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침대에 앉아 문을 빤히 보았다. 여이현이 문밖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머릿속엔 여전히 그가 했던 고백의 말이 떠올랐다.이런 일에서 그녀는 아직 겁쟁이였다. 자신의 진심을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조급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이현이 방으로 들어왔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처럼 말이다.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대놓고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여이현은 우유를 들고 들어와 그녀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자기 전에 우유 한잔 마셔. 건장에 좋아. 달달한 우유는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대.”온지유는 자신의 앞으로 내민 우유를 보다가 여이현의 핏줄이 선명한 팔을 보았다. 순간 멈칫했다. 꼭 어디서 본 장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최근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한곳에 집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알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머리가 아팠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쌌다.여이현은 좋지 않은 그녀의 안색을 보며 물었다.“아파?”온지유는 고통이 사라진 후에 답했다.“괜찮아요.”그녀는 얼른 우유 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달랬다.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지나서야 물었다.“지유야, 중학교 때 혹시 납치당 한 적 없어?”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잔을 꽉 잡았다.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꼭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이현 씨...”온지유는 더욱 긴장해졌다. ‘혹시 뭐라도 알아낸 건가?'“그건 왜 물어보는데요? 딱히 큰 비밀은 아니었어요.”여이현은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는 것 같았다.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건 과연 좋은 걸까, 나쁜 일인 걸까?온지유의 부모도 그녀가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착각하고
정말 모르는 듯한 여이현의 모습에 온지유는 다소 실망을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녜요.”여이현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이내 몸을 돌리면서 더는 여이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주 담담한 얼굴이었다.그는 대체 왜 석이가 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설마 그때의 일을 깔끔하게 잊은 걸까?설령 그렇다고 해도 예전에 썼던 이름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던 걸까?온지유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었고 괜히 머리만 아팠다.눈을 감은 그녀는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여이현은 이불을 잘 정리해준 뒤 그녀의 모습을 한참 빤히 보았다. 쌕쌕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방을 나갔다.핸드폰을 꺼내니 몇십 통의 부재중이 와 있었다.그는 엄숙한 얼굴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회사 주가가 노승아 씨 사건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전화해도 안 받으시던데 저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얼른 방법을 생각해 주셔야죠.”여이현은 이 일을 해결할 시간이 없었다.“노승아 쪽은 소식 있어요?”“없습니다. 까발리는 기사가 난 뒤 회사와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여이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을 내렸다.“노승아가 직접 지금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럼 계약을 해지하세요.”핸드폰 너머에 있던 사람은 당황했다.“대표님, 정말로 계약을 해지하시게요?”여이현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차갑게 말했다.“노승아의 단독행동은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집안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젠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죠.”“네, 알겠습니다.”노승아의 기사는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었다.그녀와 손절하는 것이 지금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노승아도 어떤 일은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여이현은 이미 최선을 다해 은혜를 갚았기에 더는 노
노승아가 이 사태를 해결해야 연예계에서 다시 제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회사도 그녀의 편에 서 줄 것이다.인명진의 아지트에서 나온 지 몇 분 되지 않아 누군가 그녀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저 여자 입만 열면 거짓말인 노승아 아니야?”누군가 자신을 알아보자 노승아는 당황하면서 얼른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맞아! 노승아 맞아! 찔리는 게 많나 봐!”노승아는 이미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낀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알아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자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순간 그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와, 뻔뻔도 해라. 어떻게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한 거지? 길가다가 날달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봐?”“뻔뻔한 사람은 그런 생각이나 해봤겠어요? 애초에 양심이 있었으면 그런 짓은 안 했겠죠!”“거짓말을 한 것도 모자라 여론몰이하면서 일반인까지 악플 공격받게 하고! 지옥이나 가라!”노승아는 그들을 보았다. 저승사자라도 본 사람처럼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심장이 쿵쾅 뛰었다.