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진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슬픔을 느껴냈다.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녀도 덩달아 슬펐다.전에 그에게 했던 심한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 상처를 남겼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순간 느꼈다. 인명진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을 말이다.어쩌면 그에게 그녀가 모르는 고충이 있을 수도 있다.그녀는 묻고 싶었다. 그녀와 그가 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는지.횡단보도를 건너려 할 때야 그를 볼 수 있었다.빨간 불이었던지라 초록 불이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두 사람 사이로 차가 지나가고, 그녀는 인명진만 빤히 보았다. 어디 가지 않고 그녀가 갈 때까지 그곳에 있기를 바라면서.초록 불이 켜지자 온지유는 얼른 다가갔다.그러나 건너편으로 왔을 때 인명진은 사라지고 없었다. 길가엔 금방 딴 것 같은 딸기 바구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온지유는 멍하니 그 바구니를 보았다.허리를 굽혀 딸기 바구니를 들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인명진 씨!”그녀는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어디 있는 거예요! 할 말이 있다고요! 왜 갑자기 저를 피하는 건데요!”그녀는 곧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앞에서 사라졌다.심지어 그녀에게 딸기 한 바구니를 남긴 채 말이다.대체 무슨 의미일까?주위를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꼭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온지유!”디저트를 사고 온 백지희는 온지유가 없자 또 납치된 줄 알고 얼른 찾으러 나왔다. 그런데 온지유는 길 건너편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온지유,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 테니까!”온지유는 딸기 바구니가 꽤나 무겁게 느껴졌다.꼭 그녀를 향한 인명진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그녀에게 나쁜 마음을 품지 않았지만,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아주 복잡해 보였다.어쩌면 두 사람은 예전에 사이가 좋았을 수도 있다.온지유는 다소 허탈했다. 마치 뭔가를 잊은 것처럼 허전하기도 했고 기운이 나지 않았
노승아는 이미 유리를 통해 여이현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에는 여이현이 곧 죽을 것 같았고 눈앞에 있는 남자의 팔을 꽉 잡았다.“어떻게 된 거예요? 많이 다친 거예요? 왜 이렇게 다친 건데요, 대체 언제 일어날 수 있다는 건데요!”“그건 아직 모릅니다.”제복을 남자가 말했다.“하지만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안 됩니다. 여이현 대장님께서 깨어나시는 걸 보고 싶으면 저기 가만히 앉아 기다려주시면 되겠습니다.”노승아는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눈가가 빨개졌다.“멀쩡하던 사람이 왜, 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건데요!”노승아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설마 죽게 되는 건 아니겠죠?”그녀는 조금 무서웠다.백지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노승아 씨, 뭘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어요. 여이현이 그쪽 남편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여이현이 다쳤다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설마 납치를 사주한 사람이 그쪽인 거예요?”그녀는 노승아를 의심했다.이곳에서 노승아를 발견한 순간부터 의심하고 있었다.여이현이 총에 맞은 뒤 병실에 누워있기까지 고작 몇 시간이 걸렸다.그동안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그런데 노승아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일까?납치범과 공범이라는 것 외엔 알 리가 없지 않은가.이 생각만 해도 이미 충분히 놀라웠다. 납치범과 노승아가 어떻게 아는 사이란 말인가.온지유는 평온한 얼굴로 다가갔다.노승아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온지유를 보자마자 바로 모든 책임을 온지유에게 돌렸다.“다 그쪽 때문이죠? 이현 오빠가 그쪽을 구하려다가 다친 게 아니냐고요! 그쪽은 주변 사람마저 불행하게 만들어요. 남에게 피해만 준다고요. 지금도 그쪽은 이현 오빠에게 피해만 줄 뿐이에요!”노승아의 질책에도 온지유는 담담하게 따져 물었다.“이현 씨가 다쳤다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요?”노승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색한 모습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내가 어떻게 몰라요? 이현 오빠 찾으러 갔는데 없다고 하잖아요. 배 비서한테 물어보니
노승아를 보는 온지유의 눈빛은 아주 싸늘했다. 꼭 전쟁을 선포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그녀에게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게다가 노승아는 처음 보는 그녀의 눈빛이었다.온지유의 눈빛만으로도 노승아는 극심한 압박감을 느꼈다.온지유는 더는 노승아의 체면을 살려주고 싶지 않았다.“노승아 씨, 이현 씨 상태도 보고 여기서 난동도 피웠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내 남편이 언제 깨어나든 전부 노승아 씨와 상관없는 일이니까요!”노승아는 바로 거부했다.“온지유 씨, 그쪽이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어차피 버려진 주제에!”“난 이현 씨 아내예요. 이현 씨는 자신의 목숨도 신경 쓰지 않고 날 구하기 위해 뛰어든 거니까 그쪽보다 내가 더 자격이 있지 않겠어요?!”온지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이 여자를 쫓아내세요!”“너...”노승아는 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온지유의 말을 더 따랐다. 그들도 여이현이 온지유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온지유가 여이현의 법적 아내였다.“노승아 씨, 이만 가주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강제로 노승아 씨를 쫓아낼 겁니다.”노승아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몇 명의 덩치 큰 남자들을 보았다. 저마다 제복을 입고 있었고 몸에 근육도 많아 그녀가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이내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딱 기다려!”노승아는 결국 스스로 병실 앞을 떠나버렸다.“지유, 방금은 정말로 멋있어. 노승아 표정 봤어? 아주 새파랗게 질려버렸더라.”백지희는 너무도 기뻤다. 노승아가 파랗게 질린 채 도망가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예전의 노승아는 여진숙을 믿고 계속 억울한 척 연기했었다.그랬기에 그녀도 어찌할 수가 없었지만 온지유는 이번에 굳게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이건 시작일 뿐이야.”온지유는 떠나가는 노승아의 뒷모습을 보았다.“난 이번 납치 사건에 노승아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아. 여길
