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아는 여이현을 속이는 동시에 자신도 속이고 있었다. 그녀도 순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현실에서는 자신까지 속일 수밖에 없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이현은 잘 속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노승아가 온지유에게 독을 먹인 순간,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더러운 속내가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다.여이현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건 위험에 빠진 온지유 뿐이 아니었다. 남들은 몰랐던 노승아의 실체도 있었다.“나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예전 같으면 믿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야. 넌 너 자신을 위해 그런 거잖아. 한패라는 걸 들키기 싫었던 거잖아. 아니야?”이 말을 들은 노승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무 말도 못 했다.‘오빠가 어떻게 안 거지?’그녀는 불안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물론 인정은 할 수 없었다. 그녀도 더러운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다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다. 그녀의 위치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노승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황함 속에서도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녀는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요? 나라고 그런 짓을 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요? 오빠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죠. 여진숙, 그 여자라 날 버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난 오빠 대신 고생하고 있는 거예요. 오빠가 살았어야 하는 인생을 사는 거라고요! 고고한 척하지 말아요. 난 오빠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노승아에게는 원하는 것을 선택할 권력이 없었다.그녀는 원래 여승아로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그녀를 버렸다.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녀는 수도 없이 했다. 원래도 축복이 아닌 원한을 품고 태어난 아이가 아니던가?이건 여이현도 잘 알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았다.“날 미워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난 너한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어.”여이현의
“누구랑 그렇게 오래 통화했어요?”온지유는 한 쪽에서 여이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가 겨우 끝난 다음에는 궁금한 듯 물었다.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회사 일로 미팅할 게 있어서 그래. 오래 기다렸지?”온지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이현 씨가 자꾸 미간을 찌푸리길래 안 좋은 일이 있나 해서 물어봤어요.”그녀는 아주 세심한 사람이다. 관찰력도 뛰어났다. 여이현은 그녀의 남편이니 사소한 반응에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오늘 같은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분 좋을 거야.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날이니까.”그는 온지유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온지유는 그의 목에 손을 두르며 말했다.“아직 더 좋은 일이 남아 있어요.”“무슨 일인데?”여이현은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이마를 콩 맞췄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발그레한 얼굴로 주저했다.주저하는 한편 행복하기도 했다. 아이를 지금껏 지킨 것이 아주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저희 이제 아이 가질 때도 됐잖아요. 고모도 기대하고 있고... 그래서...”“소대장님!”용경호가 부랴부랴 달려와서 온지유의 말을 끊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저희 교외에서...”말을 하다 말고 온지유를 발견한 그는 흠칫 얼어붙더니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심상치 않은 일임을 느낀 여이현이 입을 열었다.“나가서 얘기해.”여이현은 온지유를 풀어주며 말했다.“나 잠깐 나갔다 올게.”“네, 저희는 이따가 다시 얘기해요.”여이현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나서 용경호와 함께 나갔다. 그녀는 여이현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여이현에게 무거운 사명이 있다는 것은 잘 알았다. 그런데도 걱정이 앞섰다. 그가 위험에 빠질까 봐서 말이다.용경호가 나타나고 나서 여이현은 하루도 호락호락하게 보낸 적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의 그는 여진그
“아무튼 요즘 신경 좀 써요. 제가 언니 곁에서 챙겨줄게요. 할아버지한테 허락받고 짐까지 가져왔어요.”마침 강윤희의 짐이 차에서 내려지고 있었다.“좋아요. 이현 씨한테 맛있는 걸 해달라고 할게요.”“정말요?”강윤희는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괜찮네요. 자잘한 일은 오빠한테 맡겨요. 언니는 가만히 누리기만 하면 돼요.”온지유는 별장에 돌아왔다. 정말 오래간만에 돌아온 것이었다.먹깨비 강윤희는 별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간식을 한가득 주문했다. 정말 당분간 떠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간식도 흔쾌히 공유해 준다고 했다.두 사람은 함께 TV를 봤다. 교외에서 내장이 전부 사라진 시신을 발견했다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강윤희는 놀란 듯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요즘 미친 사람 정말 많네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 내장까지 털어가는 건 너무했잖아요.”온지유는 용경호가 하다 만 말을 떠올렸다.‘교외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혹시 이현 씨도 저곳에 갔나?’시신은 여성의 것이었다. 뉴스를 보다 보니, 강윤희뿐만 아니라 온지유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용경호 씨한테서 무슨 얘기 못 들었어요?”온지유의 질문에 강윤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뇨. 그런 얘기는 절대 제 앞에서 하지 않아요.”강윤희는 군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줄곧 위험과는 거리가 먼 백지장 같은 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온지유도 계속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되는 마음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장이 전부 사라진 시신이라니 말이다. 범인은 희대의 사이코가 틀림없었다.온지유는 마음이 점점 차가워졌다. 심장도 찌릿찌릿 아픈 것 같았다.“언니, 왜 그래요?”강윤희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디 아파요?”“아니에요. 저 잠깐 쉬고 올게요.”“제가 데려다줄게요.”강윤희는 후다닥 간식을 내려놓고 온지유와 함께 나섰다.그렇게 침실에 들어간 온지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여이현이 돌아오기를, 여이현이 전화 오기를 기다리면서 말
