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이 말했다.“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과거를 놓아야 해. 온지유는 이제 과거의 사람이야. 이번 촬영이 끝나면 우리 결혼하자. 그때 양가 부모님도 함께 만나자. 우리 엄마는 네가 이미 잘 알지만 난 아직 네 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부모님들이 서로 인정을 해줘야 이 결혼이 진정한 의미가 있을 거야.”“이현 씨 생각과 내 생각이 완전히 같네요.”노승아는 여이현의 팔을 꼭 껴안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현 씨, 고마워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된 기분이에요!”노승아는 여이현을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으며 이 순간의 행복을 온전히 느꼈다. 여이현에게 다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노승아의 모든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고 있었다. 노승아는 생각했다. 여이현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온지유는 그저 두 사람 사이에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라고.자신이 여이현에게 제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여이현의 마음은 결국 돌아올 것이라 확신했다.그리고 이제 노승아는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고 있었다.여이현은 한 손으로 노승아를 부드럽게 안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노승아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많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노승아와 여이현의 결혼식은 분명 세기의 결혼식이 될 것이다.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다.노승아는 서둘러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전화를 걸었다.“아빠!”전화 건너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냐, 우리 딸?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당연하죠!”노승아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오랜만에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이네요. 저랑 여이현이 곧 결혼할 거예요.”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네가 독약으로 얻어낸 결혼이 아니고?”“아빠, 이현 씨는 절 좋아해요!”노승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아빠도 아시잖아요. 이현 씨가 아니었으면 제가 어떻게 조직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어요. 처음부터 이현 씨는 저를 좋아했어요. 제가 해외로 나갔을 때 다른
내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장다희는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여이현과 노승아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자주 들었다.가십 뉴스는 모두 같은 이야기를 썼다. ‘여이현은 노승아에게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장다희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자신이 노승아에게 억압받는 것보다 더 불편한 기분이었다.“보지 마요.”온지유가 다가와 장다희의 휴대전화를 조용히 가져갔다. “봐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장다희는 되레 말했다. “지유 씨는 정말 마음이 넓네요”온지유는 장다희 옆에 앉아 과일 접시를 안고 먹으며 말했다.“난 이미 마음을 내려놨어요. 지금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건 뱃속에 있는 아이예요.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드라마를 잘 살려내서 좋은 결과를 얻는 거예요.”“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장다희는 물었다. “난 지유 씨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요.”“사랑한다고 해서 그게 내 모든 인생을 대변하는 건 아니에요.”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사람만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장다희는 온지유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좋은 일은 모두 나쁜 사람들에게만 돌아가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움직였다. “걱정하지 마요. 반격할 때가 오면 반드시 반격할 거예요. 그 여자 그렇게 순탄하지만 않을 거예요!”온지유는 여이현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웠다.하지만 노승아가 한 일들에 대해서는 결코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석 달이 지나 드디어 드라마가 촬영을 마쳤다.그날, 그들은 즉시 축하 파티를 열었다.“정말 기쁘네요, 드디어 촬영이 끝났어요!”지선율이 잔을 들고 온지유의 잔에 부딪히며 말했다.“가장 먼저 지유 씨한테 감사해야겠어요. 지유 씨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마칠 수 없었을 거예요. 지유 씨는 내 행운의 여신이에요!”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감사
