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의 편집장이 말했었다. 그녀의 편집 실력이 좋다고.편집장은 그녀에게 보육원의 에피소드도 예능에 편집해 넣으라고 했다.만약 더 많은 후원을 받게 되고 투자자도 생기면 고정 예능이 되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예능에 전부 담을 수 있다고 했다.온지유도 처음엔 보육원의 아이들이 새로운 집에서 살기를 바라며 찍은 것이었다.그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세상 모든 아이들을 챙길 수는 없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이번엔 정말 고마웠어요.”온지유가 겸손하게 말했다.“뭘요. 급하게 연락했는데 이유도 묻지 않고 도와주셨잖아요. 저야말로 고마워서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지유 씨도 저를 도와주었으니 당연히 저도 지유 씨가 고맙죠.”한정민은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걱정하지 말고 이 일은 나한테 맡겨요. 보육원의 아이들도 분명 행복해질 거예요.”온지유가 들어가자 아이들은 바로 해맑은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이모!”아이들은 그녀에게 모여들었다.“이모, 우리도 고기 먹을 수 있대요!”“이모이모, 이것 봐요. 예쁜 머리핀 생겼어요!”아이들은 앞다투어 서로가 가진 것을 자랑해댔다.아이들은 원래부터 순진해 작은 것에서 쉽게 만족하고 기뻐했다. 배불리 먹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아주 행복해했다.“그래, 너희들은 앞으로도 매일 고기랑 영양 가득한 반찬도 많이 먹을 수 있을 거야.”온지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이모, 감사합니다.”“아니야,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다 이 삼촌 덕분인걸. 이 삼촌이 너희들이 고기 먹을 수 있게 도와준 거야.”“감사합니다, 삼촌.”아이들은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했고 자신들에게 잘해준 사람을 똑똑히 기억하려 했다.한정민은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원장은 바빴던지라 온지유와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보살폈다.“이모, 늑대 삼촌은? 늑대 삼촌은 왜 안 왔어요?”이때 한 아이가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 뜨며 물었다.
온지유는 메스꺼움을 꾹꾹 참아보려고 했다.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예민해진 후각 탓에 바로 구역질을 해댔다.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한정민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걱정스럽게 물었다.“지유 씨, 괜찮아요...?”온지유는 더는 참지 못하고 코와 입을 막은 채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그녀의 반응을 보던 한정민은 의아했다.‘보통 임신한 사람들이 저런 증상을 보이던데...'순간 그는 뭔가 깨달은 듯 이내 그녀가 들어간 화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온지유는 한참 게워냈다.입덧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메스꺼움이 사라지고 온지유는 찬물로 세수하고 나왔다.한정민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넸다.“고마워요.”“왜 구역질을 하게 된 거예요? 혹시... 임신이에요?”“네, 바로 알아채셨네요.”온지유는 숨기지 않았다.한정민은 놀란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다.“축하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이가 생겼을 줄은 몰랐네요.”그는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온지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저희 다른 거 얘기해요.”한정민도 눈치챘다. 온지유가 아이의 아빠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그녀가 화제를 바꾸려 하니 한정민도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다만 마른 몸을 이끌고 임신한 채로 열심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혹시 임신 때문에 여진에서 그만둔 건가?'비서보다 못한 직급임에도 그녀가 방송국에 취직한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한정민은 다소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자랑 남자는 체력부터가 다르잖아. 만약 배가 불러오기라도 하면 그때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러 다닐 건가?'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한정민은 바로 비서에게 말했다.“가서 먹을 것 좀 사 와요.”“네, 대표님.”비서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카메라 감독과 자기 일을 하러 갔다.피비린내를 맡았을 때 그녀는 손을 올려 코와 입을 막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꾹꾹 참고
“정민 씨를 놔줘요!”온지유는 한정민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한정민을 감싸드는 그녀의 모습에 여이현은 더욱 화가 났다.“하, 왜. 마음이 아파? 내가 오늘 이 자식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는 발을 들더니 한정민을 걷어찼다.한정민은 입을 열 새도 없이 그의 발길질에 다시 철퍼덕 쓰러졌다.놀란 온지유는 얼른 한정민을 부축하면서 일으켰다.여이현이 그런 그녀를 말리며 소리를 높였다.“지금 감히 내 앞에서 이 자식을 걱정해?!”온지유는 여이현을 보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왜 이렇게 막무가내인 거예요! 한정민 씨는 저랑 같이 새로 일하게 된 사람이라고요!”“그걸 내가 믿을 것 같아?”여이현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이 자식이 방금 널 부축하려고 했어. 네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임산부가 쓸 물건까지 준비해 두었겠냐고! 이 자식이 그 자식이 아니라면 왜 널 걱정하겠어? 하, 넌 지금 또 날 속이고 있잖아!”“제가 언제 이현 씨를 속였다고 그래요!”“날 속인 적 없다고?”여이현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나랑 먼저 약속을 잡은 사람은 너야. 그런데 자리에는 없고 엉뚱한 채미소가 있더라?”그의 말에 온지유는 더는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그래요, 이 일로 당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걸 인정할게요. 우리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지금은 한정민 씨 상태가 먼저예요.”“아직도 이 자식을 걱정하고 있어?”온지유의 한 마디 한 마디 전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한정민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코를 꽉 잡으며 말했다.“전 괜찮아요. 두 분이 먼저 대화를 나눠서 오해를 푸세요.”온지유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녀는 여이현이 왜 이렇듯 충동적으로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와 대화가 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정민 씨, 미안해요. 저 때문에 정민 씨가 다치셨네요. 제가 일단 상처부터 치료해 드리고 나서 사과하고 배상해 드릴게요.”“전 괜찮아요. 혼자 치료하러 갈 수 있
