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웃으며 말했다."이게 진짜 서로 사랑하는 커플 사이로 보여?"상대방도 말문이 막혔다.둘 다 성인이니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갈 일도 아닐 테다.그는 여이현이 과도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여이현의 걱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여이현은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온지유는 이성 경험도 별로 없는데, 만약 누가 꿀 발린 몇 마디로 속여서 데려가면 어떡해?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모든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었다.그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전화를 끊고, 여이현은 탈의실로 들어갔다.온지유는 이미 옷을 입고 나와 있었다. 여이현이 마침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드라이기를 들었다."제가 할게요."여이현은 강제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다른 일이 있어. 다음에 다시 와.""알겠어요."온지유는 등을 돌리고 머리를 말렸다. 여이현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온지유는 머리를 다 말리고 여이현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지유 씨!"공아영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사람이 같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두 사람이 입은 옷은 마치 커플룩처럼 보였고 그에 공아영은 순간 얼어버렸다.그리고 그 사람이 여이현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더 크게 놀랐다."이게 어떻게…?"공아영은 입을 가리며 외쳤다."여 대표님?!"공아영은 온지유를 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유 씨, 전에는 그렇게 말했으면서... 오늘 직접 보니, 둘은 정말 부부였군요! 여 대표님이 정말 지유 씨 남편이었어요?!"공아영은 너무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온지유와 사이가 좋았기에 여이현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온지유의 남편이 여이현이라니. 그 뜻은 즉 온지유가 방송국에서 점점 더 잘나갈 게 분명했고, 자신도 그 덕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여이현은 그 호칭을 듣고 기분이 좋았는지 공아영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공아영은 눈앞의 남자가 정말 여이현이 맞다는 사
패션쇼 현장에는 온지유와 공아영 외에도 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주류인 시대인지라 누구나 가장 먼저 뉴스를 올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누가 첫 번째로 보도하느냐, 그리고 누가 가장 정확한 뉴스를 전하느냐에 따라 시청률은 천차만별이었다.패션쇼는 큰 이슈가 될만한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생방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많은 기자들이 이곳의 첫 번째 기사를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미 몇몇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고 있었고, 무대 아래에는 여러 스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온지유는 최고의 촬영 각도를 찾고 있었다."지유 씨."누군가가 온지유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장다희가 뒤에 서 있었다. 온지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다희 님, 이곳엔 어떻게 오셨어요?"장다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온지유는 장다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여기엔 전부 스태프들이라, 혹시 기자들한테 찍히기라도 하면 위험해요!"온지유는 기자들이 먹잇감을 발견하면 얼마나 미친 듯이 사진을 찍는지 알고 있었다.장다희가 이렇게 무작정 나와 있는 것은 그녀의 안전에도 위험할 수 있었다.그러나 장다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기자들과 사진작가들이 다른 연에인들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보세요,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잖아요?"주위를 둘러보니 확실히 기자들과 사진작가들은 스테이지를 촬영하거나, 연예계에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몇몇 여배우들을 촬영하고 있었다.그제야 온지유는 장다희가 예전만큼의 인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온지유는 그녀의 아픔을 건드린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하며 말했다."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우세요. 잠시 후에 몇 장 찍어드릴게요.""고마워요, 지유 씨."장다희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이었다.곁에 있던 장다희의 매니저가 온지유에게 말했다."저희가 노승아의 상대역을 맡고 나서 노승아의 인기가
논란을 일으켜서라도 주목을 얻으려는 노승아와 달리,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으면 받지 않는 결단 있는 장다희를 보며 온지유는 생각에 잠겼다. 연예계는 빠르게 변화하는 곳이다. 신인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기존의 사람들은 쉽게 잊히기 일쑤다. 한 작품으로 단숨에 떠오를 수는 있지만, 후속작이 없다면 제아무리 톱스타라도 금세 그 자리를 잃고 만다.경쟁이 치열한 이곳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건 몹시 어렵다. 온지유는 비록 연예계에 직접 몸담고 있지는 않지만, 이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질이 떨어지는 작품이라도, 그리고 명성이 높지 않더라도, 주목을 받기만 한다면 여전히 '성공적인 상품'이 되는 것이다."다희 씨는 정말 좋은 배우예요. 연기도 훌륭하고, 흐름에 휘말리지 않는 모습도 존경해요. 분명 곧 다시 크게 성공할 날이 올 거예요."온지유는 장다희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말했다.장다희는 그녀의 칭찬에 고마움을 표했다."이제는 온 기자라고 불러야겠네요. 응원해 줘서 고마워요.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장다희는 온지유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예전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도와줄게요."겉으로는 차가워 보였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온지유는 그녀의 명함을 받으며 감사했다.그때 갑자기 배진호가 온지유의 곁으로 다가왔다.온지유는 배진호의 등장에 적잖게 놀랐지만 그 뒤에 여이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나마 안심했다."배진호 씨? 여긴 어떻게 왔어요?"배진호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너무 고생하실까 봐 이걸 보내주셨어요."그는 봉지 안에 들어 있는 몇 병의 따뜻한 우유를 꺼내 온지유에게 건넸다."대표님이 말씀하셨어요, 사모님이 좋아하는 거라고."온지유는 달콤한 우유로 가득 찬 봉지를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장다희도 상황을 알아챘지만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온 기자, 저는 이제 들어갈게요. 다음에 또 이야기해요."장다희는 매니저와 함께 대기실로 돌아갔다.온
