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주를 벌하고 있는 흉터남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홍혜주의 상태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홍혜주가 쓰러지자 그제야 찻잔을 내려놓으며 사나운 눈빛으로 홍혜주를 보며 말했다.“일부러 그 여자를 놓아준 거지?”홍혜주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지만 두 눈은 똑바로 뜨고 있었다. 최대한 힘을 내어 앞으로 기어가 흉터남의 곁으로 왔다.“아녜요...”흉터남이 말했다.“분명 그 여자를 던지라고 했을 텐데 넌 망설였지. 그때부터 난 널 믿지 않았어.”홍혜주의 안색이 창백했다. 다소 비참한 모습으로 있는 힘껏 흉터남의 바지를 잡았다.“그 여자가 제 손을 꽉 잡은 거예요. 저도 손을 놓으려고 했어요. 제발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다음번엔 절대 실수하지 않을게요!”흉터남은 매정하게 그녀를 퍽 차버렸다.홍혜주는 신음 소리를 두어 번 내더니 입안에 퍼지는 짙은 피비린내에 역겨움이 올라오면서 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살아남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그래도 일을 완전히 망친 건 아니잖아요. 목표는 그 남자 아니었어요? 총을 맞았으니 살아남기는 힘들 거예요. 그러니 저한테도 공이 있는 거죠.”그 말을 들은 흉터남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홍혜주의 턱을 꽉 잡으며 싸늘하게 말했다.“너희들 목숨은 어차피 내 것이었어. 내가 너희들을 키워주지 않았더라면 너희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홍혜주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힘이 빠진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저도 알고 있어요. 제 양부시잖아요.”그들은 전부 흉터남이 키웠다.하지만 흉터남에게 경외와 두려움만 느낄 뿐 가족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흉터남에게 그들은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이 점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은 흉터남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그럼에도 그들에겐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두 손에 피를 묻힌 그 순간부터 그들의 삶은 하수구에 박혀 사는 쥐보다 못했고 어두운 구석에 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그들도 따스한 햇빛 아래서 당당하게 살고 싶었지만, 기회
흉터남은 인명진의 두 눈을 빤히 보았다. 화가 어느 정도 사그라든 그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그건 네 하기에 달렸지.”그러자 홍혜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인명진은 아무것도 몰라요. 이번 계획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요. 그러니 인명진만은 한 번만 봐주세요.”흉터남은 인명진의 손을 보면서 잡으려고 했지만, 인명진은 손을 뒤로 치우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녁에 한잔하시죠.”분노가 싹 가신 흉터남은 웃으며 답했다.“그래, 기다리고 있으마.”말을 마친 뒤 그는 홍혜주를 놓아주었고 부하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홍혜주는 바닥을 기었다. 아무리 몸에 상처가 많다고 해도 통증을 참으며 기어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미쳤어? 저 인간 쓰레기가 변태인 거 몰라? 방금 네가 한 말은 죽음을 자초하는 말이었다고!”이곳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인명진은 홍혜주를 보았다. 잊지 않고 멸균 물티슈를 꺼내 흉터남이 만졌던 손을 벅벅 닦았다.그의 눈빛엔 경멸의 감정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흉터남을 증오하고 있었지만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급할 건 없어.”인명진이 담담하게 말했다.“방금 네가 그랬잖아. 한잔하자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네가 그 남자 손아귀에서 상처 하나 없이 멀끔히 나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인명진은 다시 홍혜주에게 시선을 돌리며 되물었다.“넌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들어?”홍혜주는 고개를 휙 돌렸다. 눈빛엔 고집이 가득했다.“난 괜찮아. 네가 걱정할 것 없어. 어쨌든 너보단 백 배 더 나으니까!”그들은 어둠 속에서 자랐기에 어둠 속에서 죽게 될 운명이었다.그렇다고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되었고 쉽게 자존심을 내려놔서도 안 되었다.인명진의 눈빛은 아주 평온했다. 모든 것에 질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저 습관적으로 염주를 손에서 굴릴 뿐이다.“이런 생활도 곧 끝나게 될 거야.”홍혜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의 입가엔 음험한 미소가 걸려 있었기에 더욱 수상했다.“뭘 하려고?”인명진은 자신이 자주 쓰던 메스를 꺼