이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지선율의 말에 따르면 드라마가 TV 방송국에서 방영되지 못할 거라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모두의 자신감을 크게 떨어뜨렸다.술이 거의 깬 장다희는 급히 다가가 물었다.“감독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건가요?”지선율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우리 드라마의 소재가 너무 어두워서 공중파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이대로 물거품이 되면 안 되잖아요. 안 되겠어요, 직접 가서 상황을 정확히 물어봐야겠어요. 난 이렇게 포기할 수 없어요!”그들이 가장 기대했던 건 드라마가 방송되는 효과였다.그 누구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방영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마치 차가운 물을 머리에 부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모두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저도 같이 갈게요.”다른 사람들과 달리, 온지유는 비교적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떤 어려움이 올지 이미 예상하였다. 아직 상황이 최악까지는 다다르지 않았으니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문제는 지선율이 기대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대도 높았다.처음부터 지선율은 이 드라마가 TV에서 방영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지선율은 내내 얼굴을 찡그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지선율은 이 드라마가 그들에게 재도약의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공중파에 방영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엄청난 손실이 될 것이었다.지선율은 모든 사람의 기대를 등에 업고 있었다.지선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온지유는 지선율의 불안함을 느끼고 지선율을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분명 해결책이 있을 거예요.”하지만 지선율은 답했다.“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지유 씨뿐만이 아니라 다희 씨, 그리고 수많은 배우까지, 우리가 모두 큰 노력을 기울였잖아요. 거의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고요. 이건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죠. 아직 최악의 상
반 시간을 기다린 끝에 총국장실의 문이 열렸다.문이 살짝 열리자 온지유는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장님, 다음번에는 꼭 제대로 식사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노승아였고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오늘 말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노승아는 이런 중요한 만남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래요, 여이현 씨가 주최하는 자리라면 꼭 참석해야죠!”국장은 여이현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여이현은 국장과 악수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노승아는 제 소속 연예인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활동을 할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국장은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연예인인가요, 아니면 여자 친구인가요? 이현 씨, 이렇게 숨기고 있는 거 다 알아요. 당신이 직접 나서는 일이면 뭔가 중요한 일이라는 걸요.”노승아는 살짝 부끄러워 보였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국장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저희 결혼할 때 꼭 참석하셔야 해요!”노승아는 말하면서 여이현의 팔을 감쌌다. “그럼요, 꼭 참석하죠.”그들은 함께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그곳에는 노승아와 여이현 뿐만 아니라 《요골》 드라마의 감독도 있었다.“국장님, 우리 노승아는 정말 열심히 하는 배우입니다. 연기에서 가능성도 크고 앞으로도 많은 기대가 됩니다.”감독이 힘줘서 칭찬했다.국장은 웃으며 말했다.“나도 이미 알고 있어요. 실력과 운이 따르는 배우죠.”그들은 《요골》 팀과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나가는 중이었다.하지만 지선율과 온지유는 반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이런 장면을 보고 자신들이 철저히 무시당한 것 같아 불쾌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지선율은 한 번쯤은 시도해 봐야 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외쳤다. “국장님!”국장은 지선율을 보고 친숙한 듯 말했다.“지선율이구나. 오래 기다렸겠네.”“국장님, 저희 드라마가 왜 공중파에 오를 수 없는지 알고 싶어서요. 기회를 한 번만 주시면 안 될까요?”지선율은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
국장은 이 문제로 그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과 따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감독이 말을 꺼내는 바람에 국장도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온지유는 이미 노승아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다. 또한 노승아가 뒤에서 무언가 꾸밀 거라는 것도 예상하였다. 하지만 왜 여이현까지 나섰는지 의문이 들었다.온지유에게는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온지유가 말했다.“아, 그러니까 우리 드라마에 대해 이의가 있으셨군요, 여 대표님.”드디어 여이현의 시선이 온지유에게로 향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이제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여이현과 헤어진 그날 이후로 여이현은 더 이상 온지유가 알던 여이현이 아니었다.이제는 노승아의 여이현이었다.“현대극의 경우 방송국은 폭력이나 복수 같은 주제를 더 엄격하게 다룹니다. 이런 소재는 공중파에 적합하지 않아요.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여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의 노력을 단숨에 깎아내렸다.“드라마는 단지 재미를 위해서만 만들어져서는 안 됩니다. 미성숙한 청소년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죠.”“그럴 리가요!” 온지유는 반박했다.“우리는 학교 폭력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인데 어떻게 당신 입에서 이렇게 어두운 소재로 변했죠? 혹시 우리를 일부러 겨냥하는 거 아닌가요?”여이현은 차갑게 대답했다.“겨냥한 적 없습니다.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당신은 쉽게 말하지만, 당신의 한마디로 우리의 몇 달간의 노력이 무너진 겁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차가운 태도에 점점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아요. 차분히 이야기합시다.”국장이 중재에 나서며 말했다.“온지유, 최종 결정은 우리 위원회에서 내리는 거야. 이현 씨는 단지 문제점을 지적한 것뿐이니 그를 탓할 필요는 없어.”국장의 말은 여이현을 변호하는 듯 들렸고 온지유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온지유에게는 이미 큰 영향을 주고 있었
