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침대에 앉아 문을 빤히 보았다. 여이현이 문밖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머릿속엔 여전히 그가 했던 고백의 말이 떠올랐다.이런 일에서 그녀는 아직 겁쟁이였다. 자신의 진심을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조급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이현이 방으로 들어왔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처럼 말이다.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대놓고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여이현은 우유를 들고 들어와 그녀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자기 전에 우유 한잔 마셔. 건장에 좋아. 달달한 우유는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대.”온지유는 자신의 앞으로 내민 우유를 보다가 여이현의 핏줄이 선명한 팔을 보았다. 순간 멈칫했다. 꼭 어디서 본 장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최근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한곳에 집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알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머리가 아팠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쌌다.여이현은 좋지 않은 그녀의 안색을 보며 물었다.“아파?”온지유는 고통이 사라진 후에 답했다.“괜찮아요.”그녀는 얼른 우유 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달랬다.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지나서야 물었다.“지유야, 중학교 때 혹시 납치당 한 적 없어?”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잔을 꽉 잡았다.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꼭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이현 씨...”온지유는 더욱 긴장해졌다. ‘혹시 뭐라도 알아낸 건가?'“그건 왜 물어보는데요? 딱히 큰 비밀은 아니었어요.”여이현은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는 것 같았다.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건 과연 좋은 걸까, 나쁜 일인 걸까?온지유의 부모도 그녀가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착각하고
정말 모르는 듯한 여이현의 모습에 온지유는 다소 실망을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녜요.”여이현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이내 몸을 돌리면서 더는 여이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주 담담한 얼굴이었다.그는 대체 왜 석이가 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설마 그때의 일을 깔끔하게 잊은 걸까?설령 그렇다고 해도 예전에 썼던 이름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생겼던 걸까?온지유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었고 괜히 머리만 아팠다.눈을 감은 그녀는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여이현은 이불을 잘 정리해준 뒤 그녀의 모습을 한참 빤히 보았다. 쌕쌕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방을 나갔다.핸드폰을 꺼내니 몇십 통의 부재중이 와 있었다.그는 엄숙한 얼굴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회사 주가가 노승아 씨 사건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습니다. 전화해도 안 받으시던데 저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얼른 방법을 생각해 주셔야죠.”여이현은 이 일을 해결할 시간이 없었다.“노승아 쪽은 소식 있어요?”“없습니다. 까발리는 기사가 난 뒤 회사와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여이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을 내렸다.“노승아가 직접 지금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럼 계약을 해지하세요.”핸드폰 너머에 있던 사람은 당황했다.“대표님, 정말로 계약을 해지하시게요?”여이현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차갑게 말했다.“노승아의 단독행동은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집안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젠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죠.”“네, 알겠습니다.”노승아의 기사는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었다.그녀와 손절하는 것이 지금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노승아도 어떤 일은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여이현은 이미 최선을 다해 은혜를 갚았기에 더는 노
노승아가 이 사태를 해결해야 연예계에서 다시 제대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회사도 그녀의 편에 서 줄 것이다.인명진의 아지트에서 나온 지 몇 분 되지 않아 누군가 그녀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저 여자 입만 열면 거짓말인 노승아 아니야?”누군가 자신을 알아보자 노승아는 당황하면서 얼른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맞아! 노승아 맞아! 찔리는 게 많나 봐!”노승아는 이미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낀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알아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자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순간 그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와, 뻔뻔도 해라. 어떻게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한 거지? 길가다가 날달걀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봐?”“뻔뻔한 사람은 그런 생각이나 해봤겠어요? 애초에 양심이 있었으면 그런 짓은 안 했겠죠!”“거짓말을 한 것도 모자라 여론몰이하면서 일반인까지 악플 공격받게 하고! 지옥이나 가라!”노승아는 그들을 보았다. 