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을 기다리는 온지유의 눈빛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나민우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모두 내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있을 거야. 지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낼 텐데 안부를 전하면 오히려 더 걱정하실 거야. 그리고 난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잖아.”나민우는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가족들을 어떤 태도로 만나야 할지 몰랐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공허감에 휩싸여 무엇이든 해내서 그 구멍을 막고 싶었다.좀 더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온지유를 만날 때마다 나민우는 호흡이 가빠지며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럼 네 마음대로 해. 근데 네가 여긴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무섭지도 않냐?”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인생길의 끝은 모두 죽음이야. 난 길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잖아. 지금 뭐라도 해서 나 자신을 꽉 채우고 싶어.”“그래.”그 대답을 듣고 온지유는 어느 정도 나민우가 이해가 되었다.온지유는 대화를 마친 뒤부터 홍혜주와 함께 강을 따라 여이현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발견이 없었다. 연이어 며칠 동안 여이현의 행적이 보이지 않자 온지유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홍혜주의 손을 잡고 애원하는 말투로 물었다.“혜주 씨, 전 이현 씨를 찾지 못하겠어요. 제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 말고 다른 정보는 없어요? 이현 씨가 누구와 자주 통화를 하거나 어느 장소를 입에 올린 적 없어요?”온지유는 너무 지친 나머지 여이현 대신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홍혜주는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모르겠어요. 혹시 소대장님께서 가족에게 맡겨둔 게 아닐까요?”홍혜주는 자기의 추측을 털어놓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여진숙이 여이현의 아이를 돌봐줄 리가 없었고 여재호는 밖에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었기에 더욱 불가능했다.이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온지유의 뇌리
온지유는 홍혜주를 곁에 두고 인명진에게 물었다.“혜주 씨가 알고 있는데 명진 씨가 모르고 있었다고요? 인명진 씨, 지금까지도 절 속이실 생각이세요?”말을 하는 온지유의 낱카롭고 차가운 눈길이 인명진을 향했다.인명진은 얇은 입술로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지유야, 내가 다른 사람을 속이면 속였지 너에게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내가 널 알아보고도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이미 온지유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야. 과거의 기억을 잃은 너를 끌어들이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법로의 딸인 너에게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야.”Y국 내부 모순이 점점 격화되고 있는 지금 인명진은 법로를 초월하기 위해 더 위험한 독약을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심지어 법로의 자리를 엿보고 있었다.법로는 한마음 한뜻으로 Y국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기에 양극 분화가 심했다.온지유는 마음이 여린 착한 사람이고 그녀만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그래서 인명진이 온지유에게 마음속 깊이 숨겨둔 암흑한 생각을 털어놓는다면 그녀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인명진이 멍을 때리는 것을 발견한 온지유가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왔다.얼마나 가까웠던지 인명진의 피부 모공마저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인명진은 두 사람의 위험한 거리에 숨이 한껏 거칠어졌다.“널 만나기 전과 후에 생긴 일들을 생각하고 있어. 지유야,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난 네 아이의 행방을 안 순간 너에게 알려줬을 거야. 여이현 씨와 약속한 일은 네 몸속의 독소를 제거하는 일뿐이야.”온지유가 입술을 오므리며 말을 하기 전에 인명진이 한마디 덧붙었다.“지유야, 난 더는 아는 게 없어.”뒤이어 홍혜주가 미안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지유 씨, 미안해요. 도움이 되지 못했네요.”온지유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일의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이의 행방을 모르고 여이현은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도 홍혜주와 나민우가 살아있어서 천만다행이다.신무열과 법로는 아직도 온지유를
