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숙은 이 말을 듣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아주머니!”송신영은 급히 최정숙을 부축했다.“Y국?”온지유가 물었다.“Y국은 대체 어디인데요?”송신영은 온지유를 짜증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는 위험한 곳이요! 민우는 왜 갑자기 그런 곳에 가겠다고 한건지. 이상한 질문이나 하고. 설마 당신이 민우를 부추긴 거 아니에요?”온지유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대체 무슨 이상한 질문을 했는데요?”송신영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나한테 Y국에 대해 묻고, 그곳에서 약을 만들고 독을 제조하는지를 물었어요. 나는 그저 다 말해줬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무 말도 안 했을 텐데! 정말 가버릴줄이야. 호기심 때문일 줄 알았는데. 왜 그런 위험한 곳에 가려고 한 거래요?”온지유의 마음이 가라앉았다.약을 만들고 독을 제조한다고?이게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온지유는 너무 긴장되어 어지러움을 느꼈다. 다행히 공아영이 그녀를 부축했다.이들은 분명히 온지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최정숙은 울음을 터뜨렸다.“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어떻게 살라고!”“괜찮을 거예요, 아주머니. 아버지께서 찾으러 가실 거예요. 민우는 반드시 무사할 거예요.”송신영이 그녀를 달랬다.온지유는 최근 일어난 일들이 너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민우 뿐만이 아니었다.밤이 되면 이상해지는 인명진과, 심지어 여이현도 전과 달랐다.“집에 좀 다녀와야겠어요.”온지유는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일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를 바랐다.“아영 씨, 저 좀 데려다줄래요?”공아영은 온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걱정하며 말했다.“당연하죠.”온지유는 서둘러 인명진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진실을 말해줄지도 모른다.“못 가요!”송신영은 온지유를 막아서며 말했다.“민우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당신이에요. 민우가 당신에게 출국한다고 말했다면 당연히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겠죠!”“몰라요.”
인명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가 이내 어두워졌다."율아...""말해줘요."온지유는 그의 소매를 꽉 붙잡으며 불안하게 물었다."내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예요? 나민우는 약을 구하러 간 거예요?""율아..."인명진의 목소리는 점점 자신 없어졌다.그는 숨기고 싶었다. 온지유가 나아질 때까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온지유가 아무 걱정 없이 지냈으면 했건만 결국 알아채고 말았다.온지유는 그의 태도에서 답을 얻은 듯 보였다.그녀는 인명진의 소매를 놓았다.눈가가 붉어지고 입술 끝에 쓴웃음이 피었다."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거구나. 항상 힘이 없었고. 몸에 문제가 생긴 거였어. 그래서 인명진 씨가 내 곁에 있었던 거고, 그래서..."혼잣말을 하는 온지유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래서 이현 씨도 날 버린 거구나. 내 몸에 문제가 생긴 게 진짜 이유였어.""그런 말 하지 마요."인명진의 눈에는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 손을 들어 온지유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손을 멈추고 다시 내렸다."지유 씨는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죽는다고요?"온지유는 인명진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난 어떻게 되는 거에요? 솔직히 말해줘요."인명진은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아직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병이 본격적으로 발작하기 전에 반드시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온지유는 다시 물었다."최악의 상황이 오면 죽게 되는 거예요?"인명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제가 죽게 두지 않을 거예요."그의 가장 확고한 대답이었다.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온지유는 죽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었다."절 위로하려고 거짓말 하지 마요. 왜 여태 말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진작에 말했으면 민우를 막았을 텐데.""지유 씨는 막을 수 없어요. 민우 씨도 지유 씨가 살아남기를 바랐으니까."인명진이 말했다.온지유는 답답했다."왜 이렇게까지 해
인명진의 시선도 함께 문 쪽으로 향했다.그는 천천히 다가가 문을 열었다.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홍혜주였다.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괜찮아?”그리고 방 안에 온지유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홍혜주는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홍혜주를 보고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방금 전에 자신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홍혜주가 나타났으니, 그전까지 느꼈던 연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이제 남은 건 분노와 억울함뿐이었다.“당신이었군요.”온지유가 다가가며 말했다.홍혜주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랜만이네요.”온지유는 물었다.“당신이 바로 내 몸에 독을 주입한 거죠?”홍혜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고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홍혜주에게도 이 일은 매우 복잡했다.인명진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마음속의 갈등은 사라질 수 없었다.온지유는 자신이 너무 순진했다고 느꼈다.“왜 이런 짓을 한 거예요?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차라리 절벽에서 확 밀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더 깔끔했잖아요. 내게 살 희망을 줘버려서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버렸잖아요!”온지유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율아, 너무 흥분하지 마.”인명진은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자 서둘러 달래려고 했다.온지유는 그와 홍혜주 사이를 오가며 시선을 돌렸다.홍혜주가 입을 열었다.“그 약이 독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건 흉터남이 준비한 거예요. 난 단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에요.”“임무 수행?”온지유는 비웃으며 말했다.“정말 가볍게 들리네요.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거죠? 저랑 당신 사이에는 원한도 없잖아요.”홍혜주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서로 입장이 다를 뿐이었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홍혜주는 겨우 입을 떼며 말했다.“우리 모두 어쩔 수 없었어요.