저승사자라도 본 사람처럼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심장이 쿵쾅 뛰었다.“전 여론 몰아 일반인이 악플 공격받게 한 적 없어요. 거짓말도 한 적 없다고요...”퍽!이때 누군가 화단에서 흙을 집어 그녀를 향해 던졌다.노승아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그러나 인명진이 나타나 그녀의 앞에 막아서며 코트로 그녀를 감쌌다.흙과 풀 덩어리들은 다행히 그녀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놀란 노승아는 인명진의 코트 속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들어가.”인명진이 말했다.노승아는 바로 인명진과 함께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이곳엔 경비가 있었기에 그들이 따라올 수 없었다.안전한 곳으로 들어온 후에야 인명진은 노승아에게서 손을 뗐다. 코트도 벗어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졌다.노승아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다.“저 사람들이 날 증오하고 있어. 날 잡아먹겠다고 했어!”눈물이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인명진이 말했다.“방법이 있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온지유는 잔뜩 경계하는 눈길로 그를 보며 물었다. 그와는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지난번에 노승아의 일로 만난 것이 전부였다.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으니 그녀는 그가 자신을 미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다거나.인명진도 다소 의외였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옆집 이웃이 그쪽이었군요.'온지유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인명진은 자신을 잔뜩 경계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제가 옆집에 살게 되었거든요. 온지유 씨 새로운 이웃이에요.”온지유는 고개를 내밀어 열린 옆집의 문을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그녀의 옆집은 원래 빈집이었다.다시 고개를 돌려 인명진을 보며 말했다.“이사 언제 했는데요?”“오늘 아침이요.”“전에 그쪽을 찾아갔을 때 그곳이 집이기도 하고 일하는 곳이기도 한 줄 알았는데요.”온지유는 그가 정말로 그곳에서 사는 줄 알았다.“아녜요. 바쁠 땐 그곳에서 지내긴 하지만 저에게도 편안한 개인 공간은 필요하거든요.”온지유는 그와 만났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우연이 너무도 지나친 것 같았다.인명진은 그녀의 경계를 풀기 위해 말했다.“이번에도 우연인 거예요. 그러니 절 너무 경계하지 말아요. 전 온지유 씨를 다치게 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지난번에도 그는 그녀를 도와주었다.만약 그가 흔쾌히 진료 기록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빨리 절대 노승아의 일을 까발릴 수 없었을 것이다.“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나쁘게 대할 리가 없었다.“그냥 왜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 건지 이해가 안 됐을 뿐이에요.”인명진은 딸기 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오늘 금방 이사 와서 이웃과 잘 지내보려고 인사하고 있었어요. 이건 제가 직접 재배한 딸기에요. 먹어봐요.”온지유는 빨갛고 커다란 딸기를 보았다. 너무도 잘 익은 나머지 냄새도 향긋해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대가로 돈을 주긴 했지만, 인명진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으니 온지유는 기억하고 있었다.“네, 시간이 날 때요.”온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잠시만 기다려 줘요. 저한테 딸기를 주셨으니까 제가 다른 걸 드릴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인명진은 그녀의 집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고 가만히 문 앞에서 기다렸다.온지유는 아직 그에게 무엇을 줄지 생각해보지 않았다.집안을 뒤져보다 발견한 신선한 우유 몇 병에 그녀는 전부 가지고 나왔다.인명진은 온지유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눈빛도 아주 부드러웠다. 그러다가 온지유가 몸을 돌렸을 때 얼른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집안에 먹을 것이 별로 없네요. 이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우유에요. 목장에서 직접 배달해오는 거라서 우유 맛이 진하긴 하지만 그쪽이 좋아할지는 모르겠네요.”온지유가 말했다.인명진은 거절하지 않고 그녀가 건넨 우유 두 병을 받았다.“고마워요. 잘 마실게요.”“뭘요. 지난번에 도와주신 것도 정말 고마웠어요.”“돈을 받고 정보를 판 거잖아요. 그러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인명진이 말했다.“노승아의 정보는 그냥 일반 정보가 아니었잖아요.”온지유는 그를 보며 말했다.“그쪽이 저한테 흔쾌히 정보를 파셨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 당연하죠.”인명진은 우유병을 만지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왜 제가 일부러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그의 말에 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앞에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그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온지유도 직설적으로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의심한 적 있어요. 저를 도와준 이유도 모르겠고, 저한테 접근해서 그쪽이 뭘 얻어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거든요.”그녀는 한참 생각한 후 말했다.“전 그냥 일반인이에요. 그래서 더 모르겠네요.”인명진도 그녀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얻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죠.”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았다. 그는
