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에는 연상연하 커플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장다희와의 케미도 잘 맞았다."지유 누나."손재원이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다가왔다. 오랜 운동 덕분에 그의 몸은 매우 탄탄했고, 키 비율도 완벽했다.이 드라마가 잘 되면 그는 인기가 폭발할 가능성이 높은 배우였다.손재원은 매번 촬영이 끝나면 모든 스태프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며 고생했다는 말을 전했고, 마지막으로 온지유에게로 와 촬영된 장면을 함께 보았다."이번 장면, 잘 못 받았던 것 같지 않나요?”그가 말하는 장면은 장다희와 수영장에서 함께 한 씬이었다.손재원은 연기에서 살짝 서툰 모습을 보였다.온지유가 말했다."아니야. 캐릭터 설정 자체가 어리잖아. 처음으로 감정에 접하는 설정이니까 그 정도의 표현이 맞는 거야.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고.""그럼 다행이네요."손재원은 연기에 매우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장다희는 수영복을 입고 수건을 집어 들어 몸을 닦으며 그들 앞에 다가와 자신이 연기한 장면을 함께 보았다."문제없어."장다희는 손재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마.""감사합니다. 다희 누나."손재원이 웃으며 말했다."다들 잠시 쉬세요. 오늘은 야간 촬영이 있어요!"온지유가 말했다.장다희는 온지유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자신은 이미 진이 빠진 지 오랜데 온지유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야간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배가 불러 있는데도 말이다.장다희는 그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나민우의 가족이 찾아온 뒤로부터 온지유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온지유는 웃고 있지만 눈에는 언제나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게다가 그녀는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지유 씨, 이제 배도 많이 불렀는데 아무리 선율 씨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해도 제때 쉬어야 해요. 아영 씨에게 맡길 수 있는 건 맡겨요. 왜 모든 일을 직접 하려고 해요?"장다희는 진심으로 온지유를 존경했다.만약 자신이 임신 중이었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임신만으로도 이미 충
온지유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받으며 외쳤다."민우야!"그러나 상대방은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다.온지유의 얼굴이 굳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 민우가 아니지?"전화 속은 매우 시끄러웠고 온지유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그 사람이 남성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이 상황은 온지유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왜 나민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고 있는 걸까."끊지 마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볼..."온지유는 급한 나머지 통역할 사람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당연히 금방 찾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여보세요, 여보세요..."1분도 지나지 않아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온지유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무기력해졌다.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이는 온지유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확실한 것은 나민우의 휴대폰이 그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이다.설마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닐까?온지유는 큰 불안감에 휩싸였다."지유 씨."장다희는 온지유가 전화를 받으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온지유는 장다희를 바라보며 당황한 듯 말했다."민우 씨가 위험에 처한 것 같아요.""민우 씨가요?"장다희는 곧바로 생각했다."민우 씨라면 실종된 후 아직도 찾지 못했잖아요. 방금 그 전화가 민우 씨에 관한 거였던 거예요?""받은 건 낯선 사람이었고 제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휴대폰은 나민우에게 없었어요. 지금 위험한 상황인 게 분명해요.""지유 씨, 너무 서두르지 마요."장다희가 온지유를 달래며 말했다."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민우 씨의 실물을 보지 않는 이상, 그렇게 절망적으로 생각하면 실례예요.""그래요."온지유는 말했다."아직 그렇게 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에요. 민우 씨는 반드시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그
“요즘 세상에 어떻게 이런 뉴스가 나올 수 있죠? 마치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요. 정말 끔찍해요!”“여자들은 인적이 드문 곳은 피하는 게 좋아요.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성폭행이나 살인 사건도 종종 일어나잖아요. 무엇보다 자신을 잘 보호하는 게 최선이죠.”온지유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이미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까지 더해져 누군가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장기를 적출하다니...이건 장기 밀매가 아닌가?그들이 벌써 이렇게까지 대담해진 걸까?온지유는 주먹을 꼭 쥐었다. 두려움은 잊은 채 오직 진한 분노만이 남았다.온지유의 생각은 그 조직으로 이어졌다.야간 촬영을 마치고 온지유는 집으로 돌아가 쉬려고 했다.장다희는 온지유에게 인적이 드문 곳을 피하고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온지유는 공아영과 함께 길을 나섰다.길이 달라지자 둘은 각자 갈 길을 갔다.밤이었지만 길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그러나 온지유는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피해가 주로 인적이 드문 곳에서만 발생한다고 말했지만 온지유는 다르게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CCTV가 많은 곳에서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가로등 아래로 비친 그림자를 보며 온지유의 심장은 목까지 차오르는 듯했다.온지유는 두려움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빠르게 모퉁이를 돌았다.온지유를 쫓던 그 의문의 인물은 갑자기 온지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사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그 순간 갑자기 막대기가 의문의 인물에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당신이었군요!”막대기가 그 의문의 인물에 머리에 닿기 전, 온지유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처음에는 남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머리를 질끈 묶고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홍혜주는 모자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이제 경계심이 생겼네요.”온지유는 이 여자의 정체를 떠올리며 손에 들린 막대기를 놓지 않았다. 온지유가 물었다. “그 여자 시체 사건, 당신과 무
