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인명진은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인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지유를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차를 몰고 떠났다. 끝까지 설명은 없었다.점점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는 홍혜주의 눈빛에는 슬픔이 서렸다. 그가 이런 식으로 목숨을 뒷전에 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홍혜주는 주먹을 꽉 쥔 채 한참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곳을 떠났다.인명진은 온지유를 바로 집에 데려갔다. 그녀의 집이 아닌 자기 집으로 말이다. 온지유의 집은 가봤자 비밀번호를 몰랐기에 그냥 자기 집으로 왔다.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몸에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옆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시선은 시종일관 온지유의 얼굴에 머물렀다. 짙은 갈색 눈동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드러난 팔에는 여전히 붕대로 감긴 상처가 보였다.그는 그저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약 한 시간 후에야 온지유가 깨어났다.그녀는 목이 몹시 아팠다. 잠시 후 택시에서 맞아 쓰러진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깼어요?”온지유의 반응은 인명진도 보고 있었다. 온지유는 그를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몸을 튕기듯 일으켰고 뒤로 물러나며 경계의 눈빛을 쏘았다.“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에요?”그녀는 원래부터 인명진을 좋게 보지 않았다. 택시에서 쓰러졌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보이자, 당연히 택시 기사와 한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의 경계하는 태도에 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슬픈 표정이었다.“이제 다 괜찮아요. 지유 씨는 안전해요.”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방의 구조는 그녀의 아파트와 비슷했다. 옆집, 이곳은 인명진의 집인 모양이었다.“지유 씨 집 비밀번호를 몰라서 일단 여기로 데려왔어요.”인명진의 집은 아주 깔끔했다. 모든 것이
인명진은 고개를 숙였다. 입 밖으로 나온 건 짧은 한마디뿐이었다.“저는 지유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온지유는 벌떡 일어나서 거리를 두며 말했다.“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인명진 씨는 깨끗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게 분명한데. 그냥 앞으로 연락하지 말고 지내요.”그녀는 인명진과 가까이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인명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금방 딴 딸기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전해줬다.“지유 씨가 좋아하는 딸기예요. 오늘 금방 땄어요. 가져가서 먹어요.”온지유는 단호하게 몸을 틀었다.“죄송하지만, 저는 그거 못 받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인명진이 언제 갑자기 그녀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지금 당장 이사할 생각마저 들었다.살인자를 이웃으로 두고 어찌 산단 말인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 이런 일을 경솔하게 넘겨서는 안 된다.그녀는 인명진이 바이러스라도 되는 듯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집안에는 인명진과 미처 선물하지 못한 딸기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인명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바구니에 담긴 딸기는 아무리 싱싱해도 가치를 잃었다. 그는 주저 없이 전부 쓰레기통에 던졌다.온지유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녀도 원하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간 온지유는 문을 굳게 잠갔다. 그런데도 마음은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왜 나를 납치하려고 한 걸까? 대체 왜... 누구한테 사주받았나? 앞으로 조심해야겠어.’...어두운 방 안.짝!홍혜주의 머리는 뺨을 맞고 홱 돌아갔다.“여자 하나 잡지 못하면 살아서 뭐 해?!”뺨은 금방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입가에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고통을 참고 무릎을 꿇었다.“시간을 잘못 잡았습니다. 퇴근 시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꼭 잡아 오겠습니다.”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키가 177cm 정도 되어 보였다. 왼쪽 얼굴에
중년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떠났다. 홍혜주는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것이다.그녀는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붉게 부어오른 얼굴을 만졌다. 평소 세련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단단히 깃들어 있었다.두려운 게 당연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조직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이다. 한 번 떠나면 남은 길은 죽음뿐이다.그녀는 인명진이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그가 조직과 대립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도 언젠가 드러나고 말 것이다.홍혜주의 요염한 얼굴에는 근심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이건 자신뿐만 아니라 인명진도 구하는 일이었다.그녀에게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시간은 오직 일주일만 남았고, 그건 그녀와 인명진의 목숨을 건 카운트다운이었다.자리에서 일어난 홍혜주는 붉어진 얼굴을 파우더로 가리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 되어야 했다.그녀는 강가로 갔다. 인명진은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보고는 내가 했어.”홍혜주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인명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녀를 돌아봤다.“어떻게?”“별말 안 했어.”홍혜주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너 평생 이런 식으로 살 거야? 조직에 찍힌 사람은 결국 죽게 되어있어.”“누가 지시한 일이지?”“난 그냥 일만 대신해 주는 사람이야. 명령은 보스가 내렸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이게 바로 인명진이 의심을 품은 이유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왜 날 고발하지 않았어?”홍혜주의 얼굴에는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인명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린 동료잖아. 너한테 문제가 생기면 나도 곤란해. 그날 밤도 네가 상처를 치료하길 바랐던 것뿐이야. 나도 그 정도로 시끄러워질 줄은 몰랐지만...”홍혜주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감싸안으며 머리를 기댔다.“아무튼 네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 해. 이 세상에서 내가 신경 쓰는 사람