국장은 온지유와 지선율을 바라보며 이 긴장된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온지유도 더 이상 노승아를 바라보지 않았고 여이현에게 어떤 답변도 기대하지 않았다.이제 여이현은 완전히 노승아 편에 섰으니, 그가 못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이현의 이번 행동은 이미 힘겨운 길을 더 험난하게 만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노승아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저 여자는 내가 잘되는 걸 못 보고 저주라도 하려는 것 같아요.”노승아는 다시 여이현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이현 씨가 날 지켜줘서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나 괴롭힘당했을 거예요.”“가자, 저 드라마는 공중파에 오를 수 없을 거야.”여이현은 확신에 차 있었다.노승아는 속이 후련한 듯 말했다.“이현 씨의 눈썰미는 정말 대단해요. 그 하나의 문제점을 짚어내서 그들이 공중파에 오르지 못하게 막았잖아요.”여이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노승아는 사랑에 빠져 있었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맞다, 아빠와 이야기했어요. 우리 다 같이 식사할 시간도 잡아요.”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언제쯤?”“아직 정하진 않았어요, 제가 다시 물어볼게요.”총국 사무실 안.“국장님, 정말 공중파 방영은 불가능한가요?” 온지유가 다시 물었다.국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심의 기준이 매우 엄격한 건 알잖아. 공중파 방영을 위한 조건은 더 까다로워. 너희 드라마의 소재는 공중파에 적합하지 않아.”지선율은 급하게 말했다.“국장님, 저희는 꼭 공중파에 올라야 해요. 이 드라마에 모든 걸 쏟았어요. 뭔가 문제가 있다면 고치면 되잖아요. 고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국장은 한참 말이 없다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이건 내가 혼자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야. 위원회가 결정한 사항이지. 만약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나에게 부탁하려는 거라면, 난 여기서 물러날 수밖에 없어. 더 이상 부탁하지 마. 위원회 결정은 번복되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여이현은 노석명의 구체적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노석명은 뛰어난 반수사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부터 행방불명되어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비록 노승아는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연계는 끊을 수 없었다. 노석명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딸 노승아 뿐이었으니까. 노승아의 정체는 더 말할 나위 없이 확고해졌다. 노석명의 도움으로 노승아는 법로의 독약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이현은 노승아를 이용하여 반드시 노석명을 찾아낼 것이다. 바로 그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님, 이 번호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 번호이며 마지막으로 나타난 장소는 한 전화 부스입니다.”여이현은 이 결과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시도해 보았다. 만약 노석명이 전화카드를 바꾸지 않았다면 현재 그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이현은 이번 수사로부터 노석명은 치밀하고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성격이니 반드시 미끼를 던져야만 그를 나타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두운 밤. 노석명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시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살피는 그는 온몸을 무장한 채 암흑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총을 차고 있었고 호신용으로 비수 두 개를 숨겨두었다. 사방이 수림인 은밀한 곳에 들어가서야 그는 경계심을 조금 낮추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운 밤, 정글 깊은 곳에서 등불이 밝게 빛나고 있다.“거기 누구야!”밖을 지키던 사람이 기척을 느끼자 총을 겨누며 다가왔다노석명은 냉담한 표정으로 모자를 벗었다. “내가 잘 안 보이나?”총을 겨누던 사람은 재빨리 총을 거두며 노석명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삐었나 봅니다.”정글 안에는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가옥으로서 한 채 한 채 겹쳐져 있어 번화하지는 않지만 작고 정교했다. 노석명은
노석명은 점점 더 차가워지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 여자 시체들은 어떻게 된 거야?”흉터남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술 한 잔을 들이키고 입을 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자네 혹시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노석명이 대답했다. “지금 법로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모두 경거망동해서는 안 돼. 이것은 법로의 명령이야. 자네는 명령을 거역한 후과를 잘 알고 있을 거야.”“어차피 법로는 지금 외국에 있잖아.”그 말을 들은 노석명은 흉터남의 말속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알아차렸다.“그래서 사실을 인정하는 거야?”흉터남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내가 손을 썼다는 증거가 없잖아. 하지만 노석명,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고 지위도 등등하잖나. 자네가 오자마자 내 죄를 묻는다면 말이 안 되지. 게다가 나는 자네를 잘 대접했고, 내 세력의 절반을 자네에게 주려 하는데 너무 심한 거 아닌가!”노석명은 차가운 얼굴로 비웃으며 “조직을 배신할 생각인가?”라고 물었다. 