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꽃을 안고 향기를 맡고 있었다. 잠시 후, 여이현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온지유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아쉽게도 지금 손에 핸드폰이 없네. 그렇지 않으면 네 사진을 많이 찍어줬을 텐데.”여이현은 이제서야 왜 많은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온지유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지금 그럴 처지도 아니잖아. 게다가 많은 일들을 겪고 나니까 내 마음가짐도 이미 많이 변한 것 같아.”이전에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하면서 그의 지시를 엄격하게 따르며 관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했다. 누구에게도 그들의 관계를 눈치채게 하지 않으려 신경을 썼다. 지금은 이런 일들을 겪고 있으니 더더욱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온지유의 옆에 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온지유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지유야, 내가 네게 너무 많은 잘못을 해 왔다는 건 잘 알아. 지금 일을 서둘러 처리하고 있으니까 빨리 끝내고 너에게 온전한 나를 돌려줄게.”“응, 기다릴게.”온지유는 여이현의 품에 기대어 함께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지유야, 신무열과 법로가 우릴 찾아왔어. Y국은 이미 큰 변화를 겪었고 노예 수용소도 모두 해체됐어. 지금 Y국을 이끄는 사람은 신무열이야. 법로는 물러났고, 율이 행세를 하던 사람은...”“노승아지?”여이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온지유가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여이현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온지유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언제부터 안 건데?”여이현은 웃으며 물었다.온지유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의심스러웠던 점들이 하나하나 이어지면서 알게 됐어. 율이는 노석명이 데려왔고, 노승아는 노석명의 딸이잖아.”“사실 노승아는 노석명의 딸이 아니야. 노승아는 여진숙의 딸이었고 여진숙과 노석명이 접점이 있었을 뿐
온지유는 가면을 벗은 법로를 처음 보았다.신무열의 곁에 서 있는 법로의 시선은 온지유를 향해 무겁게 쏟아졌다.온지유는 법로의 시선을 피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Y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온지유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확고했다. 그녀는 절대 Y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법로와도 화해할 의사가 없었다. 온지유는 온갖 불편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여이현은 말없이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는 언제나 온지유의 곁에 있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강한 시선이 여이현의 의지를 말해주었다.신무열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법로가 휘청거리며 온지유에게 다가갔다.“율아...”법로의 목소리는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꽉 막혀있었다.온지유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저는 율이가 아니예요. 제 이름은 온지유예요.”그의 목소리는 온지유를 불편하게 했다. 마치 커다란 돌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사람의 감정과 태도는 수시로 바뀔수 있는것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거부감이 들었다.법로는 온지유와 재회할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상했었다.물론 온지유에게서 돌아 올 차가운 반응도 예상했었지만 실제로 겪으니 가슴이 아팠다.당장 생각 나는 건 물질적인 보상을 하는 것이었다.법로가 손으로 지휘 하자 다크가 보석과 금이 가득 담긴 상자를 가져왔다.그리고 법로 손안의 카드도 온지유를 향해있었다.“이건 아버지가 주는 선물이다...”그러나 온지유는 받지 않았다. 신무열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녀에게 다가갔다.예전에는 그저 추측뿐이었지만 그는 이제 확실히 온지유가 율이임을 알게 되었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온지유의 거리감을 두는 표정을 보고 그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온지유는 차갑게 말했다.“제 아버지는 온경준이에요.”온지유는 법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신무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Y국이 저지른 일들은 그녀에게 아직도 너무나 생생한 상처였다. 자신의 친부가 그런 악행을 저지른 법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
“그리고 이곳에 잠시 머무르고 싶습니다.”신무열이 덧붙였다.여이현은 신무열과 법로가 남아있으려는 이유가 온지유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온지유의 가까이에 머물며 설득하려는 것일 테다.그러나 여이현이 아직 말하기도 전에 신무열은 여이현에게 다가가며 눈치를 줬다.여이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떠나기 전에 그는 부하에게 눈짓을 주었고 부하는 남아 법로를 접대하기 시작했다.여이현과 신무열은 텐트 밖으로 나왔다.신무열은 솔직하게 말했다.“아버지는 노석명에게 속았을 뿐이에요. 저렇게 보여도 사실 율이를 무척 사랑하셨어요. 저희도 지유와 여이현 씨의 관계를 잘 알고 있어요. 이현 씨가 중간에서 중재해 줄 수는 없을까요?”신무열은 온지유가 여이현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여이현이 온지유를 설득한다면 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신무열의 눈에는 희망이 어렸다.여이현도 잊지 않았다. Y국 내부에서 신무열은 온지유와 자신을 도와주었고 덕분에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온지유의 마음을 대신할 수 없었다. 과거에 여이현은 한 번 온지유를 대신해 결정을 내렸고 그로 인해 온지유에게 원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 또다시 온지유 대신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유의 의사는 이미 명확합니다. 아쉽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없어요. 하지만 두 분께서 이곳에 남고 싶다면 그건 두 분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온지유의 결정은 확실했지만 신무열과 법로가 온지유의 가족임을 여이현도 알고 있었다. 그들을 함부로 쫓아낼 수는 없다.신무열은 여이현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하지만 신무열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주제를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신무열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연합군은 이쪽의 주권을 빼앗고 싶어 합니다. Y국이 공격을 받을 게 분명해요. 하지만 이제 아버지께서 자
