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진은 온지유를 막으며 설득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율아, 우리가 강을 따라서 이렇게나 오래 찾아보았는데도 발견하지 못했잖아. 성재민 씨 쪽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인명진은 오랜 수색에도 여이현이 보이지 않자 사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으니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도 반드시 받아들여야 했다.온지유는 인명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세웠다.“이런 말 하지 마세요. 제 눈으로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거예요. 모두 돌아가세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현 씨를 찾아낼 거에요!”온지유는 멘탈이 붕괴되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여이현의 시체만 발견되지 않는다면 살아있을 희망이 있었기에 이대로 멈추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위급한 상황이라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인명진은 온지유가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녀를 기절시켜 억지로 데려갔다.군영에 도착하니 신무열이 온지유를 데리고 Y국으로 돌아가려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명진은 온지유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도련님, 지금 이 상황에서 지유를 보내드릴 수 없어요. 지유가 여이현 씨를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도련님이 막무가내로 데려가시면...”자살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비록 온지유는 아직도 여이현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온지유가 여이현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고 사랑하는데 Y국으로 돌아갔다가 감금이라도 당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컸다.신무열은 온지유가 했던 말과 그들에 대한 태도가 생각나서 한 발짝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혼미 속에서 깨어난 온지유는 눈을 뜨기 무섭게 여이현을 찾아 나서려 했지만 인명진에게 잡혔다.“너 지금 그 몸으로 어딜 가려고 그래? 온지유 정신 차려! 그냥 현실을 받아들여. 화국에서 이미 여이현 씨 사망 통지를 내렸다고.”온지유는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익숙한 말투에 온지유는 고개를 번쩍 들고 홍혜주를 바라보았다. 홍혜주의 눈가에 은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홍혜주의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전투를 겪은 화약 흔적이 남아있어서 먼지를 뒤집어쓴 듯 초라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닥뜨리자 혼혜주는 빠른 발걸음으로 온지유에게 다가가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지유 씨, 저 돌아왔어요. 소대장님 소식 들었어요.”그녀는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로 향했다. 그러다 적군의 대포에 쓰러져 여러 날 동안 혼미상태였다. 다시 눈을 떠보니 모든 기억이 회복되어있었다.그리고 영지도 돌아와서야 여이현의 희생 소식을 알게 되었다.홍혜주는 온지유가 여이현에 대한 깊은 감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알고 이리로 황급히 달려왔다.온지유는 홍혜주를 본 순간부터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그녀는 자주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제일 기대했던 아이마저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그녀 곁을 떠나버렸다.“콜록, 콜록!”그녀는 너무 슬퍼 감정 기복이 심했는지 맹렬한 기침을 하다가 급기야 피를 토하고 말았다.이 장면에 옆에 서 있던 홍혜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했다. 다행히 인명진이 휴지를 가져다주며 홍혜주에게 온지유를 위로해 주라는 눈치를 줬다.홍혜주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온지유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지유 씨, 전 지유 씨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리고 지유 씨가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아요. 하지만 진정하시고 마음을 다잡으세요. 그래야 아이를 만날 수 있죠.”“뭐라고요?”온지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아이라니? 우리 아이는 이미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 아니었나? 혜주 씨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온지유는 목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물었다.“혜주 씨, 무슨 뜻이죠? 무슨 소식을 알고 있는 거예요?”그
홍혜주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쓸개를 먹은 것처럼 목구멍이 쓰라렸다. 온지유가 이렇게 슬픈 얼굴로 남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온지유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토끼처럼 빨간 두 눈으로 홍혜주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홍혜주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진실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지유 씨, 아이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소대장님뿐이에요. 하지만 소대장님께서는...”현재 여이현의 사망 통지가 널리 퍼진 마당에 믿으려 하지 않아도 방법이 없었다. 오랫동안 찾아보았는데도 여이현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으니 이미 건너지 말아야 할 다리 너머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오직 여이현만이 아이의 행방을 알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다.온지유는 북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양 볼을 따라 쉴 새 없이 흘러내려왔다.“혜주 씨, 그 말 진심이세요? 절 속이시는 거 아니에요? 저는 제 아이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저는...”온지유는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홍혜주는 그 모습이 너무 가슴이 아파 온지유를 품에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지유 씨, 진짜예요. 살아만 있다면 뭐든 다 가능하죠. 소대장님께서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시고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데려오려는 속셈일 수도 있죠.”그녀는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를 속이는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 하면 온지유라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온지유는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이현 씨라면 모든 일을 잘 계획했을 거야. 그래야 이현 씨지.’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홍혜주의 말에 동의했다.“그래요. 혜주 씨 말이 맞아요. 더 강해져서 꼭 제 아이를 살아서 만날 거에요. 혜주 씨,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요.”온지유는 붕괴한 멘탈을 다시 붙잡고 이성을 되찾았다.그녀는 아직도 홍혜주가 그녀를 보호하려고 심하게 다쳤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홍혜주는 그녀 때문에 노승아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당시 홍