그의 말에 흉터남의 표정이 싸해졌다. “노석명 자네는 또 나에게 죄명을 씌우는군.”“자네가 본업을 시작했으니 산을 점령해 왕 노릇을 하며 조직을 배신하려 한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군.”여자 시체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이상하다.흉터남이 장기를 팔기 시작하면서 다시 본업에 종사하게 되었다.법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마당에 흉터남이 큰 소동을 벌였으니 경찰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그것도 노석명이 금방 출소한 시기에 일이 벌어졌으니 경찰 측은 노석명을 첫 번째 목표로 의심할 것이다.동시에 조직도 경찰 측의 의심을 면할 수 없다.그렇게 되면 흉터남이 누워서 어부지리를 얻게 된다. “하하하하하하하!”흉터남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노석명은 흉터남이 이렇게 날뛰는 것을 보고 안색이 변하고 또 변했다. “그래 내가 한 일이야. 그래서 뭘 어쩌려고?”흉터남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만했다. “법로께 말하려고?”노석명은
밖을 내다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적막이 흘렀다.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노점상들이 한창 손님을 맞이하며 돈을 벌어야 할 때였다. 모두가 한꺼번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건 말이 안 됐다.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모든 게 남태건이 꾸민 짓이라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너, 정말 비열하고 추잡하구나.”권다솔은 그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심해졌다.하지만 남태건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칭찬 고맙다. 내가 노점상들한테 각각 200만 원을 줬거든. 이제 너한테 선택지는 한 가지야. 나랑 만나.”그는 그녀를 꼭 얻어야 했다.권다솔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지퍼에 올렸다.“난 선택하지 않을 거야.”어찌 인간이 짐승과 어울리겠는가.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지퍼를 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순간 남태건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한테서 정말 좋은 향이 나는 거 알아? 다음 주에 네가 이혼하면 그날 바로 결혼하는 게 어때?”“꺼져!”그녀는 힘껏 뒤로 발길질하며 그를 걷어차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듯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잡은 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너도 나랑 함께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네. 난 지금 바로 널 갖고 싶은데, 여기서 할까? 얼마나 짜릿하겠어?”그는 원래는 그녀에게 멋진 밤을 선사하려고 했다. 7성급 호텔에 장미로 덮인 침대와 로맨틱하게 촛불까지.하지만 그녀가 너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원래 말 안 듣는 고양이는 잘 길들여야 발톱을 감출 줄 알게 되는 법이다.“남태건!”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아? 너 그러다 감옥 갈 거야!”그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종아리를 따라 손을 위로 더듬었다.“우리가 부부가 된 후에도 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 지난 뒤 네 뱃속
그럼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는 편이 나았다.김영은은 그녀의 편에서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 돈은 바로 계좌로 보낼게. 물건은 혼자 옮길 수 없을 테니 경호원을 불러서 도와줄게.”경호원이라는 말을 들은 남태건은 더욱 씁쓸해졌다.이 또한 은근히 그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집에는 경호원이 있으니 즉시 제압할 수 있고 그는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남태건은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솔아, 잘 지내. 몸조심하고.”‘가급적이면 외출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물론 남태건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그는 예전에도 권다솔을 스토킹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기회를 보면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계획이었다.그때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를 악물고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회는 여자에게 항상 더 가혹한 법이다.그녀의 부모님이 딸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를 사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남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우리 딸, 이제 모든 물건은 돌려주었어.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도 돼.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뒤에서 지켜줄게.”김영은은 그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그녀는 김영은을 꼭 안아줬다. 아무래도 미리 대비하는 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다음 날, 출근길에 권다솔은 가방 안에 호신용 스프레이 한 병을 넣었다. 여러 종류의 고춧가루로 만들어졌기에 아주 소량만으로도 사람을 울릴 수 있었다.하루 종일 별다른 일은 없었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근처 먹자골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권다솔이 그중 한 골목 입구를 지나던 순간 옆에서 손을 뻗어와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예전의 신사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마는 지금 병이 매우 심각해요. 아마 수술을 받는다 해도 남은 인생을 병상에 누워서 보내야 할 가능성이 커요.”