홍혜주는 아무 말 없이 온지유를 따라 들어갔다.집 안으로 들어서자, 홍혜주는 현관에 서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을 만끽하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은은하게 퍼지는 향기.집 안 인테리어는 세심한 손길이 느껴질 만큼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온지유는 삶을 정성스럽게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온지유는 마음을 다해 그 집을 꾸미며 삶을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이런 사람은 낙천적이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온지유가 차를 우려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홍혜주는 온지유가 부러웠다. 원래는 같은 운명이었을 텐데 온지유는 그 굴레를 벗어나 알차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홍혜주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앉아요.”온지유는 홍혜주가 현관에 서 있는 걸 보고 예의 바르게 홍혜주를 안으로 들였다.홍혜주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온지유는 우려낸 차를 홍혜주의 앞에 놓았다.홍혜주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맑은 차 속에는 몇 송이 꽃잎이 떠다니고 있었다.홍혜주는 이렇게 여유롭고 세심한 일상을 느껴본 게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떠올렸다. 홍혜주도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자신의 얼굴을 소중히 여기지만 외모와 달리 홍혜주의 삶은 매우 거칠었다.홍혜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안에 퍼지는 은은한 향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무슨 차인가요?”“재스민차예요.”“정말 맛있네요.” 홍혜주가 말했다. “입안에 향이 오래 남아요.”“좋아하신다면 가져가셔도 돼요.” 온지유는 아주 대범하게 말했다. 이건 그저 흔한 차일 뿐이었다.홍혜주는 몇 모금 더 마신 뒤 찻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전에 말했던 흉터남, 그 사람이 그날 다리 근처에서 봤다던 사람인가요?”온지유가 물었다. “그 사람이 독을 넣었나요? 나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왜 이런 방식이어야 했죠?”홍혜주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느끼셨군요, 뭔가가 어긋나 있다는 걸.”온지유는
온지유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졌다.“당신이 그 속에 있었던 누구였든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에요.” 홍혜주가 말했다. “인명진이 목숨을 걸고 당신을 지키려고 했어요... 그러니 당신은 절대 죽어서는 안 돼요. 그게 인명진의 소원이었고 나도 그 사람을 대신해 지켜줄 거예요.”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 주먹을 꽉 쥐었다. 눈빛은 복잡했지만 이내 다시 차갑게 변했다.“오늘 이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가요?”홍혜주가 대답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은 지금 아이도 가졌으니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거예요.”“할 말 다 했나요? 당신들이 이런 얘기를 한다고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나요?”온지유의 차가운 말에 홍혜주는 순간 당황했다.홍혜주는 온지유가 이렇게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온지유는 홍혜주를 바라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죠. 하지만 누가 내게 이 독을 주었는지 나는 잊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난 지쳤어요. 당신도 인명진도 모두 다 지겨워요! 예전에 우리가 함께였다고 해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내 손은 피로 더럽혀진 적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이미 더러워졌죠. 우리는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나 인명진이나 더 이상 저를 찾지 마세요.”홍혜주의 얼굴빛이 변했다. “난 그저 좋은 마음으로 온 건데...”“당신의 호의는 필요 없어요.” 온지유가 말했다. “어서 나가세요!”온지유는 홍혜주를 밀어냈다.홍혜주는 채 반응하지 못한 채로 밀려났다.온지유는 홍혜주를 문밖으로 밀어냈고 홍혜주는 문밖에 서서 말했다. “율이...”“율이이라고 부르지 마요!” 온지유가 크게 소리쳤다. “나는 온지유에요, 율이가 아니라고요! 당신뿐만 아니라 인명진도 이제 더 이상 나를 율이라고 부르지 마요! 처음부터 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홍혜주는 상처받은 듯했다.하지만 더 이상 온지유를
홍혜주는 온지유의 변화를 지나치게 빠르다고 느꼈다. 홍혜주는 온지유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온지유를 위해 한 번 더 노력해 보겠다고 말했을 때 온지유가 그걸 거절할 줄은 몰랐다.보통 사람이라면 목숨이 위태로울 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그런데 온지유는 그들을 모두 밀어냈다. 이 모든 상황이 몹시 이상하게 느껴졌다.홍혜주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온지유가 자신들을 연루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인명진은 홍혜주의 말을 들으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가 인명진의 정체를 알았을 때도 그다지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인명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밀어냈다.아마도 나민우가 온지유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Y국으로 갔기 때문에 온지유는 죄책감을 느끼고 더는 다른 사람들을 연루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도 인명진은 온지유의 감정을 존중하기로 했다.“어떻게든 지유 씨의 목숨은 내가 지킬 거야. 지유 씨가 우리를 원하지 않으면 우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되는 거지. 지유 씨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인명진도 뚜렷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온지유의 몸에 있는 독은 아직 해독제가 없었다.수많은 실험을 거듭했지만 제대로 된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다. 인명진은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모든 사람이 노력하고 있었다.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면, 이 조직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홍혜주는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지유 씨의 독은 다시 발작할 거야. 봤지? 지유 씨 팔에 이미 멍이 들기 시작했어.”온지유의 팔에는 서서히 멍이 생기고 있었지만 아직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그조차도 독이 온지유의 몸을 점점 더 침식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후였다.아무리 인명진이 도와주더라도 임시방편일 뿐이었다.독이 저항성을 갖게 된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소용없을 것이다.인명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법이 있을 거야!”온지유가 깨어났을 때, 소파에 누워