인명진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슬픔을 느껴냈다.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녀도 덩달아 슬펐다.전에 그에게 했던 심한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 상처를 남겼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순간 느꼈다. 인명진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을 말이다.어쩌면 그에게 그녀가 모르는 고충이 있을 수도 있다.그녀는 묻고 싶었다. 그녀와 그가 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는지.횡단보도를 건너려 할 때야 그를 볼 수 있었다.빨간 불이었던지라 초록 불이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두 사람 사이로 차가 지나가고, 그녀는 인명진만 빤히 보았다. 어디 가지 않고 그녀가 갈 때까지 그곳에 있기를 바라면서.초록 불이 켜지자 온지유는 얼른 다가갔다.그러나 건너편으로 왔을 때 인명진은 사라지고 없었다. 길가엔 금방 딴 것 같은 딸기 바구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온지유는 멍하니 그 바구니를 보았다.허리를 굽혀 딸기 바구니를 들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인명진 씨!”그녀는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어디 있는 거예요! 할 말이 있다고요! 왜 갑자기 저를 피하는 건데요!”그녀는 곧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앞에서 사라졌다.심지어 그녀에게 딸기 한 바구니를 남긴 채 말이다.대체 무슨 의미일까?주위를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꼭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온지유!”디저트를 사고 온 백지희는 온지유가 없자 또 납치된 줄 알고 얼른 찾으러 나왔다. 그런데 온지유는 길 건너편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온지유,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 테니까!”온지유는 딸기 바구니가 꽤나 무겁게 느껴졌다.꼭 그녀를 향한 인명진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그녀에게 나쁜 마음을 품지 않았지만,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아주 복잡해 보였다.어쩌면 두 사람은 예전에 사이가 좋았을 수도 있다.온지유는 다소 허탈했다. 마치 뭔가를 잊은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고 기운이 나지 않았
노승아는 이미 유리를 통해 여이현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에는 여이현이 곧 죽을 것 같았고 눈앞에 있는 남자의 팔을 꽉 잡았다.“어떻게 된 거예요? 많이 다친 거예요? 왜 이렇게 다친 건데요, 대체 언제 일어날 수 있다는 건데요!”“그건 아직 모릅니다.”제복을 남자가 말했다.“하지만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안 됩니다. 여이현 대장님께서 깨어나시는 걸 보고 싶으면 저기 가만히 앉아 기다려주시면 되겠습니다.”노승아는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눈가가 빨개졌다.“멀쩡하던 사람이 왜, 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건데요!”노승아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설마 죽게 되는 건 아니겠죠?”그녀는 조금 무서웠다.백지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노승아 씨, 뭘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어요. 여이현이 그쪽 남편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여이현이 다쳤다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설마 납치를 사주한 사람이 그쪽인 거예요?”그녀는 노승아를 의심했다.이곳에서 노승아를 발견한 순간부터 의심하고 있었다.여이현이 총에 맞은 뒤 병실에 누워있기까지 고작 몇 시간이 걸렸다.그동안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그런데 노승아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일까?납치범과 공범이라는 것 외엔 알 리가 없지 않은가.이 생각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라웠다. 납치범과 노승아가 어떻게 아는 사이란 말인가.온지유는 평온한 얼굴로 다가갔다.노승아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온지유를 보자마자 바로 모든 책임을 온지유에게 돌렸다.“다 그쪽 때문이죠? 이현 오빠가 그쪽을 구하려다가 다친 게 아니냐고요! 그쪽은 주변 사람마저 불행하게 만들어요. 남에게 피해만 준다고요. 지금도 그쪽은 이현 오빠에게 피해만 줄 뿐이에요!”노승아의 질책에도 온지유는 담담하게 따져 물었다.“이현 씨가 다쳤다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요?”노승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색한 모습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내가 어떻게 몰라요? 이현 오빠 찾으러 갔는데 없다고 하잖아요. 배 비서한테 물어보니