백지희와 온지유는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인명진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긴 다리를 집안으로 뻗었을 때 그는 다소 망설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엔 들어갔다.백지희는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온 지 유는 주방으로 들어가 국수를 말았다.인명진은 현관 쪽에 서서 갈색 눈동자로 집안을 둘러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백지희는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멀뚱히 서서 뭐해요. 여기 와서 앉으세요.”인명진은 백지희를 보며 다가갔다.백지희는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도 궁금했다.이렇게나 훈훈하게 생겼다니.온지유의 곁으로 항상 잘생긴 남자가 다가왔던 것 같았다.“직업이 뭐예요? 나이는 어떻게 돼요? 가족은 몇 명이에요?”백지희는 차를 마시며 꼭 온지유의 엄마가 된 것처럼 이것저것 캐물었다.“의사예요.”인명진은 느긋한 어투로 백지희의 질문에 답하며 차를 마셨다.백지희는 그의 손목에 있는 염주를 보곤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신비롭기도 했다.“손목에 있는 염주는 무슨 의미예요? 염주하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봐서요. 혹시 종교가 불교?”인명진은 눈웃음을 지었다.“아니요. 그냥 습관처럼 하고 다니는 거예요.”백지희는 그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음을 눈치챘다.그래서 더는 묻지 않았다.어쩌면 첫 만남에 자신의 정보를 많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누구도 그녀처럼 활발하지 않았으니까.그녀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백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온지유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미안해.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게 해서. 네가 임산부라는 거 깜빡 잊고 있었네. 이리 줘, 내가 할게.”그녀는 온지유 대신 아침을 만들려 했다.비록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은 없으나 실력이 나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온지유는 거절했다.“국수 삶는 것뿐인데 뭐. 평소에도 내가 알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거든. 그러니까 얼른 가서 앉아 있어. 여긴 나
온지유는 인명진을 보았다.“아녜요. 정말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인명진이 말했다.“전 과일 자주 먹지 않아요. 맛있게 익은 딸기를 집안에 그대로 내버려 두면 썩을 테니까 그냥 인명진 씨가 드시는 게 나아요.”백지희는 시선을 돌려 인명진을 보았다. 어딘가 이상했다.꼭 온지유를 엄청 신경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얼른 국수 먹어요. 불면 맛이 없을 거예요.”온지유가 말했다.그들은 다시 국수를 먹었다.인명진은 온지유가 만들어준 국수를 한참 빤히 보고 나서야 젓가락을 들었다.그는 아주 천천히 먹었다.온지유가 한 그릇을 비웠을 때 인명진의 그릇엔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온지유는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왔다. 그러자 백지희도 따라오며 온지유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저 사람, 너 좋아하는 거 맞지?”온지유는 하마터면 입안에 우물거리고 있던 국수를 뿜어낼 뻔했다.“그럴 리가. 오늘까지 합쳐서 세 번밖에 만난 적 없어. 그리고 매번 대화도 길게 나누지 않았다고.”백지희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인명진을 어디에서도 본 적 없었다.“근데 난 왜 꼭 두 사람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지?”그녀는 말을 이었다.“널 보는 눈빛이 꼭 오랫동안 널 알고 지낸 사람 같았어. 안 그랬으면 왜 너한테 딸기도 가져다줬겠어? 너 딸기라면 환장하잖아, 아니야? 크고 빨간 딸기라면 엄청 좋아했는데, 마침 저 사람이 가져다준다고.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에이, 설마. 그냥 우연이겠지.”“간단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달라. 저 사람이랑 매번 마주치게 될 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녀가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었다.그다음 두 번째 만남에선 노승아의 진료 기록을 주었다.그리고 이번엔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를 주었다.매번 꼭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전부 만족해 주었다.그녀는 인명진을 본 적 없었다.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와 그
“세상에, 국물까지 다 마신 거예요?”백지희가 말했다.온지유는 팔꿈치로 백지희를 툭 쳤다. 그만 말하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그릇을 받아들었다.인명진이 말했다.“국물이 시원해서요.”이내 그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일이 남아서 그럼 먼저 가볼게요.”온지유가 말했다.“그래요.”인명진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나갔다.온지유는 그를 배웅하곤 문을 닫았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인명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문을 한참 빤히 본 뒤 자리를 옮겼다.그는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곳엔 벤츠 한 대가 있었다.걸음을 옮기려 하자 벤츠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차 안에는 빨간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얼굴이 예뻤을 뿐 아니라 긴 웨이브 펌을 하고 있었고 턱을 괸 채 웃으며 말했다.“왜 갑자기 장소를 바꾼 거야? 귀띔이라도 해주지.”그녀를 본 인명진은 바로 차 문을 열며 미소를 지었다.“빨리 찾았네?”빨간 머리 여자는 차에서 있어도 요염한 몸매가 한눈에 보였고 비싼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왜 여기로 온 거야? 여긴 전혀 네 취향 같지 않아 보이는데.”그녀는 인명진에게 결벽증이 있을 뿐 아니라 장소를 엄청 따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런 곳은 인명진에게 어울리지 않았다.인명진이 말했다.“그냥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 무슨 일이 있었어?”“있지.”빨간 머리 여자는 입꼬리를 올렸다.“보스가 널 찾아.”인명진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며 고개를 끄덕인 후 차에 올라탔다.여자는 먼저 출발했다. 인명진은 그녀의 차를 따라갔다.온지유는 외출 준비를 했다.“난 출근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지내도 돼. 열쇠는 여기 있으니까.”백지희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아주머니께서 나한테 물어보시더라고. 네가 이혼했는지.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렸어. 아직 안 했다고.”온지유는 몸을 굽힌 채 신발을 신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왜 그런 말 했어.”정미리는 그녀에게 직접 묻지 않