두 사람의 싸움에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여이현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온지유의 말에 이성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온지유는 이상하리만큼 냉정했다.그녀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슴 쪽에서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이혼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그와 이혼하게 되니 실망에 휩싸였다.어쩌면 그녀는 여이현이 자신에게 이렇듯 화를 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또 어쩌면 오늘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져 그녀가 아직 전부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다투게 되어 그런 것일 수도 있다.여이현은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온지유는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네, 그럼 동사무소에서 봬요.”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그래!”여이현은 몸을 틀어 떠나버렸다.떠나기 전에 바닥에 있는 임산부를 위한 비타민을 보곤 짜증이 났는지 발로 걷어찼다.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온지유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감정 기복이 너무도 심했던지라 이번엔 어지럼증에서 그치지 않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온지유 씨!”보육원의 원장이 쓰러지는 그녀를 보며 바로 달려와 부축했다.“괜찮아요? 안 되겠어요. 쉬어요.”온지유는 원장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자, 물 좀 마셔요.”선생님이 그녀에게 물잔을 건넸다.“고마워요.”온지유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잔을 받았다.“온지유 씨, 세상에 싸우지 않고 사는 부부는 없어요. 그래도 싸우고 나면 한 침대에서 자면서 화해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녀에게 물잔을 건넨 선생님은 그녀를 위로했다.“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사실 예전의 그녀는 여이현과 다툰 적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불만이 있어도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이현은 그녀를 무시하며
“괜찮아요. 제가 차를 끌고 왔거든요. 혹시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나중에 제가 다시 정식으로 사과하러 찾아갈게요.”한정민이 말했다.“정말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전 오늘 거저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온지유 씨의 능력을 믿으니 나중에 오늘 맞은 것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상처를 치료한 뒤 한정민은 온지유와 대화를 나누다가 먼저 보육원을 떠났다.한정민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민우에게 문자를 보냈다.[온지유 씨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같은 시각 나민우는 집에 있었다.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캐주얼하게 입고 있었다. 한정민의 문자를 읽자마자 그의 손이 멈칫했다.[몰랐어.]한정민의 의외라고 생각했다.[그럼 앞으로 온지유 씨랑 잘 되긴 글렀네. 지유 씨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배고, 오늘 보니까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네가 지유 씨랑 잘 되긴 아주 힘들겠어.]나민우의 안색이 변했다. 결국 포기한 듯한 문자를 보냈다.[지유가 행복하다면... 난 그거면 돼...]그는 이내 한 마디 더 전송했다.[지유가 직접 행복하다고 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지유 씨가 임신하긴 했어도 상황을 보니까 아기 아빠를 포기하려는 것 같았어. 혹시 아기 아빠라도 되어줄 생각은?]나민우가 답장했다.[그런 기회가 나한테도 차려진다면 그럴 생각이야.]한정민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와, 정말 순애 녀석이네.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순애보일 거야. 10년 넘게 변함없이 지유 씨를 짝사랑하다니... 정말 대단해.]나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사실 짝사랑은 그에게 힘든 것이었다.하루하루 마음 편히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온지유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불안하면서도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라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그가 바라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했다. 온지유가 행복한 것.그는 온지유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까지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의지할만한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모