“전엔 키도 나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이젠 훌쩍 컸구나. 얼굴도 더 잘생겨졌어. 어쩐지 아들을 만난 이분이구나.”성무현은 진심으로 여이현을 좋아했다. 그는 여이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세히 살펴보았다.예전에 여이현은 그의 부대에 있었다. 그때는 성무현이 대령이 되기도 전이었다. 분대장이었던 그는 여이현과 함께 생사를 오가며 전우애를 쌓았다. 여이현이 부대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그 정은 사라지지 않았다.그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여이현은 정말로 성무현의 아들 벌이었다. 그래서인지 성무현도 여이현을 아들처럼 여겼다.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과거 얘기였다. 때가 무르익자 여이현이 말했다.“저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말만 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꼭 도와줄게. 근데 너 부대로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어?”성무현은 여이현이 다시 돌아오기를 원했다.“그건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여이현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거절의 뜻을 드러낸 성무현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그래, 부탁할 일은 뭐야?”“사람 한 명 찾아주세요.”여이현은 ‘석이’라는 남자를 찾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남자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그도 내심 그 남자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온지유 배 속의 아이가 설명이 안 됐다.만약 그 남자가 온지유를 능멸한 것이라면, 그는 꼭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온지유는 빨리 아이를 지워야 했다. 정체 모르는 아이를 가진 것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이런 생각에 여이현의 눈빛은 부쩍 차가워졌다.성무현의 업무능력은 아주 훌륭했다. 여이현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즉시 지시를 내렸다. 여이현은 거의 그에게 무언가 부탁한 적 없었다. 그래서 이번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이건 이름에 ‘석’자가 들어간 목록이야.”오후, 성무현은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여기 있는 사람 모두 경성에 온 적 있어. 네가 찾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봐봐.”여이현은 파일을 쭉 살펴보
“여보세요.”온지유의 목소리를 들은 여이현의 눈빛에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보고 싶어.”온지유는 핸드폰을 꽉 쥐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납치당할 뻔했다는 두려움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인명진을 옆집에 두고 계속 지내도 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그래도 여이현과 통화하는 것이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괜히 물어봤다.“지금 어디 있어요?”여이현은 창밖으로 보이는 훈련하는 군인들을 바라봤다. 구령 소리가 너무 커서 그는 창문을 닫으며 대답했다.“나 지금 교외에 있어.”“교외요?”온지유는 그가 부랴부랴 떠났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교외로 갈 줄은 몰랐다.“응, 일이 좀 있어서.”그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았다. 온지유가 괜한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잠시 후 여이현이 다시 물었다.“요즘 어때? 밥은 제때 먹고 있어?”그는 여전히 온지유를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온지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지만 대답은 간결했다.“저는 괜찮아요.”여이현은 그녀가 좀 더 얘기하길 바랐다. 전화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물었다.“이제 잘 거야?”“네.”이쯤 되자 여이현은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졌다.“그럼 푹 쉬어. 방해하지 않을게.”“언제 돌아와요?”온지유가 한 마디 더 물었다. 그러자 여이현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내일, 아니면 모레쯤.”“인터뷰도 해야 하는 거 잊지 않았죠? 돌아오면 바로 일정 잡아요.”그녀가 언급한 건 일과 관련된 얘기였다.잠깐이나마 여이현은 그녀가 자신을 보고 싶어서 빨리 돌아오라고 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그래도 여이현은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네 일에 영향 주지 않을게.”온지유는 여전히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
백지희는 물건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온지유는 그녀를 보자마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꽉 껴안았다.“잘 왔어, 지희야. 네가 와서 다행이다. 안 그러면 나 오늘 잠도 못 잘 거야.”백지희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 있었구나? 어쩐지 여이현이 갑자기 전화 와서 너한테 가보라고 한다고 했어. 난 그것도 모르고...”여이현이 부탁한 일은 단순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도 곧바로 달려왔다.“이현 씨가 전화했었어?”온지유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자기는 바빠서 못 온대. 그래서 너 좀 돌봐달라고 부탁하더라.”백지희는 온지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너 좀 봐,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렇게 놀랄 일이었어?”온지유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나도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근데 나 오늘 납치당할 뻔했다?”“뭐?! 야, 그런 일은 여이현한테 말해야지! 여이현은 해결해 줄 거 아니야! 