“괜찮아요. 기사 아저씨께서 한 번만 내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제 것만 낸 거로 하면 되죠. 돌려 주지 않으셔도 돼요.”최승현은 택시비를 내고 차에서 내려 여희영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서 여희영을 몸 뒤로 숨겼다.“두 사람이 왜 같은 차에서 내려요?”온지유는 질투 난 듯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최승현을 바라보았다. 여희영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연기에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최승현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그쪽을 온지유 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사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그 말에 두 사람은 조각상처럼 굳어졌다. 최승현은 진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했다.여희영은 그런 최승현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무시하고 온지유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여희영 씨, 전 여희영 씨를 진심으로 좋아해요. 여희영 씨가 저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희영 씨를 제 여자로 만들 거에요!”고래고래 소리치는 최승현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리로 주의를 기울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여희영은 최승현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온지유와 함께 여이현을 찾으러 올라갔다.연회가 열리는 곳은 교외에 있는 바캉스 호텔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호텔 전부를 연회장소로 정해서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도록 만들었다.홀로 연회장에 들어선 여희영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각양각색의 남녀들이 모여있는 연화장은 마치 소개팅을 하는 것 같았다.이때 그녀 눈이 들어온 간판이 그 추측을 실증해줬다. 그제야 여이현이 왜 온지유를 참가 못 하게 막으려 했는지 깨달았다.“아가씨, 저와 함께 춤을 추실 수 있나요?”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젠틀하게 초대를 보내왔다.여희영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소개팅할 마음이 없었다.여희영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누군가는 일부러 연회에 참가했다.“이분은 여희영 씨라고 여진그룹 여
“어머, 네가 마음 많이 썼네. 나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맞아. 예전에는 파리에서 생활하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알다시피...”여진숙이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원인을 알고 있었다.이때 온지유가 여진숙에게 선물 상자를 가져다주며 말했다.“이 얘긴 그만하는 게 어때요? 자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한번 열어보세요. 맘에 드시는지.”여진숙이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열쇠와 부동산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부동산 계약서에 쓰여있는 파리 주소를 보자 여진숙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온지유가 여진숙의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줬다.“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어머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말씀하세요. 의료팀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현 씨가 모두 준비해뒀어요.”여희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이번 가정모임에서 여진숙이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 여이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파리에서 자리 잡고 살 기회를 얻은 여진숙은 그 자리에서 여씨 가문을 여이현에게 전부 넘겨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다.지금부터 여진숙은 남은 세월을 편안히 누리고 재단의 일에 손을 뗄 것이다.세 사람이 모임 장소에서 나오자 여희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인제야 비로소 여진 그룹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이현아, 정말 대단해.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진숙이 파리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말이야.”그녀는 여이현이 그처럼 세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온지유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어느 정도 주행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서찬이 찾아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불러 간병인을 매수했죠. 서찬이 떠나자마자 간병인 쪽에서 정보를 입수했어요.”‘그렇구나.’두 사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여진숙은 서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진 그룹의 일에 관심이 일도 없었다.서찬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당연히 사모님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죠.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글쎄 여이현이 여 대표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모두 해고했지 뭐에요. 지금 여진 그룹은 여이현의 천하에요.”여진숙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덤덤한 태도로 “그래요.”라고 대답한 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서찬은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설득했다.