인명진은 천천히 말을 꺼냈고 그의 눈빛은 점점 더 확신에 차갔다.문득 그는 여러 해 전의 율이를 떠올렸다. 그녀가 웃을 때의 모습은 너무나 따뜻하고 아름다웠다.무엇보다도 율이는 한때 그를 따뜻하게 해주었고, 보호해 주었었다. 율이가 아니었으면 그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의 그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현재 율이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명진에게는 큰 위안이었다.법로는 인명진의 말을 듣고 곧 깨달았다.잠시 침묵한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널 약인으로 만든 사람이 나라는 걸 잊지 마라.”매듭을 묶은 사람이 매듭을 풀 수 있는 법이다.그는 인명진을 약인으로 만들 수 있었고 반대로 그를 정상으로 되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렇다, 그는 인명진에게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할 수 있었다.이제 법로는 실험은 불행을 만들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었다.“정말인가요?”인명진의 눈빛에는 기쁨과 설렘이 스쳤다.처음 지유의 곁을 떠났을 때 그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비록 온지유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정상적인 신분도 없고 건강한 몸도 없었기에 친구로 여겼던 온지유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다시 돌아온 이유는 여이현이 전화로 온지유에게 일이 생겼다고 알렸기 때문이었다.온지유가 노석명의 실험 대상으로 취급받는 것을 보고, 또 온지유가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는 것을 본 그는 더 이상 떠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법로는 이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이 있다고 한다!인명진은 늘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꿈꿔왔었다.법로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지유를 구한 건 너니까 사례 정도로 생각해라.”...법로와 신무열은 이곳에 머무르며 가끔 온지유와 마주쳤다.비록 군부대에 있었지만 여이현은 온지유를 잘 챙겨주었다. 그녀의 식사는 따로 준비되었고 특히 신무열과 법로가 온 후로는 더욱 호화로워졌다.하지만 온지유는 전혀 식욕이 없
율이라고 불리는 게 싫다면 부르지 않으면 그만이다.온지유는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고 신무열을 바라봤다.그리고 의문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죠?”온지유라는 호칭을 신무열이 받아들였다면 다른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믿을 수 없었다.신무열이 진지한 투로 말했다.“지유야, 네가 우리를 배척하는 이유를 잘 알아. 아버지는 실제로 아주 많은 나쁜 짓을 해왔어.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위한 마음은 진짜가 맞아. 네가 실종 된 뒤로도 몇 번이고 널 찾으러 다녔었어. 아니, 아버지는 이 몇 년간 한 번도 널 찾는 걸 멈춘 적 없었어.”“너는 모르겠지. 노석명이 노승아를 데려왔을 때, 아버지는 노승아를 너로 착각하고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아 부었는지...”온지유는 손을 저었다. 더 이상 신무열이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신무열은 온지유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넌 아직 모르지? 아버지가 야망을 위해 실험을 계속해 왔고, 그로 인해 인명진을 약인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인명진을 정상인으로 돌려줄 수 있다고 하는걸. 그리고 인명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한 걸.”신무열은 호흡이 무거워졌다.아버지는 Y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법로이다. 몇 년간 노석명에게 속아 신무열이 어떤 말을 해도 의견을 숙이지 않던 그였다.하지만 아버지가 온지유를 대할 때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온지유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목에 무언가 걸리기라도 한 듯 불편했다.법로가 자신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줄 몰랐다.신무열의 말대로 비록 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지만 자애로운 아버지였다는 것은 변함이 없을지도 모른다. 몸 안에 흐르는 피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하지만...온지유는 자신을 설득할 수 없었다.“지금 이런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만하면 안 돼요?”온지유는 지쳤다. 몸도 마음도.신무열도 온지유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엎드려!”신무열은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온지유 쪽으로 몸을 던졌다.군영 전체는 바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여이현은 신속하게 배치를 지시했고 인명진도 급히 온지유 앞으로 도착했다. 한편 홍혜주와 나민우는 대부대와 함께 이번 기습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신무열은 이 틈을 타 온지유를 데려가려고 했지만 인명진의 저지를 받았다.“도련님, 이현 씨가 특별히 당부한 게 있습니다. 지금은 전투 중이니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게다가 율이도 말했잖아요. Y국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신무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온지유가 앞으로 나서더니 신무열의 손목을 단단히 잡았다. 온지유는 표정을 굳히고 캐물었다.“이번 전쟁, 당신이 일부러 일으킨 건 아니죠?”아니면 왜 신무열만 이 상황에서 평온하게 그녀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걸까?