인명진의 회색빛 눈동자가 홍혜주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인명진은 홍혜주의 손을 떼며 말했다."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홍혜주는 눈을 붉히며 히스테릭하게 외쳤다."정말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미친 거야?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남았는데. 왜 고작 한 사람을 위해 죽으려고 해. 나도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해왔는데. 흉터남 앞에서 너 대신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감당했는지 알아? 넌 날 위해서라도 참아야 해. 난 네 파트너야. 날 버리면 안 돼!"인명진은 힘없이 손을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한 번도 그렇게 해달라고 한 적 없어. 이건 내 문제야.""인명진!"홍혜주는 그의 손을 다시 잡아끌며 소리쳤다."너 정말 살고 싶지 않은 거야?"인명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말했잖아. 이제와서 죽는 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홍혜주는 그의 손을 놓고 몇 걸음 물러서며 실망스럽게 말했다."네가 이렇게 미쳐 있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온지유를 죽여야 했어!"그 말에 인명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차갑게 말했다."아직도 그런 말이 나와?"홍혜주는 비통하게 웃었다."너도 알잖아. 난 너밖에 없어. 겨우 하나 남은 동료인데 넌 지금 날 떠나려고 해. 난 당장 가서 그 여자를 죽일 거야!"홍혜주는 문 쪽으로 향했다.그러나, 한 손이 그녀의 목을 단단히 감싸 쥐었다.홍혜주는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혀 눈을 크게 뜨고 살기 가득한 인명진의 눈을 바라보았다."네가 감히?"온지유를 위해서라면 그는 자신의 목숨조차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홍혜주는 웃고 싶었다.그녀는 인명진 마음속의 자신의 자리를 너무 과대평가했다.홍혜주는 다시 버려진 것 같았다.그녀는 이런 기분을 싫어했다. 견딜 수 없었다.살아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차라리 인명진의 손에 죽는 것이 혼자 외롭게 남겨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너무 춥고, 외로웠다.홍혜주가 저항하지 않자 인명진은 그녀의 목
"헛소리하지 마."홍혜주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지만 더 이상 인명진을 위한 눈물이 아니었다.이번에는 그녀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정말이야."홍혜주는 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나에겐 가족도 친구도 없잖아. 죽으면 쓰레기처럼 버려질 거야."인명진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야."홍혜주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 깊은 슬픔을 떨쳐낼 수 없었다.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달랐다.다른 아이들은 부모가 있었지만 그녀는 없었다.그녀에게는 오직 살인뿐이었다.사람들은 말했다. 친부모가 150만 원에 그녀를 팔아넘겼다고.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그녀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부모는 아들을 원했고, 딸은 원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주저 없이 그녀를 팔아넘긴 것이다.기억을 되찾은 이후엔 훈련과 살인, 그리고 도둑질밖에 배운 것이 없었다.그녀의 어린 시절은 매질과 냉혈한으로만 가득 찬 시간이었다.팔려 온 이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그녀는 살인 기계로 전락했다.이런 걸 알면서도 그 수렁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뛰어들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그녀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다면 범죄 조직에 팔려 가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는 않았을 테니까.그녀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허락되지 않았다.홍혜주는 자신이 한 번이라도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산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아마도 아니었다.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써 왔을 뿐이다.흉터남이 말했듯이 그녀의 목숨은 싸구려였다.부모도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그녀를 사랑해 주겠는가?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인명진만이 유일하게 그녀가 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때때로 홍혜주는 인명진이 부러웠다.그는 자신의 개성도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
온통 가식밖에 오가지 않는 접대 자리에서 온지유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소식을 들은 여이현은 바로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았다."그래."전화를 끊고 여이현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노숭아는 한창 유명한 감독과 제작자를 만나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앞으로 성공의 정점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당연히 노승아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머무르게 해야 했다.이에 여이현이 이미 자리를 떠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채 마시지 않은 술잔 하나만 남아 있었다.노승아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중요한 인물들 앞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쿵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폭우가 올 징조였다.곧이어 한 방울의 비가 땅에 떨어졌다.두 방울세 방울...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여이현이 도착했을 때 온지유는 마치 혼이 나간 듯 허무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서 내려 비가 오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빠르게 온지유에게로 다가갔다.여이현은 그녀를 확 잡아채며 소리쳤다."여기서 뭐 하고 있어? 비 오는 거 안 보여? 미친 거 아니야?"온지유는 뒤돌아 여이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입고 있는 정장과 꼼꼼하게 정돈된 모습은 마치 중요한 자리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온지유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오늘도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셨나 보네요. 멋지네요!"여이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온지유의 비꼬는 듯한 미소를 보았다.온지유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여이현은 다시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따라 와!"온지유는 그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말했다."맞아요. 저 정말 미쳤어요. 그러든 말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요!""제발 그만해!"여이현이 무겁게 말했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더 씁쓸하게 웃었다."소란도 안 피웠고 말도 고분고분 잘 들었어요. 그래도 난 그저 숨겨진 아내였잖아요. 제게 주어진 건 그것뿐이었잖아요. 하지만 보세요. 결