노승아를 보는 온지유의 눈빛은 아주 싸늘했다. 꼭 전쟁을 선포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그녀에게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게다가 노승아는 처음 보는 그녀의 눈빛이었다.온지유의 눈빛만으로도 노승아는 극심한 압박감을 느꼈다.온지유는 더는 노승아의 체면을 살려주고 싶지 않았다.“노승아 씨, 이현 씨 상태도 보고 여기서 난동도 피웠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내 남편이 언제 깨어나든 전부 노승아 씨와 상관없는 일이니까요!”노승아는 바로 거부했다.“온지유 씨, 그쪽이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어차피 버려진 주제에!”“난 이현 씨 아내예요. 이현 씨는 자신의 목숨도 신경 쓰지 않고 날 구하기 위해 뛰어든 거니까 그쪽보다 내가 더 자격이 있지 않겠어요?!”온지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이 여자를 쫓아내세요!”“너...”노승아는 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온지유의 말을 더 따랐다. 그들도 여이현이 온지유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온지유가 여이현의 법적 아내였다.“노승아 씨, 이만 가주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강제로 노승아 씨를 쫓아낼 겁니다.”노승아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몇 명의 덩치 큰 남자들을 보았다. 저마다 제복을 입고 있었고 몸에 근육도 많아 그녀가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이내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딱 기다려!”노승아는 결국 스스로 병실 앞을 떠나버렸다.“지유, 방금은 정말로 멋있어. 노승아 표정 봤어? 아주 새파랗게 질려버렸더라.”백지희는 너무도 기뻤다. 노승아가 파랗게 질린 채 도망가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예전의 노승아는 여진숙을 믿고 계속 억울한 척 연기했었다.그랬기에 그녀도 어찌할 수가 없었지만 온지유는 이번에 굳게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이건 시작일 뿐이야.”온지유는 떠나가는 노승아의 뒷모습을 보았다.“난 이번 납치 사건에 노승아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아. 여길
시간이 지나도 온지유가 나오지 않자 정미리가 서재로 들어갔다.“지유야, 뭐 하는 거니?”정미리는 문턱에 서서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는 온지유를 보며 물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엄마, 아빠가 신문지를 수집하시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도 없는 거예요?”온경준은 신문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처음 신문을 산 뒤로 지금까지 계속 신문을 사서 정해진 상자에 넣어두었다.이미 시간별로 정리도 되었을 거고 그녀의 눈에도 보여야 했지만 찾지 못했다.그녀의 말에 정미리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웃으며 다가갔다.“어떤 신문? 내가 같이 찾아줄게.”온지유는 그제야 말해주었다.“그냥 중학교 때 신문을 찾고 있었어요. 분명 있을 것 같은데...”그녀의 말에 정미리는 더욱 긴장해졌다.“중학교 때 언제? 중학교는 3년 다녔잖아. 구체적으로 몇 학년 때 신문을 찾는 거야?”“중학교 때 제가 납치당하지 않았어요?”온지유는 태연하게 말했다.“그런 일은 큰 사건이니 분명 신문에 실렸겠죠?”정미리의 안색이 변했다.“그건 왜 찾는데?”온지유는 이내 멈칫하며 고개를 들어 정미리를 보았다.“그냥 요즘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래서 그때의 신문을 찾아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는 거예요.”정미리는 바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찾지 마. 그런 아픈 기억을 떠올려서 뭐 하려고. 괜히 기분만 우울해지지 않겠니? 그리고 네 아빠는 매번 신문을 사 오지 않는단다. 그래서 전부 있는 건 아니야. 네가 찾지 못했다는 건, 그럼 없다는 소리야.”온지유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정말로 없는 거예요?”정미리가 답했다.“없어. 너야말로 나한테 말해 봐. 대체 뭐가 떠올라서 이러는 건데?”온지유는 서재를 전부 뒤져보았지만, 그때 그 시절의 신문지를 찾아내지 못했다.그렇다는 건 정말로 없다는 소리였다.그녀도 더는 힘을 낭비할 필요 없었다.“별건 아녜요. 그냥 악몽을 꿨을 뿐이에요.”온지유가 말했다
말을 마친 정미리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온지유는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부모님이 건강히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그녀를 이렇듯 사랑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서재를 한바탕 뒤져보고 있었던 온지유 덕에 쉬고 있던 온경준도 눈을 뜨게 되었다.이내 두 사람을 위해 과일을 내왔다.부모들은 아이가 행여나 굶고 다닐까 봐 걱정했고 항상 맛있는 것을 내와 아이에게 먹였다.“아빠,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온지유가 말했다.“괜찮다. 우리 딸이 왔다는데 시간이 문제니?”온경준은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온지유를 보다가 이내 백지희에게 시선을 돌렸다.“지희도 오랜만이구나.”백지희가 대답했다.“그동안 일이 바빠서 들르지 못했어요. 그래도 지유랑은 계속 연락하고 지냈어요. 아저씨, 급하게 온 터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네요, 죄송해요.”