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보낼 생각이야?”인명진은 온지유 말속에 숨겨진 뜻을 눈치채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온지유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명진 씨, 세상에 헤어지지 않는 잔치는 없는 법이에요. 우리 모두 각자 걸어야 할 길이 있잖아요. 그리고 명진 씨는 저 때문에 이곳까지 온 거잖아요.”인명진에게 원래 자기만의 계획이 있었는데 온지유를 위해서 계획을 바꾸었다.“맞아, 너에게 일이 터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유야 나는 그냥 너를 위해서 움직이고 싶어. 내가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말이야.”온지유와 마주 앉아있는 인명진은 굳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 속엔 확고한 의지뿐만 아니라 온지유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었다.그녀는 인명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 마음속은 여이현으로 가득하여 있고 지금 그가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었다.그에 온지유는 모르는 체하며 입을 열었다.“명진 씨 인생은 명진 씨가 해야 할 일을 하며 보내는 거예요. 명진 씨는 약인 이라 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제 곁에 남으려 한다는 거 알아요.”“지유야, 지금 이런 얘기를 꺼내기 적합하지 않다는 거 알아. 하지만 꼭 말해야겠어. 내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것 같아. 지유야, 나는 널 좋아해.”온지유가 말했었다. 그녀는 온지유일 뿐 율이가 아니라고.그녀가 율이라 불리는 것을 꺼리니 고백하는 이 순간 인명진은 그녀를 더는 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온지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인명진의 눈빛에는 사랑과 슬픔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그는 말을 이었다.“지유야, 난 항상 네 곁을 지키면서 너를 챙겨줄 수 있어. 언제든지 네가 뒤를 돌아보기만 한다면 내가 그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진심 어린 고백에 온지유는 목구멍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명진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알고 있다. 하
말을 마친 여이현은 온지유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리고 유유히 사라졌다.온지유는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여이현을 잡으려 손을 뻗고 달려갔다. 하지만 여이현은 온몸이 투명해지며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여이현 이 나쁜 놈!”온지유가 꿈속에서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얼굴에서 촉촉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어 만져보았더니 눈물이었다.이때 인명진이 신무열을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온지유의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신무열은 빠른 걸음으로 온지유에게 다가가서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했다.“지유야, 괜찮아. 그건 그냥 꿈일 뿐이야. 이왕에 나랑 같이 Y국으로 돌아가지 않을래?”여이현이 목숨을 잃은 지금 온지유를 홀로 이곳에 내버려 두려니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 있든 온지유를 Y국으로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다.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저는 무열 씨와 함께 떠날 생각이 없어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예요? 저는 율이가 아니라 온지유라고요! 저는 화국 경성사람이지 Y국 사람이 아니에요!”그리고 신무열의 손을 내팽개쳤다.지금까지도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온지유의 태도는 신무열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는 것과 같았다. 신무열은 그동안 온지유가 마음을 바꾸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고집을 세울 줄 몰랐다.그는 어릴 적 기억이 문뜩 떠올랐다. 어린 시절 그들은 아주 화기애애한 남매였다.신무열도 온지유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가 계속 이대로 나온다면 방법이 없는 일이다.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설득했다.“지유야, 우리는 피를 나눈 남매야. 네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우리의 몸에서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우리는 서로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극친한 존재라고. 지유야, 네가 우릴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한 번이라도 돌이킬 기회를 주면 안 돼?”신무열은 온지유 곁에 앉은
신무열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Y국과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에게 사고가 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신무열과 협상을 통해 해독약을 가지려 했다.하지만 지금은...온지유는 여이현 생각을 할 때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들게 느껴졌다.“무열 씨, 이곳에서 무사히 나가고 싶다면 지금 당장 떠나세요.”온지유는 천막 밖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신무열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가 그녀의 뜻을 따랐다. 떠나기 전 그는 온지유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지유야, 기다리고 있을게.”말을 끝낸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온지유는 신무열과 함께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무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인명진에게 물었다.