“열심히 해야지. 네가 나 먹여 살릴 거야?”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백지희는 자신 있게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내가 널 먹여 살릴게.”백지희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고 온지유에게도 매우 관대했다. 온지유는 더욱 밝게 웃었다. “네가 있어서 참 든든해. 이렇게 마음 편히 얹혀살 수 있다니. 그래도 사람은 꿈이 있어야지.”백지희는 다시 물었다. “너랑 여이현은 아직 화해 안 했어?”온지유는 잠시 멈칫했다. “다시 화해할 일은 없어.”백지희는 더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번에는 정말 끝난 거야?”백지희는 두 사람이 이혼한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둘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이야.” 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백지희는 진지하게 물었다.“네가 아이를 가졌는데도 이현 씨가 널 떠났다고? 말이 안 돼! 설마 그 아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야? 너희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야? 이건 도저히 이해가 안 돼!”온지유는 더 이상 문제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신경 쓰지 마. 나 그 사람 본 지도 오래됐어.”백지희는 온지유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지금 온지유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이번에 실패하면... 그럼 어쩔 셈인가?아이와 함께 굶어 죽기라도 할 건가?아이의 아버지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온지유와 아이는 얼마나 힘들게 살겠는가?백지희는 이렇게 생각하며 여이현이 정말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정말 그 사람을 잘못 본 걸까?백지희는 온지유가 또 상처받을까 봐 몹시 걱정되었다.동시에 둘의 관계가 이렇게 빨리 끝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만약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백지희는 평생 사랑을 믿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온지유는 수프를 다 마신 후 백지희가 부엌에서 정리하는 사이 소매를 살짝 걷어 팔에 생긴 옅은 멍 자국을 확인했다.독이
갑자기 한 남자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온지유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본 남자의 얼굴은 긴장과 초조함으로 가득 찼다.남자는 황급히 달려와 온지유를 품에 꽉 안았다.온지유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이 온지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온지유가 단지 검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불안에 떨며 온지유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미안해...”단 세 글자에 그의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온지유는 그의 품 안에서 당황한 채 곧바로 그의 가슴을 밀치며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여이현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온지유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이현의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모습에 온지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전에 깔끔한 여이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괜찮아?”여이현은 온지유를 살펴보며 물었다. 병세가 심각하지 않다는 걸 알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앞서다 보니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나... 괜찮아요.”온지유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 지금 검사 중이었어요.”여이현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검사실임을 깨달았다. 그제야 자리를 정리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미안해.”“괜찮아요.”온지유는 짧게 대답했다.여이현은 밖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여이현의 시선은 여전히 검사 받는 온지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여이현의 마음속엔 온통 온지유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온지유가 겪는 고통을 바라보는 것도 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하지만 여이현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곧 해독제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제 예상이 맞았어요. 두 사람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에요.”백지희는 여이현이 급하게 달려온 모습을 보고 여이현이 여전히 온지유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다.여이현은 백지희를 돌아보며 눈빛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어떻게 알게 됐어요?”“두 사람 이혼이 너무 갑작스러웠잖아요. 온지유도 그걸 알고 있는
밖을 내다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적막이 흘렀다.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노점상들이 한창 손님을 맞이하며 돈을 벌어야 할 때였다. 모두가 한꺼번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건 말이 안 됐다.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모든 게 남태건이 꾸민 짓이라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너, 정말 비열하고 추잡하구나.”권다솔은 그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심해졌다.하지만 남태건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칭찬 고맙다. 내가 노점상들한테 각각 200만 원을 줬거든. 이제 너한테 선택지는 한 가지야. 나랑 만나.”그는 그녀를 꼭 얻어야 했다.권다솔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지퍼에 올렸다.“난 선택하지 않을 거야.”어찌 인간이 짐승과 어울리겠는가.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지퍼를 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순간 남태건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한테서 정말 좋은 향이 나는 거 알아? 다음 주에 네가 이혼하면 그날 바로 결혼하는 게 어때?”“꺼져!”그녀는 힘껏 뒤로 발길질하며 그를 걷어차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듯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잡은 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너도 나랑 함께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네. 난 지금 바로 널 갖고 싶은데, 여기서 할까? 얼마나 짜릿하겠어?”그는 원래는 그녀에게 멋진 밤을 선사하려고 했다. 7성급 호텔에 장미로 덮인 침대와 로맨틱하게 촛불까지.하지만 그녀가 너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원래 말 안 듣는 고양이는 잘 길들여야 발톱을 감출 줄 알게 되는 법이다.“남태건!”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아? 너 그러다 감옥 갈 거야!”그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종아리를 따라 손을 위로 더듬었다.“우리가 부부가 된 후에도 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 지난 뒤 네 뱃속