배진호는 엄마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처음에 권다솔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매사에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자주 찾아뵈러 가서는 다양한 보신탕을 끓여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터무니없는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쩌다 그렇게 됐어요?”분명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만 해도 정미진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다.“계속 아픈 척하다가 이제 진짜 병이 든 거죠. 악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치료의 최적 시기를 놓쳤어요.”배진호는 간단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권다솔은 하마터면 꼴좋다고 말할 뻔했다.하지만 정미진은 어디까지나 그의 친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해 그만 삼켜버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는 혼자 방에 앉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정미진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간섭하고 싶어 할지라도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혼해야 할까?그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남태건이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지난번에 이미 할 말을 다 했고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는데 이제 와서 또 뭘 하려는 거니?”김영은은 다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증거가 모두 드러났는데도 남태건은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그녀는 외간 남자의 몇 마디 달콤한 말에 딸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었다.“저와 다솔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고요. 오늘은 전에 드린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온 거에요.”남태건은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고 그
“전 치료 받지 않았어요.”정미진은 크게 후회했다.온갖 계산을 다 해가며 일을 꾸몄지만 결국 제대로 걸려든 사람은 본인이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왜 했을까?“하지만 환자분 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요.”“약은 먹지 않았고 링거도 다 버렸어요.”정미진은 말할수록 후회가 밀려왔다.이제는 의사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치료받기 싫으시면 그냥 퇴원 수속 밟으세요. 집에서 지내는 게 나을 거예요. 약값도 아낄 수 있고 요즘 젊은이들 돈 벌기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소문나면 우리 병원 체면도 말이 아니거든요.”“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치료에 협조할게요.”정미진은 순순히 의사의 의견에 따랐다.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돈 걱정도 없고 배진호도 권다솔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효자였다. 그녀가 죽게 되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셈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일단 병실로 돌아가세요. 치료를 받으시려면 가족분께서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하고 저희 병원 측에서도 다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의사는 그녀를 설득해 병실로 돌려보낸 뒤 이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저녁, 배진호는 정관수술을 마쳤다.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을 느꼈다.아버지로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어쩌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남은 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때 권다솔이 전화를 걸어왔다.권다솔?배진호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다솔 씨, 이제야 저한테 연락하는 거예요?”“전 그냥 월요일에 이혼 절차를 마치러 가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하려던 것뿐이에요.”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임신 사실을 숨기기
“걔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정미진은 비웃음을 흘렸다.“지난번에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걔 체질은 워낙 임신하기 힘들대. 특히 유산까지 한 번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리 우리 진호를 유혹한다 해도 아이는 못 얻을걸.”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엄마가 이렇게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일 줄은 차마 상상도 못 했다.“진호야, 갑자기 어쩐 일이야?”정미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방금까지 병실 안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다만 배진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가 뒤에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엄마도 여자인데 어떻게 다솔 씨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배진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권다솔을 유산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그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대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제야 권다솔이 왜 확실하게 선을 긋고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해치고 싶지 않았다.“방금 그냥 해본 말이야. 엄마가 무슨 짓을 하진 않았잖아...”“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 오늘 바로 정관수술 예약할 거예요. 제 아이를 잃은 이상 앞으로도 다른 아이는 절대 갖지 않을 거예요.”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그는 오늘 중으로 수술을 예약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이 말을 들은 정미진은 마치 청천벽력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애써가며 미래의 손자를 위해 준비했는데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만약 배진호가 진짜 정관수술을 한다면 그녀는 평생 손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불효 중 가장 큰 불효가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이야.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