“전 여론 몰아 일반인이 악플 공격받게 한 적 없어요. 거짓말도 한 적 없다고요...”퍽!이때 누군가 화단에서 흙을 집어 그녀를 향해 던졌다.노승아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그러나 인명진이 나타나 그녀의 앞에 막아서며 코트로 그녀를 감쌌다.흙과 풀 덩어리들은 다행히 그녀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놀란 노승아는 인명진의 코트 속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들어가.”인명진이 말했다.노승아는 바로 인명진과 함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이곳엔 경비가 있었기에 그들이 따라올 수 없었다.안전한 곳으로 들어온 후에야 인명진은 노승아에게서 손을 뗐다. 코트도 벗어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졌다.노승아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다.“저 사람들이 날 증오하고 있어. 날 잡아먹겠다고 했어!”눈물이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인명진이 말했다.“방법이 있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온지유는 잔뜩 경계하는 눈길로 그를 보며 물었다. 그와는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지난번에 노승아의 일로 만난 것이 전부였다.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으니 그녀는 그가 자신을 미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다거나.인명진도 다소 의외였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옆집 이웃이 그쪽이었군요.'온지유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인명진은 자신을 잔뜩 경계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제가 옆집에 살게 되었거든요. 온지유 씨 새로운 이웃이에요.”온지유는 고개를 내밀어 열린 옆집의 문을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그녀의 옆집은 원래 빈집이었다.다시 고개를 돌려 인명진을 보며 말했다.“이사 언제 했는데요?”“오늘 아침이요.”“전에 그쪽을 찾아갔을 때 그곳이 집이기도 하고 일하는 곳이기도 한 줄 알았는데요.”온지유는 그가 정말로 그곳에서 사는 줄 알았다.“아녜요. 바쁠 땐 그곳에서 지내긴 하지만 저에게도 편안한 개인 공간은 필요하거든요.”온지유는 그와 만났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우연이 너무도 지나친 것 같았다.인명진은 그녀의 경계를 풀기 위해 말했다.“이번에도 우연인 거예요. 그러니 절 너무 경계하지 말아요. 전 온지유 씨를 다치게 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지난번에도 그는 그녀를 도와주었다.만약 그가 흔쾌히 진료 기록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빨리 절대 노승아의 일을 까발릴 수 없었을 것이다.“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나쁘게 대할 리가 없었다.“그냥 왜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 건지 이해가 안 됐을 뿐이에요.”인명진은 딸기 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늘 금방 이사 와서 이웃과 잘 지내보려고 인사하고 있었어요. 이건 제가 직접 재배한 딸기에요. 먹어봐요.”온지유는 빨갛고 커다란 딸기를 보았다. 너무도 잘 익은 나머지 냄새도 향긋해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대가로 돈을 주긴 했지만, 인명진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으니 온지유는 기억하고 있었다.“네, 시간이 날 때요.”온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잠시만 기다려 줘요. 저한테 딸기를 주셨으니까 제가 다른 걸 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인명진은 그녀의 집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고 가만히 문 앞에서 기다렸다.온지유는 아직 그에게 무엇을 줄지 생각해보지 않았다.집안을 뒤져보다 발견한 신선한 우유 몇 병에 그녀는 전부 가지고 나왔다.인명진은 온지유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눈빛도 아주 부드러웠다. 그러다가 온지유가 몸을 돌렸을 때 얼른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집안에 먹을 것이 별로 없네요. 이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우유에요. 목장에서 직접 배달해오는 거라서 우유 맛이 진하긴 하지만 그쪽이 좋아할지는 모르겠네요.”온지유가 말했다.인명진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가 건넨 우유 두 병을 받았다.“고마워요. 잘 마실게요.”“뭘요. 지난번에 도와주신 것도 정말 고마웠어요.”“돈을 받고 정보를 판 거잖아요. 그러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인명진이 말했다.“노승아의 정보는 그냥 일반 정보가 아니었잖아요.”온지유는 그를 보며 말했다.“그쪽이 저한테 흔쾌히 정보를 파셨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 당연하죠.”인명진은 우유병을 만지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왜 제가 일부러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그의 말에 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앞에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그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온지유도 직설적으로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의심한 적 있어요. 저를 도와준 이유도 모르겠고, 저한테 접근해서 그쪽이 뭘 얻어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거든요.”그녀는 한참 생각한 후 말했다.“전 그냥 일반인이에요. 그래서 더 모르겠네요.”인명진도 그녀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얻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았다. 그는