“저 사람들이 명진 씨를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해서 다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려는 거에요?”아까 인명진이 신무열을 데리고 들어온 것을 목격한 온지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인명진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지유야, 미안해. 나는 그냥 널 돕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야. 너는 가족이 없잖아. 이곳에서 혼자 지내기 힘드니까 가족이 생긴다면 네가 행복해질 것 같아서 그랬어.”인명진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온지유는 그런 인명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사람은 다 현실적이기 마련이야. 명진 씨도 사람인데 평생을 이대로 살고 싶진 않을 거야.’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만약 명진 씨가 저 사람들과 거래를 했다면 제가 도와드릴게요.”인명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연기를 해줄 수 있었다. 인명진은 온지유가 율이 신분을 회복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지유야, 고마워. 네가 도와줄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다.계다가 여이현에게 큰 사고가 발생했기에 이 상황에서 여진숙이 온지유에게 전화를 바꿔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제일 사랑하는 여인으로서 이 통화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온지유! 차라리 네가 죽지 그랬니!”온지유가 전화를 받자마자 여진숙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화 너머에 있는 여진숙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현 씨의 죽음은 사고 때문이에요. 모든 것이 제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현 씨 진짜 신분은 어머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온지유, 내가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두고 봐.”‘승아의 죽음은 모두 온지유 이년 때문이야! 온지유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승아는 이현이랑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여진숙은 온지유에게 저주를 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이현은 Y국 온지유 곁에서 목숨을 잃었다.여진숙의 말을 들은 온지유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아랑곳하지 않았다.“마음대로 해보세요. 제가 끝까지 가줄 테니까.”그녀는 한치 두려움도 없이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Y국에 있어서가 아니라 더는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말을 마친 그녀는 통화를 끊어버렸다.옆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성재민은 온지유의 차가운 태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는 온지유와 여진숙이 서로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이야기를 나눌 줄로 알았는데 이렇게 서로를 용납하지 못할 줄이야.성재민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조금 전으로 돌아가 전화를 바꿔주던 자신을 막고 싶었다. 이때 문뜩 여이현의 엄숙하고 냉담한 얼굴이 떠올랐다. 여이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한바탕 혼을 낼 것이 분명했다.“지유 씨,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전화를 넘겨야 하는데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성재민은 선생님께 혼이 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단정한 자세로 온지유 앞에 서 있었다.그는 여이현의 부하였기 때문에 온지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있었다.온지
대답을 기다리는 온지유의 눈빛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나민우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모두 내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있을 거야. 지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낼 텐데 안부를 전하면 오히려 더 걱정하실 거야. 그리고 난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잖아.”나민우는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가족들을 어떤 태도로 만나야 할지 몰랐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공허감에 휩싸여 무엇이든 해내서 그 구멍을 막고 싶었다.좀 더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온지유를 만날 때마다 나민우는 호흡이 가빠지며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럼 네 마음대로 해. 근데 네가 여긴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무섭지도 않냐?”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인생길의 끝은 모두 죽음이야. 난 길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잖아. 지금 뭐라도 해서 나 자신을 꽉 채우고 싶어.”“그래.”그 대답을 듣고 온지유는 어느 정도 나민우가 이해가 되었다.온지유는 대화를 마친 뒤부터 홍혜주와 함께 강을 따라 여이현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발견이 없었다. 연이어 며칠 동안 여이현의 행적이 보이지 않자 온지유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홍혜주의 손을 잡고 애원하는 말투로 물었다.“혜주 씨, 전 이현 씨를 찾지 못하겠어요. 제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 말고 다른 정보는 없어요? 이현 씨가 누구와 자주 통화를 하거나 어느 장소를 입에 올린 적 없어요?”온지유는 너무 지친 나머지 여이현 대신 아이를 찾으러 나섰다.홍혜주는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모르겠어요. 혹시 소대장님께서 가족에게 맡겨둔 게 아닐까요?”홍혜주는 자기의 추측을 털어놓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여진숙이 여이현의 아이를 돌봐줄 리가 없었고 여재호는 밖에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었기에 더욱 불가능했다.이때 기발한 아이디어가 온지유의 뇌리