시간이 지나도 온지유가 나오지 않자 정미리가 서재로 들어갔다.“지유야, 뭐 하는 거니?”정미리는 문턱에 서서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는 온지유를 보며 물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엄마, 아빠가 신문지를 수집하시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도 없는 거예요?”온경준은 신문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처음 신문을 산 뒤로 지금까지 계속 신문을 사서 정해진 상자에 넣어두었다.이미 시간별로 정리도 되었을 거고 그녀의 눈에도 보여야 했지만 찾지 못했다.그녀의 말에 정미리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웃으며 다가갔다.“어떤 신문? 내가 같이 찾아줄게.”온지유는 그제야 말해주었다.“그냥 중학교 때 신문을 찾고 있었어요. 분명 있을 것 같은데...”그녀의 말에 정미리는 더욱 긴장해졌다.“중학교 때 언제? 중학교는 3년 다녔잖아. 구체적으로 몇 학년 때 신문을 찾는 거야?”“중학교 때 제가 납치당하지 않았어요?”온지유는 태연하게 말했다.“그런 일은 큰 사건이니 분명 신문에 실렸겠죠?”정미리의 안색이 변했다.“그건 왜 찾는데?”온지유는 이내 멈칫하며 고개를 들어 정미리를 보았다.“그냥 요즘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래서 그때의 신문을 찾아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는 거예요.”정미리는 바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찾지 마. 그런 아픈 기억을 떠올려서 뭐 하려고. 괜히 기분만 우울해지지 않겠니? 그리고 네 아빠는 매번 신문을 사 오지 않는단다. 그래서 전부 있는 건 아니야. 네가 찾지 못했다는 건, 그럼 없다는 소리야.”온지유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정말로 없는 거예요?”정미리가 답했다.“없어. 너야말로 나한테 말해 봐. 대체 뭐가 떠올라서 이러는 건데?”온지유는 서재를 전부 뒤져보았지만, 그때 그 시절의 신문지를 찾아내지 못했다.그렇다는 건 정말로 없다는 소리였다.그녀도 더는 힘을 낭비할 필요 없었다.“별건 아녜요. 그냥 악몽을 꿨을 뿐이에요.”온지유가 말했다
말을 마친 정미리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온지유는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부모님이 건강히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그녀를 이렇듯 사랑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서재를 한바탕 뒤져보고 있었던 온지유 덕에 쉬고 있던 온경준도 눈을 뜨게 되었다.이내 두 사람을 위해 과일을 내왔다.부모들은 아이가 행여나 굶고 다닐까 봐 걱정했고 항상 맛있는 것을 내와 아이에게 먹였다.“아빠,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온지유가 말했다.“괜찮다. 우리 딸이 왔다는데 시간이 문제니?”온경준은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온지유를 보다가 이내 백지희에게 시선을 돌렸다.“지희도 오랜만이구나.”백지희가 대답했다.“그동안 일이 바빠서 들르지 못했어요. 그래도 지유랑은 계속 연락하고 지냈어요. 아저씨, 급하게 온 터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네요, 죄송해요.”“아니다. 괜찮다. 선물 같은 거 사 올 것 없단다.”온경준이 말했다.“너랑 지유는 절친한 친구가 아니더냐. 이미 내 딸이나 다름없으니 올 때마다 선물을 챙겨올 필요 없단다.”말을 마친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네 엄마한테 가봐야겠구나.”온경준도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여전히 티브이 소리가 들렸다. 백지희는 사과를 입안에 넣었다.“아까는 뭘 그렇게 찾고 있었던 거야? 한참 지나도 안 나오던데.”“신문지를 찾고 있었어.”그녀의 말에 백지희도 멈칫했다.“신문? 어떤 신문?”온지유가 말했다.“중학교 때 죽을 뻔했던 일이 있었거든. 큰 사건이라 신문에 실린 기사가 없나 찾아보고 있었어.”백지희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그건 왜 찾아보려고 하는 거야? 안 좋은 일이었잖아. 굳이 떠올려서 뭐 하려고.”온지유도 그렇게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반드시 떠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중요한 것을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최근 일어난 일을 떠올려보면 이상하게도 나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래.”온지유가 말했다.“만약 그 사람들이 나에게 앙심을 품
“그래.”온지유는 흔쾌히 답했다.“다시 자자.”백지희는 졸렸기에 눕자마자 다시 잠들었다.그러나 생각이 많았던 온지유는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부처님께 절이라도 하자는 백지희의 말에 인명진이 손에서 굴리던 염주가 떠올랐다.너무도 익숙했다.아침, 백지희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온지유는 눈을 떴다.눈을 뜨자마자 다급한 백지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지유야, 눈 좀 떠봐. 큰일 났어. 여이현이 위독해졌대!”온지유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뭐라고?”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언제부터?”“방금, 방금 전화 왔었어!”백지희가 말했다.온지유는 통화 기록을 보았다. 병원에서 전화가 온 기록이 있었다.설마 여이현은 정말로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온지유의 눈시울이 바로 붉어졌다. 여이현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제발 그가 눈을 뜨길 바랐다.만약 그가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가슴이 너무도 아팠다.온지유는 너무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으로 얼른 달려가 봐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을 삼키고 힘든 몸을 이끌며 옷을 갈아입은 뒤 집을 나섰다.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백지희는 부단히 그녀를 괜찮다며 달랬다.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는가?