“아니다. 괜찮다. 선물 같은 거 사 올 것 없단다.”온경준이 말했다.“너랑 지유는 절친한 친구가 아니더냐. 이미 내 딸이나 다름없으니 올 때마다 선물을 챙겨올 필요 없단다.”말을 마친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네 엄마한테 가봐야겠구나.”온경준도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여전히 티브이 소리가 들렸다. 백지희는 사과를 입안에 넣었다.“아까는 뭘 그렇게 찾고 있었던 거야? 한참 지나도 안 나오던데.”“신문지를 찾고 있었어.”그녀의 말에 백지희도 멈칫했다.“신문? 어떤 신문?”온지유가 말했다.“중학교 때 죽을 뻔했던 일이 있었거든. 큰 사건이라 신문에 실린 기사가 없나 찾아보고 있었어.”백지희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그건 왜 찾아보려고 하는 거야? 안 좋은 일이었잖아. 굳이 떠올려서 뭐 하려고.”온지유도 그렇게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반드시 떠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중요한 것을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최근 일어난 일을 떠올려보면 이상하게도 나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래.”온지유가 말했다.“만약 그 사람들이 나에게 앙심을 품
“그래.”온지유는 흔쾌히 답했다.“다시 자자.”백지희는 졸렸기에 눕자마자 다시 잠들었다.그러나 생각이 많았던 온지유는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부처님께 절이라도 하자는 백지희의 말에 인명진이 손에서 굴리던 염주가 떠올랐다.너무도 익숙했다.아침, 백지희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온지유는 눈을 떴다.눈을 뜨자마자 다급한 백지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지유야, 눈 좀 떠봐. 큰일 났어. 여이현이 위독해졌대!”온지유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뭐라고?”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언제부터?”“방금, 방금 전화 왔었어!”백지희가 말했다.온지유는 통화 기록을 보았다. 병원에서 전화가 온 기록이 있었다.설마 여이현은 정말로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온지유의 눈시울이 바로 붉어졌다. 여이현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제발 그가 눈을 뜨길 바랐다.만약 그가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가슴이 너무도 아팠다.온지유는 너무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으로 얼른 달려가 봐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을 삼키고 힘든 몸을 이끌며 옷을 갈아입은 뒤 집을 나섰다.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백지희는 부단히 그녀를 괜찮다며 달랬다.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는가?만약 여이현이 죽으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어떻게 하라고?”온지유는 여이현이 없는 나날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설령 이혼했다고 해도, 여이현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죽는 것보다 나았다.온지유는 최대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슬픈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백지희가 건네는 위로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여이현이 위독하다는 소식뿐이었다.병원에 도착한 뒤 온지유는 빠르게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여이현의 부하였던 사람들이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아주 심각했다.여이현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온지유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몸이 덜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냥 적응이 안 된 것뿐이에요.”여희영은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다. 광고부 직원인 그녀는 이태훈과 나눌 만한 얘기가 없었고 여이현이 왜 자신한테 이 일을 시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후 그룹과 어떤 광고 협력이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불안한 마음으로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여이현이 회사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희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여희영 씨, 아니... 여 본부장님, 차 한잔하실래요?”이태훈은 여희영이 여이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이태훈이 무엇을 원하는지 여이현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도 자신의 의도를 숨길 필요 없었다.