그들은 온지유를 데려가겠다는 의지만 밝혔을 뿐 여이현이 중독된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무런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았다.“우리가 한 게 아니야.”신무열의 얇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고 그의 표정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그는 전쟁을 싫어했고 자신의 나라를 화국처럼 만들고 싶어했지만 화국을 싫어하기도 했다.온지유만 없었다면, 그는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지유는 지금 신무열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의심이 서려 있었다.신무열은 입술을 꼭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유야, 나는 그냥 여기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하지만 네가 나와 함께 간다면, 나는...”“함께 가면 무슨 좋은 일이 있는데요? Y국의 귀족 딸이 되어 누릴 수 없는 부와 명예를 얻게 되는 건가요?”온지유의 입가에는 차가운 웃음기가 스쳤다.Y국의 상류층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하류층 사람들은 어떤가.노예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 그들의 부하들, 모두가 피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었다.신무열은 계속해서 말했다.“그런
그들은 말을 돌려 온지유의 의심을 사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데리고 가려 했었다.하지만 여이현의 부하들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혼란한 틈을 노려 온지유를 Y국으로 데리고 가려 했는데 지금 상황을 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이 모든 것이 다 인명진 때문이다!인명진은 입을 살짝 벌리며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신무열이 그의 말길을 끊었다.“인명진 씨, 무슨 수를 써서든 지유를 Y국으로 데려와야 해요.”...두 시간 후.“큰일 났습니다!”조급한 목소리가 군영 전체에 울려 퍼졌다. 모든 사람이 그 소리에 놀라 신속하게 상부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지유도 빠른 속도로 천막에서 달려 나왔다. 그녀는 많은 사람이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밖으로부터 돌아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하지만 그녀는 사람들 속에서 여이현 뿐만 아니라 용경호와 성재민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기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다 갑자기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이 그녀 눈에 띄었다.조급한 마음이 어려있는 그의 까만 눈동자를 본 온지유는 심하게 요동치는 가슴을 쥐어 잡고 다가가서 물었다.“경호 씨, 이현 씨는요? 왜 이현 씨가 보이지 않는 거죠?”그 말을 들은 용경호의 두 눈은 격한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는 머리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사모님, 대장님께서…”무언가 눈치 채고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넘어질 뻔한 온지유를 인명진이 부축해주었다.온지유는 한순간에 모든 힘을 빼앗긴 것처럼 고통스럽고 믿기지 않았다.“경호 씨, 지금 장난치는 거죠? 그 말이 진심 아니죠?”용경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사모님, 대장님께서는 전투 중 총알을 맞고 강으로 추락했습니다. 저희들이 오랫동안 찾았는데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강에 사람을 포식하는 악어와 아나콘다가 서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온지유는 힘이 풀린 채 온몸의 감각을 서서히 잃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여이현이 총을 맞고 추락하는 화면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인명진은 온지유를 막으며 설득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율아, 우리가 강을 따라서 이렇게나 오래 찾아보았는데도 발견하지 못했잖아. 성재민 씨 쪽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인명진은 오랜 수색에도 여이현이 보이지 않자 사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으니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도 반드시 받아들여야 했다.온지유는 인명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세웠다.“이런 말 하지 마세요. 제 눈으로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거예요. 모두 돌아가세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현 씨를 찾아낼 거에요!”온지유는 멘탈이 붕괴되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여이현의 시체만 발견되지 않는다면 살아있을 희망이 있었기에 이대로 멈추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위급한 상황이라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인명진은 온지유가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녀를 기절시켜 억지로 데려갔다.군영에 도착하니 신무열이 온지유를 데리고 Y국으로 돌아가려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명진은 온지유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도련님, 지금 이 상황에서 지유를 보내드릴 수 없어요. 지유가 여이현 씨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도련님이 막무가내로 데려가시면...”자살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비록 온지유는 아직도 여이현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온지유가 여이현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고 사랑하는데 Y국으로 돌아갔다가 감금이라도 당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컸다.신무열은 온지유가 했던 말과 그들에 대한 태도가 생각나서 한 발짝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혼미 속에서 깨어난 온지유는 눈을 뜨기 무섭게 여이현을 찾아 나서려 했지만 인명진에게 잡혔다.“너 지금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그래? 온지유 정신 차려! 그냥 현실을 받아들여. 화국에서 이미 여이현 씨 사망 통지를 내렸다고.”온지유는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