온지유는 어두운 안색으로 핸드폰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서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오늘 오후 뭐 하러 갔을까? 노승아한테 갔을까, 아니면 시신을 살펴보러 갔을까?’온지유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여이현을 믿기로 했다.3년, 그들이 결혼한 세월만 해도 장장 3년이다. 그러나 여이현이 이토록 잘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그 마음이 선명히 느껴질 정도였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눈빛에 담긴 사랑이 보였다. 그는 평생 그녀를 사랑하겠다고, 평생 그녀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갑작스러운 변화에 약간 의아한 것도 사실이다. 어쩐지 숨겨진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온지유가 생각에 잠긴 새로 여이현이 씻고 나왔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온지유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시선을 보냈다.온지유는 머리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수건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걸어갔다.“왜 아직도 안 잤어?”“이현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여이현이 침대에 걸터앉자,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머리를 기댔다. 여이현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왜?”온지유는 통화기록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여이현은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기 때문이다.노승아와 통화했을 때도 표정이 아주 어두웠다.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그냥요. 이제 같이 자요.”여이현은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멍때리고 나서야 온지유에게 말했다.“나 내일 늦게 돌아올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눈을 감았던 온지유는 다시 뜨면서 대답했다.“알았어요.”여이현은 몸을 돌려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온지유 머릿속의 의문은 그의 품에 안긴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어찌 됐든 두 사람은 부부였다.온지유는 그의 손을 잡아서 배에 댔다.“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같이 이겨내요. 절대 혼자 견디려고 하지 말아요.”그녀의 체온을 느끼며,
“그 인간은 신경 쓰지 말고 저희끼리 놀아요. 오늘 쇼핑하러 가는 건 어때요? 제가 가방 사 줄게요! 평소에도 쓸 수 있는 그런 캐주얼한 거로!”강윤희와 친해질 대로 친해진 온지유는 인사치레 말을 하지 않았다.“오늘 왜 이렇게 통이 커요?”“남도 아닌 지유 씨잖아요. 지유 씨한테 잘해줘야 이현 오빠가 눈치 주지 않아요.”강윤희는 여이현의 차가운 얼굴이 너무 싫었다.“옷 갈아입고 올게요.”온지유도 마침 쇼핑 가고 싶었던 참이다. 배가 점점 불러오니 유아용품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두 사람은 기사와 경호원을 대동하고 함께 나섰다. 방송국 쪽은 미리 못 간다고 사정을 얘기했다.그녀가 없더라도 공아영이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장다희도 퇴원했다고 한다. 진송이는 주연 자리를 잃었고, 다시 돌아온 제안을 장다희는 거절했다고 한다. 지금은 다른 배우를 찾는 중이다.백화점에 도착한 온지유와 강윤희는 명품관에 갔다. 옷, 가방, 신발... 어느 브랜드에나 사람이 많았다. 일반인이라면 줄 서서 기다려야겠지만, VIP 강윤희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강윤희는 최근 돈을 더 주면서도 사기 어렵기로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온지유에게 들려주면서 말했다.“이거 지유 씨한테 어울려요. 가벼워서 무리도 안 갈 것 같아요.”“괜찮네요. 근데 저는 맞은켠 브랜드가 더 좋아요.”“지유 씨도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었어요? 일찍 말하지! 빨리 가봐요!”온지유는 장난으로 물었다.“제가 윤희 씨 용돈을 전부 써버리면 어떡하려고요?”“지유 씨만 좋다면 뭐든 사줄게요. 가방 10개라도 사줄 수 있어요!”“저 그냥 윤희 씨한테 시집갈 걸 그랬어요.”강윤희는 진지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온지유의 웃는 얼굴을 본 다음에야 농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저는 진지하다고요! 놀리지 마요.”“아니에요. 윤희 씨도 마음에 드는 거 있나 봐봐요.”온지유의 말 한마디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강윤희는 그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좋아요!”두 사람은 한 브랜드에서 몇 개 사고 다른