차 한 잔 마시자 이태훈은 술을 마신 듯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는 여이현이 이런 방법을 쓸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이태훈 씨, 무슨 프로젝트를 논의하시려고 오신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여희영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만약 자신이 맡은 업무가 아니면 핑계를 대고 거절할 생각이었다.이태훈은 일어나서 물 한 잔을 마셨지만 어지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서 실눈을 뜬 채로 몇 걸음 걸어가 여희영 앞에 섰다.“여희영 씨, 지금 뭐 하려는 겁니까? 제가 여진 그룹을 너무 높게 평가한 건가요?”“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여희영은 이태훈의 경멸스러운 말투를 듣고 그를 밀쳐내며 한쪽으로 물러섰다.“이태훈 씨, 계속 사적인 얘기를 하실 거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는 시간이 많지 않거든요.”“차에 약을 탄다는 건 저한테 뭐라도 해보겠다는 거 아닌가요?”이태훈은 비웃으며 두 걸음 다가가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그런데 만약 저랑 희영 씨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면 저야 너무 좋죠. 하지만 그 대신 앞으로 희영 씨와 여진 그룹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 같네요.”그 말을 들은 여희영은
집에 돌아온 뒤, 온지유는 여이현과 간단히 통화하고 변호사를 시켜 박민정에게 연락을 보냈다.이 일은 이렇게 그녀의 손에서 완벽하게 끝을 맺었다.일을 끝낸 뒤에 온지유는 아이 방을 찾아가 애가 한창 꿈나라 여행 중인 걸 확인한 뒤 내려와서 저녁준비를 했다.방문이 닫히자마자 자고있던 별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속삭였다.“외할아버지, 아까 말한 거 할아버지는 다 들으셨어요?”“그럼, 다 들었지. 누가 너희를 괴롭힌다며?”“그래요,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꼭 우리를 도와주셔야 해요. 누구도 우리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요, 우리 엄마가 괴롭힘당하면 외할아버지가 괴롭힘 당하는 거랑 같아요.”법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별이가 말을 이었다.“외할아버지 돈 많아요? 엄청 엄청 아주 많이 있어요? 저 먼저 빌려줄 수 없어요?”“이 할아버지는 돈 좀 있으니 별이는 걱정하지 마. 돈 문제든 아니든 이 할아버지가 꼭 너를 도와주마. 넌 기다리고 있거라, 다 이 할아버지가 알아서 할 터이니”법로는 즉시 사람을 경성으로 보냈다.별이의 말이 맞았다. 온지유를 건드리는 건 그를 건드리는 거와 다름없었다.전화를 끊고 법로는 온지유에게 전화하려 했으나 별이의 당부가 생각나 결국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그는 홀연 일어나 결국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경성으로 가는 사람에게 시켜 어둠 속에서 일을 해결하기로 결저했다.한편 여진그룹 쪽, 여이현은 금방 장 사장을 접대해 보낸 뒤 건물 최고층에서 그가 떠나는걸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이태훈에게 연락해. 장 사장이 우리를 찾아 협조하겠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줘.”네 하고 나간 비서가 몇 분 후 돌아와 보고했다.“대표님, 이태훈 씨 지금 오고 있답니다. 그리고 여희영 씨께서 회사에 계시는지 궁금해하십니다.”“알려줘, 고모님께서 지금 회사에 있다고. 그리고 고모님께 연락 넣어서 지금 당장 회사로 오라고 해. 내가 급한 일로 부른다고 하면 될 거야.”일을 간단히 처리한 후, 여이현
장 사장은 온지유의 눈길에 잔뜩 겁을 먹었다. 오랫동안의 판매 경험 덕분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겁을 먹고 줄행랑을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한참 넋 놓고 있던 장 사장은 웃는 얼굴로 여이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정말 부탁합니다. 저도 방법이 없어서 그래요.”“예전에 이씨 그룹과 일을 함께하지 않으셨나요? 왜 지금은 하지 않으시죠?”여이현은 돌려 물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대답을 기다렸다.장 사장은 안색이 많이 굳어지더니 오랜 고민 끝에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정상적인 관계라면 이리도 입을 열기 힘들 리가 없었기에 여이현은 무언가 눈치를 채고 눈빛으로 온지유에게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이때 온지유의 핸드폰이 울렸다. 별이 선생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실례합니다. 밖에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온지유는 회의실을 떠나서 전화를 받고 물었다.“선생님, 저는 별이 엄만데요. 무슨 일이죠?”“별이 어머니, 학교에 한 번 와보셔야 될 거 같아요. 별이가 같은 반 친구와 싸워서 애가 다쳤어요. 지금 애 부모님께서 꼭 별이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하세요.”‘별이가 어떻게 애들이랑 싸울 수 있을까? 개학한 지 얼마 안 되는데. 아직 서먹서먹할 텐데 무슨 일로 싸웠지? ”온지유가 급히 학교에 도착하자 사무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과 필요 없어요! 배상해요. 배상!”