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가 가장 먼저 그 사람의 모습을 알아차렸다.석양빛을 등지고 선 그는 빛에 감싸여 마치 황금빛 테두리를 두른 듯했다.나민우?!온지유는 순간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렸다.“민우야...?”인명진은 온지유가 넘어질까 봐 곁에서 조심스럽게 부축했다.나민우도 온지유를 보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여이현이 통화하는 내용을 들은 그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가끔 떠오르는 기억대로 온지유는 예쁘고 온화한 이미지였다.나민우의 마음속에는 희미한 기억의 파편들이 떠올랐지만 그 기억들을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과거 노예 수용소에서 나민우를 찾았던 장면을 떠올렸다.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고 있었다.“명진 씨, 민우가 기억을 되찾도록 도와줄 방법이 있을까요?”온지유는 절박하게 물었다.과거를 잊은 사람은 인생에 공백이 생긴 것과 같다.온지유는 자신을 잊는 것은 괜찮아도 가족과 모든 과거를 잊는 것은 나민우에게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한번 해볼게.”온지유가 하는 부탁을 인명진이 거절 할 리가 없었다.나민우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겨우 온지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나민우는 모든 것을 잊어도 온지유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으면 과거가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인명진은 자신의 손목에서 피를 흘려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는 여전히 거부감이 있었다.“지유야,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약인이야. 내 피는 네게 도움이 될 거야. 그때 내가 너에게 주었던 푸른 구슬을 기억해?”온지유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 구슬이 주는 편안함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인명진은 설명을 이어갔다.“그 구슬 안에도 내 피가 섞여 있었어. 내 피는 네게 안정감을 줄 거야. 사실 너는 이미 몇 번 내 피를 받아들인적 있어. 너를 데리고 도망쳤을 때에도, 법로가 나를 연구했을 때도...”인명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멀리서 군복을 입은 남자가 은색 휴대폰을
“그냥 지유로 불러줘요.”그전까지는 인명진과 지낸 시간도 짧았고 이름의 유래도 몰랐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율이라는 이름이 법로의 딸에게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사뭇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인명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처음부터 널 율이라고 불렀어. 네가 지금 온지유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도 너는 여전히 율이야. 과거를 바꾸는 건 불가능해. 태어나는 곳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출신을 인정하고 알아 갈 필요는 있어.”‘알 필요는 있다’ 라.온지유는 그 말에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내가 알고 있는 법로와 부하들은 오직 살육과 약탈에 빠져 있었어요. 그 사람은 명진씨를 이런 존재로 만든 사람이기도 해요.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잖아요.”온지유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끔찍한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과거에 율이로서 Y국에서 어떻게 버텨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기운이 빠졌다.“명진 씨, 나 좀 피곤한 것 같아요.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이현 씨가 오면 깨워주세요.”온지유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누였다.인명진은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키며 열을 내려주려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었다....한 시간 후, 드디어 여이현이 도착했다.그는 부하에게서 온지유의 위치를 물어본 후 바로 그녀가 있는 텐트로 걸음을 재촉했다.텐트 문을 열자마자 여이현은 온지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인명진과 멀리 의자에 앉아 있는 나민우를 발견했다.그의 등장에 인명진과 나민우는 무언의 눈빛을 교환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온지유와 여이현 두 사람에게 공간을 남겨 주었다.온지유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여이현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잠에서 깬 온지유는 자신이 환각을 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어서 인명진과 함께 여이현의 부대로 온 것을 기억해 내고 눈앞의 여이현이 환상이 아님을 깨달았다.온지유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고 여이현은 그녀의 손길이 닿도록 가까이 다가갔다.