“사모님, 여진 그룹이 여 대표님 손으로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는 요양원에 계시지 않아도 돼요. 들은 바에 의하면 사모님께서는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아직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신다면서요. 사실, 이 모든게 여이현 때문이잖아요.”“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겁니까?”여진숙이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서찬이 그녀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 여진숙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분부했다.“알겠어요. 서 부장님 뜻대로 하세요.”허락을 받은 서찬은 한껏 부풀어 올라 당장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그는 허리를 굽힌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담보했다.두 사람의 계획은 가정모임이었다. 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였기에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가정모임에서 그녀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여의현은 아니였다.밝은 하늘에 어둠이 깃들 무렵 여이현이 온지유와 별이를 데리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그는 여진숙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여진숙은 자상한 눈길로 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별아, 할머니께 인사해야지.”여이현의 말에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별이 인사를 받은 여진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별이에게 미리 준비한 돈 봉투를 쥐여주었다.여이현과 온지유 두 사람은 확연히 달라진 여진숙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가정모임에 여희영이 빠질 리가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려던
최승현은 여희영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여희영 씨, 저는 진심으로 여희영 씨를 좋아해요.”여희영은 비록 여이현의 친고모는 아니었지만 여진 그룹에 큰 변화가 생긴 뒤로부터여이현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여이현은 현재 그녀를 친 고모로 여기며 존경스러운 태도로 모시고 있다. 그건 여희영이 여진 그룹의 다양한 광고 촬영에 참여했다는 소식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최승현이 악착스레 달라붙는 것도 뒷백이 센 여희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여희영은 그의 속셈을 모른 채 짜증 나기만 했다.그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하려던 찰나 최승현이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여희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최승현을 두 손으로 밀어 내팽개쳤다.이 장면을 목격한 온지유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여희영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안돼요. 전 반대에요! 저와 약속하셨잖아요!”너무나도 가련한 온지유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더니 작은 소리로 두 사람을 의논하기 시작했다.여희영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차가운 말투로 최승현에게 말했다.“최승현 씨, 제가 분명히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더는 저에게 달라붙지 마세요.”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호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최승현이 또 따라올까 봐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아직도 따라오고 있어?”여희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아니요. 하지만 아직도 저희를 보고 있어요. 어? 이현 씨가 내려왔는데요.”여희영은 여이현이 두 사람의 계획을 망칠까 봐 두려워 발걸음을 재촉했다.“아니 근데 이현이가 최승현 쪽으로 다가가서 뭘 말하고 있는데.”이 말에 온지유는 여희영을 밀어내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이현이 입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이현 씨가 최승현 씨에게 계속 달라붙으면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말했어요.”온지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희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최승현 씨 연예인이에요?”“아니. 여
‘이게 끝이라고? 더 시도해 보지 않을 건가?’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여자가 여이현을 붙잡을까 봐 많이걱정하고 있었다. 바람기 많은 남자보다 진지한 여자가 더 위험하기 마련이다.자신의 마음을 과감히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남자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여이현, 운 좋은 줄 알아.”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 앞길을 막고 서있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이현이 부드러운 눈길로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끝이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온지유를 빨아 들어갈 것으로 보였다.“어떤 여자분이 찾던 것 같던데 가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받아 주지. 그러면...”“그럼 나 간다.”그 대답에 온지유는 재빨리 여이현을 잡으며 소리쳤다.“가긴 어딜 가!”이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안 갈 거야. 내 곁에 지유 너와 별이만 있으면 행복한걸.”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온지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금방 발생한 불쾌한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시 야시장 돌아다녔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재밌게 놀고 나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 어느덧 늦은 밤이 되었다.