납치범 빨리 잡아야 해. 하아... 대체 누구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꾸민 거지?”온지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이현과 결혼한 후로 원수가 부쩍 많아졌다. 직장에서든, 생활에서든 그 수가 적지 않았다.“한 명 한 명 추려봐야 할 것 같아.”“그건 그거고, 너 어떻게 빠져나왔어?”온지유는 바로 인명진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 문제로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그가 선 쪽인지 악 쪽인지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인명진이라는 사람 기억해?”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기억하지.”“하아... 인명진이 날 구해줬어.”백지희는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봐봐, 내가 뭐랬어. 그 사람 너한테 신경 많이 쓴다니까. 중요한 순간에 널 구해줬네.”“넌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우연히 내 옆집에 살고, 또 우연히 날 구해줬잖아.”그녀는 여전히 의심이 들었다. 백지희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하지만 널 해치지는 않았잖아.”“만약 일부러 내 신뢰를
“승아 언니는 잘 지내고 있어요.”김예진이 말했다.“최근 일이 많아서 연락을 못 했나 봐요.”“일이 많아...?”여진숙은 속으로 실망스러우면서도 아닌 척 말을 이었다.“그래, 일이 많으면 좋은 거지. 우리 승아 톱스타가 다 됐네. 앞으로 더 유명해질 텐데, 일이 많다는 건 앞길이 창창하다는 뜻이야. 나도 정말 기쁘다고 전해줘.”“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그래, 가봐.”여진숙은 노승아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녀는 뒤늦게 도시락이 떠올라서 김예진에게 건넸다.“이건 내가 직접 끓인 닭곰탕이야. 우리 승아 일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지? 이거 좀 가져가서 쉬는 시간에 먹어줘.”김예진은 도시락을 받아서 들었다.“네, 전해드리겠습니다.”대답을 끝낸 김예진은 다시 몸을 옮겼다.여진숙은 문 앞에서 잠시 더 기다렸다. 그러나 노승아는 끝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실망한 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김예진이 휴게실에 들어갔을 때, 노승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언니, 아주머니는 돌려보냈어요. 이건 아주머니가 주신 닭곰탕이에요.”김예진은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노승아는 도시락을 힐끗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알았어.”“드실래요?”“아니.”노승아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여진숙의 행동이 조금도 감동스럽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여진숙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깟 닭곰탕 한 번 배달했다고 감동할 리도 없었다.노승아는 도시락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자 김예진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그녀는 여진숙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나 이제 닭곰탕 안 먹어.”노승아의 말을 김예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닭곰탕에 질렸겠거니 했다....여진숙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교도소로 갔다. 그녀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잠시 기다린 끝에 그녀는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 만났다. 두 사람은 유리창을 사이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여진숙의 눈에는 잠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
“나쁜 놈!”여진숙은 눈물을 머금은 채 이를 악물었다.“당신 때문에 내가 그 집안에 시집간 거야. 도건웅, 이 빚은 어떻게 갚을 건데?!”도건웅은 당연히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그건 기억하고 있어.”그는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출소한 다음 거하게 챙겨줄게.”여진숙은 차갑게 대꾸했다.“됐어, 이제는 그냥 네 삶을 살아. 나도 승아도 찾지 마. 승아 인생에 영향 주지 말라고. 그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야.”그녀는 도건웅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저 그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노승아는 아주 힘들게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여진숙은 도건웅이 그걸 망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게다가 노승아는 그의 곁에서 고된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했다.지난 세월 동안 노승아는 많은 고생을 했다. 그래서 여진숙은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앞으로 다시는 고생시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도건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여진숙을 바라봤다. 여진숙은 오늘 그냥 경고하러 온 것이다. 그래서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끝낸 그녀는 화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도건웅은 그녀를 끝까지 바라보며 희미한 냉소를 지었다....“검사받을 때 필요한 건 다 챙겼어?”집을 나서기 전 백지희가 물었다. 온지유는 일찍 일어나서 병원에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응, 다 챙겼어.”온지유는 가방 안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넣었다. 이제 그녀는 하이힐을 신지 않았고 옷차림도 편한 것뿐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원피스만 입었다.백지희는 차로 그녀를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마침 진료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대기 줄은 아주 길었다. 아무래도 주말인 탓에 그런 것 같았다.어쩔 수 없이 온지유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녀의 순서는 꽤 뒤쪽에 있었다. 아마 11시쯤 돼야 그녀 차례가 올 것 같았다. 일부는 오후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가기도 했다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여진숙은 서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진 그룹의 일에 관심이 일도 없었다.서찬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사모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죠.