘기하시는 건지, 아니면 아버지 친딸을 얘기하시는 건지요.”법로는 어리석지 않았다. 신무열의 말을 듣고 노석명이 자신의 딸을 율이로 바꿔치기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율이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거냐?”신무열의 태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했다.“아버지는 이미 율이를 본 적이 있으세요.”신무열은 천천히 입을 열었고 법로는 그제야 깨달았다. 온지유를 보았을 때 느낀 친숙함이 그녀가 법로의 친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온지유가 바로 그들이 찾던 율이었던 것이다!법로의 머릿속에는 어릴 적 율이가 사탕과 꽃을 들고 자신을 향해 뛰어오던 장면이 떠올랐다.“아버지.”신무열의 부름에도 법로는 잠시 멍해있었다.“그럼 율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법로는 초조해졌다. 과거 한 차례의 화재 이후 그는 율이를 잃었다. 결국 유해를 찾지 못했
“지금 아버지 몸은 아주 허약한 상태예요. 노석명이 무슨 약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평생 실험실에서만 지내 오셨으니 본인이 더 잘 아시겠죠.”이 말을 남기고 신무열은 자리를 뜨려 했다.그러나 아직 온지유의 행방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법로는 불안감에 휩싸였다.“율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무사한 거냐?”법로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신무열은 잠시 멈춰 서며 그를 되돌아봤다.“인명진을 기억하시나요?”법로는 다시금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 애는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었다. 당연히 기억하고말고.”인명진은 법로의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였고, 그의 중요한 ‘약인’이었다. 그는 오래전 도망쳤지만 법로는 그를 항상 추적해 왔다. 하지만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사람 한명을 찾는 데에 많은 자원을 쏟을 수는 없었다.법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인명진이 율이를? 율이 행세를 하던 그놈은?”신무열은 냉랭하게 말했다.“율이가 아버지와는 달리 살길을 남길 줄 아는 아이여서 다행이라 여기세요. 노석명이 반란을 일으킬 때 바로 그 인명진이 율이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온지유가 율이임이 확실해지자 신무열은 그녀를 서슴없이 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특히 법로의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어떻게든 율이를 찾아야 해. 나는 그 아이에게 너무 큰 빚을 졌어... 정말 볼 면목이 없다...”법로는 목이 메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노석명이 율이를 데리고 와줬으니 눈 앞의 일을 마치면 율이에게 제대로 보상을 해줄것이라고 다짐했었다.하지만 지금은 하나 또 하나 폭풍우같이 사건이 휘몰아쳤다.지금의 그에게는 어떤 계획도 율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신무열은 그런 법로를 비웃듯 차갑게 말했다.“이제 와서 제게 얘기해 봐야 소용없어요. 이미 때는 늦었으니까요.”그렇게 말하고 신무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법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깊은 후회와 무거운 죄책감에 사로잡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
온지유가 가장 먼저 그 사람의 모습을 알아차렸다.석양빛을 등지고 선 그는 빛에 감싸여 마치 황금빛 테두리를 두른 듯했다.나민우?!온지유는 순간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렸다.“민우야...?”인명진은 온지유가 넘어질까 봐 곁에서 조심스럽게 부축했다.나민우도 온지유를 보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여이현이 통화하는 내용을 들은 그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가끔 떠오르는 기억대로 온지유는 예쁘고 온화한 이미지였다.나민우의 마음속에는 희미한 기억의 파편들이 떠올랐지만 그 기억들을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과거 노예 수용소에서 나민우를 찾았던 장면을 떠올렸다.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고 있었다.“명진 씨, 민우가 기억을 되찾도록 도와줄 방법이 있을까요?”온지유는 절박하게 물었다.과거를 잊은 사람은 인생에 공백이 생긴 것과 같다.온지유는 자신을 잊는 것은 괜찮아도 가족과 모든 과거를 잊는 것은 나민우에게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한번 해볼게.”온지유가 하는 부탁을 인명진이 거절 할 리가 없었다.나민우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겨우 온지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나민우는 모든 것을 잊어도 온지유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으면 과거가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인명진은 자신의 손목에서 피를 흘려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는 여전히 거부감이 있었다.“지유야,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약인이야. 내 피는 네게 도움이 될 거야. 그때 내가 너에게 주었던 푸른 구슬을 기억해?”온지유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 구슬이 주는 편안함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인명진은 설명을 이어갔다.“그 구슬 안에도 내 피가 섞여 있었어. 내 피는 네게 안정감을 줄 거야. 사실 너는 이미 몇 번 내 피를 받아들인적 있어. 너를 데리고 도망쳤을 때에도, 법로가 나를 연구했을 때도...”인명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멀리서 군복을 입은 남자가 은색 휴대폰을
“그냥 지유로 불러줘요.”그전까지는 인명진과 지낸 시간도 짧았고 이름의 유래도 몰랐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율이라는 이름이 법로의 딸에게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사뭇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인명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처음부터 널 율이라고 불렀어. 네가 지금 온지유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도 너는 여전히 율이야. 과거를 바꾸는 건 불가능해. 태어나는 곳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출신을 인정하고 알아 갈 필요는 있어.”‘알 필요는 있다’ 라.온지유는 그 말에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내가 알고 있는 법로와 부하들은 오직 살육과 약탈에 빠져 있었어요. 그 사람은 명진씨를 이런 존재로 만든 사람이기도 해요.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잖아요.”온지유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끔찍한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과거에 율이로서 Y국에서 어떻게 버텨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기운이 빠졌다.“명진 씨, 나 좀 피곤한 것 같아요.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이현 씨가 오면 깨워주세요.”온지유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누였다.인명진은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키며 열을 내려주려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었다....한 시간 후, 드디어 여이현이 도착했다.그는 부하에게서 온지유의 위치를 물어본 후 바로 그녀가 있는 텐트로 걸음을 재촉했다.텐트 문을 열자마자 여이현은 온지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인명진과 멀리 의자에 앉아 있는 나민우를 발견했다.그의 등장에 인명진과 나민우는 무언의 눈빛을 교환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온지유와 여이현 두 사람에게 공간을 남겨 주었다.온지유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여이현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잠에서 깬 온지유는 자신이 환각을 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어서 인명진과 함께 여이현의 부대로 온 것을 기억해 내고 눈앞의 여이현이 환상이 아님을 깨달았다.온지유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고 여이현은 그녀의 손길이 닿도록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