온지유는 장다희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비록 그녀가 외모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연기력이 뛰어나 같이 작업했던 많은 남자 배우들을 스타로 만들었던 그 능력은 여전히 빛났다. 장다희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패션쇼가 거의 끝나갈 때, 온지유는 사진작가와 함께 장다희를 찾아갔다. 공아영은 장다희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배우 장다희 님? 내가 직접 장다희 님을 보다니!"온지유는 공아영의 반응에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좋아요?"공아영이 들떠 말했다."당연하죠! 저 다희 씨가 나온 드라마를 엄청 많이 돌려 봤어요. 이거 진짜 현실 맞죠? 여기서 직접 만나다니 저 너무 행복해요!"장다희가 둘을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장다희예요."그녀는 공아영에게 손을 내밀었다.공아영은 그 손을 보며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이거 꿈인가요?"공아영은 장다희를 보며 감동에 겨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다희 님 드라마는 빠트리지 않고 다 봤어요. 다희 님 경력도 알고 있어요. 지방에서 나오셔서 연예계에서 오랜 시간 노력해 오셨죠. 정말 팬이에요..."공아영은 말하다 감정에 북받쳐 울먹였다.장다희는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알겠어요, 울지 마요. 소중한 눈물을 여기서 흘리면 안 되죠."장다희는 공아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공아영은 자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의 팬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감동했다.장다희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며, 많은 연예인보다 거리감 없는 사람이었다.온지유가 공아영에게 말했다."우리 먼저 일에 집중해요. 오늘 다희 씨를 멋지게 찍어드려야 하잖아요."공아영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네, 물론이죠."촬영을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했고 많은 연예인이 줄을 서야 했다. 이를 안 둘은 이미 촬영 장소를 예약해 놓았다.그러나 온지유와 공아영은 현장에 도착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뭐라고요? 자리가 없다고요?""죄송합니다, 이미 다른 분께서 예약하셨습니다."공아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그
온지유는 노승아가 여이현의 회사 소속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노승아에게 문제가 생기면 회사가 그녀를 보호할 것이다. 불과 며칠 동안에도 노승아를 옹호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온지유는 노승아의 의상을 보며 조롱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백조 흉내 내보려다 더 우스운 꼴이 된 것 같네요? 뭐, 과정이라도 재밌으셨으면 됐어요"온지유의 말은 노숭아의 자존심을 긁었다. 이번만큼은 자존심따위는 다 내려놓고 온지유에게 한번 이겨보고 싶었던 노승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지유 씨, 연예계에 있지 않으니 관중들이 뭘 더 좋아하는지 모르나 보죠? 결국 누가 더 예쁜지, 누가 더 인기 있는지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장다희가 자신만큼 예쁘지 않다는 얘기였다.하지만 장다희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였고, 굳이 체급을 낮춰 얼굴로 비교당할 필요는 없었다.장다희는 그저 곁에서 조용히 서서 노승아의 말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노승아와 말싸움으로 번지고 싶지 않은 듯했다.온지유도 이런 유치한 문제로 노승아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노승아가 뒷배만 믿고 설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정 맘에 든다면, 장소는 양보하죠. 다희 씨는 굳이 이 배경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요."온지유가 싸움을 피하자 노승아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눈치는 있나 보네요. 이번에는 내가 이겼고 앞으로도 내가 계속 이길 거예요. 똑똑하다면 나와 겨루려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온지유는 노승아를 지나치며 돌아보았다."정말 당신이 이겼다고 생각해요?"노승아의 눈은 온지유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다. 온지유만 아니었더라면 노승아는 팬들을 잃지 않았을 테고, 평판도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 여이현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노승아는 온 세상이 자신을 방해한다 생각 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노승아는 온지유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당신을 이기는 건 간단해. 기다려 봐. 곧 모든 걸 잃게 될 거니까."노승아의 시