들어 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라 누군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온지유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만약 저희 별이 잘못이라면 얼마든지 배상해드릴게요. 하지만 별이 잘못이 없다면 저희는 배상할 생각 없어요.” “그쪽이 누군데요?”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기세등등하여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있었다.이 틈을 타 온지유는 그 여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붉은색 원피스에 흰 진주 목걸이, 펜던트 귀걸이 그리고 다이아몬드반지 부잣집 집안임이 분명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온지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여희영은 원망의 눈길로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온지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희영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줬다.“죄송해요. 이현 씨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어젯밤에 잘 못 잤죠? 돌아가서 푹 휴식하세요. 제가 점심을 맛있게 차려드릴게요.”“그래도 네가 젤 좋아.”여희영은 온지유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올라갔다.온지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는 여이현이 꼭 무슨 꿍꿍이가 있는 상인 같아 보였다.그녀는 여이현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껴안고 온몸을 기댔다.“대표님,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사랑하는 이가 품속에 있는데 남자로서 참을 수 없었던 여이현은 그녀를 꼭 껴안고 진한 키스를 했다.“말해, 도대체 무슨 일인데?” 키스할 때마다 산소 부족이 오는 온지유는 성난 말투로 물었다.여이현이 그녀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어제 고모를 구해준 사람은 이태훈이야.”이태훈? 온지유는 한참을 생각해서야 이태훈이 이씨 가문 도련님이라는 것이 생각났다.‘갠 좀 곤란한 성격인데. 이게 좋은 일이랑 뭔 상관이지?’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고모님 젊은이들에게 인기 많네요? 근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죠?”최승현 하나로도 벅찬데 이씨가문까지 더해진다면 여이현과 온지유가 나선다고 해도 방법이 없다. 이씨 가문 지금의 지위로 그런 더러운 수단을 써서 돈을 끌어모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여이현은 이태훈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가령 진짜 음모가 있다면 여진그룹을 해치워버리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아닐 거야. 그냥 우연이야. 두 사람의 인연이라고 해야 적합하나?”“인연인지 아닌지 좀 있다가 알게 될 거잖아. 얼른 옷이나 바꿔. 오늘 만날분은 예전에 이씨 가문과 일을 같이 해봤던 분이야. 그분에게서 정보를 깨여낼 수도 있겠다.”여이현은 그 말을 듣고서야 이번 미팅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이며 온지유에게 칭찬의 키스를 했다
이태훈은 집사로부터 아침밥을 받아쥐더니 하나하나 밥상 위에 올려놓았다. 집사는 이태훈의 이런 세심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도련님, 제가 할게요.”집사는 여희영이 진짜 이태훈의 여자친군지 아니면 그냥 소개팅을 피하려고 찾아온 가짜인지 떠보기 시작했다.이태훈은 그런 집사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한껏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왜요? 제가 제 여자친구를 돌봐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에요? 제가 몇 년 동안 집을 떠나있으니 규칙을 다 잊으셨나 보네요.”“아닙니다. 전 다만 도련님을 위해서 일을 해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도련님이 혼자 하실 수 있다니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이태훈은 집사를 향해 손짓하고 침대 옆에 앉아 여희영에게 죽을 먹여줬다.“조심해요. 죽이 뜨거워요. 이 죽은 몸이 좋은 죽이에요. 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제가 다 가져다드릴게요.”“알겠어요. 그럼 약속한 거예요. 두말하기 없기인 거 아시죠?”‘어차피 연기하는데 더 실감이 나게 하면 좋지.’여희영은 애교 넘치는 눈빛으로 이태훈을 바라보았다. 이 장면을 목격한 집사는 이씨 가문 전체에 이 사실을 알렸다.집사가 떠난 한참 뒤에도 이태훈은 여전히 여희영에게 아침을 먹여주고 있었다. 여희영은 그의 손길을 뒤로 피했다.그녀의 거부에 이태훈은 동작을 멈추고 웃음기 찬 얼굴로 아침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그럼 혼자 드세요. 아 맞다. 제 이름은 이태훈이고 경성 이씨 가문 넷째예요.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신분은 어르신들이 주신 거니 자랑할 바는 아니죠.”“그러면 뭐가 자랑거리라고 생각해요?”