온지유가 차마 말 못 한 감정을 여이현은 잘 이해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힘껏 품 안에 가둬 두고 싶었지만, 마지막 순간 여이현은 다시 온지유를 놓아주었다.“여기서 며칠만 더 쉬어. 준비가 되면 다시 떠나자.”“그래...”온지유는 숨을 고르며 여이현이 텐트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는 다음 출동을 위해 준비해야 했다. 이번 일로 온지유를 위해 병력을 동원한 일로 인해 여이현은 처벌을 받았고 지금은 3일 동안의 정직 처분을 받는 중이었다.여이현은 이에 관해 온지유에게 직접 설명할 수 없었기에 용경호에게 설명을 맡겼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상황을 이해했다.하지만 여이현 외에 홍혜주의 행방도 궁금했다.“혜주 씨는 어디 있나요?”온지유가 물었다.그에 용경호는 사실대로 답했다.“홍혜주 씨는 지금 다른 텐트에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혜주 씨는 잘 지내고 있어요. 대장님이 혜주 씨를 다시 부대에 복귀시킨 데에도 훈련을 통해 기억을 자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저를 혜주 씨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알겠습니다."용경호는 앞장서서 온지유를 이끌었다.몇 분 후, 온지유는 넓은 초원에서 땅을 갈고 있는 홍혜주를 발견했다. 그녀는 손에 호미를 들고 있었다.“혜주 씨!”용경호가 부르자 홍혜주는 호미를 내려놓고 빠른걸음으로 다가왔다.홍혜주는 비록 과거의 기억을 잃었지만 이곳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자신에게 붙여진 ‘홍혜주’라는 이름도 꽤 마음에 들었다.특히 용경호의 다정함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용경호의 앞으로 다가온 홍혜주는 곁에 같이 온 온지유를 보며 묘한 친숙함을 느꼈다.“안녕하세요, 저는 온지유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온지유는 마치 처음 만나는 듯이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다.홍혜주는 순간 멈칫했다.온지유라는 이름이 기억 속 깊은 곳을 자극하는 듯했지만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그러나 온지유의 따뜻한 미소는 홍혜주의 머릿속에 깊게 남았다.“우리
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를 데리고 가면 방해가 될 거야. 아직 할 일도 많잖아. 그럴 수는 없어.”여이현은 온지유를 구하려다 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부대 일을 더 우선 하기를 바랐다. 둘은 아직 더 볼 날이 많이 있으니 말이다.“바보야, 방해가 되기는? 내가 미안한 일을 한 거지. 아직 내 실력이 약해서 너를 지켜주지 못한 건데.”여이현의 목소리는 더 깊어졌다. 슬픔이 그의 눈에 드리웠다.온지유는 계속 사과하는 여이현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그만해. 다 알고 있어. 난 먼저 나민우와 홍혜주를 데리고 돌아갈게."그러나 뜻밖에도 홍혜주와 나민우는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홍혜주는 이곳에서 여군으로 활동하는 삶을 좋아하고 있었고, 나민우 역시 온지유의 곁에 있는 것이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다.본인들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나민우의 결정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그에게 다가갔다."왜 돌아가고 싶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경성에는 아직 너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네가 떠난 후 가족들 모두 널 그리워하고 있는걸."그러나 지금의 나민우에게 있어 가족은 그저 낯선 존재일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지유야, 네가 여기 있잖아. 그리고 난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경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고 차라리 여기서 조금 더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아."온지유는 잠시 침묵했다. 나민우에게 이름을 불리자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잠시 후 온지유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민우야,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만나면 오히려 기억이 돌아올 가능성이 커. 여기는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야. 오래 있기는 위험해."온지유는 그의 안전을 고려해 경성으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나민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알아. 하지만 괜찮아. 만약 내가 여기서 너무 편하게 지내는 게 거슬린다면 나도 홍혜주 씨처럼 군인이 될게.”그 말에 깜
“이곳은 제가 함부로 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저 하나의 결정은 통하지 않을 거예요.”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명진의 마음은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지만 온지유는 그를 친구로만 여겼다.“그럼 내가 직접 말하러 갈게.”인명진은 진지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바로 손을 흔들며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이현을 찾아왔다.여이현은 텐트 안에서 지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엄숙했다. 여이현은 복장과 상관없이 본래부터 기품이 있었다. 온지유가 그에게 반한 것도 당연해 보였다.인명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여이현에게 다가갔다.“지유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죠?”여이현은 일하던 손을 멈췄다.그리고 손에 들려있던 펜을 내려놓고, 깊고 검은 눈으로 인명진을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나 보군요.”“그런 셈이죠.”인명진의 질문에 여이현은 짧게 대답했다.인명진은 더 말을 이어갔다.“지유는 노예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강한 공감을 느낀 거예요. 그 이후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이 겪은 일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 거죠. 이현 씨, 이 상황에서 나는 지유의 곁을 떠날 수 없어요.”인명진의 눈빛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그 결심은 그의 눈빛에 선명하게 드러났다.여이현은 인명진의 입장도, 온지유의 마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연인이 다른 남자에게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커다란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불편함이었다.“제 존재가 불편하다는 건 잘 알아요. 둘 사이를 방해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현 씨라면 제가 어떤 역할을 맡을수 있을지 잘 알고 있을 거에요.”인명진은 차분히 말했다. 그의 시선은 무겁게 여이현을 눌렀다.그러나, 여이현이 채 대답하기 전에 성재민이 텐트에 찾아왔다.성재민은 텐트에 들어와 공손하게 보고했다.“대장님, Y국에서 사