노승아는 장다희와 비슷한 분위기의 한복을 입고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촬영 중, 사진작가는 다양한 각도에서 노승아를 찍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주 좋아요, 승아씨! 정말 너무 예뼈요!""진짜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완벽하세요!"사진작가의 칭찬에 노승아는 자신만만해져, 더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노승아는 자신의 외모가 장다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연예계에서 아름다움은 강력한 무기였다. 일부 사람들은 단지 외모만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노승아는 연기력도 갖추고 있었고, 아름다움까지 겸비했으니 장다희를 쉽게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사실 그녀의 목표는 장다희가 아니라 온지유를 이기는 것이었다.온지유와 장다희가 함께 있다면 장다희를 이기는 것은 곧 온지유를 이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이번에도,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승자는 노승아가 될 것이다.촬영이 끝난 후 노승아는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고 노승아는 이번에도 반드시 화제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이번 이벤트의 열기를 타서 빨리 사진을 공개하세요."노승아가 말했다."물론이죠, 오늘 밤에는 다 올라갈 거예요!"노승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듯 자신만만했다.저녁이 되자 최신 사진들이 치열하게 공개되었다.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돈으로 댓글 부대를 사서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노승아의 사진은 예상대로 최상위권에 올랐다.노승아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녀의 순수하고 예쁘장한 외모 때문이었다. 이런 외모는 관객의 호감을 사기 쉽다. 아니나 다를까 노승아의 사진은 공개되자마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이젠 말도 안 나오네. 노승아 진짜 예쁘다. 보장 안 들어간 기사 사진인데! 피부는 또 왜 이렇게 좋은 거야!’‘여자인데 노승아 미인계에 넘어감. 한복 너무 잘 어울려. 사극 좀 찍어주라 ㅠㅠ. 꼭 챙겨볼 거야!’대부분의 댓글은 긍정적이었다.노승아는 댓글들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저녁 시간에는 사람들이 더
‘맞아. 굳이 둘 중에서 고르자면 나도 장다희. 드라마 속 캐릭터가 너무 잘 어울려!’노승아는 이 댓글들을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장다희가 나보다 더 잘 나왔다고? 말도 안 돼!’노승아는 자신이 장다희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확신하고 있었다.옆에 있던 매니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장다희의 영상이 천만 개의 '좋아요'를 기록한 것을 보고 비꼬듯이 말했다."댓글들 대체 무슨 소리래요? 우리 언니가 훨씬 더 예쁜데. 장다희는 그냥 추억 팔이 하는 거지, 진짜 실력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숏폼 영상은 일반인들이나 하는 거지, 제대로 된 배우라면 값 떨어지게 그런 거 쳐다도 안 보죠!"매니저는 장다희를 매우 경멸했다. 숏폼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인기가 없어 용돈을 벌기 위해 숏폼을 촬영한다고 생각했다. 노승아가 이런 방식으로 경쟁하는 것을 굴욕적으로 여겼다.하지만 노승아는 분노에 차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매니저는 노승아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녀의 격한 반응에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언니...!"노승아는 분노로 두 눈이 새빨개져 말했다."왜 장다희가 천만 '좋아요'를 받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랑을 받는 거야? 겨우 몇 편의 드라마를 찍었을 뿐이잖아! 나보다 예쁘지도 않아! 촬영 장소도 내가 차지했는데, 어떻게 이걸 찍은 거야? 분명 다 사기야, 전부 돈으로 산 거야!"노승아는 자신이 장다희보다 못할 리 없다고 믿었다. 분명히 장다희측이 뭔가 속임수를 썼다고 생각했다.매니저는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말했다."맞아요, 언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장다희는 정말 천박해요. 진짜 배우라면 이런 식으로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 않죠. 짧은 영상 하나가 성공했다고 해도 언니의 인기를 넘지는 못할 거예요!"그러나 노승아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장다희가 영상 하나로라도 약간의 주목을 받는 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노승아는 장다희가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인명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조금 더 천천히 가자. 늘 하던 장소로."홍혜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 시간이 되면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말을 마친 그녀는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홍혜주가 떠난 후, 인명진은 차분하게 토끼의 심장을 제자리에 넣고 천천히 봉합하기 시작했다.방금까지의 참혹한 현장을 거치고도 그 심장은 다시 뛸 수 있었다.모든 절차를 마친 후, 인명진은 피 묻은 장갑을 벗고 소독제와 비누를 여러 번 사용해 철저하게 손을 씻었다. 몸에서 더 이상 냄새가 나지 않는것을 확인하고 인명진도 떠났다.인명진은 차를 타고 농장으로 향했다. 농장 입구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고, 인명진이 도착하자마자 즉시 문을 열어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농장 안에는 장식용 꽃들과 함께 오직 딸기만이 심겨 있었다.딸기들은 제때 따지 않아 많은 것들이 땅에 떨어져 썩어 있었다.인명진은 차에서 내려 미소를 지으며 정성스럽게 가꾼 딸기밭을 바라보았다.그의 기분은 한결 좋아졌다.경비원이 그에게 바구니를 건넸다.인명진은 바구니를 받아 들고 딸기밭으로 들어갔다.농익은 붉은 딸기들이 눈에 띄었다.그는 신중하게 하나하나를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그 어떤 것도 상처를 입지 않았고, 신선한 이슬이 맺힌 상태로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딸기를 바구니 한가득 따고 나서야 인명진은 만족했다.썩어버린 딸기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그들의 존재가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딸기를 바구니에 담은 후, 인명진은 그대로 차에 싣고 농장을 떠났다.--한편, 온지유와 공아영이 만든 짧은 영상이 천만 조회수를 돌파하며 둘은 축제 분위기였다.그들에게는 이러한 성과가 전혀 우습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청자들이 좋아한다면, 그게 바로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대형 제작물을 통해서만 성취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지금은 아직 연예인들이 숏폼을 통해 주목을 받으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러나 장다희는 이를 통해 다시 한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