은서우는 인명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이제 남은 과제는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었다.어느 날 병원 휴게실에서 그녀는 인명진이 혼자 앉아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은서우는 심호흡하며 용기를 내어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만지는 척했다.실제로는 몰래카메라를 켜 자연스럽게 각도를 조정한 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다행히도 인명진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은서우는 재빨리 사진을 인턴에게 전송했다.인턴은 그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은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죠.]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인명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학술 교류에 관련하여 질문한 것이다.당황한 은서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인턴도 들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은서우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보내주며 인명진이 그녀를 추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은서우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다시 인명진을 찾아갔다.“원장님, 한 인턴이 이번 수술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학술 연구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원장님께서도 얘기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 친구 연락처입니다.”인명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은서우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는 은서우와 학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은서우는 탄탄한 의학적 지식과 침착한 분석 능력으로 빛을 발했고 인명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이상한 점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네. 한 번 키워봐도 되겠어.’인명진이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전문적인 역량이 기대 이상이군요. 앞으로 더 도전적인 케이스들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은서우는 깜짝 놀랐
은서우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평생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는 숨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 마음대로 해. 진실은 결국 밝혀질 테니까.”소태훈은 은서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분노에 휩싸였다.그는 옆에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밀쳐버렸다.탁자 위의 찻잔과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은서우!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광기에 휩싸인 그의 행동은 방 안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분노까지 부추겼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은서우! 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으로 은서우의 옷깃을 움켜잡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은서우는 목이 조여와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외쳤다.“이건 불법 감금이에요! 놔요!”“불법 감금? 이건 가족 간의 일이야! 네가 태연이를 죽였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그 장면을 목격한 인명진은 얼굴을 굳히고 이내 앞으로 나서서 중년 남성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남자는 인명진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지만 굽히지 않고 외쳤다.“넌 누구야? 뭔데 우리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지?”인명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은서우 병원 원장. 내 직원이 이런 식으로 위협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이 많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법 앞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소상태가 다가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이러다 일이 더 커지겠어요. 일단 놔요.”사내는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은서우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인명진이
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그날 가자고 제안한 건 단순한 모임이었어. 그 누구도 그런 사고가 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보상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도 내 삶이 있어. 더 이상 이 일에 끌려다닐 순 없어.”그 순간 소상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뻗어 은서우의 이마를 찌를 듯 들이밀었다.“이 배은망덕한 년아! 태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해?”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태연이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지고 살 순 없어요. 저도 할 만큼 했어요.”연희진이 흐느끼며 애원했다.“서우야,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니? 태훈이 몸이 안 좋아서 치료비가 계속 필요해.”은서우는 자신을 거둬준 양모를 바라보며 심란함을 느꼈다.이전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은서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엄마, 마지막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드린 돈만으로 부족했나요? 