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해야지. 네가 나 먹여 살릴 거야?”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백지희는 자신 있게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내가 널 먹여 살릴게.”백지희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고 온지유에게도 매우 관대했다. 온지유는 더욱 밝게 웃었다. “네가 있어서 참 든든해. 이렇게 마음 편히 얹혀살 수 있다니. 그래도 사람은 꿈이 있어야지.”백지희는 다시 물었다. “너랑 여이현은 아직 화해 안 했어?”온지유는 잠시 멈칫했다. “다시 화해할 일은 없어.”백지희는 더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번에는 정말 끝난 거야?”백지희는 두 사람이 이혼한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둘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이야.” 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백지희는 진지하게 물었다.“네가 아이를 가졌는데도 이현 씨가 널 떠났다고? 말이 안 돼! 설마 그 아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야? 너희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야? 이건 도저히 이해가 안 돼!”온지유는 더 이상 문제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신경 쓰지 마. 나 그 사람 본 지도 오래됐어.”백지희는 온지유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지금 온지유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이번에 실패하면... 그럼 어쩔 셈인가?아이와 함께 굶어 죽기라도 할 건가?아이의 아버지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온지유와 아이는 얼마나 힘들게 살겠는가?백지희는 이렇게 생각하며 여이현이 정말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정말 그 사람을 잘못 본 걸까?백지희는 온지유가 또 상처받을까 봐 몹시 걱정되었다.동시에 둘의 관계가 이렇게 빨리 끝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만약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백지희는 평생 사랑을 믿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온지유는 수프를 다 마신 후 백지희가 부엌에서 정리하는 사이 소매를 살짝 걷어 팔에 생긴 옅은 멍 자국을 확인했다.독이
갑자기 한 남자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온지유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본 남자의 얼굴은 긴장과 초조함으로 가득 찼다.남자는 황급히 달려와 온지유를 품에 꽉 안았다.온지유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이 온지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온지유가 단지 검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불안에 떨며 온지유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미안해...”단 세 글자에 그의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온지유는 그의 품 안에서 당황한 채 곧바로 그의 가슴을 밀치며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여이현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온지유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이현의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모습에 온지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전에 깔끔한 여이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괜찮아?”여이현은 온지유를 살펴보며 물었다. 병세가 심각하지 않다는 걸 알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앞서다 보니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나... 괜찮아요.”온지유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 지금 검사 중이었어요.”여이현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검사실임을 깨달았다. 그제야 자리를 정리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미안해.”“괜찮아요.”온지유는 짧게 대답했다.여이현은 밖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여이현의 시선은 여전히 검사 받는 온지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여이현의 마음속엔 온통 온지유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온지유가 겪는 고통을 바라보는 것도 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하지만 여이현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곧 해독제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제 예상이 맞았어요. 두 사람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에요.”백지희는 여이현이 급하게 달려온 모습을 보고 여이현이 여전히 온지유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여이현은 백지희를 돌아보며 눈빛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어떻게 알게 됐어요?”“두 사람 이혼이 너무 갑작스러웠잖아요. 온지유도 그걸 알고 있는
여이현은 전화를 받지 않고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여이현은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설정했다.노승아의 전화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온지유는 피곤함에 지쳐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고개가 자꾸 아래로 떨어졌다.임신한 몸으로 앉은 채 졸고 있는 온지유의 모습에 여이현의 마음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이 긴 기다림이 온지유에게는 더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옆에 앉아 온지유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살짝 기울였다. 온지유는 더 편안해진 듯 몸을 살짝 기울여 온전히 여이현의 품에 무게를 실었다.여이현은 고개를 돌려 온지유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의 고요함이 너무나 평화로웠다.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이현의 눈빛은 한층 부드러워졌다.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병원 안에서는 교대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온지유 씨...”의사가 실험실에서 나와 온지유를 불렀다.온지유는 곧바로 눈을 떠 일어났다.“네!”온지유는 옆에 있는 여이현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그만큼 자신의 몸 상태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너무 궁금했다. 의사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온지유의 가슴은 조여오는 듯했다.“검사 결과, 당신의 신체 기능이 점차 쇠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의사의 말은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안겨주었다.지금 드러난 증상이 있다는 건가?그전까지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피부에 멍이 생기면서 곧바로 신체 기능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온지유는 한동안 말을 잊은 채 멍하게 서 있었다. 온지유가 묻기 전에 여이현이 먼저 물었다.“이 사람은 아주 희귀한 독에 중독됐습니다. 독이 이 사람의 몸을 침식하고 있는데 해독제가 없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습니까?”의사는 고