온지유는 꽃을 안고 향기를 맡고 있었다. 잠시 후, 여이현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온지유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아쉽게도 지금 손에 핸드폰이 없네. 그렇지 않으면 네 사진을 많이 찍어줬을 텐데.”여이현은 이제서야 왜 많은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온지유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지금 그럴 처지도 아니잖아. 게다가 많은 일들을 겪고 나니까 내 마음가짐도 이미 많이 변한 것 같아.”이전에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의 지시를 엄격하게 따르며 관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했다. 누구에게도 그들의 관계를 눈치채게 하지 않으려 신경을 썼다. 지금은 이런 일들을 겪고 있으니 더더욱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온지유의 옆에 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온지유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지유야, 내가 네게 너무 많은 잘못을 해 왔다는 건 잘 알아. 지금 일을 서둘러 처리하고 있으니까 빨리 끝내고 너에게 온전한 나를 돌려줄게.”“응, 기다릴게.”온지유는 여이현의 품에 기대어 함께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지유야, 신무열과 법로가 우릴 찾아왔어. Y국은 이미 큰 변화를 겪었고 노예 수용소도 모두 해체됐어. 지금 Y국을 이끄는 사람은 신무열이야. 법로는 물러났고, 율이 행세를 하던 사람은...”“노승아지?”여이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온지유가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여이현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온지유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언제부터 안 건데?”여이현은 웃으며 물었다.온지유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의심스러웠던 점들이 하나하나 이어지면서 알게 됐어. 율이는 노석명이 데려왔고, 노승아는 노석명의 딸이잖아.”“사실 노승아는 노석명의 딸이 아니야. 노승아는 여진숙의 딸이었고 여진숙과 노석명이 접점이 있었을 뿐
온지유는 가면을 벗은 법로를 처음 보았다.신무열의 곁에 서 있는 법로의 시선은 온지유를 향해 무겁게 쏟아졌다.온지유는 법로의 시선을 피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Y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온지유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확고했다. 그녀는 절대 Y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법로와도 화해할 의사가 없었다. 온지유는 온갖 불편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여이현은 말없이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는 언제나 온지유의 곁에 있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강한 시선이 여이현의 의지를 말해주었다.신무열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법로가 휘청거리며 온지유에게 다가갔다.“율아...”법로의 목소리는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꽉 막혀있었다.온지유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저는 율이가 아니예요. 제 이름은 온지유예요.”그의 목소리는 온지유를 불편하게 했다. 마치 커다란 돌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사람의 감정과 태도는 수시로 바뀔수 있는것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거부감이 들었다.법로는 온지유와 재회할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상했었다.물론 온지유에게서 돌아 올 차가운 반응도 예상했었지만 실제로 겪으니 가슴이 아팠다.당장 생각 나는 건 물질적인 보상을 하는 것이었다.법로가 손으로 지휘 하자 다크가 보석과 금이 가득 담긴 상자를 가져왔다.그리고 법로 손안의 카드도 온지유를 향해있었다.“이건 아버지가 주는 선물이다...”그러나 온지유는 받지 않았다. 신무열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녀에게 다가갔다.예전에는 그저 추측뿐이었지만 그는 이제 확실히 온지유가 율이임을 알게 되었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온지유의 거리감을 두는 표정을 보고 그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온지유는 차갑게 말했다.“제 아버지는 온경준이에요.”온지유는 법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신무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Y국이 저지른 일들은 그녀에게 아직도 너무나 생생한 상처였다. 자신의 친부가 그런 악행을 저지른 법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
“그리고 이곳에 잠시 머무르고 싶습니다.”신무열이 덧붙였다.여이현은 신무열과 법로가 남아있으려는 이유가 온지유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온지유의 가까이에 머물며 설득하려는 것일 테다.그러나 여이현이 아직 말하기도 전에 신무열은 여이현에게 다가가며 눈치를 줬다.여이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떠나기 전에 그는 부하에게 눈짓을 주었고 부하는 남아 법로를 접대하기 시작했다.여이현과 신무열은 텐트 밖으로 나왔다.신무열은 솔직하게 말했다.“아버지는 노석명에게 속았을 뿐이에요. 저렇게 보여도 사실 율이를 무척 사랑하셨어요. 저희도 지유와 여이현 씨의 관계를 잘 알고 있어요. 이현 씨가 중간에서 중재해 줄 수는 없을까요?”신무열은 온지유가 여이현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여이현이 온지유를 설득한다면 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신무열의 눈에는 희망이 어렸다.여이현도 잊지 않았다. Y국 내부에서 신무열은 온지유와 자신을 도와주었고 덕분에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온지유의 마음을 대신할 수 없었다. 과거에 여이현은 한 번 온지유를 대신해 결정을 내렸고 그로 인해 온지유에게 원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또다시 온지유 대신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유의 의사는 이미 명확합니다. 아쉽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없어요. 하지만 두 분께서 이곳에 남고 싶다면 그건 두 분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온지유의 결정은 확실했지만 신무열과 법로가 온지유의 가족임을 여이현도 알고 있었다. 그들을 함부로 쫓아낼 수는 없다.신무열은 여이현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하지만 신무열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신무열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연합군은 이쪽의 주권을 빼앗고 싶어 합니다. Y국이 공격을 받을 게 분명해요. 하지만 이제 아버지께서 자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