연이어 하품하는 온지유를 보고 여이현은 택시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힘들게 약속한 단둘만의 데이트라 여이현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뜨거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왔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나라에서 빠져나온 온지유의 머릿속은 온통 뜨거웠던 어젯밤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어 요동치는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시간을 보니 벌써 별이 등교 시간이었다.온지유는 아직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여이현을 버려두고 옷을 바꾼 뒤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어머, 우리 자기 왜 그렇게 급해.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여희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귀가에대고
두 사람은 야시장 입구에 왔다. 인파로 사람들 머리만 보이자 여이현은 바로 그녀를 끌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옷이라도 갈아입고 올까? 인파들 속에서 기회를 틈타 널 만지려고 하면 어떡해.”온지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흥, 드레스를 고를 땐 야시장을 구경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나 봐? 안 갈아입을래. 오랜만에 이쁘게 입었는데 왜 갈아입어. 게다가 여긴 사람도 많잖아. 그럼 더 신경 써야지.”여이현은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었기에 속으로 어떻게든 지켜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실컷 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온지유는 더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맛있는 것을 보면 맛보고 배가 부르면 여이현에게 넘겨주었다. 알록달록한 칵테일에 맛만 본 후 바로 여이현에게 주기도 했고 재밌는 것이 있으면 체험해보기도 했으며 무서운 것이 있으면 바로 여이현의 품으로 안겨들었다.그녀는 밤하늘에 뜬 예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에 사람들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리고 있었다.당연히 눈치 없는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했다.아이스크림을 사러 줄을 서고 있을 때 온지유는 누군가와 부딪치게 되었고 바로 표정이 일그러졌다.여이현은 바로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인파 속에서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만진 건 확실했다.여이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얼른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명령 어조로 말했다.“당장 갈아입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집으로 갈 거야.”“왜 화를 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알아. 네 잘못이 아닌 거. 하지만 난 짜증이 난다고. 그런 썩을 놈들이 네 엉덩이를 만졌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다 불쾌하고 화가 나.”여이현의 기분을 누가 알겠는가. 자신의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몰라 복수할 수도 없는 이 기분을.온지유는 억울했다. 그래서 아주 보수적인 옷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옷을 갈아입고도 나오지 않았
말을 하던 여이현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더니 파란 장미를 꺼내 온지유에게 건넸다.“온지유 씨,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평생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게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오직 당신만 사랑할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을 받아줘요. 내가 평생 당신을 걱정하고 아끼며 사랑할 수 있게.”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지유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다. 파란 장미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지나서야 그녀는 대답했다.“그럴게요.”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그녀를 안고 빙빙 돌았다.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확성기에 틀어놓은 것처럼 크게 들렸다.“내 고백을 받아줬으니까 다음 순서로 그 장미를 뜯어 봐.”여이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를 힐끗 보다가 조심스럽게 장미를 뜯었다.안에는 반지가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이현 씨, 정말!”“마음에 들어?”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얼마나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그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며 준비했다.다행히 온지유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온지유가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여자라면 대부분 그의 이벤트를 좋아할 것이다.그녀는 발꿈치를 들더니 여이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짧은 입맞춤 후 입을 떼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이내 질척인 키스를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에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온지유는 숨이 막혔다. 여이현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뭐야. 하지 마. 나 배고파. 얼른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해줘.”온지유는 배고프다는 핑계를 대며 야릇해진 분위기를 피해 보려고 했다.여이현이 준비한 저녁은 전부 밸런타인데이와 연관이 있는 음식이었다.데코레이션이든 음식의 의미이든 전부 마음에 들었다.이런 이벤트를 싫어할 여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온지유는 하루 종일 자신을 방치해둔 것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