온지유는 홍혜주를 곁에 두고 인명진에게 물었다.“혜주 씨가 알고 있는데 명진 씨가 모르고 있었다고요? 인명진 씨, 지금까지도 절 속이실 생각이세요?”말을 하는 온지유의 낱카롭고 차가운 눈길이 인명진을 향했다.인명진은 얇은 입술로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지유야, 내가 다른 사람을 속이면 속였지 너에게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내가 널 알아보고도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이미 온지유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야. 과거의 기억을 잃은 너를 끌어들이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법로의 딸인 너에게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야.”Y국 내부 모순이 점점 격화되고 있는 지금 인명진은 법로를 초월하기 위해 더 위험한 독약을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심지어 법로의 자리를 엿보고 있었다.법로는 한마음 한뜻으로 Y국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기에 양극 분화가 심했다.온지유는 마음이 여린 착한 사람이고 그녀만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그래서 인명진이 온지유에게 마음속 깊이 숨겨둔 암흑한 생각을 털어놓는다면 그녀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인명진이 멍을 때리는 것을 발견한 온지유가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왔다.얼마나 가까웠던지 인명진의 피부 모공마저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인명진은 두 사람의 위험한 거리에 숨이 한껏 거칠어졌다.“널 만나기 전과 후에 생긴 일들을 생각하고 있어. 지유야,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난 네 아이의 행방을 안 순간 너에게 알려줬을 거야. 여이현 씨와 약속한 일은 네 몸속의 독소를 제거하는 일뿐이야.”온지유가 입술을 오므리며 말을 하기 전에 인명진이 한마디 덧붙었다.“지유야, 난 더는 아는 게 없어.”뒤이어 홍혜주가 미안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지유 씨, 미안해요. 도움이 되지 못했네요.”온지유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일의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이의 행방을 모르고 여이현은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도 홍혜주와 나민우가 살아있어서 천만다행이다.신무열과 법로는 아직도 온지유를
나민우는 온지유의 곁에 있어야만 마음속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그래? 그럼 같이 가자.”...5년 뒤.온지유가 여진그룹 사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배진호가 서류를 가지고 급히 찾아왔다.“지유 씨, 이 서류 좀 보세요. S국 z그룹에서 우리 장사를 낚아챘어요. 이번 장사 때문에 저희는 6조를 날려 먹었습니다.”여이현이 이혼서류를 작성하며 재산양도서까지 온지유에게 넘겨주었기에 현재 여진그룹 제일 큰 주주는 온지유였다.그녀는 돌아오자마자 여진그룹을 물려받고 열심히 경영했다. 왜냐하면 여진그룹은 여이현이 이 세상에 남겨놓은 유일한 산업이었고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이 모든 것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했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세상을 떠났으니 온지유는 그가 보호하려던 모든 것을 열심히 수호할 것이다.배진호의 말에 온지유는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그렇다면 S국 z그룹과 정식으로 대결을 펼쳐봅시다. 아 그리고 원래 저희랑 합작하기로 했던 회사 책임자에게 연락해서 제가 직접 가볼 것이라고 전해주세요.”온지유는 여의현 곁에서 7년 동안 배진호와 함께 회사의 크고 작은 사무를 해결했기에 이 정도 일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그뿐만 아니라 지금은 제일 큰 주주로서 모범을 보여야 했다.배진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먼저 홍혜주 씨에게 급히 연락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오후에 출발하는 게 어떻습니까?”온지유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오후에 출발하겠다니? 어딜 가려고?”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니 인명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하얀 셔츠차림으로 금테 안경을 쓰고 밖으로부터 들어왔다.그의 손에는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온지유를 따라 돌아온 뒤 인명진은 진료소를 차리고 매달마다 온지유의 건강검진을 해주었다. 그들은 인명진을 보고서야 온지유가 건강검진을 받을 날임이 생각났다.온지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는 진호 씨와 S국에 가보려고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꼭 가봐야