송신영은 그릇을 들며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그의 입가까지 가져다 댔다.그러자 나민우는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유지했다.“알았어. 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래, 천천히 먹어. 아직 뜨거우니까.”송신영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가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나민우는 숟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다.“어때?”송신영은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나민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맛있어.”송신영은 아주 기뻤다.“아직 내가 만들어온 반찬은 안 먹어봤지? 먹어본 사람들은 다들 요리에 재능이 있다면서 칭찬해줬어. 다음번에 만들어 줄게. 어머님과 아버님께 네가 어떤 반찬을 좋아하는지 이미 물어봤으니까 다음엔 재료를 사 와서 네 주방에서 만들어 줄게, 어때?”“괜찮아.”나민우는 바로 거절했다.“요즘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시간이 날 때 와서 해줄게.”나민우는 열정적인 송신영을 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거절했다.“신영아, 날 이렇게 챙겨줄 필요 없어. 우리 부모님 말씀도 열심히 듣지 않아도 돼. 나도 날 잘 챙길 수 있어. 남녀가 유별한 세상인데 네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차린다면 다른 사람들이 안 좋게 볼 거야. 너 그러다가 나중에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그래.”그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송신영은 바로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어제 술 잔뜩 먹고 나서 네가 다른 사람의 이름만 중얼거리는 거 들었어.”송신영이 물었다.“온지유,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거야?”나민우는 시선을 떨군 채 담담하게 답했다.“응.”솔직하게 말하자 송신영의 안색이 변했다. 열정이 팍 식어버린 그녀가 또 물었다.“왜? 얼굴이 예뻐서? 나보다 예뻐?”나민우는 그녀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나한테는 지유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송신영은 온지유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비록 나민우는 원래부터 성격이 좋아 그녀를 대할 때도 부드럽게 대하며 심한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
온지유는 고개를 돌렸다.채미소는 씩씩대며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갈궜다.다행히 반응이 빨랐던 온지유는 그녀가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든 것임을 눈치채고 바로 확 잡아버렸다.채미소는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애를 쓰며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X, 감히 날 물 먹여? 내가 방심한 사이에 든든한 뒷배를 찾은 것도 모자라 네 쓰레기 같은 기획안을 편집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말이 돼? 왜, 네가 뭔데 자꾸만 내 것이어야 했을 것들을 빼앗아 가는데!”그녀가 만약 보육원에 찾아가 소란을 피운다면 그녀에게 안 좋을 것이 분명했고 회사에서도 해고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게다가 누군가 온지유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으니 행여나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녀는 앞으로 이 바닥에서 일하기 어려워진다.초조해진 채미소와 달리 온지유는 그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채미소 씨가 절 계략으로 밀어 넣는 건 괜찮고, 전 채미소 씨가 꾸민 일에 방어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리고 전 채미소 씨가 원하는 대로 여이현 씨를 미소 씨 앞으로 데려와 줬잖아요. 여이현을 유혹하지 못했다는 건 채미소 씨의 능력이 부족해서죠.”“하, 지금 나한테 능력이 부족하다고 했어? 이 개 같은 X이! 죽여버릴 거야!”채미소는 커다란 눈을 부릅뜨더니 방송국인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온지유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행동은 회사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되었고 보안 요원이 달려와 급히 그녀를 막았다.온지유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도 놀란 기색 하나도 없었다.“각자 능력대로 일하자고요. 제가 채미소 씨 밥그릇에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제 밥그릇에도 손을 댈 생각하지 말아요!”“하, 여이현을 내 앞으로 데리고 오기 전에 분명 나에 대해 뭐라고 말했지? 안 그랬으면 왜 날 보자마자 화를 냈겠냐고! 사악한 X, 너만 아니었어도 난 지금 이미 여이현을 내 남자로 만들었을 거야!”채미소는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여이현을 꼬시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탓을 온지유에게
온지유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바지에 피가 묻어있었다.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어제부터 배가 살살 아팠지만 바빴던 탓에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신은 처음이었기에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그리고 지금, 배가 너무도 아팠다.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 안으며 몸을 굽혔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났다.여이현은 그녀가 피를 흘리는 순간부터 안색이 굳어져 있었다. 서둘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부축하였다.“온지유!”온지유는 극심한 통증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아팠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이현의 팔을 잡으며 힘겹게 말했다.“아기...”여이현은 두말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가 지금 바로 병원에 데려다줄게.”“배 비서, 얼른 시동 걸어요!”배진호는 놀라 넋을 잃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던지라 정신을 차리며 얼른 두 사람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안고 차 안에 밀어 넣은 뒤 자신도 올라탔다. 