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한 가정, 또 한 가정을 망가뜨려 왔나 봐요? 자기 탓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나 보죠?”“내 탓이 뭐가 있는데요!”여진숙이 흥분하며 말했다.“다 당신들이 이렇게 만든 것 아니에요!”노승아는 격분하여 언성이 점점 높아져 가는 두 사람을 말렸다.“고모님, 아주머님과 싸우지 마세요. 아주머님도 잠깐 화가 올라오셨을 뿐이세요. 전 괜찮으니, 아주머님도 한발 물러서는 게 어떠세요? 이러지 마세요.”“너랑은 상관없어! 내 탓을 하는 게 아니라면 여진숙한테는 왜 일러바친 거래? 대신 싸워주길 바란 게 아니냐? 입만 번지르르해서는. 난 너 같은 사람이 제일 싫어.”여희영이 노승아를 향해 큰 소리로 욕했다.그에 여진숙이 여희영을 밀어냈다.“누굴 욕하는 거예요? 승아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욕을 해? 대체 얼마나 더 밑바닥까지 내려가려는 거예요?”“내가 밑바닥이라 해도 당신보다야 더하겠어요?”여희영도 여진숙을 밀쳤다.“지금 내 몸에 손을 댄 거예요?”여진숙이 눈을 부릅떴다.“오늘 한번 끝장을 보죠!”“내가 가만둘 줄 알아!”여희영은 두말없이 여진숙과 몸싸움을 시작했다.뒤따라온 온지유와 나민우가 마침 그 광경을 목격했다.둘은 조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노승 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제 자리에 서 있었다.“고모님!”묘원은 계단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처럼 뒤엉켜있으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었다.온지유의 심장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와 있었다.온지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둘을 떼어 놓으려 뛰쳐나갔다.나민우는 온지유를 걱정해 그 뒤를 따랐다.“지유야, 조심해!”행여 온지유가 다치기라도 할이 조심스러웠다.여진숙과 여희영은 누구도 먼저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머리카락도 서로 잡아당겨 헝클어져 있었다.“당신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해대니 아들이 나를 소원하게 된 거죠! 그것도 모자라 이젠 승아에게도 손을 대! 오늘에야말로 아버지 눈 아래에서 승부를 내고 말 거에요. 아버지께서 보고 계신다면 당
“이현아.”여희영과 싸우던 도중에 여진숙은 그의 존재를 발견하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온지유도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이현은 그들의 발언이 전혀 의외이지 않았다는 듯 차가운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여이현은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여희영은 여이현의 눈빛을 보고 충격받았다.그 순간, 여희영은 자신이 흥분해 여이현의 출신을 밝혀버린 것에 후회했다.여이현에게는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여희영은 정신이 혼미해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현아...”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이들이 묘원에 온 것을 알고,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지 걱정되어 와본 것뿐이다.여진숙은 더더욱 화가 났다.“여희영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요? 날 해코지하려고 악을 쓰더니, 곱게 죽지 못할 거예요!”그녀는 여희영을 힘껏 밀쳤다.여희영의 정신은 여이현에게 팔려있었고, 기세도 누그러들어 있었다. 여이현에게 상처라도 낼까 손도 내렸다.그 탓에 여진숙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다.단김에 밀려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온지유는 연이은 충격에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 여희영이 계단 밑으로 넘어지는 것을 보고 소리 질렀다.“고모님!”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여이현의 얼굴에도 걱정이 어렸다.여희영은 열몇 층의 계단을 굴러 내려갔다. 온몸에 상처가 났지만 가장 심한 건 머리에 난 상처였다.온지유가 가장 먼저 여희영의 곁으로 달려왔다.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옆에서 외칠 뿐이었다.“고모님, 일어나세요!”여희영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여진숙은 놀라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진 여희영을 바라보았다.자기 손이 피투성이가 된 것만 같았다.“난... 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저 사람이 날 놀리지만 않았어도 밀칠 것까진 없었는데. 어쨌든 난 모르는 일이에요!”여이현이 걸어와 여희영을 안아 올렸다.“고모님!”불러도 대답이 없자 여이현은 바로 자리를 옮겼다.“빨리 병원으로 가!”그는 여희영을 안고 묘원 밖으로 향했다.