배진호는 급히 말했다.“지유 씨, 먼저 방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먼저 나서겠습니다.”여진숙은 늘 온지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여이현이 사망한 지금 배진호는 그의 부탁을 받은 사람으로서 온지유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이에 온지유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제가 직접 뵐 거예요.”배진호가 한두 번은 막아줄 수 있더라도 매번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온지유는 배진호의 어깨를 쓰다듬고 여진숙을 만나러 내려갔다.여진숙은 모란꽃이 새겨져 있는 흰색 치마를 입고 서 있었다. 에메랄드그린 보석을 달고 있는 그녀는 온유하고 우아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눈빛은 독기를 머금고 있었다.여진숙은 온지유를 보자마자 건방진 태도로 따졌다.“온지유, 넌 무슨 얼굴로 이곳으로 돌아온 거니?”여진숙은 하이힐을 신고 온지유에게 달려왔다. 막무가내로 휘두른 손찌검은 공중에서 온지유에게 막혔다. 온지유는 여진숙의 손목을 잡고 뒤로 꺾으며 뿌리쳤다.여진숙이 뒤로 몇 걸음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온지유 네가 감히 날 밀어? 정말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지금의 온지유는 눈빛으로 굳센 의지를 나타냈고 옛날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온지유의 작은 몸에 이리도 강한 힘이 존재하고 있다니.온지유는 도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세요. 손찌검이나 하시지 말고. 제가 지금 많이 참아주고 있는 거예요.”온지유는 일을 해결하러 왔지 괴롭힘을 당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온지유, 네가 뭔데 이렇게 기세가 등등한 건데? 이현이는 너 때문에 죽은 거잖아!”여진숙은 분노에 찬 두 눈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소리쳤다.노승아는 온지유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끝까지 그녀의 신분을 밝혀주지 못했다.여이현의 이름 세글자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온지유의 심장에 꽂혔다. 여이현의 죽음은 온지유에게 여전히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그래서 고작 이 말 하시려고 찾아온 거예요? 부
온지유는 여자아이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사고를 당하거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그녀는 다시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무슨 일인지 이모한테 말해 줄래? 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넌 엄마 아빠가 없어?”소녀는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는 떠났어요. 다들 아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엄마도 절 혼자 두고 떠나버렸어요. 어디로 간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절 돌보지 않아서 집에서 굶어 죽을 뻔했어요.”여자아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온지유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이야기를 듣고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아이를 짐스럽게 여겨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다.이렇게 어린아이가 집 주소와 전화번호는 물론 이름까지 모른다니 말이다.“이모,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어요. 아빠랑 엄마는 그냥 저를 사월이라고만 불렀어요.”소녀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속삭였다.“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런 거겠죠? 제가 좀 더 똑똑했으면 엄마가 절 버리지 않았을 텐데...”“아니야.”온지유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몰라 머뭇거렸다. 아이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잘못은 그녀의 부모에게 있었다.여자아이를 사월이라고만 부르며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으니,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더구나 아이를 낳았다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아이가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이유로도 아이를 버릴 권리는 없었다. 모든 아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진실을 그대로 말한다면, 소녀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길까 두려웠다. 아이에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했다.온지유는 여자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냈다.“아마도 네 엄마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일이
강원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 되었다.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가장 큰 백화점으로 갔다. 그리고 한참 구경하고 나서 백화점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이때 백화점 안에서 귀를 찌르는 화재 경보음이 들렸다.“불났나 봐. 빨리 나가자.”여이현은 별이를 훌쩍 안아 올리며 온지유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은 함께 출굴 나갔다.그들이 출구에 갔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백화점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밖으로 밀려 나왔다.여이현은 별이를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인파 속에서 흩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 말이다. 특히 별이는 아직 어린아이기 때문에 어른들 틈에서 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았다. 별이도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기에 여이현을 꼭 끌어안았다.이때 한쪽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된 온지유는 이런 소리에 유독 예민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자 혼자 울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는 별이 또래로 보였다.여자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인파 속에 있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댔다. 