그럼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는 편이 나았다.김영은은 그녀의 편에서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 돈은 바로 계좌로 보낼게. 물건은 혼자 옮길 수 없을 테니 경호원을 불러서 도와줄게.”경호원이라는 말을 들은 남태건은 더욱 씁쓸해졌다.이 또한 은근히 그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집에는 경호원이 있으니 즉시 제압할 수 있고 그는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남태건은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솔아, 잘 지내. 몸조심하고.”‘가급적이면 외출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물론 남태건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그는 예전에도 권다솔을 스토킹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기회를 보면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계획이었다.그때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를 악물고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회는 여자에게 항상 더 가혹한 법이다.그녀의 부모님이 딸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를 사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남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우리 딸, 이제 모든 물건은 돌려주었어.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도 돼.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뒤에서 지켜줄게.”김영은은 그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그녀는 김영은을 꼭 안아줬다. 아무래도 미리 대비하는 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다음 날, 출근길에 권다솔은 가방 안에 호신용 스프레이 한 병을 넣었다. 여러 종류의 고춧가루로 만들어졌기에 아주 소량만으로도 사람을 울릴 수 있었다.하루 종일 별다른 일은 없었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근처 먹자골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권다솔이 그중 한 골목 입구를 지나던 순간 옆에서 손을 뻗어와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예전의 신사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마는 지금 병이 매우 심각해요. 아마 수술을 받는다 해도 남은 인생을 병상에 누워서 보내야 할 가능성이 커요.”배진호는 엄마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처음에 권다솔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매사에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자주 찾아뵈러 가서는 다양한 보신탕을 끓여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터무니없는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쩌다 그렇게 됐어요?”분명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만 해도 정미진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다.“계속 아픈 척하다가 이제 진짜 병이 든 거죠. 악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치료의 최적 시기를 놓쳤어요.”배진호는 간단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권다솔은 하마터면 꼴좋다고 말할 뻔했다.하지만 정미진은 어디까지나 그의 친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해 그만 삼켜버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는 혼자 방에 앉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정미진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간섭하고 싶어 할지라도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혼해야 할까?그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남태건이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지난번에 이미 할 말을 다 했고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는데 이제 와서 또 뭘 하려는 거니?”김영은은 다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증거가 모두 드러났는데도 남태건은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그녀는 외간 남자의 몇 마디 달콤한 말에 딸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었다.“저와 다솔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고요. 오늘은 전에 드린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온 거에요.”남태건은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고 그
“전 치료 받지 않았어요.”정미진은 크게 후회했다.온갖 계산을 다 해가며 일을 꾸몄지만 결국 제대로 걸려든 사람은 본인이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왜 했을까?“하지만 환자분 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요.”“약은 먹지 않았고 링거도 다 버렸어요.”정미진은 말할수록 후회가 밀려왔다.이제는 의사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치료받기 싫으시면 그냥 퇴원 수속 밟으세요. 집에서 지내는 게 나을 거예요. 약값도 아낄 수 있고 요즘 젊은이들 돈 벌기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소문나면 우리 병원 체면도 말이 아니거든요.”“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치료에 협조할게요.”정미진은 순순히 의사의 의견에 따랐다.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돈 걱정도 없고 배진호도 권다솔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효자였다. 그녀가 죽게 되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셈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일단 병실로 돌아가세요. 치료를 받으시려면 가족분께서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하고 저희 병원 측에서도 다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의사는 그녀를 설득해 병실로 돌려보낸 뒤 이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저녁, 배진호는 정관수술을 마쳤다.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을 느꼈다.아버지로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어쩌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남은 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때 권다솔이 전화를 걸어왔다.권다솔?배진호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다솔 씨, 이제야 저한테 연락하는 거예요?”“전 그냥 월요일에 이혼 절차를 마치러 가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하려던 것뿐이에요.”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임신 사실을 숨기기