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글쎄 여이현이 여 대표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모두 해고했지 뭐에요. 지금 여진 그룹은 여이현의 천하에요.”여진숙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로 “그래요.”라고 대답한 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서찬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사모님, 여진 그룹이 여 대표님 손으로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는 요양원에 계시지 않아도 돼요. 들은 바에 의하면 사모님께서는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아직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신다면서요. 사실, 이 모든게 여이현 때문이잖아요.”“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겁니까?”여진숙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서찬이 그녀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 여진숙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분부했다.“알겠어요. 서 부장님 뜻대로 하세요.”허락을 받은 서찬은 한껏 부풀어 올라 당장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힌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담보했다.두 사람의 계획은 가정모임이었다.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기에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가정모임에서 그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여의현은 아니였다.밝은 하늘에 어둠이 깃들 무렵 여이현이 온지유와 별이를 데리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그는 여진숙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여진숙은 자상한 눈길로 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별아, 할머니께 인사해야지.”여이현의 말에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별이 인사를 받은 여진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별이에게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쥐여주었다.여이현과 온지유 두 사람은 확연히 달라진 여진숙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가정모임에 여희영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려던
최승현은 여희영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여희영 씨, 저는 진심으로 여희영 씨를 좋아해요.”여희영은 비록 여이현의 친고모는 아니었지만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긴 뒤로부터여이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여이현은 현재 그녀를 친 고모로 여기며 존경스러운 태도로 모시고 있다. 그건 여희영이 여진 그룹의 다양한 광고 촬영에 참여했다는 소식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최승현이 악착스레 달라붙는 것도 뒷백이 센 여희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여희영은 그의 속셈을 모른 채 짜증 나기만 했다.그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하려던 찰나 최승현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여희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최승현을 두 손으로 밀어 내팽개쳤다.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여희영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안돼요. 전 반대에요! 저와 약속하셨잖아요!”너무나도 가련한 온지유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더니 작은 소리로 두 사람을 의논하기 시작했다.여희영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차가운 말투로 최승현에게 말했다.“최승현 씨, 제가 분명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더는 저에게 달라붙지 마세요.”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호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최승현이 또 따라올까 봐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아직도 따라오고 있어?”여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아니요. 하지만 아직도 저희를 보고 있어요. 어? 이현 씨가 내려왔는데요.”여희영은 여이현이 두 사람의 계획을 망칠까 봐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했다.“아니 근데 이현이가 최승현 쪽으로 다가가서 뭘 말하고 있는데.”이 말에 온지유는 여희영을 밀어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이현이 입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이현 씨가 최승현 씨에게 계속 달라붙으면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말했어요.”온지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희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최승현 씨 연예인이에요?”“아니. 여
‘이게 끝이라고? 더 시도해 보지 않을 건가?’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자가 여이현을 붙잡을까 봐 많이걱정하고 있었다. 바람기 많은 남자보다 진지한 여자가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자신의 마음을 과감히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여이현, 운 좋은 줄 알아.”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이현이 부드러운 눈길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이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온지유를 빨아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어떤 여자분이 찾던 것 같던데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받아 주지. 그러면...”“그럼 나 간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재빨리 여이현을 잡으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이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안 갈 거야. 내 곁에 지유 너와 별이만 있으면 행복한걸.”