나민우는 온지유의 곁에 있어야만 마음속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그래? 그럼 같이 가자.”...5년 뒤.온지유가 여진그룹 사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배진호가 서류를 가지고 급히 찾아왔다.“지유 씨, 이 서류 좀 보세요. S국 z그룹에서 우리 장사를 낚아챘어요. 이번 장사 때문에 저희는 6조를 날려 먹었습니다.”여이현이 이혼서류를 작성하며 재산양도서까지 온지유에게 넘겨주었기에 현재 여진그룹 제일 큰 주주는 온지유였다.그녀는 돌아오자마자 여진그룹을 물려받고 열심히 경영했다. 왜냐하면 여진그룹은 여이현이 이 세상에 남겨놓은 유일한 산업이었고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이 모든 것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했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세상을 떠났으니 온지유는 그가 보호하려던 모든 것을 열심히 수호할 것이다.배진호의 말에 온지유는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그렇다면 S국 z그룹과 정식으로 대결을 펼쳐봅시다. 아 그리고 원래 저희랑 합작하기로 했던 회사 책임자에게 연락해서 제가 직접 가볼 것이라고 전해주세요.”온지유는 여의현 곁에서 7년 동안 배진호와 함께 회사의 크고 작은 사무를 해결했기에 이 정도 일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그뿐만 아니라 지금은 제일 큰 주주로서 모범을 보여야 했다.배진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먼저 홍혜주 씨에게 급히 연락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오후에 출발하는 게 어떻습니까?”온지유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오후에 출발하겠다니? 어딜 가려고?”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니 인명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하얀 셔츠차림으로 금테 안경을 쓰고 밖으로부터 들어왔다.그의 손에는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온지유를 따라 돌아온 뒤 인명진은 진료소를 차리고 매달마다 온지유의 건강검진을 해주었다. 그들은 인명진을 보고서야 온지유가 건강검진을 받을 날임이 생각났다.온지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는 진호 씨와 S국에 가보려고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꼭 가봐야
배진호는 급히 말했다.“지유 씨, 먼저 방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먼저 나서겠습니다.”여진숙은 늘 온지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여이현이 사망한 지금 배진호는 그의 부탁을 받은 사람으로서 온지유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이에 온지유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제가 직접 뵐 거예요.”배진호가 한두 번은 막아줄 수 있더라도 매번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온지유는 배진호의 어깨를 쓰다듬고 여진숙을 만나러 내려갔다.여진숙은 모란꽃이 새겨져 있는 흰색 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에메랄드그린 보석을 달고 있는 그녀는 온유하고 우아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눈빛은 독기를 머금고 있었다.여진숙은 온지유를 보자마자 건방진 태도로 따졌다.“온지유, 넌 무슨 얼굴로 이곳으로 돌아온 거니?”여진숙은 하이힐을 신고 온지유에게 달려왔다. 막무가내로 휘두른 손찌검은 공중에서 온지유에게 막혔다. 온지유는 여진숙의 손목을 잡고 뒤로 꺾으며 뿌리쳤다.여진숙이 뒤로 몇 걸음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온지유 네가 감히 날 밀어? 정말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지금의 온지유는 눈빛으로 굳센 의지를 나타냈고 옛날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온지유의 작은 몸에 이리도 강한 힘이 존재하고 있다니.온지유는 도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세요. 손찌검이나 하시지 말고. 제가 지금 많이 참아주고 있는 거예요.”온지유는 일을 해결하러 왔지 괴롭힘을 당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온지유, 네가 뭔데 이렇게 기세가 등등한 건데? 이현이는 너 때문에 죽은 거잖아!”여진숙은 분노에 찬 두 눈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소리쳤다.노승아는 온지유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끝까지 그녀의 신분을 밝혀주지 못했다.여이현의 이름 세글자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온지유의 심장에 꽂혔다. 여이현의 죽음은 온지유에게 여전히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그래서 고작 이 말 하시려고 찾아온 거예요? 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여진숙이 노승아를 보내고 여씨 가문에서 여태까지 혼자 지내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온지유는 입꼬리를 올려세우며 여진숙을 내쫓았다.“저는 예전부터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제가 여진그룹에서 제일 큰 주주예요. 그러니 제가 뱉어내든 말든 어머님이 알 바 아니에요. 이분을 밖으로 잘 모셔다드려 주세요.”말이 끝날 무렵 온지유의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여진숙은 자기가 이 많은 사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전 그녀는 온지유를 매서운 눈길로 째려보았다.‘오늘 일을 그대로 갚아줄 거야. 어디 한번 두고 봐. 내가 죽지 않으면 온지유 네가 죽는 거야.’여진숙이 떠난 뒤 온지유는 멀리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를 향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배진호 씨, 저에게 사람을 더 붙여 주세요. 그리고 여진그룹 쪽엔 주주 회의를 한번 열어야겠어요.”여이현이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모든 재산을 넘겨주었다. 여이현의 사망 소식이 널리 알려졌고 그녀가 오래 자리를 비운 탓에 다른 주주들이 소란을 피울 것이 분명했다.게다가 여진숙이 혼란을 틈타 다른 주주들을 꼬드겨서 그녀를 끌어내리려 할 것이 뻔한 일이다.비록 온지유도 거액의 재산을 관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진숙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눈 뜨고 보고 있을 순 없었다.“지유 씨, 면이 불었어요. 아직 한 입도 드시지 못했는데 한 그릇 바꿔 달라고 할까요?”배진호가 온지유에게 다가와서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진호 씨도 일찍 쉬세요.”온지유는 머리를 저으며 거절하고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배진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대표님이 살아계신다면 두 사람이 함께 비지니스계를 휘젓고 다닐 텐데. 하늘의 뜻은 예측할 수 없이 변덕스러웠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대표님이 너무 아쉬웠다.온지유가 떠나가는 뒷모습은 배진호뿐만 아니라 인명