“뭐라고요?”온지유는 깜짝 놀라 여이현의 손을 확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 나보고 아이를 포기하라고요? 난 절대 아이를 지울 수 없어요!”여이현은 온지유를 날카롭게 응시하며 말했다.“지금 네 몸은 아이를 가질 상태가 아니야. 아이를 지우면 네 몸이 더 이상 영양분을 뺏기지 않아서 더 오래 살 수 있어. 네가 더 오래 살아야만 더 많은 기회가 생길 수 있어. 알겠어?”여이현의 목소리에는 절박함과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먼저 어른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아이는 다시 가질 수 있을 테니까.그러나 온지유는 여이현의 말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여이현이 아이를 지우라고 말하는 순간, 온지유는 여이현과 멀어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온지유에게 이성적인 판단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온지유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온지유!”여이현이 온지유를 다급하게 불렀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의사도 말했잖아요! 내가 아이를 낳을 때까진 괜찮다고 했어요. 그럼 그걸로 된 거잖아요!”“너 그렇게 살다가 목숨을 잃는다고!”여이현은 외쳤다.“아이를 낳고 나면 넌 어떻게 살아갈 건데?”온지유는 눈을 크게 뜨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포기하면 내가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요?”여이현은 오직 온지유가 살아남기만을 원했다.“기회는 있을 거야!”온지유는 여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이현의 눈빛에서 아이를 포기하려는 마음을 읽어냈다. 이것은 온지유가 더욱 아이를 보호하고 싶게 만들었다.온지유는 두 손으로 배를 꼭 감싸며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이 몸을 움츠렸다. 여이현은 더 이상 남편이 아니라 악몽처럼 느껴졌다.온지유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믿을 수 없어요. 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 당신은 날 속이려는 걸 거예요!”“온지유!”여이현이 다가오며 말했다.“내가 방법을 찾아낼 거야. 나를 믿어. 네가 아이를 지우기만 하면 이렇게 고통
게다가 이 독을 해독할 수 없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온지유는 다시는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온지유는 마음을 다잡고 차분히 말했다.“여이현 씨, 난 당신에게 우리 아이를 사랑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이 아이를 해치지만 말아줘요.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에요.”여이현은 온지유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마음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여이현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떠오르는 것이 두려웠다.여이현의 주먹은 떨리고 입술은 단단히 다물렸으며 마음속은 끝없는 갈등으로 소용돌이쳤다.여이현은 온지유가 이토록 고통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거야?”마침내 여이현이 조용히 물었다.“네, 생각 다 했어요.”여이현은 마지못해 물러서며 더 이상 아이를 지우라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온지유가 목숨을 걸고 반대하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여이현이 바란 것은 온지유가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슬픔과 걱정이 어린 얼굴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를 그렇게 약하게 보지 마세요. 내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요. 난 잘할 수 있어요. 반드시 잘 해낼 거예요!”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은 누구보다도 아팠다.온지유가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분명했다.여이현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모두 잘 살아가자는 메시지였다. 온지유의 강인한 모습이 여이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그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놓아주기로 조용히 결심했다. 여이현은 온지유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온지유는 거절했다. 백지희가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번에는 여이현도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다.여이현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온지유와 헤어진 후, 여이현은 곧장 촬영장으로 향했다.노승아는 마침 퇴근하던 참이었다.스태프들은 노승아를 향해
여이현이 말했다.“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과거를 놓아야 해. 온지유는 이제 과거의 사람이야. 이번 촬영이 끝나면 우리 결혼하자. 그때 양가 부모님도 함께 만나자. 우리 엄마는 네가 이미 잘 알지만 난 아직 네 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부모님들이 서로 인정을 해줘야 이 결혼이 진정한 의미가 있을 거야.”“이현 씨 생각과 내 생각이 완전히 같네요.”노승아는 여이현의 팔을 꼭 껴안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현 씨, 고마워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된 기분이에요!”노승아는 여이현을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으며 이 순간의 행복을 온전히 느꼈다. 여이현에게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노승아의 모든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고 있었다. 노승아는 생각했다. 여이현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온지유는 그저 두 사람 사이에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라고.