악역은 그가 맡기로 했다.“아니에요. 애초부터 태건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진호의 아이예요.”그녀는 손을 뻗어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설마, 잃어버렸던 그 아이가 다시 그녀한테 돌아온 걸까?그녀는 권용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어찌 됐든 간에 전 이 아이를 꼭 지킬 거예요. 저랑 진호 씨는 이미 이혼했지만 진호 씨는 저를 괴롭힐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잘 알아요.”“그렇다면 배진호 어머니는 어떡하려고? 그처럼 고약한 시어머니를 만나면 누구든 불행할 수밖에 없어.”권용민은 그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남태건과 비교하니 이제는 배진호가 조금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게다가 그가 찾아본 증거에 따르면 권다솔에게 달린 악플들은 배진호가 퍼뜨린 것이 아니었다. 석규리가 권씨 가문의 경쟁업체를 찾은 것이었다. 더 이상 배진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만약 배진호 혼자였다면 권용민은 아이를 위해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아빠가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미안하다만 배진호의 어머니가 있는 한 너희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그건 저도 잘 알아요.”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 역시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이미 시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한 번 잃었지만 하늘의 축복으로 다시 아이를 가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그녀가 명확히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권용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배진호는 매일 병원에 들러 정미진을 보살폈다. 정미진은 그의 앞에서 약을 먹고 링거를 맞는 척하며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진호는 병원 문을 나서다 병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것이 떠올라 급히 되돌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며칠째 연기하느라 들어간 병원비만 해도 적지 않잖아요. 오빠도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제가 병원비를 봤는
그는 바닥에 쓰러진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구급차 불러!”지나가던 직원이 급히 응급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권용민은 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그는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왔다 갔다 오간 지도 셀 수 없었다. 권용민은 평생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약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그조차 견딜 수 없는데 만약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몰랐다.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니던 찰나 의사가 걸어 나왔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용민은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물었다.“의사 선생님, 지금 제 딸은 어떤 상태인가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겁니까?”권용민은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의사는 그의 손을 보며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너무 세게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는 속으로 어쩌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따님은 괜찮습니다. 단순히 저혈당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따님이 임신 중이라 반드시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권용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완전히 멍해졌다.‘임신이라니?’그럼 이 아이는 남태건의 아이인가?원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남태건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딸과 엮이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권다솔이 남태건의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녀는 얼마 전에도 아이를 잃었는데 또 낙태 수술을 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뻔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남태건의 성격상 아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권용민은 걱정을 가득 안고 딸을 만나러 갔다.“아빠, 지금 아빠 상태를 보면 마치 제가 정말 큰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잖아요.”권다솔은 병상에 누운 채 창백한 얼굴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