백지희와 온지유는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인명진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긴 다리를 집안으로 뻗었을 때 그는 다소 망설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엔 들어갔다.백지희는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온 지 유는 주방으로 들어가 국수를 말았다.인명진은 현관 쪽에 서서 갈색 눈동자로 집안을 둘러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백지희는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멀뚱히 서서 뭐해요. 여기 와서 앉으세요.”인명진은 백지희를 보며 다가갔다.백지희는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도 궁금했다.이렇게나 훈훈하게 생겼다니.온지유의 곁으로 항상 잘생긴 남자가 다가왔던 것 같았다.“직업이 뭐예요? 나이는 어떻게 돼요? 가족은 몇 명이에요?”백지희는 차를 마시며 꼭 온지유의 엄마가 된 것처럼 이것저것 캐물었다.“의사예요.”인명진은 느긋한 어투로 백지희의 질문에 답하며 차를 마셨다.백지희는 그의 손목에 있는 염주를 보곤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신비롭기도 했다.“손목에 있는 염주는 무슨 의미예요? 염주하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봐서요. 혹시 종교가 불교?”인명진은 눈웃음을 지었다.“아니요. 그냥 습관처럼 하고 다니는 거예요.”백지희는 그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음을 눈치챘다.그래서 더는 묻지 않았다.어쩌면 첫 만남에 자신의 정보를 많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누구도 그녀처럼 활발하지 않았으니까.그녀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백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온지유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미안해.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게 해서. 네가 임산부라는 거 깜빡 잊고 있었네. 이리 줘, 내가 할게.”그녀는 온지유 대신 아침을 만들려 했다.비록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은 없으나 실력이 나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온지유는 거절했다.“국수 삶는 것뿐인데 뭐. 평소에도 내가 알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거든. 그러니까 얼른 가서 앉아 있어. 여긴 나
온지유는 인명진을 보았다.“아녜요. 정말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인명진이 말했다.“전 과일 자주 먹지 않아요. 맛있게 익은 딸기를 집안에 그대로 내버려 두면 썩을 테니까 그냥 인명진 씨가 드시는 게 나아요.”백지희는 시선을 돌려 인명진을 보았다. 어딘가 이상했다.꼭 온지유를 엄청 신경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얼른 국수 먹어요. 불면 맛이 없을 거예요.”온지유가 말했다.그들은 다시 국수를 먹었다.인명진은 온지유가 만들어준 국수를 한참 빤히 보고 나서야 젓가락을 들었다.그는 아주 천천히 먹었다.온지유가 한 그릇을 비웠을 때 인명진의 그릇엔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온지유는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왔다. 그러자 백지희도 따라오며 온지유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저 사람, 너 좋아하는 거 맞지?”온지유는 하마터면 입안에 우물거리고 있던 국수를 뿜어낼 뻔했다.“그럴 리가. 오늘까지 합쳐서 세 번밖에 만난 적 없어. 그리고 매번 대화도 길게 나누지 않았다고.”백지희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인명진을 어디에서도 본 적 없었다.“근데 난 왜 꼭 두 사람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지?”그녀는 말을 이었다.“널 보는 눈빛이 꼭 오랫동안 널 알고 지낸 사람 같았어. 안 그랬으면 왜 너한테 딸기도 가져다줬겠어? 너 딸기라면 환장하잖아, 아니야? 크고 빨간 딸기라면 엄청 좋아했는데, 마침 저 사람이 가져다준다고.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에이, 설마. 그냥 우연이겠지.”“간단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달라. 저 사람이랑 매번 마주치게 될 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녀가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었다.그다음 두 번째 만남에선 노승아의 진료 기록을 주었다.그리고 이번엔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를 주었다.매번 꼭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전부 만족해 주었다.그녀는 인명진을 본 적 없었다.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와 그
“세상에, 국물까지 다 마신 거예요?”백지희가 말했다.온지유는 팔꿈치로 백지희를 툭 쳤다. 그만 말하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그릇을 받아들었다.인명진이 말했다.“국물이 시원해서요.”이내 그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일이 남아서 그럼 먼저 가볼게요.”온지유가 말했다.“그래요.”인명진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나갔다.온지유는 그를 배웅하곤 문을 닫았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인명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문을 한참 빤히 본 뒤 자리를 옮겼다.그는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곳엔 벤츠 한 대가 있었다.걸음을 옮기려 하자 벤츠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차 안에는 빨간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얼굴이 예뻤을 뿐 아니라 긴 웨이브 펌을 하고 있었고 턱을 괸 채 웃으며 말했다.“왜 갑자기 장소를 바꾼 거야? 귀띔이라도 해주지.”그녀를 본 인명진은 바로 차 문을 열며 미소를 지었다.“빨리 찾았네?”빨간 머리 여자는 차에서 있어도 요염한 몸매가 한눈에 보였고 비싼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왜 여기로 온 거야? 여긴 전혀 네 취향 같지 않아 보이는데.”그녀는 인명진에게 결벽증이 있을 뿐 아니라 장소를 엄청 따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런 곳은 인명진에게 어울리지 않았다.인명진이 말했다.“그냥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 무슨 일이 있었어?”“있지.”빨간 머리 여자는 입꼬리를 올렸다.“보스가 널 찾아.”인명진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며 고개를 끄덕인 후 차에 올라탔다.여자는 먼저 출발했다. 인명진은 그녀의 차를 따라갔다.온지유는 외출 준비를 했다.“난 출근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지내도 돼. 열쇠는 여기 있으니까.”백지희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아주머니께서 나한테 물어보시더라고. 네가 이혼했는지.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렸어. 아직 안 했다고.”온지유는 몸을 굽힌 채 신발을 신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왜 그런 말 했어.”정미리는 그녀에게 직접 묻지 않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