자신이 여이현에게 제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여이현의 마음은 결국 돌아올 것이라 확신했다.그리고 이제 노승아는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고 있었다.여이현은 한 손으로 노승아를 부드럽게 안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노승아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많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노승아와 여이현의 결혼식은 분명 세기의 결혼식이 될 것이다.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다.노승아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전화를 걸었다.“아빠!”전화 건너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냐, 우리 딸?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당연하죠!”노승아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오랜만에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이네요. 저랑 여이현이 곧 결혼할 거예요.”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네가 독약으로 얻어낸 결혼이 아니고?”“아빠, 이현 씨는 절 좋아해요!”노승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아빠도 아시잖아요. 이현 씨가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조직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어요. 처음부터 이현 씨는 저를 좋아했어요. 제가 해외로 나갔을 때 다른
내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장다희는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여이현과 노승아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자주 들었다.가십 뉴스는 모두 같은 이야기를 썼다. ‘여이현은 노승아에게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장다희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자신이 노승아에게 억압받는 것보다 더 불편한 기분이었다.“보지 마요.”온지유가 다가와 장다희의 휴대전화를 조용히 가져갔다. “봐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장다희는 되레 말했다. “지유 씨는 정말 마음이 넓네요”온지유는 장다희 옆에 앉아 과일 접시를 안고 먹으며 말했다.“난 이미 마음을 내려놨어요. 지금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건 뱃속에 있는 아이예요.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드라마를 잘 살려내서 좋은 결과를 얻는 거예요.”“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장다희는 물었다. “난 지유 씨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요.”“사랑한다고 해서 그게 내 모든 인생을 대변하는 건 아니에요.”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사람만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장다희는 온지유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좋은 일은 모두 나쁜 사람들에게만 돌아가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움직였다. “걱정하지 마요. 반격할 때가 오면 반드시 반격할 거예요. 그 여자 그렇게 순탄하지만 않을 거예요!”온지유는 여이현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웠다.하지만 노승아가 한 일들에 대해서는 결코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석 달이 지나 드디어 드라마가 촬영을 마쳤다.그날, 그들은 즉시 축하 파티를 열었다.“정말 기쁘네요, 드디어 촬영이 끝났어요!”지선율이 잔을 들고 온지유의 잔에 부딪히며 말했다.“가장 먼저 지유 씨한테 감사해야겠어요. 지유 씨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마칠 수 없었을 거예요. 지유 씨는 내 행운의 여신이에요!”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감사
이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지선율의 말에 따르면 드라마가 TV 방송국에서 방영되지 못할 거라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모두의 자신감을 크게 떨어뜨렸다.술이 거의 깬 장다희는 급히 다가가 물었다.“감독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건가요?”지선율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우리 드라마의 소재가 너무 어두워서 공중파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이대로 물거품이 되면 안 되잖아요. 안 되겠어요, 직접 가서 상황을 정확히 물어봐야겠어요. 난 이렇게 포기할 수 없어요!”그들이 가장 기대했던 건 드라마가 방송되는 효과였다.그 누구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방영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마치 차가운 물을 머리에 부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모두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저도 같이 갈게요.”다른 사람들과 달리, 온지유는 비교적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떤 어려움이 올지 이미 예상하였다. 아직 상황이 최악까지는 다다르지 않았으니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문제는 지선율이 기대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대도 높았다.처음부터 지선율은 이 드라마가 TV에서 방영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지선율은 내내 얼굴을 찡그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지선율은 이 드라마가 그들에게 재도약의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공중파에 방영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엄청난 손실이 될 것이었다.지선율은 모든 사람의 기대를 등에 업고 있었다.지선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온지유는 지선율의 불안함을 느끼고 지선율을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분명 해결책이 있을 거예요.”하지만 지선율은 답했다.“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지유 씨뿐만이 아니라 다희 씨, 그리고 수많은 배우까지, 우리가 모두 큰 노력을 기울였잖아요. 거의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고요. 이건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죠. 아직 최악의 상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