여희영은 당연히 이씨 가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씨 가문은 후배들에게 아주 엄격하다고 많이 들어봤지만 직접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이태훈이 처음 만나는 이씨 가문 사람이라 그녀는 호기심이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해낸 사업이야말로 진정한 자랑거리죠. 진정한 사나이가 되려면 가문의 힘을 빌면 안 되죠.”말을 하던 이태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근데 이씨 가문 도련님이 경성으로 돌아왔을 줄이야.”남자가 돌아설 때 여이현은 그가 이씨 가문 도련님 이태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태훈은 자유롭기를 좋아하고 규정에 구속되지 않으며 어렸을 때부터 세계 일주를 다닌 유명한 사람이었다.벌써 이렇게 컸을 줄이야.이씨 가문은 후배들의 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이라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품은 꼭 합격 되어야 했다.여이현은 그런 이태훈이 여희영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고 설마 진짜 일이 벌어졌다면 이씨 가문 이태훈과 여희영이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일 것이다. 그는 여씨 가문과 연을 이을 생각을 하며 가볍게 웃었다.“하지만 대표님, 저놈들이 술잔에 탄 약이 효과가 강하다고 소문난 약이에요. 정말 괜찮을까요?”부하의 말에 여이현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정말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될 게 아닌가 생각했다.병원 안, 이태훈이 응급실 문어구에서 기다리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전화 너머에서 무슨 얘길 했는지 이태훈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그 말인즉 할머니께서 꼭 저에게 소개팅을 시켜주시겠다 하셨다고요? 하지만 전 다른 사람에게 정해지는 운명이 싫어요. 좀 도와주세요. 이번 일만 해결해 준다면 제가 호텔 본부장 자리를 내줄게요. 금방 개업한 그 호텔 있잖아요. 매출이 아주 좋대요.”상대방이 뭐라 했는지 이태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저에게 방법이 있었으면 지금 이러고 있겠어요?”이때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 선생님들이 밖으로 나왔다. 이태훈은 전화를 끊고 급히 다가가서 물었다.“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약 때문인 거 같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악효과가 좀 강해서 이미 주사를 놓았으니 좀 기다려 보시면 될 거에요. 내일 아침까지 이상이 없으시다면 퇴원해도 좋습니다. 여전히 불편하시다면 약을 더 주사해야 합니다.”이태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 선생님이 떠난 뒤 병실로 들어갔다.
술을 마신 여희영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주량으로 이 정도 술을 마시고 취할 리가 없을 텐데 술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 눈앞이 희미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최승현이 술잔에 약을 탓 것이 틀림없다.여희영은 아무 생각 없이 이현에게 물었다.“이현 씨, 오늘 차 갖고 오셨나요? 제가 갑자기 몸이 좀 불편해서 절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이현은 최승현과 아이컨택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었다.“당연하죠. 전 술을 마시지 않았잖아요.”그리고 여희영을 부축하여 연회장을 떠났다. 그는 여희영이 경계심을 늦춘 틈을 타서 최승현에게 은밀히 눈치를 줬다. 눈치를 받은 최승현은 다른 출구로 떠나 미리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여희영은 이현 자동차 조수석이 앉아있는 최승현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최승현 씨가 왜 이곳에 있죠?”“아, 최승현 씨는 제 친구예요. 저와 함께 왔으니 같이 떠나는 거예요. 여희영 씨 걱정하지 마세요. 먼저 여희영 씨를 데려다주고 최승현 씨를 데려다줄 거에요.”남자의 말에 여희영은 무언가 깨달은 듯 남자가 부축하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두 사람은 공범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같은 차를 타고 가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여희영은 신속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최승현이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낮은 목소리로 이현에게 말했다.“얼른 안으로 끌어오지 않고 뭐해?”그 말을 들은 이현이 여희영을 잡으러 다가오자 여희영은 큰소리로 외치며 도움을 청했다.“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때 호텔 안으로부터 구석에 남아있던 남자가 뛰쳐나왔는데 누군가 그보다 더 빨랐다.그 남자는 호텔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나와 이현을 제압하고 여희영을 등 뒤에 감춰 보호했다.최승현은 차에서 내려 차가운 눈길로 갑자기 뛰쳐나온 남자를 보며 말했다.“사람을 도와주기 전에 그쪽이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해요.”말을 마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