여이현의 품에 안긴 순간 온지유는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놔요!"온지유는 그를 밀쳐내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당신의 동정 따위 필요 없어요.""지유야..."여이현은 다른 방법도 없이 그저 온지유의 이름을 불렀다.온지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계속해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불쌍한 눈으로 날 보지 마세요. 이혼 후의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사람들 모두 데리고 돌아가세요.""내가 널 어떻게 모른 척해."여이현은 앞으로 한발 다가가며 말했다."이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오지 마요! 그만하라고!"온지유는 절규하며 소리쳤다."난 당신을 증오해요. 모든 걸 숨기고 날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어서 애꿎은 나민우가 위험을 감수하게 했잖아요! 내겐 민우를 막을 기회도 없었어요. 만약 나민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난 평생 당신을 저주할 거야!"여이현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그는 물었다."나민우 때문이야? 그래서 나에게 이렇게 화가 난 거야?"온지유는 단호히 말했다."당신이 나민우보다 나은 게 뭐가 있어요? 민우는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어요. 당신은요? 내가 가장 힘들 때 날 버리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잖아요!""넌 날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여이현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났다.온지유는 입술을 비꼬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더 어떻게 봐주는 게 좋겠어요? 돌아 가 노승아랑 잘 지내세요. 내 앞에서 당신은 절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여이현 씨, 우리 사이에 기회는 없어요!"온지유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 여이현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마지막으로 그녀는 몸을 돌려 떠났다.온지유는 그대로 여이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여이현은 마치 땅에 뿌리가 박힌 듯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그의 머릿속에는 온지유의 말들이 메아리쳤고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찔렀다.온지유의 말 속에는 온통 나민우가 있었다. 나민우가 위험을 무릅쓰고 해독제를 구하러 떠난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은 점점 나민
노승아를 견제하는 동시에 해독제를 찾아야 했다."하지만 사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민우만 위험을 감수한 건 아니잖아요. 분명히 대장님도..."용경호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여태 여이현이 한 일들을 온지유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답답한 상황이었다.이 이야기가 나오자 여이현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나도 나민우가 그 사실을 알게 될 줄은 몰랐어."더군다나 그가 혼자서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갈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성재민이 말했다."지금은 사모님께도 위로가 필요할 겁니다."여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못 봤어? 날 증오한다잖아. 다시 찾아가도 더 불편하게 할 뿐이야."여이현은 젖어버린 외투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용경호와 성재민은 그의 뒤를 따르며 그가 느끼는 슬픔과 무력함을 함께 느꼈다.오랜 시간 그와 함께 일했지만 이렇게 낙담한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아무리 강한 남자라도 감정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현실 속 문제를 해결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여이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온지유가 그를 원망하고 싫어해도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먼저 해독제를 찾아야 한다!밖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노승아가 그녀의 BMW를 몰고 안으로 들어왔다.파티가 끝나자마자 노승아는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하이힐을 신은 노승아는 안으로 들어섰고 마침 그들이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온몸이 젖은 상태인 걸 보았다.노승아의 얼굴에 즉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왜 이 정도로 비를 맞은 거예요? 옷도 안 갈아입고,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요."노승아는 여이현에게 다가와 걱정하며 말을 건넸다.용경호와 성재민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승아를 바라보았다. 노승아가 수건을 건네며 닦아주려 하자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했다."언제 해독제를 구할 수 있지?"다시
밖을 내다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적막이 흘렀다.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노점상들이 한창 손님을 맞이하며 돈을 벌어야 할 때였다. 모두가 한꺼번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건 말이 안 됐다.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모든 게 남태건이 꾸민 짓이라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너, 정말 비열하고 추잡하구나.”권다솔은 그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심해졌다.하지만 남태건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칭찬 고맙다. 내가 노점상들한테 각각 200만 원을 줬거든. 이제 너한테 선택지는 한 가지야. 나랑 만나.”그는 그녀를 꼭 얻어야 했다.권다솔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지퍼에 올렸다.“난 선택하지 않을 거야.”어찌 인간이 짐승과 어울리겠는가.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지퍼를 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순간 남태건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한테서 정말 좋은 향이 나는 거 알아? 다음 주에 네가 이혼하면 그날 바로 결혼하는 게 어때?”“꺼져!”그녀는 힘껏 뒤로 발길질하며 그를 걷어차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듯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잡은 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너도 나랑 함께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네. 난 지금 바로 널 갖고 싶은데, 여기서 할까? 얼마나 짜릿하겠어?”그는 원래는 그녀에게 멋진 밤을 선사하려고 했다. 7성급 호텔에 장미로 덮인 침대와 로맨틱하게 촛불까지.하지만 그녀가 너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원래 말 안 듣는 고양이는 잘 길들여야 발톱을 감출 줄 알게 되는 법이다.“남태건!”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아? 너 그러다 감옥 갈 거야!”그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종아리를 따라 손을 위로 더듬었다.“우리가 부부가 된 후에도 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 지난 뒤 네 뱃속