“있어요!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건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마유주를 마시는 일정이에요. 총 7박 8일이고 모든 비용은 전부 저희가 책임집니다!” 여대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아르바이트 첫날 만에 벌써 계약을 성사시키다니!급여를 받으면 바로 외할머니 치료비에 보탤 수 있었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어차피 어디든 상관없었다.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배진호와 남태건을 마주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권다솔은 가이드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출발지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저 내일 여행사 패키지로 여행 가려 해요. 다음 주쯤 돌아올게요.”“좋지! 네 나이에는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을 봐야 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면 만 리를 걸어야 한다잖니. 짐은 다 챙겼니?”김영은은 딸이 여행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다만 여행길이 불편할까 걱정될 뿐이었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지만 괜찮았다.“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요. 필요한 건 현지에서 사면 돼요.”“다른 건 밖에서 사도 되지만 침구류는 우리가 보내줄게. 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 호텔 이불 덮었다가 알레르기라도 나면 어쩌려고.”권용민이 덧붙였다.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집의 침구와 비길 순 없었다.그는 아직도 권다솔이 어릴 적 피부 알레르기로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약을 사고 주사를 맞으며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저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롭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었다.권용민은 끝내 직접 가겠다고 고집했고 권다솔은 결국 그들을 이기지 못해 승낙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문득 배진호를 떠올렸다.‘지금쯤 석규리와 단둘이 집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다만
할머니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고,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아직도 너를 만나주지 않니? 이 할미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은데 들어볼 생각 있니?”배진호는 당연히 할머니가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다.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배진호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먼지가 아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질 수 없었다.다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나도 젊었을 때 우리 집 할아버지를 엄청 쫓아다녔단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안 사람들 또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내가 시골 출신이라 배운 게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니? 나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어.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결국 내 사람으로 만들었단다.”할머니는 눈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배진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두 분이 함께하신 후에도 할아버지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할머니를 예전처럼 대하셨나요?”“그럴 리가 있겠니? 부모는 그저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야.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 결혼 후엔 날 친딸처럼 대했단다. 집안의 돈까지 전부 나한테 맡겼으니. 설령 그 집안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도 두려울 게 없었어.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텐데.”할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적어도 99살까지는 살 거 같아.”배진호는 할머니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그는 권다솔의 부모님이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결혼 전에는 반대했지만 결혼 후에는 축복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해서 방해할 분들이 아니었다.그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미 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결국 병문안 갈 때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할머니,
