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장다희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비록 그녀가 외모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연기력이 뛰어나 같이 작업했던 많은 남자 배우들을 스타로 만들었던 그 능력은 여전히 빛났다. 장다희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패션쇼가 거의 끝나갈 때, 온지유는 사진작가와 함께 장다희를 찾아갔다. 공아영은 장다희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배우 장다희 님? 내가 직접 장다희 님을 보다니!"온지유는 공아영의 반응에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좋아요?"공아영이 들떠 말했다."당연하죠! 저 다희 씨가 나온 드라마를 엄청 많이 돌려 봤어요. 이거 진짜 현실 맞죠? 여기서 직접 만나다니 저 너무 행복해요!"장다희가 둘을 발견하고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장다희예요."그녀는 공아영에게 손을 내밀었다.공아영은 그 손을 보며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이거 꿈인가요?"공아영은 장다희를 보며 감동에 겨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다희 님 드라마는 빠트리지 않고 다 봤어요. 다희 님 경력도 알고 있어요. 지방에서 나오셔서 연예계에서 오랜 시간 노력해 오셨죠. 정말 팬이에요..."공아영은 말하다 감정에 북받쳐 울먹였다.장다희는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알겠어요, 울지 마요. 소중한 눈물을 여기서 흘리면 안 되죠."장다희는 공아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공아영은 자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의 팬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감동했다.장다희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며, 많은 연예인보다 거리감 없는 사람이었다.온지유가 공아영에게 말했다."우리 먼저 일에 집중해요. 오늘 다희 씨를 멋지게 찍어드려야 하잖아요."공아영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네, 물론이죠."촬영을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했고 많은 연예인이 줄을 서야 했다. 이를 안 둘은 이미 촬영 장소를 예약해 놓았다.그러나 온지유와 공아영은 현장에 도착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뭐라고요? 자리가 없다고요?""죄송합니다, 이미 다른 분께서 예약하셨습니다."공아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그
온지유는 노승아가 여이현의 회사 소속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노승아에게 문제가 생기면 회사가 그녀를 보호할 것이다. 불과 며칠 동안에도 노승아를 옹호하는 기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온지유는 노승아의 의상을 보며 조롱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백조 흉내 내보려다 더 우스운 꼴이 된 것 같네요? 뭐, 과정이라도 재밌으셨으면 됐어요"온지유의 말은 노숭아의 자존심을 긁었다. 이번만큼은 자존심따위는 다 내려놓고 온지유에게 한번 이겨보고 싶었던 노승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지유 씨, 연예계에 있지 않으니 관중들이 뭘 더 좋아하는지 모르나 보죠? 결국 누가 더 예쁜지, 누가 더 인기 있는지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장다희가 자신만큼 예쁘지 않다는 얘기였다.하지만 장다희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였고, 굳이 체급을 낮춰 얼굴로 비교당할 필요는 없었다.장다희는 그저 곁에서 조용히 서서 노승아의 말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노승아와 말싸움으로 번지고 싶지 않은 듯했다.온지유도 이런 유치한 문제로 노승아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노승아가 뒷배만 믿고 설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정 맘에 든다면, 장소는 양보하죠. 다희 씨는 굳이 이 배경이 아니어도 괜찮으니까요."온지유가 싸움을 피하자 노승아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눈치는 있나 보네요. 이번에는 내가 이겼고 앞으로도 내가 계속 이길 거예요. 똑똑하다면 나와 겨루려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온지유는 노승아를 지나치며 돌아보았다."정말 당신이 이겼다고 생각해요?"노승아의 눈은 온지유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다. 온지유만 아니었더라면 노승아는 팬들을 잃지 않았을 테고, 평판도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 여이현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노승아는 온 세상이 자신을 방해한다 생각 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노승아는 온지유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당신을 이기는 건 간단해. 기다려 봐. 곧 모든 걸 잃게 될 거니까."노승아의 시
노승아는 장다희와 비슷한 분위기의 한복을 입고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촬영 중, 사진작가는 다양한 각도에서 노승아를 찍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주 좋아요, 승아씨! 정말 너무 예뼈요!""진짜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완벽하세요!"사진작가의 칭찬에 노승아는 자신만만해져, 더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노승아는 자신의 외모가 장다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연예계에서 아름다움은 강력한 무기였다. 일부 사람들은 단지 외모만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노승아는 연기력도 갖추고 있었고, 아름다움까지 겸비했으니 장다희를 쉽게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사실 그녀의 목표는 장다희가 아니라 온지유를 이기는 것이었다.온지유와 장다희가 함께 있다면 장다희를 이기는 것은 곧 온지유를 이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이번에도,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승자는 노승아가 될 것이다.촬영이 끝난 후 노승아는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고 노승아는 이번에도 반드시 화제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이번 이벤트의 열기를 타서 빨리 사진을 공개하세요."노승아가 말했다."물론이죠, 오늘 밤에는 다 올라갈 거예요!"노승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듯 자신만만했다.저녁이 되자 최신 사진들이 치열하게 공개되었다.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돈으로 댓글 부대를 사서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노승아의 사진은 예상대로 최상위권에 올랐다.노승아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녀의 순수하고 예쁘장한 외모 때문이었다. 이런 외모는 관객의 호감을 사기 쉽다. 아니나 다를까 노승아의 사진은 공개되자마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이젠 말도 안 나오네. 노승아 진짜 예쁘다. 보장 안 들어간 기사 사진인데! 피부는 또 왜 이렇게 좋은 거야!’‘여자인데 노승아 미인계에 넘어감. 한복 너무 잘 어울려. 사극 좀 찍어주라 ㅠㅠ. 꼭 챙겨볼 거야!’대부분의 댓글은 긍정적이었다.노승아는 댓글들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저녁 시간에는 사람들이 더