홍혜주는 인명진이 무언가 알고 있으며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홍혜주의 물음에 인명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소식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비밀이라고 하기 어려워.”인명진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첫눈에 율이를 알아본 것이다.그가 노승아와 손을 잡은 것도 사실은 율과 여이현을 갈라놓기 위해서였다.그는 단지 이 기회를 타서 율의 곁으로 가고 싶었을 뿐이다.하지만 그의 부주의로 율은 흉터남에게 잡혀갔다. 그러는 바람에 홍혜주도 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에게 독약을 주입했다.“그래? 알겠어. 일찍 쉬어.”홍혜주는 이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객실로 가버렸다.내일 그녀는 온지유 곁에 있어 줘야 할 뿐만 아니라 사적인 일들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한편, Y국에서.신무열과 법로는 의사당에 있었다.법로는 벽에 걸린 지도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도의 북쪽에 빨간 펜으로 원을 하나 그렸다. 그와 동시에 또 지도의 남쪽에 두 개의 긴 화살표를 그렸다.“이 노석명이라는 반역자는 Y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화국까지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 누구 마음대로!”“원으로 그려놓은 지역에 사람을 배치하도록. 이곳은 반드시 지켜내야 해. 연합군이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그리고 화살표 쪽에도 두 개의 병력을 배치해 적을 유인하도록 하게.”신무열은 법로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는 지도 앞으로 걸어가 S국의 국토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노석명이 싸움을 원한다면 S국을 끌어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화국이라면... 한번 시도해볼 수는 있어요.”지금의 화국은 백 년 전의 화국이 아니었지만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화국을 완전히 뒤엎을 수는 없더라도 화국으로 하여금 일련의 조치를 취하게 하여 Y국의 국제지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지금의 Y국은 국제적으로 너무 낮은 지위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법로
법로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온지유가 율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부터 가면을 쓰려 하지 않았다.지금 법로는 기분이 아주 나빠 보였다.신무열은 법로의 뜻대로 온지유를 설득해볼 수도 있고 좋은 말을 해줄 수도 있었지만, 법로가 벌인 일 중 일부는 그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신무열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아버지께서 직접 안배하세요.”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S국, 대통령 청사.좀 전에 대통령이 치료해주라고 한 남자는 이미 깨어났다. 그의 얼굴에 있는 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약을 바르고 흰 붕대를 감아서인지 마치 백색 천으로 싸인 미라같아 보였다.대통령은 침대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한테 성질을 쓰고 있는 거야?”그가 항상 남자의 주변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여기서 눈을 굴리며 누워있을 기회없이 하늘나라로 직행했을 것이다.“아닙니다.”너무 오래동안 말을 해본적이 없어서인지 남자의 목소리는 사포처럼 거칠었다.대통령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 마음이 없었다면 네가 이런 태도일 리가 있겠니? 넌 몸이나 잘 챙겨. 아주 심하게 다쳤더군. 네가 목숨을 지키고,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돌아가고 싶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이야.”남자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몇 초 동안의 망설임 끝에 천천히 “알겠어요.”라고 대답했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떠 있는 둥글고 밝은 달은 마치 커다란 원반 같아 보였다.내일은 한 가족이 함께 모이는 추석날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온지유는 아침 일찍부터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핸드폰을 들어보니 아버지 온경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비록 법로가 그녀의 친아버지라는 신분이 밝혀졌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양육의 은혜가 낳아준 은혜보다 크다고 생각했다.그녀의 부모님은 영원히 온경준과 정미리일뿐이다.전화를 받자마자 온경준의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