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온지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금방 발생한 불쾌한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야시장 돌아다녔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재밌게 놀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연이어 하품하는 온지유를 보고 여이현은 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힘들게 약속한 단둘만의 데이트라 여이현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뜨거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나라에서 빠져나온 온지유의 머릿속은 온통 뜨거웠던 어젯밤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 요동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시간을 보니 벌써 별이 등교 시간이었다.온지유는 아직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여이현을 버려두고 옷을 바꾼 뒤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어머, 우리 자기 왜 그렇게 급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여희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가에대고
두 사람은 야시장 입구에 왔다. 인파로 사람들 머리만 보이자 여이현은 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 인파들 속에서 기회를 틈타 널 만지려고 하면 어떡해.”온지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흥, 드레스를 고를 땐 야시장을 구경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봐? 안 갈아입을래. 오랜만에 이쁘게 입었는데 왜 갈아입어. 게다가 여긴 사람도 많잖아. 그럼 더 신경 써야지.”여이현은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었기에 속으로 어떻게든 지켜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실컷 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온지유는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맛있는 것을 보면 맛보고 배가 부르면 여이현에게 넘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칵테일에 맛만 본 후 바로 여이현에게 주기도 했고 재밌는 것이 있으면 체험해보기도 했으며 무서운 것이 있으면 바로 여이현의 품으로 안겨들었다.그녀는 밤하늘에 뜬 예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에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당연히 눈치 없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했다.아이스크림을 사러 줄을 서고 있을 때 온지유는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여이현은 바로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인파 속에서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만진 건 확실했다.여이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얼른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명령 어조로 말했다.“당장 갈아입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갈 거야.”“왜 화를 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알아. 네 잘못이 아닌 거. 하지만 난 짜증이 난다고. 그런 썩을 놈들이 네 엉덩이를 만졌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불쾌하고 화가 나.”여이현의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 복수할 수도 없는 이 기분을.온지유는 억울했다. 그래서 아주 보수적인 옷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도 나오지 않았
말을 하던 여이현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더니 파란 장미를 꺼내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 씨,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게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오직 당신만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을 받아줘요. 내가 평생 당신을 걱정하고 아끼며 사랑할 수 있게.”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지유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다. 파란 장미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대답했다.“그럴게요.”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그녀를 안고 빙빙 돌았다.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확성기에 틀어놓은 것처럼 크게 들렸다.“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다음 순서로 그 장미를 뜯어 봐.”여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를 힐끗 보다가 조심스럽게 장미를 뜯었다.안에는 반지가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이현 씨, 정말!”“마음에 들어?”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얼마나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그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준비했다.다행히 온지유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온지유가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여자라면 대부분 그의 이벤트를 좋아할 것이다.그녀는 발꿈치를 들더니 여이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 후 입을 떼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이내 질척인 키스를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에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혔다. 여이현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뭐야. 하지 마. 나 배고파. 얼른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해줘.”온지유는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며 야릇해진 분위기를 피해 보려고 했다.여이현이 준비한 저녁은 전부 밸런타인데이와 연관이 있는 음식이었다.데코레이션이든 음식의 의미이든 전부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벤트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온지유는 하루 종일 자신을 방치해둔 것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