단순한 사고였어요. 저도 태연이한테 그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고 태훈이가 이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그 말에 소태훈이 흥분하며 휠체어에서 몸을 기울였다.그의 눈빛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은서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 모든 게 왜 벌어진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은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물었다.“뭐라고? 그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단지 내가 네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소태훈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이젠 감추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태연이가 죽을 일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러
“성북 쪽으로 가주세요. 도착하면 제가 길 안내할게요.”인명진은 은서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용히 성북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성북은 오래된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인명진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그가 경성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게 아니면 여이현이 있는 지역에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곳에 올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마침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한 단칸방 앞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순간 안에서 격한 소란이 들려왔다.“왜 아직도 그 계집애 편을 들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애만 없었어도 우리 태훈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그 애가 우리한테 준 돈만 해도 충분해. 게다가 태훈이 사고는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일 뿐이었어.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한테 책임을 떠넘길 거야?”끝없는 다툼.은서우는 이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는 은서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무심하게 말했다.“가족 문제로 일에 지장 주지 마세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면 그냥 휴가 내세요. 그리고 차비는 안 받아요.”그건 분명 의도적인 언급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내일 현금을 들고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은서우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은 깨진 유리 조각, 뒤집힌 가구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로 인해서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여기 이천만 원이에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 기억하세요. 저도 이제 곧 서른이에요.”“곧 서른이라고? 그럼 태연이는 너 때문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 알
이천만 원이라는 돈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다.‘하지만 원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 병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은 선생님, 1억이라도 원하시는 건 아니죠?”인턴은 어떻게든 인명진과 접촉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인명진의 비서와 접촉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결국 선택한 차선책이 은서우였다.어차피 은서우는 돈을 받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고 그 후 그녀가 병원에서 잘리든 말든 인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은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요. 그 부탁은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내일이면 원장님 사무실에 가는 날이잖아요? 은 선생님, 그냥 지금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요.”인턴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그때 은서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은서우! 지금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막혀왔다.“진정 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원하는 것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은서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이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턴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천만 원 준다고 하셨죠? 바로 주면 내일 부탁 처리해 줄게요.”“지금 바로 송금할게요.”인턴은 은서우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은서우는 그것이 최신형 아이폰이라는 걸 알아챘다.케이스조차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명품이었다.‘그래. 돈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이천만 원이나 쓸 리 없지.’계좌 번호를 불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계좌로 이천만 원이 들어왔다.인턴은 신신당부했다.“전 고화질 사진이 필요해요. 그리고 카카오톡도 꼭 추가해 줘야 해요.”“그럼 제가 당신 카카오톡을 로그인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어떻게 추가해요?”“좋아요. 로그인하세요. 은서우 씨...”그때 인턴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