“그냥 집에서 하민이를 돌봐 주면 안 돼? 하민이 너랑 있으면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하거든. 돈은 내가 많이 벌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편히 지내면 돼. 평생 널 먹여 살릴 수 있어.”나진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변호사 시절부터 받았던 수임료도 억대였으니, 나도현은 한 가족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에 내가 하던 일도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었잖아. 근데 넌 그때부터 나한테 마음껏 해 보라고 응원해 줬어. 그런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양시은이 다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나도현이 크게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에서 하민을 돌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회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그런 뜻은 아니야. 네가 여기저기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래. 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나도현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눈길은 온통 양시은에게 쏠려 있었다.양시은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은 나도현과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알았어,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는 게 어때?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주문해 줄게. 아니면 뭐 마실래?”나도현은 양시은을 마치 아이 대하듯 온갖 걸 다 챙겨 주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결해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양시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단미주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나도현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문제 있어?”“아픈 건 아니고... 사실 이따가 협력할 사람이랑
단미주는 임다혜를 면회했다. 임다혜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 안 해?”만약 임다혜가 나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임다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인생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난 이제 후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그러면서 그녀는 단미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나를 본보기로 삼아. 너는 절대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목매지 마. 그러다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임다혜는 아주 정형적인 본보기였다.단미주는 임다혜를 대신해 복수해 주고 싶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에 양시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오히려 당한 적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미안해. 내가 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어. 근데 나도 잊진 않았어.”“네가 날 찾아와 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굳이 나를 위해 나도현을 건드리거나, 양시은을 상대로 무리수를 두지 말아 줘. 넌 걔네 상대가 안 돼.”특히 나도현은 전직 변호사로서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건 변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단미주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알지. 그래서 더 미안해. 아무튼 이제 나오면 다시 당당하게 살아. 기다리고 있을게.”“응.”단미주는 임다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자리를 떴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단미주는 어느 날 양시은과 협력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도 단미주는 여전히 양시은을 깔보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현 씨가 아니면 누가 알아줬겠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예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양시은 씨, 설마 사람들이 조금 치켜세워 준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단미주는 비웃듯이 웃었다.사람들이 양시은을 높이 평가하는 건 오로지 나도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나도현은 나진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 시절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
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우울했지만 곧 기분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하지만 두 아이가 차 안에서 조잘조잘 나누던 비밀이 식당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밥을 먹을 때도 두 아이는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하느라 음식에 손도 별로 대지 않았다.결국 양시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테이블을 톡톡 쳤다.“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밥부터 먹어야지. 학교에서도 밥 먹을 땐 떠들지 말라고 배웠을 텐데?”하민은 그녀가 화가 좀 난 것 같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서 바로 바른 자세로 돌아앉아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네, 이제 조용히 먹을게요.”양시은은 별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별이도 은근히 그녀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먹겠다고 했다.