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권다솔의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차가워진 걸까?“저를 때리든 욕하든 심지어 문밖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 해도 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솔 씨, 제발 절 무시하지는 말아줘요.”배진호는 간절히 애원했다.그는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그는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권다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그녀만은 잃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그러나 배진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발이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봤다가는 다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호 씨, 우린 이미 끝났어요. 만약 다시 만나더라도 여긴 아니에요.”둘의 마지막은 구청이어야 했다.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우리가 끝났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다솔 씨 마음속에 제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배진호는 집착했고 고집스러웠다.권다솔이 그를 뻔뻔하다 욕하든 귀찮다 욕하든 전혀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우리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어요. 아이도 없고... 그리고 며칠 전 술을 마시다가...”권다솔은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이미 남태건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정작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이혼까지 가는 마당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이 사실을 배진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천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그녀는 한편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을 경멸할까 봐 두려웠다.‘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그날 다솔 씨가 취했을 때 저도 같은 술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솔 씨가...”“그
김영은도 이번 일로 남태건이 막무가내로 느껴졌다.하지만 남태건의 인성에 문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태건이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는 거지.”“마음이 급하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전 태건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날은 제가 술에 잔뜩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누군가 제 술잔에 약을 탔거든요. 그래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전 절대 하룻밤의 실수로 제 평생을 누군가에게 보상으로 주려는 생각은 없어요.”권다솔은 계속 자기 생각을 말했다.아무리 김영은이 설득한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려웠으니까.더구나 남태건이 이토록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하니 그녀는 더더욱 그와 결혼 할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다솔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냥 네가 태건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어.”뜻밖에도 김영은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피우다가 꺼버린 후 김영은의 옆으로 다가왔다.“설령 네가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괜찮다. 너 하나쯤은 평생 먹고 살게 해줄 돈은 있으니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행복할 방법은 아주 많지.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해.”권다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이렇게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을 들어주니까.동시에 그녀는 두렵기도 했다.만약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억지로 남태건과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아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빠. 역시 저한테는 두 분밖에 없네요.”권다솔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김영은은 딸 대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권용민에게 눈짓했다. 권용민은 얼른 차를 따라주었다.“태건아, 아직 차 한잔도 못 마셨지? 얼른 한잔하면서 좀 쉬어.”“아버님, 어머님. 전 진심으로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저희는 급도 맞잖아요. 다솔이와 결혼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잘해줄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다솔이를 딸처럼 예뻐하고 계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남태건은 찻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기대하는 얼굴로 권용민과 김영은을 보았다.권용민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태건아, 난 이 일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결혼 전에 먼저 약혼부터 해야 하잖니. 약혼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걸 절차대로 마쳐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일단 이 물건들을 가져가. 그리고 다음에 내가 집사람과 함께 찾아가마.”남태건은 그의 말에서 거절의 의미를 눈치챘다.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다솔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인신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가져온 예물과 금붙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기고 가려고 했다.“태건아, 네가 우리한테 준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하지만 예물은 도로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권용민이 허리를 굽혀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남태건은 이미 현관까지 가버렸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용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일단 다솔이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김영은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권다솔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권다솔은 전화를 받기 전 특별히 거울을 보며 차림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혈색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엄마. 전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너랑 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