“날 보낼 생각이야?”인명진은 온지유 말속에 숨겨진 뜻을 눈치채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온지유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명진 씨, 세상에 헤어지지 않는 잔치는 없는 법이에요. 우리 모두 각자 걸어야 할 길이 있잖아요. 그리고 명진 씨는 저 때문에 이곳까지 온 거잖아요.”인명진에게 원래 자기만의 계획이 있었는데 온지유를 위해서 계획을 바꾸었다.“맞아, 너에게 일이 터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유야 나는 그냥 너를 위해서 움직이고 싶어. 내가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말이야.”온지유와 마주 앉아있는 인명진은 굳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 속엔 확고한 의지뿐만 아니라 온지유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었다.그녀는 인명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 마음속은 여이현으로 가득하여 있고 지금 그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었다.그에 온지유는 모르는 체하며 입을 열었다.“명진 씨 인생은 명진 씨가 해야 할 일을 하며 보내는 거예요. 명진 씨는 약인 이라 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제 곁에 남으려 한다는 거 알아요.”“지유야, 지금 이런 얘기를 꺼내기 적합하지 않다는 거 알아. 하지만 꼭 말해야겠어. 내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아. 지유야, 나는 널 좋아해.”온지유가 말했었다. 그녀는 온지유일 뿐 율이가 아니라고.그녀가 율이라 불리는 것을 꺼리니 고백하는 이 순간 인명진은 그녀를 더는 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온지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인명진의 눈빛에는 사랑과 슬픔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그는 말을 이었다.“지유야, 난 항상 네 곁을 지키면서 너를 챙겨줄 수 있어. 언제든지 네가 뒤를 돌아보기만 한다면 내가 그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진심 어린 고백에 온지유는 목구멍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명진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알고 있다. 하
말을 마친 여이현은 온지유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리고 유유히 사라졌다.온지유는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여이현을 잡으려 손을 뻗고 달려갔다. 하지만 여이현은 온몸이 투명해지며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여이현 이 나쁜 놈!”온지유가 꿈속에서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얼굴에서 촉촉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어 만져보았더니 눈물이었다.이때 인명진이 신무열을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온지유의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신무열은 빠른 걸음으로 온지유에게 다가가서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했다.“지유야, 괜찮아. 그건 그냥 꿈일 뿐이야. 이왕에 나랑 같이 Y국으로 돌아가지 않을래?”여이현이 목숨을 잃은 지금 온지유를 홀로 이곳에 내버려 두려니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 있든 온지유를 Y국으로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다.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저는 무열 씨와 함께 떠날 생각이 없어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예요? 저는 율이가 아니라 온지유라고요! 저는 화국 경성사람이지 Y국 사람이 아니에요!”그리고 신무열의 손을 내팽개쳤다.지금까지도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온지유의 태도는 신무열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것과 같았다. 신무열은 그동안 온지유가 마음을 바꾸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고집을 세울 줄 몰랐다.그는 어릴 적 기억이 문뜩 떠올랐다. 어린 시절 그들은 아주 화기애애한 남매였다.신무열도 온지유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계속 이대로 나온다면 방법이 없는 일이다.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설득했다.“지유야, 우리는 피를 나눈 남매야. 네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우리의 몸에서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우리는 서로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극친한 존재라고. 지유야, 네가 우릴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한 번이라도 돌이킬 기회를 주면 안 돼?”신무열은 온지유 곁에 앉은
신무열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Y국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에게 사고가 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신무열과 협상을 통해 해독약을 가지려 했다.하지만 지금은...온지유는 여이현 생각을 할 때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들게 느껴졌다.“무열 씨, 이곳에서 무사히 나가고 싶다면 지금 당장 떠나세요.”온지유는 천막 밖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신무열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가 그녀의 뜻을 따랐다. 떠나기 전 그는 온지유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지유야, 기다리고 있을게.”말을 끝낸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온지유는 신무열과 함께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무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인명진에게 물었다.“저 사람들이 명진 씨를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해서 다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려는 거에요?”아까 인명진이 신무열을 데리고 들어온 것을 목격한 온지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인명진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지유야, 미안해. 나는 그냥 널 돕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야. 너는 가족이 없잖아. 이곳에서 혼자 지내기 힘드니까 가족이 생긴다면 네가 행복해질 것 같아서 그랬어.”인명진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온지유는 그런 인명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사람은 다 현실적이기 마련이야. 명진 씨도 사람인데 평생을 이대로 살고 싶진 않을 거야.’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만약 명진 씨가 저 사람들과 거래를 했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인명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연기를 해줄 수 있었다. 인명진은 온지유가 율이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지유야, 고마워. 네가 도와줄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다.계다가 여이현에게 큰 사고가 발생했기에 이 상황에서 여진숙이 온지유에게 전화를 바꿔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제일 사랑하는 여인으로서 이 통화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온지유! 차라리 네가 죽지 그랬니!”온지유가 전화를 받자마자 여진숙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 너머에 있는 여진숙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현 씨의 죽음은 사고 때문이에요. 모든 것이 제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현 씨 진짜 신분은 어머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온지유, 내가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두고 봐.”‘승아의 죽음은 모두 온지유 이년 때문이야! 온지유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승아는 이현이랑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여진숙은 온지유에게 저주를 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이현은 Y국 온지유 곁에서 목숨을 잃었다.여진숙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아랑곳하지 않았다.