두 아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지자 양시은은 내심 흐뭇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과일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기분이 좋아 보이네?”양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소곤소곤 말했다.“아까 차 안에서 하민이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그냥 복수하는 거지, 뭐.”나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너 아직도 애 같다는 거 알아? 왜 애한테 앙심을 품고 그래.”양시은은 나도현이 뭘 말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큰 문제도 아니니 아이들 장난처럼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놀리고 장난치는 맛이 없으면 육아의 절반은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 않나.한편, 별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온지유가 데리러 왔다. 온지유는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별거 아니에요. 고맙긴요. 저 별이 좋아하잖아요.”양시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온지유의 품에서 잠 들어 버린 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요한 거실 한편을 둘러봤다. 그러다 마침 나도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양시은을 찾으러 오는 기색이었다.그걸 알아챈
나도현은 고개를 숙여서 양시은이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양시은은 그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해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의 손을 계속 붙잡고만 있었다. 그게 바로 나도현이 원하던 바였다.“이제 슬슬 하민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양시은이 자료를 전부 훑어본 뒤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유치원은 네 시 반에 끝나니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터였다.나도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가자.”마침 길이 막히지 않아 금세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양시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지유 씨가 오늘 일이 있어서 별이를 못 데리러 간대. 우리 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둘은 시선을 마주쳤다.나도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하나 더 데리러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양시은은 집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고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됐다.“집에 식재료가 그리 많진 않은데...”아이가 둘이면 조금 모자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평소에도 도움을 준 걸 생각하면 별이를 대충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럼 나가서 먹자.”나도현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양시은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하민을 유치원에서 태운 뒤, 저녁에 별이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진짜요? 엄마, 그럼 빨리 별이 형아 만나러 가요!”“일단 앉아. 안전벨트부터 매고.”시동을 걸기 전에 양시은이 하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가까운 덕분에 금방 태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차에 함께 타자마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민과 별이는 서로 보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살짝 귀
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자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남자가 뻔뻔하게 되묻자 자연스레 의심의 시선이 양시은 쪽으로 향했다.“요즘 애들은 망상증이 심한가 봐.”“아니지,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자신감도 병이라잖아.”“에이, 너무들 하네. 난 저 여자가 꽤 예뻐 보이는데? 오히려 저 남자가 진짜 훔쳐본 것 같아. 아까부터 묘하게 수상했잖아.”마침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말을 거들자, 양시은은 그 사람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해준 이는 젊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양시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져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양시은은 다시 그 남자와 맞섰다.“제가 언제 저를 봤다고 했어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고 했죠.”“헛소리하지 마요!”양시은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미소를 띤 채 단호하게 말했다.“헛소린지 아닌지, 여기 CCTV 영상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저쪽에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거든요. 떳떳하다면 확인 정도 해봐도 되죠?”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양시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잡아주세요! 저 사람 변태예요!”하지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허둥대느라 반응을 못 했다. 양시은 역시 한발 늦어 속만 탔다.그때 갑자기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뭐야, 네가 뭔데 내 손을 꺾어! 아악!”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를 붙잡은 사람이 꽤 강하게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이었다.언제부턴가 문가에 서 있던 나도현을 발견한 양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리셉션 쪽을 흘끗 봤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너 언제 온 거야? 아까는 여기 없었잖아...”“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