그럼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는 편이 나았다.김영은은 그녀의 편에서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 돈은 바로 계좌로 보낼게. 물건은 혼자 옮길 수 없을 테니 경호원을 불러서 도와줄게.”경호원이라는 말을 들은 남태건은 더욱 씁쓸해졌다.이 또한 은근히 그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집에는 경호원이 있으니 즉시 제압할 수 있고 그는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남태건은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솔아, 잘 지내. 몸조심하고.”‘가급적이면 외출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물론 남태건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그는 예전에도 권다솔을 스토킹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기회를 보면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계획이었다.그때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를 악물고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회는 여자에게 항상 더 가혹한 법이다.그녀의 부모님이 딸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를 사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남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우리 딸, 이제 모든 물건은 돌려주었어.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도 돼.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뒤에서 지켜줄게.”김영은은 그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그녀는 김영은을 꼭 안아줬다. 아무래도 미리 대비하는 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다음 날, 출근길에 권다솔은 가방 안에 호신용 스프레이 한 병을 넣었다. 여러 종류의 고춧가루로 만들어졌기에 아주 소량만으로도 사람을 울릴 수 있었다.하루 종일 별다른 일은 없었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근처 먹자골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권다솔이 그중 한 골목 입구를 지나던 순간 옆에서 손을 뻗어와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예전의 신사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마는 지금 병이 매우 심각해요. 아마 수술을 받는다 해도 남은 인생을 병상에 누워서 보내야 할 가능성이 커요.”배진호는 엄마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처음에 권다솔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매사에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자주 찾아뵈러 가서는 다양한 보신탕을 끓여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터무니없는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쩌다 그렇게 됐어요?”분명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만 해도 정미진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다.“계속 아픈 척하다가 이제 진짜 병이 든 거죠. 악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치료의 최적 시기를 놓쳤어요.”배진호는 간단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권다솔은 하마터면 꼴좋다고 말할 뻔했다.하지만 정미진은 어디까지나 그의 친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해 그만 삼켜버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는 혼자 방에 앉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정미진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간섭하고 싶어 할지라도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혼해야 할까?그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남태건이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지난번에 이미 할 말을 다 했고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는데 이제 와서 또 뭘 하려는 거니?”김영은은 다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증거가 모두 드러났는데도 남태건은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그녀는 외간 남자의 몇 마디 달콤한 말에 딸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었다.“저와 다솔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고요. 오늘은 전에 드린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온 거에요.”남태건은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고 그
“전 치료 받지 않았어요.”정미진은 크게 후회했다.온갖 계산을 다 해가며 일을 꾸몄지만 결국 제대로 걸려든 사람은 본인이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왜 했을까?“하지만 환자분 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요.”“약은 먹지 않았고 링거도 다 버렸어요.”정미진은 말할수록 후회가 밀려왔다.이제는 의사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치료받기 싫으시면 그냥 퇴원 수속 밟으세요. 집에서 지내는 게 나을 거예요. 약값도 아낄 수 있고 요즘 젊은이들 돈 벌기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소문나면 우리 병원 체면도 말이 아니거든요.”“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치료에 협조할게요.”정미진은 순순히 의사의 의견에 따랐다.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돈 걱정도 없고 배진호도 권다솔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효자였다. 그녀가 죽게 되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셈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일단 병실로 돌아가세요. 치료를 받으시려면 가족분께서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하고 저희 병원 측에서도 다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의사는 그녀를 설득해 병실로 돌려보낸 뒤 이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저녁, 배진호는 정관수술을 마쳤다.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을 느꼈다.아버지로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어쩌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남은 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때 권다솔이 전화를 걸어왔다.권다솔?배진호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다솔 씨, 이제야 저한테 연락하는 거예요?”“전 그냥 월요일에 이혼 절차를 마치러 가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하려던 것뿐이에요.”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임신 사실을 숨기기