“정말 이현 씨예요?”온지유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아무래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강윤희는 창백한 얼굴로 씩씩대며 말했다.“나쁜 놈! 이현 오빠는 다르다고 생각한 제가 멍청했어요! 결국 남자는 다 똑같아요!”강윤희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온지유는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노승아는 여이현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처럼 다정한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온지유의 발은 마치 뿌리라도 내린 듯,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고, 노승아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오빠. 이렇게 비싼 선물도 해주고.”좋아하는 사람이 선물한 물건은 어느 여자에게나 큰 기쁨이었다. 노승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별거 아니야. 네가 좋으면 됐어.”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제가 좋다면 뭐든 들어줄 거죠?”“응.”“우리 오빠 너무 다정하다~. 역시 내 안목이 최고라니까요. 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예요. 난 오빠가 이혼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들은 온지유와 마주쳤다. 모두 발걸음을 멈췄다.노승아는 온지유의 잔뜩 상심한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쇼핑하다가도 만나다니요.”노승아는 여이현과 팔짱을 더 꽉 꼈다. 자신의 남자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 말이다.온지유의 시선은 오직 여이현에게만 향해 있었다. 여이현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표정도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물론 해명할 생각도 전혀 없어 보였다.이때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윤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빠, 가정 있는 사람이 다른 여자랑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강윤희 씨 맞죠? 강태규 씨의 손녀.”노승아는 강윤희의 비난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말했다.“벌써 이렇게 컸네요.”반대로 강윤희
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사실이에요?”여이현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온지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계속 침묵을 지켰다.기다리다 못해 온지유가 다시 물었다.“노승아 씨랑 만나기로 한 거예요? 말해줘요, 제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이현 씨 말만 믿을 수 있어요.”여이현은 여전히 침묵했다. 온지유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 아직도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이현 씨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걸로 알고 있을게요. 제 눈보다도 이현 씨 말을 더 믿어요.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대체... 대체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요. 말 좀 해요, 뭐라도 다 되니까요.”온지유는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 아팠다. 그의 프러포즈도 사랑도 전부 환상이었던 것 같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꼈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자가 드디어 자신을 선택해 줬으니 말이다. 그동안 그녀가 했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오늘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온지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절망했고, 마음이 칼에 베인 듯이 아팠다.여이현은 자꾸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는 온지유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바늘이 되어 마음에 떨어졌기 때문이다.‘울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로 다시는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여이현은 시선을 돌리며 온지유에게 집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전부 무시하고 차갑게 대답했다.“온지유, 우리 이혼하자.”이 말을 들은 노승아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이날이 왔네! 이젠 별 탈 없이 이혼할 수 있겠지?’온지유의 마음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치 영혼이 몸을 떠나버린 듯,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하며 애써 침착한 미소를 지었다.“방금 뭐
노승아는 잠시 넋이 나갔다.‘설마 이현 오빠는 모르고 있었나? 말이 안 되는데?’이 말을 듣고도 여이현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냉기만 가득했다. 온지유와 관련된 모든 일이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했다.온지유는 아이를 이용해서라도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선 여이현에게 아이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랐다.마지막 희망의 끈까지 사라지자, 온지유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이현 오빠, 우리 이제 가요.”노승아는 여이현에게 기대면서 다툼을 끊었다.“지유 씨도 애쓰지 마요. 그러게 애를 일찍 지웠으면 좋았잖아요. 그러면 이런 망신도 겪을 필요 없었을 텐데.”여이현은 시선을 돌렸다. 숨결이 약간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차갑고 무정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자. 이혼 안 하려고 못할 말이 없는 여자야.”두 사람은 그대로 온지유를 스쳐 지나갔다.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말이다.노승아는 지나가면서 일부러 온지유의 어깨를 툭 쳤다. 온지유는 살짝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강윤희가 그녀를 부축하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요? 저 여우 년이 분명히 이현 오빠를 꼬드겼을 거예요. 지유 씨, 저희...”“그만해요.”온지유는 강윤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녀는 너무 빨리 변해 버린 여이현의 태도에 의심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도 온지유는 쓴웃음만 지었다.“제가 무슨 말을 해도 이현 씨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이현 씨는 저한테 믿음이 없어요.”강윤희는 초조하게 말했다.“정말 이대로 끝낼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않는 건데... 그러면 운 나쁘게 마주치지도 않았을 거고...”온지유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울음보다 더 처절해 보이는 미소였다.“아니에요. 언젠가 마주해야 할 일이었어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빨리 끝내면 좋죠.”온지유는 동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