‘맞아. 굳이 둘 중에서 고르자면 나도 장다희. 드라마 속 캐릭터가 너무 잘 어울려!’노승아는 이 댓글들을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장다희가 나보다 더 잘 나왔다고? 말도 안 돼!’노승아는 자신이 장다희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확신하고 있었다.옆에 있던 매니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장다희의 영상이 천만 개의 '좋아요'를 기록한 것을 보고 비꼬듯이 말했다."댓글들 대체 무슨 소리래요? 우리 언니가 훨씬 더 예쁜데. 장다희는 그냥 추억 팔이 하는 거지, 진짜 실력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숏폼 영상은 일반인들이나 하는 거지, 제대로 된 배우라면 값 떨어지게 그런 거 쳐다도 안 보죠!"매니저는 장다희를 매우 경멸했다. 숏폼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인기가 없어 용돈을 벌기 위해 숏폼을 촬영한다고 생각했다. 노승아가 이런 방식으로 경쟁하는 것을 굴욕적으로 여겼다.하지만 노승아는 분노에 차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매니저는 노승아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녀의 격한 반응에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언니...!"노승아는 분노로 두 눈이 새빨개져 말했다."왜 장다희가 천만 '좋아요'를 받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랑을 받는 거야? 겨우 몇 편의 드라마를 찍었을 뿐이잖아! 나보다 예쁘지도 않아! 촬영 장소도 내가 차지했는데, 어떻게 이걸 찍은 거야? 분명 다 사기야, 전부 돈으로 산 거야!"노승아는 자신이 장다희보다 못할 리 없다고 믿었다. 분명히 장다희측이 뭔가 속임수를 썼다고 생각했다.매니저는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말했다."맞아요, 언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장다희는 정말 천박해요. 진짜 배우라면 이런 식으로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 않죠. 짧은 영상 하나가 성공했다고 해도 언니의 인기를 넘지는 못할 거예요!"그러나 노승아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장다희가 영상 하나로라도 약간의 주목을 받는 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노승아는 장다희가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인명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조금 더 천천히 가자. 늘 하던 장소로."홍혜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 시간이 되면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말을 마친 그녀는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홍혜주가 떠난 후, 인명진은 차분하게 토끼의 심장을 제자리에 넣고 천천히 봉합하기 시작했다.방금까지의 참혹한 현장을 거치고도 그 심장은 다시 뛸 수 있었다.모든 절차를 마친 후, 인명진은 피 묻은 장갑을 벗고 소독제와 비누를 여러 번 사용해 철저하게 손을 씻었다. 몸에서 더 이상 냄새가 나지 않는것을 확인하고 인명진도 떠났다.인명진은 차를 타고 농장으로 향했다. 농장 입구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고, 인명진이 도착하자마자 즉시 문을 열어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농장 안에는 장식용 꽃들과 함께 오직 딸기만이 심겨 있었다.딸기들은 제때 따지 않아 많은 것들이 땅에 떨어져 썩어 있었다.인명진은 차에서 내려 미소를 지으며 정성스럽게 가꾼 딸기밭을 바라보았다.그의 기분은 한결 좋아졌다.경비원이 그에게 바구니를 건넸다.인명진은 바구니를 받아 들고 딸기밭으로 들어갔다.농익은 붉은 딸기들이 눈에 띄었다.그는 신중하게 하나하나를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그 어떤 것도 상처를 입지 않았고, 신선한 이슬이 맺힌 상태로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딸기를 바구니 한가득 따고 나서야 인명진은 만족했다.썩어버린 딸기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그들의 존재가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딸기를 바구니에 담은 후, 인명진은 그대로 차에 싣고 농장을 떠났다.--한편, 온지유와 공아영이 만든 짧은 영상이 천만 조회수를 돌파하며 둘은 축제 분위기였다.그들에게는 이러한 성과가 전혀 우습게 느껴지지 않았다. 시청자들이 좋아한다면, 그게 바로 성공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대형 제작물을 통해서만 성취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지금은 아직 연예인들이 숏폼을 통해 주목을 받으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러나 장다희는 이를 통해 다시 한
“돕는다고 할 수 없어요. 다희 씨는 실력 있는 사람이니까요. 이번 아이디어는 저희가 같이 생각해 낸 거예요. 상대가 다희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저는 똑같이 했을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다희 씨가 다희 씨를 도운 격이죠.”“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제가 좋은 인연을 만났네요. 그럼 전 할 일이 있어서 다음에 다시 연락해요.”“네.”전화를 끊은 다음 공아영은 턱을 괸 채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유 씨는 어쩌면 못 하는 일이 없어요? 장다희 씨 매니저를 해도 되겠어요.”“아니에요. 그래도 화제성은 떼놓은 당상이겠어요. 전통적인 미디어는 못하는 걸 숏폼은 할 수 있으니까요.”이제는 신문 기사에만 목매다는 세대가 아니다. 21세기는 변화가 찾아올 때도 되었다.퇴근 시간이 되자, 온지유가 공아영에게 말했다.“시간 됐어요. 이만 퇴근해요.”“네.”공아영은 주섬주섬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방향이 다른 것만 아니었어도 같이 돌아가고 싶네요.”온지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내일 봐요.”