“마음대로 해보세요. 제가 끝까지 가줄 테니까.”그녀는 한치 두려움도 없이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Y국에 있어서가 아니라 더는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말을 마친 그녀는 통화를 끊어버렸다.옆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성재민은 온지유의 차가운 태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는 온지유와 여진숙이 서로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이야기를 나눌 줄로 알았는데 이렇게 서로를 용납하지 못할 줄이야.성재민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조금 전으로 돌아가 전화를 바꿔주던 자신을 막고 싶었다. 이때 문뜩 여이현의 엄숙하고 냉담한 얼굴이 떠올랐다. 여이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한바탕 혼을 낼 것이 분명했다.“지유 씨,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전화를 넘겨야 하는데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성재민은 선생님께 혼이 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단정한 자세로 온지유 앞에 서 있었다.그는 여이현의 부하였기 때문에 온지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있었다.온지
대답을 기다리는 온지유의 눈빛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나민우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모두 내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있을 거야. 지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낼 텐데 안부를 전하면 오히려 더 걱정하실 거야. 그리고 난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잖아.”나민우는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가족들을 어떤 태도로 만나야 할지 몰랐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공허감에 휩싸여 무엇이든 해내서 그 구멍을 막고 싶었다.좀 더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온지유를 만날 때마다 나민우는 호흡이 가빠지며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럼 네 마음대로 해. 근데 네가 여긴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무섭지도 않냐?”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인생길의 끝은 모두 죽음이야. 난 길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잖아. 지금 뭐라도 해서 나 자신을 꽉 채우고 싶어.”“그래.”그 대답을 듣고 온지유는 어느 정도 나민우가 이해가 되었다.온지유는 대화를 마친 뒤부터 홍혜주와 함께 강을 따라 여이현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발견이 없었다. 연이어 며칠 동안 여이현의 행적이 보이지 않자 온지유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홍혜주의 손을 잡고 애원하는 말투로 물었다.“혜주 씨, 전 이현 씨를 찾지 못하겠어요. 제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 말고 다른 정보는 없어요? 이현 씨가 누구와 자주 통화를 하거나 어느 장소를 입에 올린 적 없어요?”온지유는 너무 지친 나머지 여이현 대신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홍혜주는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모르겠어요. 혹시 소대장님께서 가족에게 맡겨둔 게 아닐까요?”홍혜주는 자기의 추측을 털어놓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여진숙이 여이현의 아이를 돌봐줄 리가 없었고 여재호는 밖에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었기에 더욱 불가능했다.이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온지유의 뇌리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
은서우는 인명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이제 남은 과제는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었다.어느 날 병원 휴게실에서 그녀는 인명진이 혼자 앉아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은서우는 심호흡하며 용기를 내어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만지는 척했다.실제로는 몰래카메라를 켜 자연스럽게 각도를 조정한 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다행히도 인명진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은서우는 재빨리 사진을 인턴에게 전송했다.인턴은 그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은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죠.]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인명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학술 교류에 관련하여 질문한 것이다.당황한 은서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인턴도 들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은서우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보내주며 인명진이 그녀를 추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은서우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다시 인명진을 찾아갔다.“원장님, 한 인턴이 이번 수술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학술 연구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원장님께서도 얘기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 친구 연락처입니다.”인명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은서우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는 은서우와 학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은서우는 탄탄한 의학적 지식과 침착한 분석 능력으로 빛을 발했고 인명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이상한 점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네. 한 번 키워봐도 되겠어.’인명진이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전문적인 역량이 기대 이상이군요. 앞으로 더 도전적인 케이스들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은서우는 깜짝 놀랐
은서우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평생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는 숨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 마음대로 해. 진실은 결국 밝혀질 테니까.”소태훈은 은서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분노에 휩싸였다.그는 옆에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밀쳐버렸다.탁자 위의 찻잔과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은서우!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광기에 휩싸인 그의 행동은 방 안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분노까지 부추겼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은서우! 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으로 은서우의 옷깃을 움켜잡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은서우는 목이 조여와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외쳤다.“이건 불법 감금이에요! 놔요!”“불법 감금? 이건 가족 간의 일이야! 네가 태연이를 죽였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그 장면을 목격한 인명진은 얼굴을 굳히고 이내 앞으로 나서서 중년 남성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남자는 인명진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지만 굽히지 않고 외쳤다.“넌 누구야? 뭔데 우리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지?”인명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은서우 병원 원장. 내 직원이 이런 식으로 위협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이 많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법 앞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소상태가 다가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이러다 일이 더 커지겠어요. 일단 놔요.”사내는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은서우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인명진이