"아니야..."여진숙이 말했다."넌 그래도 내 아들이야. 나도 후회하고 있어. 최대한 보답할게...""필요 없어요."여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어머니라고 부르는 것도 제 최대의 인내에요. 그 정도로 만족하시죠."여진숙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너 나한테 그러면 안 돼. 너희 아버지처럼 굴 거야? 내가 너를 왜 데려온 줄 알기나 해?"여이현이 대꾸했다."제가 있어서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게 헛수고였었죠."말 한마디 한마디가 여진숙의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그녀와 여재호의 결혼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그녀가 억지로 여재호에게 시집간 것이었으니까.여재호는 그녀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혐오했다.그녀는 결혼만 하면 여재호가 자신의 것이 될 거로 생각했다.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여진호는 그 뒤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늘 홀로 빈방을 지켜야 했다.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여진숙은 큰 노력을 기울였다.심지어는 그의 아이를 가지려고까지 했다.여진숙은 여재호가 아들을 원하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는 아들을 낳으면 여재호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것이고, 그가 마음을 돌려 그녀 곁으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여진숙은 완벽한 가정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결국 여진숙은 아들을 입양할 수밖에 없었다.그 아이가 바로 여이현이였다.하지만 여재호의 마음은 냉혹했다. 그녀가 자기 배로 아들을 낳았어도, 여재호는 여진숙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여재호는 아들조차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실망한 여진숙은 모든 책임을 갓난아기인 여이현에게 돌렸다.여진숙은 여이현을 학대하기 시작했다.밥도 주지 않으며 아이를 굶겨 죽이려 했다.여진숙은 여이현의 생사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다행히도 여희영이 이를 발견하고 여이현을 그 환경에서 벗어
여진숙이 노승아를 감싸고 있던 바로 그때, 온지유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여진숙이 다시 말했다.“지유야, 승아가 지금 이런 상태인데, 더 이상 상처 주지 마."여진숙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식’을 보호하려 하고 있었다.온지유는 노승아가 연약한 모습으로 우는 것을 보고 말했다."왜 말하면 안 되죠? 누구 하나라도 고모님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나요? 어머님은 아들이 떠날지 걱정하고, 노승아는 누군가 자신을 탓할까 봐 걱정하며 동정표를 얻으려 연기를 하고 있잖아요. 고모님이 계단에서 밀려 떨어진 건 제가 두 눈으로 다 봤어요. 실행한 건 어머니고, 배후에서 주도한 사람은 노승아겠죠!"고모님은 심각한 부상으로 수술실에 들어갔고, 온지유는 그들에게 더 이상 어떠한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여진숙이 호통쳤다."내가 밀긴 했지만, 아주 가볍게 건드린 것뿐이었어. 왜 여희영이 일부러 넘어졌다고는 하지 않는 거니?"온지유는 여진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절대 가볍지 않았어요. 모두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여진숙은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나서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지유 너 나한테 이런 말투로 말하는 거니? 그래도 너의 시어머니고, 너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야. 너 진짜 이 집에서 계속 살고 싶긴 한 거야?"온지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쁜 짓을 해놓고 할 말이 없으니 이제 와서 어른이라는 이유로 입을 막으려고요? 절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어머니잖아요? 노승아 때문에 이젠 모든 걸 다 인정하는 거예요? 도대체 노승아가 어머니께 무슨 사람이기에 이렇게 보호하려고 애쓰는 거예요?"여진숙은 노승아의 팔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네가 여희영을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승아에게 손을 대지 않았을 거고, 승아가 청력을 잃을 일은 없었을 거야!"온지유의 시선이 다시 노승아에게 향했다. 노승아는 여전히 흐느끼며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모습은 참으로 가련해 보였다.자신이 듣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여진숙은 여이현의 냉담한 태도에 당황했다."이현아!"여이현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차가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여진숙은 여이현에게 몇 마디 더 말하고 싶었지만 노승아가 주저앉아 울고 있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여진숙은 결국 노승아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승아야, 울지 말고 빨리 일어나."노승아는 일어서서 여진숙의 품에 엎드려 울며 말했다."이모님, 제가 그렇게 나빠요? 그래서 모두가 저를 싫어하는 건가요?""아니야, 아니야, 나도 널 좋아하고, 모두가 널 좋아해."여진숙은 노승아의 등을 두드리며 그녀를 달랬다.노승아는 계속 여진숙의 품에 엎드린 채 울었다.이러고 있으면, 잘못이 있더라도 피해자로 보여 누구도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여기가 병원이 아니고 사람들이 없었다면, 온지유는 손을 올려서라도 노승아의 가면을 벗겨냈을 것이다.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는지, 좋은 볼거리가 될 것이다.물론 온지유는 알고 있었다. 노승아가 한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여진숙은 변함없이 그녀를 보호하리라는 것을.그들 사이의 관계는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그때,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나?"온지유가 고개를 들어보니, 여재호가 다가오고 있었다.정장을 입고 있었고, 키는 여이현과 비슷했다. 머리카락은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비록 나이가 오십이 넘었지만, 여전히 젊어 보였으며, 외모도 준수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여희영의 사고에 대해 약간의 걱정을 드러냈다.여희영은 그의 친여동생이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는 여가 집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살면서도 여재호를 몇 번밖에 본 적이 없었다.매번 그는 일에 바빠 보였다..그도 여호산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관계는 그리 좋지 않은 듯 보였다.밖에서는 여씨 성을 감추고 현재호라 말하고 다녔으니 말이다.지난 몇 년 동안, 할아버지는 그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돌아가신 뒤 여진그