“아쉽지만 내일 봐요.”공아영과 헤어진 다음 온지유는 혼자 거리를 걸었다. 그녀는 택시를 잡지 않았다. 앉아 있은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조금 움직이고 싶었던 것이다.요즘 들어 배가 좀 커진 것 같았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함께 커가는 아이가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차량 한 대가 그녀를 쫓았다.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모습, 어딘가에 대고 사진 찍는 모습... 그녀의 모든 모습을 지켜봤다.차 안의 남자는 기분 좋은 듯 눈웃음을 지었다. 눈가의 점이 함께 움직여 아주 매혹적인 모습을 자아냈다. 그는 조수석에 놓인 딸기 바구니를 힐끗 보고는 계속 천천히 뒤따랐다.잠깐 걸은 다음 온지유는 택시를 잡고 집에 돌아가려고 했다. 앱으로 잡은 택시는 금방 찾아왔고, 그녀는 주소를 말하고 올라탔다.택시 안에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맴돌았다. 택시 기사에게 시선을 주니 그녀는 무언가 감추려는
‘성공이야!’그러나 여자가 기뻐하기도 전에 벤츠 한 대가 바짝 붙어왔다. 그녀가 속도를 올리자, 벤츠도 역시 속도를 올렸다. 퇴근길 차로 가득한 거리에서 미친 듯이 쫓아왔다.여자는 더 이상 속도를 높일 용기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 가는 치명적인 교통사고가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벤츠는 옆으로 다가왔다. 다리를 지날 때는 금방이라도 강에 빠뜨릴 듯 가까이 붙었다.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차를 세웠다. 벤츠는 끼익 소리를 내며 그녀의 앞으로 가서 멈춰 도망갈 길을 막았다.인명진은 주저 없이 차에서 내렸다. 차 안의 여자는 잠깐 진정하다가 차에서 내렸다.“이번엔 또 뭐야? 급한 일 있다며? 시간을 칼같이 지키던 사람이 왜 나보다도 급해졌대?”인명진은 빨간 머리 여자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말한 임산부가 저 여자야?”여자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그 말투 마음에 안 들어.”인명진은 정신을 잃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뭘 먹였어?”“아무것도 안 먹었어. 한 번 내리치니까 그냥 쓰러지던데?”인명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온지유를 안아 내렸다. 빨간 머리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을 잡았다.“인명진, 너 뭐 하는 거야? 이거 우리 임무야. 그 인간들이 저 여자 장기를 팔아야 한다고 했잖아!”임명진은 정신 잃은 온지유를 꼭 안은 채 여자의 손을 뿌리쳤다.“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너 미쳤어? 죽고 싶어?”인명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다.“이 여자는 안 돼.”“왜? 우린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어. 여자 하나 때문에 실패 경력을 만들고 싶어?”인명진의 눈빛은 아주 단호했다.“홍혜주, 난 내가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어.”홍혜주는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너 진짜 제정신 아니구나. 네가 언제부터 이런 거 신경 썼다고 그래? 왜 여자 때문에 인생을 망치려고 하냐고.”그녀는 인명진의 차 안에 있는 딸기 바구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목숨값으로 농장을 사더니 딸기를 심으려고 그랬던 거야? 이 여자가 딸기라
홍혜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인명진은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인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지유를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차를 몰고 떠났다. 끝까지 설명은 없었다.점점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는 홍혜주의 눈빛에는 슬픔이 서렸다. 그가 이런 식으로 목숨을 뒷전에 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홍혜주는 주먹을 꽉 쥔 채 한참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곳을 떠났다.인명진은 온지유를 바로 집에 데려갔다. 그녀의 집이 아닌 자기 집으로 말이다. 온지유의 집은 가봤자 비밀번호를 몰랐기에 그냥 자기 집으로 왔다.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몸에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옆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시선은 시종일관 온지유의 얼굴에 머물렀다. 짙은 갈색 눈동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드러난 팔에는 여전히 붕대로 감긴 상처가 보였다.그는 그저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약 한 시간 후에야 온지유가 깨어났다.그녀는 목이 몹시 아팠다. 잠시 후 택시에서 맞아 쓰러진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깼어요?”온지유의 반응은 인명진도 보고 있었다. 온지유는 그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몸을 튕기듯 일으켰고 뒤로 물러나며 경계의 눈빛을 쏘았다.“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에요?”그녀는 원래부터 인명진을 좋게 보지 않았다. 택시에서 쓰러졌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보이자, 당연히 택시 기사와 한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의 경계하는 태도에 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슬픈 표정이었다.“이제 다 괜찮아요. 지유 씨는 안전해요.”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방의 구조는 그녀의 아파트와 비슷했다. 옆집, 이곳은 인명진의 집인 모양이었다.“지유 씨 집 비밀번호를 몰라서 일단 여기로 데려왔어요.”인명진의 집은 아주 깔끔했다. 모든 것이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여진숙은 서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진 그룹의 일에 관심이 일도 없었다.서찬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사모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죠.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글쎄 여이현이 여 대표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모두 해고했지 뭐에요. 지금 여진 그룹은 여이현의 천하에요.”여진숙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로 “그래요.”