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그날 가자고 제안한 건 단순한 모임이었어. 그 누구도 그런 사고가 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보상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도 내 삶이 있어. 더 이상 이 일에 끌려다닐 순 없어.”그 순간 소상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뻗어 은서우의 이마를 찌를 듯 들이밀었다.“이 배은망덕한 년아! 태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해?”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태연이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지고 살 순 없어요. 저도 할 만큼 했어요.”연희진이 흐느끼며 애원했다.“서우야,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니? 태훈이 몸이 안 좋아서 치료비가 계속 필요해.”은서우는 자신을 거둬준 양모를 바라보며 심란함을 느꼈다.이전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은서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엄마, 마지막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드린 돈만으로 부족했나요? 단순한 사고였어요. 저도 태연이한테 그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고 태훈이가 이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그 말에 소태훈이 흥분하며 휠체어에서 몸을 기울였다.그의 눈빛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은서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 모든 게 왜 벌어진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은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물었다.“뭐라고? 그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단지 내가 네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소태훈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이젠 감추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태연이가 죽을 일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러
“성북 쪽으로 가주세요. 도착하면 제가 길 안내할게요.”인명진은 은서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용히 성북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성북은 오래된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인명진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그가 경성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게 아니면 여이현이 있는 지역에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곳에 올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마침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한 단칸방 앞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순간 안에서 격한 소란이 들려왔다.“왜 아직도 그 계집애 편을 들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애만 없었어도 우리 태훈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그 애가 우리한테 준 돈만 해도 충분해. 게다가 태훈이 사고는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일 뿐이었어.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한테 책임을 떠넘길 거야?”끝없는 다툼.은서우는 이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는 은서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무심하게 말했다.“가족 문제로 일에 지장 주지 마세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면 그냥 휴가 내세요. 그리고 차비는 안 받아요.”그건 분명 의도적인 언급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내일 현금을 들고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은서우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은 깨진 유리 조각, 뒤집힌 가구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로 인해서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여기 이천만 원이에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 기억하세요. 저도 이제 곧 서른이에요.”“곧 서른이라고? 그럼 태연이는 너 때문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 알
이천만 원이라는 돈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다.‘하지만 원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 병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은 선생님, 1억이라도 원하시는 건 아니죠?”인턴은 어떻게든 인명진과 접촉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인명진의 비서와 접촉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결국 선택한 차선책이 은서우였다.어차피 은서우는 돈을 받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고 그 후 그녀가 병원에서 잘리든 말든 인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은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요. 그 부탁은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내일이면 원장님 사무실에 가는 날이잖아요? 은 선생님, 그냥 지금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요.”인턴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그때 은서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은서우! 지금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막혀왔다.“진정 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원하는 것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은서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이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턴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천만 원 준다고 하셨죠? 바로 주면 내일 부탁 처리해 줄게요.”“지금 바로 송금할게요.”인턴은 은서우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은서우는 그것이 최신형 아이폰이라는 걸 알아챘다.케이스조차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명품이었다.‘그래. 돈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이천만 원이나 쓸 리 없지.’계좌 번호를 불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계좌로 이천만 원이 들어왔다.인턴은 신신당부했다.“전 고화질 사진이 필요해요. 그리고 카카오톡도 꼭 추가해 줘야 해요.”“그럼 제가 당신 카카오톡을 로그인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어떻게 추가해요?”“좋아요. 로그인하세요. 은서우 씨...”그때 인턴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