여재호는 여진숙의 모든 울부짖음을 무시했다.그에게 여진숙의 눈물은 전혀 가치가 없었다.한 여자로서 여진숙은 남편의 냉담한 태도에 점점 더 무너져 내렸고, 더욱 격하게 외치기 시작했다."말 좀 해봐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예요? 당신한테는 여희영이 더 중요한 거죠, 그렇죠? 난 당신과 정식으로 결혼한 아내예요, 나한테 이러시면 안 돼요!"여진숙은 두 눈이 벌게지도록 울면서, 남편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신경 써주길 바랐다.그가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더 봐준다면, 분노와 불안이 다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여재호는 아무 말 없이 침착하게 낯선 사람 대하듯 했다.여이현은 그들의 이러한 관계를 보며 익숙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의견도 없었다.여이현에게 그들은 이름뿐인 부모일 뿐이었다.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이 모든 것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여재호는 더 이상 여진숙을 견딜 수 없어 자리를 일어나며 여이현에게 말했다."이만 내려가마. 희영이 깨어나면 알려줘."여이현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여재호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그는 여이현에게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부자간의 정이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여이현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친여동생인 여희영뿐이었다.말을 끝낸 여재호는 자리를 떠났다.여진숙은 그가 자신을 무시하자, 급히 따라가며 말했다."이대로 가면 안 돼요. 나한테 설명은 하고 가야죠!"노승아는 여진숙의 감정이 매우 격해진 모습을 보고 속으로 놀라웠다. 여희영와 다툴 때도 여진숙은 이렇게 동요한 적은 없었다.이곳에서는 여진숙만이 자신의 편이었다.노승아는 당연히 그녀를 따라갔다.여진숙이 막 여재호의 소매를 잡았을 때, 그는 마치 세균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로 소매를 뿌리치며 냉담하게 말했다."난 할 만큼 했어. 더 이상 혐오감을 느끼게 하
여이현은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일까?예전에 여희영이 몇 번 말한 적이 있었지만, 온지유는 당시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마도 여이현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저 속으로 묵인했을 뿐일지도 모른다."지유야."나민우가 그녀 옆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잠시 쉬는 게 어때? 이렇게 있으면 너도 지치잖아."온지유는 오랫동안 서 있어 허리가 아팠다. 하지만 여희영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서 옆에 앉으며 말했다."고모님이 깨어날 때까지는 여기서 기다릴래.""그럼 나도 같이 있을게."나민우가 다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이현은 문틀에 기대어 나민우가 온지유를 걱정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민우의 눈길에서는 따뜻한 배려가 엿보였다.온지유도 그의 친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했다.그때, 한층 더 큰 불쾌감이 여이현의 온몸을 휘감았다.여이현은 일부러 옆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차 소리를 냈다.그 의자는 나민우가 앉아 있던 의자였다.나민우가 고개를 들자, 여이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실례했습니다, 실수로 발이 닿았네요.""괜찮습니다."나민우도 유연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여이현이 말했다."여기는 가족 대기 구역입니다. 나 대표님, 회사 일이 한가 하지는 않을 텐데, 여기서 뭘 하는 거죠?"나민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유와 함께 있어 주는 거죠. 임신 중인데 고모님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니, 혼자 두는 게 불안해서 옆에 있어 주는 거예요.""고모님?"그 말을 듣고 여이현은 더욱 불쾌해졌다."나민우씨, 제 고모가 언제 당신 고모가 됐는지요?"나민우는 여전히 웃음을 띤 채, 여이현의 차가운 태도와는 달리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모르셨나요? 저와 고모님도 이제 친구가 됐습니다. 고모님은 지유가 존경하는 분이니, 저도 당연히 존경해야죠."여이현은 주먹을 꽉 쥐며, 충동을 억누르려 애썼다."나 대표님이 이렇게 가벼운 분일 줄은 몰랐네요. 지유가 고모님이라고 부르는 건 나를 따라서인데, 당신은 무슨 자격
"아니요."온지유가 대답했다.여이현의 얼굴이 굳어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곧 전처가 될 사람이죠."의사는 그들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말했다."환자는 가벼운 뇌진탕과 손목 골절이 있습니다.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면 회복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라는 생각에 온지유는 곧바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천만에요."두 사람은 여희영을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온지유는 여희영의 입술이 말라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따뜻한 물을 가져와 면봉으로 그녀의 입술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여이현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병실에는 환자의 휴식을 방해할 다른 사람은 없었다.온지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맞은편에 앉아 여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다가 어느새 피곤해져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결국 잠에 빠지고 말았다.얼마 후 온지유는 놀라서 깨어났다.꿈에서 그녀는 온통 어둠에 싸인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그녀를 괴롭히는 듯, 자주 그런 악몽을 꾸곤 했다.온지유는 불쾌감을 느끼며 깨어났다.정신을 차린 온지유는 자신이 담요 대신 누군가의 외투를 덮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외투는 아직 따뜻했고, 익숙한 향기가 났다. 그녀는 그것이 여이현의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러나 병실에는 여이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들고 있던 정장을 내려놓았다. 여이현의 한 번의 따뜻함에 속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것은 익숙한 일이었다.여이현이 자신에게 해준 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여희영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온지유는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생활용품을 사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나중에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병실을 나서자, 나민우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여진숙과 노승아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민우야."온지유가 그를 불렀다.나민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나왔구나.""오래 기다렸지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