라고 대답한 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서찬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사모님, 여진 그룹이 여 대표님 손으로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는 요양원에 계시지 않아도 돼요. 들은 바에 의하면 사모님께서는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아직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신다면서요. 사실, 이 모든게 여이현 때문이잖아요.”“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겁니까?”여진숙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서찬이 그녀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 여진숙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분부했다.“알겠어요. 서 부장님 뜻대로 하세요.”허락을 받은 서찬은 한껏 부풀어 올라 당장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힌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담보했다.두 사람의 계획은 가정모임이었다.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기에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가정모임에서 그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여의현은 아니였다.밝은 하늘에 어둠이 깃들 무렵 여이현이 온지유와 별이를 데리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그는 여진숙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여진숙은 자상한 눈길로 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별아, 할머니께 인사해야지.”여이현의 말에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별이 인사를 받은 여진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별이에게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쥐여주었다.여이현과 온지유 두 사람은 확연히 달라진 여진숙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가정모임에 여희영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려던
최승현은 여희영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여희영 씨, 저는 진심으로 여희영 씨를 좋아해요.”여희영은 비록 여이현의 친고모는 아니었지만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긴 뒤로부터여이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여이현은 현재 그녀를 친 고모로 여기며 존경스러운 태도로 모시고 있다. 그건 여희영이 여진 그룹의 다양한 광고 촬영에 참여했다는 소식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최승현이 악착스레 달라붙는 것도 뒷백이 센 여희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여희영은 그의 속셈을 모른 채 짜증 나기만 했다.그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하려던 찰나 최승현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여희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최승현을 두 손으로 밀어 내팽개쳤다.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여희영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안돼요. 전 반대에요! 저와 약속하셨잖아요!”너무나도 가련한 온지유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더니 작은 소리로 두 사람을 의논하기 시작했다.여희영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차가운 말투로 최승현에게 말했다.“최승현 씨, 제가 분명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더는 저에게 달라붙지 마세요.”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호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최승현이 또 따라올까 봐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아직도 따라오고 있어?”여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아니요. 하지만 아직도 저희를 보고 있어요. 어? 이현 씨가 내려왔는데요.”여희영은 여이현이 두 사람의 계획을 망칠까 봐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했다.“아니 근데 이현이가 최승현 쪽으로 다가가서 뭘 말하고 있는데.”이 말에 온지유는 여희영을 밀어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이현이 입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이현 씨가 최승현 씨에게 계속 달라붙으면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말했어요.”온지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희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최승현 씨 연예인이에요?”“아니. 여
‘이게 끝이라고? 더 시도해 보지 않을 건가?’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자가 여이현을 붙잡을까 봐 많이걱정하고 있었다. 바람기 많은 남자보다 진지한 여자가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자신의 마음을 과감히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여이현, 운 좋은 줄 알아.”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이현이 부드러운 눈길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이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온지유를 빨아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어떤 여자분이 찾던 것 같던데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받아 주지. 그러면...”“그럼 나 간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재빨리 여이현을 잡으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이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안 갈 거야. 내 곁에 지유 너와 별이만 있으면 행복한걸.”