“걔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정미진은 비웃음을 흘렸다.“지난번에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걔 체질은 워낙 임신하기 힘들대. 특히 유산까지 한 번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리 우리 진호를 유혹한다 해도 아이는 못 얻을걸.”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엄마가 이렇게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일 줄은 차마 상상도 못 했다.“진호야, 갑자기 어쩐 일이야?”정미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방금까지 병실 안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다만 배진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가 뒤에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엄마도 여자인데 어떻게 다솔 씨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배진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권다솔을 유산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그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대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제야 권다솔이 왜 확실하게 선을 긋고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해치고 싶지 않았다.“방금 그냥 해본 말이야. 엄마가 무슨 짓을 하진 않았잖아...”“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 오늘 바로 정관수술 예약할 거예요. 제 아이를 잃은 이상 앞으로도 다른 아이는 절대 갖지 않을 거예요.”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그는 오늘 중으로 수술을 예약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이 말을 들은 정미진은 마치 청천벽력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애써가며 미래의 손자를 위해 준비했는데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만약 배진호가 진짜 정관수술을 한다면 그녀는 평생 손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불효 중 가장 큰 불효가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이야.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
악역은 그가 맡기로 했다.“아니에요. 애초부터 태건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진호의 아이예요.”그녀는 손을 뻗어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설마, 잃어버렸던 그 아이가 다시 그녀한테 돌아온 걸까?그녀는 권용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어찌 됐든 간에 전 이 아이를 꼭 지킬 거예요. 저랑 진호 씨는 이미 이혼했지만 진호 씨는 저를 괴롭힐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잘 알아요.”“그렇다면 배진호 어머니는 어떡하려고? 그처럼 고약한 시어머니를 만나면 누구든 불행할 수밖에 없어.”권용민은 그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남태건과 비교하니 이제는 배진호가 조금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게다가 그가 찾아본 증거에 따르면 권다솔에게 달린 악플들은 배진호가 퍼뜨린 것이 아니었다. 석규리가 권씨 가문의 경쟁업체를 찾은 것이었다. 더 이상 배진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만약 배진호 혼자였다면 권용민은 아이를 위해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아빠가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미안하다만 배진호의 어머니가 있는 한 너희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그건 저도 잘 알아요.”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 역시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이미 시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한 번 잃었지만 하늘의 축복으로 다시 아이를 가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그녀가 명확히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권용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배진호는 매일 병원에 들러 정미진을 보살폈다. 정미진은 그의 앞에서 약을 먹고 링거를 맞는 척하며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진호는 병원 문을 나서다 병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것이 떠올라 급히 되돌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며칠째 연기하느라 들어간 병원비만 해도 적지 않잖아요. 오빠도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제가 병원비를 봤는
그는 바닥에 쓰러진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구급차 불러!”지나가던 직원이 급히 응급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권용민은 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그는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왔다 갔다 오간 지도 셀 수 없었다. 권용민은 평생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약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그조차 견딜 수 없는데 만약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몰랐다.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니던 찰나 의사가 걸어 나왔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용민은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물었다.“의사 선생님, 지금 제 딸은 어떤 상태인가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겁니까?”권용민은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의사는 그의 손을 보며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너무 세게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는 속으로 어쩌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따님은 괜찮습니다. 단순히 저혈당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따님이 임신 중이라 반드시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권용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완전히 멍해졌다.‘임신이라니?’그럼 이 아이는 남태건의 아이인가?원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남태건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딸과 엮이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권다솔이 남태건의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녀는 얼마 전에도 아이를 잃었는데 또 낙태 수술을 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뻔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남태건의 성격상 아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권용민은 걱정을 가득 안고 딸을 만나러 갔다.“아빠, 지금 아빠 상태를 보면 마치 제가 정말 큰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잖아요.”권다솔은 병상에 누운 채 창백한 얼굴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