커다란 발이 이미 그녀의 발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온지유는 단호하게 여이현의 손을 놓았다.“별이 데리고 먼저 나가. 우린 밖에서 합류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여자아이 쪽으로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올리면서 말했다.“네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여아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 온지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과정에 그녀의 팔에 난 상처들이 드러났다.온지유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설마 아동 학대인가?’어찌 됐든 지금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앞으로 걸어가서 무사히 출구로 빠져나갔다.백화점 밖으로 나간 그녀는 우선 여이현과 별이부터 찾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별아, 너 괜찮아?”온지유는 후다닥 달려가서 별이부터 살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별이도 같은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나들이 가지 말고 아빠가 좀 더 쉬는 게 어때요? 저는 아빠가 푹 쉬시는 게 더 좋아요.”별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쉴 시간도 있어. 그러니까 마음껏 나가 놀아도 괜찮아.”여이현의 미소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는 온지유와 별이에게 말했다.“두 사람이 간 다음 인사팀에 연락해서 새 비서를 뽑으라고 했어. 어제 드디어 괜찮은 사람을 뽑아서 오늘부터 출근했어. 내 일의 일부를 맡겨놨으니까 이제 좀 숨 돌릴 수 있을 거야.”“다행이네요.”온지유는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여이현의 일이 바쁜 걸 한 번도 탓한 적 없었다. 여이현도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남편이 집안일에 손을 보태는 것을 희망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도 내심 좋았다.“밥 먹고 나서 짐 정리하자.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 하윤이는 데려갈까? 아니면 집에 둘까?”온지유는 잠시 고민했다.온하윤은 너무 어려서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괜히 데려갔다가 제대로 못 쉬면 문제였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고 말이다.이런 생각에 온지유는 온하윤을 집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이현도 마찬가지다.“밥 먹고 나서 다솔 씨한테 하윤이를 봐줄 수 있는지 연락할게. 도우미가 있는 데다가 우리 금방 돌아올 테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쉬는 시간 며칠 짜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게 바로 그가 강원시에 가기로 결정한 이유다.권다솔이라면 온지유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권다솔은 아이를 좋아하고 인내심도 있었다.식사를 끝낸 다음 그들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이도 옆에서 손을 보탰다. 그는 자신의 옷을 챙기고 나서 여이현에게서 받은 장난감도 가져왔다.“엄마, 이것도 가져가면 안 돼요?”“당연히 되지.”온지유는 장난감을 트렁크 안에 넣었다.“트렁크 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뭐든 가져도 돼.”놀러 가는 거면 당연히 기분이 최우선이었다. 이 정도 소원은 얼
두 사람이 함께 요리를 하니 속도가 훨씬 빨랐다. 온지유는 칼질을 책임지고 여이현은 볶는 걸 책임졌다. 그러자 요리도 금방 완성되었다.온지유가 완성된 음식을 가지고 나가려는 순간 여이현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요즘 수고했어. 내가 잘못했어. 일만 하느라 집안일은 너한테 다 맡겼네.”“그렇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이제 부부야. 가족끼리 그 정도 도울 수도 있는 거지.”온지유는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더군다나 일하러 간 거잖아. 노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당연히 이해해야지 노발대발 화를 낼까 봐?”여이현은 한 회사의 리더다. 그 책임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사람을 집에서도 부려 먹을 수는 없었다.온지유의 눈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행복감을 느꼈다.“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그는 저도 모르게 온지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은 당장이라도 닿을 거리에 있었다.똑똑똑.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깨졌다.온지유는 옷을 정리하고 나서 문을 열러 갔다.“별아, 깼어?”“네!”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도울게요.”“아니야, 다 됐어. 넌 수저만 챙겨서 오면 돼.”온지유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벌써 이렇게 사람 마음 헤아릴 줄 아는 걸 봐서는 커서도 아주 스윗한 사람이 될 것이다.“엄마 도와 음식이라도 나를래요.”그는 발꿈치를 들고 그릇을 내리고는 조심조심 밖으로 걸어갔다.식사 전 온지유는 거실에 가서 한창 잘 자고 있는 온하윤을 힐끗 봤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여이현이 사 온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오늘의 꿈은 사탕 맛인 듯했다.온지유는 손을 뻗어 이불을 정리해 줬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식탁 옆으로 걸어갔다.밥 먹을 때 여이현은 좋은 소식을 알렸다.“요즘 날씨 좋으니까 나들이 겸 강원시에 다녀오자.”“정말요?”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좋아요! 좋아요!”그는 진심으로 나가서 놀고 싶었다. 하지만