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온지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금방 발생한 불쾌한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야시장 돌아다녔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재밌게 놀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연이어 하품하는 온지유를 보고 여이현은 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힘들게 약속한 단둘만의 데이트라 여이현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뜨거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나라에서 빠져나온 온지유의 머릿속은 온통 뜨거웠던 어젯밤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 요동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시간을 보니 벌써 별이 등교 시간이었다.온지유는 아직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여이현을 버려두고 옷을 바꾼 뒤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어머, 우리 자기 왜 그렇게 급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여희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가에대고
두 사람은 야시장 입구에 왔다. 인파로 사람들 머리만 보이자 여이현은 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 인파들 속에서 기회를 틈타 널 만지려고 하면 어떡해.”온지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흥, 드레스를 고를 땐 야시장을 구경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봐? 안 갈아입을래. 오랜만에 이쁘게 입었는데 왜 갈아입어. 게다가 여긴 사람도 많잖아. 그럼 더 신경 써야지.”여이현은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었기에 속으로 어떻게든 지켜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실컷 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온지유는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맛있는 것을 보면 맛보고 배가 부르면 여이현에게 넘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칵테일에 맛만 본 후 바로 여이현에게 주기도 했고 재밌는 것이 있으면 체험해보기도 했으며 무서운 것이 있으면 바로 여이현의 품으로 안겨들었다.그녀는 밤하늘에 뜬 예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에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당연히 눈치 없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했다.아이스크림을 사러 줄을 서고 있을 때 온지유는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여이현은 바로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인파 속에서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만진 건 확실했다.여이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얼른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명령 어조로 말했다.“당장 갈아입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갈 거야.”“왜 화를 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알아. 네 잘못이 아닌 거. 하지만 난 짜증이 난다고. 그런 썩을 놈들이 네 엉덩이를 만졌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불쾌하고 화가 나.”여이현의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 복수할 수도 없는 이 기분을.온지유는 억울했다. 그래서 아주 보수적인 옷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도 나오지 않았
말을 하던 여이현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더니 파란 장미를 꺼내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 씨,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게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오직 당신만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을 받아줘요. 내가 평생 당신을 걱정하고 아끼며 사랑할 수 있게.”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지유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다. 파란 장미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대답했다.“그럴게요.”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그녀를 안고 빙빙 돌았다.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확성기에 틀어놓은 것처럼 크게 들렸다.“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다음 순서로 그 장미를 뜯어 봐.”여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를 힐끗 보다가 조심스럽게 장미를 뜯었다.안에는 반지가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이현 씨, 정말!”“마음에 들어?”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얼마나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그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준비했다.다행히 온지유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온지유가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여자라면 대부분 그의 이벤트를 좋아할 것이다.그녀는 발꿈치를 들더니 여이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 후 입을 떼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이내 질척인 키스를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에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혔다. 여이현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뭐야. 하지 마. 나 배고파. 얼른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해줘.”온지유는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며 야릇해진 분위기를 피해 보려고 했다.여이현이 준비한 저녁은 전부 밸런타인데이와 연관이 있는 음식이었다.데코레이션이든 음식의 의미이든 전부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벤트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온지유는 하루 종일 자신을 방치해둔 것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