“걔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정미진은 비웃음을 흘렸다.“지난번에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걔 체질은 워낙 임신하기 힘들대. 특히 유산까지 한 번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리 우리 진호를 유혹한다 해도 아이는 못 얻을걸.”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엄마가 이렇게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일 줄은 차마 상상도 못 했다.“진호야, 갑자기 어쩐 일이야?”정미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방금까지 병실 안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다만 배진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가 뒤에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엄마도 여자인데 어떻게 다솔 씨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배진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권다솔을 유산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그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대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제야 권다솔이 왜 확실하게 선을 긋고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해치고 싶지 않았다.“방금 그냥 해본 말이야. 엄마가 무슨 짓을 하진 않았잖아...”“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 오늘 바로 정관수술 예약할 거예요. 제 아이를 잃은 이상 앞으로도 다른 아이는 절대 갖지 않을 거예요.”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그는 오늘 중으로 수술을 예약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이 말을 들은 정미진은 마치 청천벽력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애써가며 미래의 손자를 위해 준비했는데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만약 배진호가 진짜 정관수술을 한다면 그녀는 평생 손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불효 중 가장 큰 불효가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이야.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
악역은 그가 맡기로 했다.“아니에요. 애초부터 태건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진호의 아이예요.”그녀는 손을 뻗어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설마, 잃어버렸던 그 아이가 다시 그녀한테 돌아온 걸까?그녀는 권용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어찌 됐든 간에 전 이 아이를 꼭 지킬 거예요. 저랑 진호 씨는 이미 이혼했지만 진호 씨는 저를 괴롭힐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잘 알아요.”“그렇다면 배진호 어머니는 어떡하려고? 그처럼 고약한 시어머니를 만나면 누구든 불행할 수밖에 없어.”권용민은 그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남태건과 비교하니 이제는 배진호가 조금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게다가 그가 찾아본 증거에 따르면 권다솔에게 달린 악플들은 배진호가 퍼뜨린 것이 아니었다. 석규리가 권씨 가문의 경쟁업체를 찾은 것이었다. 더 이상 배진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만약 배진호 혼자였다면 권용민은 아이를 위해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아빠가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미안하다만 배진호의 어머니가 있는 한 너희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그건 저도 잘 알아요.”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 역시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이미 시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한 번 잃었지만 하늘의 축복으로 다시 아이를 가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그녀가 명확히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권용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배진호는 매일 병원에 들러 정미진을 보살폈다. 정미진은 그의 앞에서 약을 먹고 링거를 맞는 척하며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진호는 병원 문을 나서다 병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것이 떠올라 급히 되돌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며칠째 연기하느라 들어간 병원비만 해도 적지 않잖아요. 오빠도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제가 병원비를 봤는
그는 바닥에 쓰러진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구급차 불러!”지나가던 직원이 급히 응급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권용민은 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그는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왔다 갔다 오간 지도 셀 수 없었다. 권용민은 평생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약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그조차 견딜 수 없는데 만약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몰랐다.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니던 찰나 의사가 걸어 나왔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용민은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물었다.“의사 선생님, 지금 제 딸은 어떤 상태인가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겁니까?”권용민은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의사는 그의 손을 보며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너무 세게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는 속으로 어쩌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따님은 괜찮습니다. 단순히 저혈당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따님이 임신 중이라 반드시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권용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완전히 멍해졌다.‘임신이라니?’그럼 이 아이는 남태건의 아이인가?원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남태건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딸과 엮이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권다솔이 남태건의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녀는 얼마 전에도 아이를 잃었는데 또 낙태 수술을 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뻔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남태건의 성격상 아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권용민은 걱정을 가득 안고 딸을 만나러 갔다.“아빠, 지금 아빠 상태를 보면 마치 제가 정말 큰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잖아요.”권다솔은 병상에 누운 채 창백한 얼굴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