권다솔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저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배진호도 지금은 그녀의 생각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여이현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배진호와 권다솔이 따로 회사를 차린 시간 동안 여진그룹에는 그밖에 없어서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온지유는 여이현 혼자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게 안타까웠다. 아이들도 유독 말을 잘 들었다. 온하윤은 물론 별이도 조용히 있어 줬다.그래도 여이현은 지금처럼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보다 가족이 중요했다. 오늘 오래간만에 쉬는 시간이 생겼으니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돌아가는 길에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이현은 선물을 잔뜩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온지유는 거실에서 아이를 보다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그녀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여이현을 보게 되었다.“오늘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이 꽃은...”온지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사이에 꽃은 무슨.”“만난지 아무리 오래돼도 이런 감성이 필요한 법이야.”여이현이 꽃다발을 건넸다. 이건 그가 직접 고른 꽃이다. 꽃 한 송이 한 송이 다 사랑을 품고 매력적인 색채를 뿜어냈다.소리를 듣고 별이가 달려와서 팔을 벌렸다.“아빠! 안아줘요!”여이현은 짐을 내려놓고 별이를 훌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거실에서 한참 빙빙 돌고 나서야 내려놓았다.“아빠가 선물 사왔어. 가서 볼래?”“아빠가 준 선물이라면 뭐든 좋아요.”별이가 곧장 대답했다.여이현이 산 것은 최신형 로봇 장난감이었다. 별이가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이기도 했다. 갖고 싶다고 말 하기도 전에 여이현이 먼저 사 온 것이다.그는 장난감을 꼭 붙들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아빠 사랑해요! 선물 너무 좋아요!”“좋으면 됐어. 네 여동생 것도 있어. 빠짐없이 챙겨왔거든.”여이현은 또 가방에서 인형 두 개를 꺼냈다. 아기에게 줄 만한 작은 인형이었다.인형을 본 온하윤은 꺄르르 웃었다
이튿날, 정미진은 또다시 권다솔을 만나러 왔다. 이번에는 보온병도 챙겼다.정미진은 보온병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정중하게 말했다.“다솔 씨, 이거 잘 챙겨. 내가 귀한 보약을 가져왔어. 동창한테서 받은 건데 홍경천을 담근 물이래. 이게 임산부한테 그렇게 좋다고 했어.”“홍경천이요?”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홍경천이라는 약재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산부에게 좋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그러나 깊이 생각하기에 정미진은 너무 열정적이었다. 자꾸만 마셔보라고 재촉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 정미진은 가져온 것을 전부 먹인 다음에야 시름을 놓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권다솔은 임신 후 유독 졸음이 많아져서 오후 세네 시쯤에는 꼭 낮잠을 자야 했다. 그래서 정미진도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정미진이 돌아간 뒤, 권다솔은 평소처럼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는 갑자기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눈을 떴다.그 통증이 점점 강해져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뜬 순간, 권다솔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침대 시트 아래로 짙은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그녀는 놀라서 잔뜩 잠긴 소리로 외쳤다.“누구 없어요? 아주머니, 저 너무 아파요... 빨리요...”방문이 열리는 순간 권다솔은 시야가 검게 변하며 의식을 잃었다. 그 순간 느껴진 것은 누군가의 넓은 품에 안겼다는 것뿐이었다.그 품에서 나는 차갑고 상쾌한 향기는 마치 눈 덮인 소나무처럼 그녀를 감쌌다.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권다솔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새하얀 천장이 보였고 코끝에는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스며들었다.그녀가 뒤척이자 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배진호였다.배진호는 곧바로 몸을 숙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깼어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이제 괜찮아요?”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제대로 쉬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난 진호 어머니예요. 다솔 씨 집에 있어요?”정미진은 도우미의 뒤를 힐끗거리며 말했다.도우미는 잠깐 멈칫하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정미진은 한 번도 이곳에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늘 출근하지 않은 권다솔은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와봤다. 정미진이 온 것을 보고는 잠깐 넋이 나갔다.“아주머니? 잠깐만요... 어서 문을 열어줘요.”권다솔은 도우미에게 당부하고 부랴부랴 준비하러 갔다. 이 집에는 손님이 자주 오지 않기에 찻잎을 찾는 것만 한참 걸렸다.곱게 자란 권다솔은 차 끓이는 법조차 몰랐다. 그녀는 한참 연구하고 나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끓인 것도 물도 차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아주머니, 이거 드셔보세요.”그녀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건넸다.정미진은 경멸의 표정을 숨기고 힐끗 보기만 했다.배진호의 부모는 차를 좋아했다. 그들보다 찻잎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권다솔이 끓인 차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녀는 보기만 해도 알았다.