만약 여이현이 죽으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어떻게 하라고?”온지유는 여이현이 없는 나날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설령 이혼했다고 해도, 여이현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죽는 것보다 나았다.온지유는 최대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슬픈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백지희가 건네는 위로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여이현이 위독하다는 소식뿐이었다.병원에 도착한 뒤 온지유는 빠르게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여이현의 부하였던 사람들이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아주 심각했다.여이현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온지유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몸이 덜
온지유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아니요. 사과 안 받아줄 거예요.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죽어요!”말을 마친 온지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지유야!”여이현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며 쫓아가려고 했지만, 상처를 자극해버려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쿨럭, 쿨럭쿨럭...”그는 끊임없이 기침해댔다.온지유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여이현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결국 그가 걱정된 그녀는 다시 다가갔다.“괜찮아요? 상처 벌어진 거 아니죠? 의사 불러올까요?”여이현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온지유의 손을 잡는 것을 잊지 않았다.“네가 내 곁에 있어만 준다면 다 괜찮을 것 같아.”온지유는 여이현의 창백한 안색을 보았다. 그는 부탁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자신의 곁에 남아달라고 말했다.그녀는 마음이 누그러지고 말았다.“일단 다시 누워요. 의사를 불러 상처를 확인하라고 할 테니까.”여이현은 그녀의 말대로 고분고분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가 이내 물었다.“그럼 안 갈 거지?”온지유가 말했다.“나 때문에 가친 건데 어떻게 가요. 전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녜요. 이 은혜는 반드시 어떻게든 갚을 거예요.”여이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네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거로 난 만족해.”온지유는 그를 보고 있으니 여전히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그가 중환자실에 누워있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그와 이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의 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의사는 여이현의 상태를 확인하곤 푹 쉬면서 치료 잘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의사가 떠난 뒤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배고파.”그 말을 들은 용경호는 바로 대답했다.“제가 사 오겠습니다.”이내 다른 부하들을 데리고 나갔다.병실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여이현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이리와.”온지유는 그에게 다가갔다.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더니 품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였다
그의 말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줄 안 온지유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불편하다고요? 어디가 불편한데요?”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온지유를 보고 있던 여이현의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이내 잠겨버린 목소리로 답했다.“몸이 불편해.”온지유는 얼른 확인했다.뜨거운 그의 체온에 거칠어진 호흡 소리를 들은 그녀는 그제야 눈치챘다.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린 그녀는 얼른 그의 몸에서 손을 떼면서 말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좀 참을 수 없어요?”“본능인데 어떻게 참아.”여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진정해 보려고 시도했다.그러자 온지유가 말했다.“이현 씨는 생각이 많아서 그래요. 매일 이런 것만 머릿속에 생각하잖아요!”여이현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며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 말했다.“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다른 남자였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 오히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게 더 문제 있는 거지!”“...”직설적인 그의 말에 온지유는 말 문이 막혔다.“얼른 자.”여이현은 손을 들어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들끓어 오르는 욕망을 꾹꾹 억누르면서.“괜찮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온지유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녀도 사실 그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나중에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이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여하간에 부부 생활을 오랫동안 했지만, 그가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존중하고 있었기에 그럴 일은 절대 없었다.다만 여이현이 그녀를 꽉 끌어안은 탓에 그녀는 그의 몸에 생긴 변화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그녀는 함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지유는 잠들어 버렸다.임산부였기에 자주 졸음이 쏟아지는 건 정상적인 증상이었다.하지만 요즘 자꾸 악몽을 꾼 탓에 푹 자지 못했다.여이현의 품에서 온지유는 아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