아무런 기색도 없이 찻잔을 밀어낸 정미진은 덤덤하게 말했다.“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 사실 오늘은 그냥 널 보러 온 거야. 참, 아직 밥 안 먹었지?”권다솔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정미진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만들 기세를 보여줬다. 권다솔은 깜짝 놀라며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 옆에 있던 도우미도 얼른 나서서 만류했다.두 사람의 적극적인 만류 끝에서야 겨우 그녀의 의욕을 꺾을 수 있었다. 정미진은 조금 서운한 듯 웃으며 말했다.“요즘은 내가 밥 한 끼 하기도 어렵구나. 뭐, 괜찮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정미진은 거실에 앉아 권다솔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해 질 무렵 집을 떠났다. 도우미는 식탁을 정리하며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제가 보기에 어머님은 참 괜찮은 분 같아요. 저희 때 시어머니들은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다른 도우미도 거들며 말했다.“맞아요.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에 좋은 남편까지 있으니 사모님은 앞으로 행복
“부사장님, 왜 안 들어가세요?”권다솔은 깜짝 놀랐다. 언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직원을 바라보며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이거 대신 전해줘요.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요.”직원에게 서류를 건넨 권다솔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며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수많은 차와 정장 차림의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 하나 없는 것 같았다. 막연한 감각도 따라서 피어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배진호의 어머니 정미진이었다.“다솔 씨, 지금 시간 있어?”정미진의 목소리는 아주 무덤덤했다.“시간 되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15분 후, 권다솔은 넋을 잃은 채 산부인과 앞에 서 있었다.평일이다 보니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산부인과는 더욱 적을 수밖에 없다.간호사는 금방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권다솔 씨.”권다솔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정미진은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태도도 보기 드물게 부드러웠다.“가서 검사받아. 짐은 내가 대신 보관할게.”권다솔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정미진이 왜 그녀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왔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태도가 변했는지 전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의사는 보고서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축하드려요. 임신하셨네요.”정미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선생님, 확실한가요?”의사는 아예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직접 확인하세요. 초음파 사진에서 태아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잘 크고 있어요.”사진까지 나오자 정미진은 할 말이 없었다.병원에서 나온 다음 그녀는 직접 권다솔을 데려다줬다. 가는
배상준이 와인을 보고 지나치게 들뜬 모습을 보이자 정미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그만 좀 해! 평생 와인 처음 본 사람처럼 굴지 마. 작년에 친구가 준 와인도 있잖아?”정미진은 와인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니 배상준에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배상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최고급이야. 그거랑은 달라.”정미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그제야 배상준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된 후라 정미진은 권다솔에게 선물을 다시 가져가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했다.“뭐, 그럼 이건 받아 둘게. 진호 아빠는 다른 취미는 없고 술만 좋아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사전 준비는 꽤 철저했네.”권다솔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그녀는 손바닥을 꼭 쥐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어른들 댁에 올 때는 좋아하시는 걸 알아보고 준비하는 게 예의니까요.”정미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상준은 더 이상 정미진이 권다솔에게 계속 차갑게 굴지 않도록 나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 좀 해. 둘이 결혼한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좀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게 어때?”정미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배상준은 주눅 든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확실히 아내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그래도 그의 말이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정미진은 권다솔을 내쫓지는 않았고 함께 식사를 했다.그러나 그것뿐이었다.식사가 끝난 후 정미진은 권다솔을 문까지 배웅하며 말했다.“앞으로 별일 없으면 다솔 씨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 집은 당신처럼 귀한 아가씨를 모실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