온지유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눕혔다. 혈색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너무도 걱정되었다.“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그는 온지유가 이렇듯 피를 많이 흘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애초에 그녀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녀가 얼마나 아픈지 줄줄 흐르는 피만 봐도 알 수 있었다.운전대를 잡은 배진호는 속도를 올렸다.온지유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혈색을 잃은 입술을 틀어 물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그녀는 불안해졌고 손톱이 그의 손등에 박힐 정도로 꽉 잡고 있었다.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으면서 힘겹게 말을 꺼냈다.“이현 씨, 꼭, 꼭 아기를 지켜야 해요. 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돼요!”그녀가 여이현에게 한 말은 아기를 지켜달라는 말뿐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이 아기를 지켜주지 않을까 봐
문이 쿵 하고 닫히고 문지원과 지석훈은 현관에서부터 거실 소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소파에 쓰러질 때 문지원이 머리를 부딪힐까 봐 지석훈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었는데 키스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서로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잠깐만요.”문지원이 말했다.지석훈이 멈추려 하지 않자, 그녀는 아예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내려가서 사와요.”지석훈은 붉게 달아오른 문지원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 떠올리더니 고의로 안 간다고 했다.“안 써도 돼.”그는 문지원의 귓불을 깨물었고 숨소리도 점점 더 거칠어졌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한번 건드리면 멈출 수가 없었다.하지만 문지원은 확고했다.“안 돼요. 사 와요.”지석훈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문지원의 입술에 입 맞추고 옷을 입었다.“알았어. 기다려.”아파트 입구에 바로 편의점이 있기에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지석훈은 얼마나 급했는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에 핑크색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그동안 그의 욕망은 추호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지석훈은 뒤에서 문지원을 껴안으며 속삭였다.“당신이 뜯어줘.”문지원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직접 해요.”“해줘.”문지원은 하는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비닐 포장을 뜯었다.지석훈은 그녀를 들어 올렸고 문지원은 그가 리드하는 대로 움직였다.일이 끝난 다음에도 지석훈은 부족했던지 문지원의 쇄골에 키스하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왜 갑자기 이렇게 열정적이야?”“싫어요? 그럼, 다음부터 조심할게요.”“아니, 너무 좋아. 다음에도 계속해.”지석훈은 그녀의 얼굴을 돌려 키스하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 뒤로도 이러한 관계를 서로 묵인했다.문지원은 가끔은 자기 집에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석훈의 집에서 지냈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석훈의 집에는 그녀의 물건들이 화장품부터 시작해서 일상용품, 그리고 여성용품들까지 추가되었다.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금방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지석훈이 말했다.“그 사람을 괴롭히지 마.”지석훈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강윤슬도 잘 알고 있다.강윤슬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이 떨릴 정도의 차가움에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숨기며 말했다.“석훈아, 오랜만에 연락해서 한다는 말이 그거야?”“선배, 너무 심했어. 나는 혁수가 아니라서 선배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혁수한테 신경 써.”“혁수는 이제 아이까지 있어. 그리고 나한테 이제 관심이 없어.”지석훈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나도 선배에게 관심이 없어.”강윤슬은 한 사람의 말에 이토록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강윤슬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지석훈은 또 말했다.“선배가 나를 받아준 적이 없으니 우리 사이에 끝나고 말고 할 건 없잖아. 그리고 우리 사이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강윤슬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석훈아, 너한테 문지원 씨가 다른 사람이야?”지석훈은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강윤슬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액자를 바라보았는데 사진에는 지석훈이 젊은 시절의 최고의 미소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를 향했던 지석훈의 최고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져서 안타까울 뿐이었다.그리고 지금 강윤슬은 똑같은 눈빛으로 문지원을 바라보고 있다.문지원은 강윤슬의 눈빛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편했다.“윤슬 씨,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죠?”두 사람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강윤슬은 길거리에 오고 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문지원을 향해 물었다.“석훈이한테서 저에 대해 들은 적 있어요?”“조금요.”강윤슬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렇겠죠. 석훈이랑 나 워낙 아무런 관계가 아니니까요. 다만 예전에는 내가 석훈이를 쳐다보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후회했죠. 시작한 적도 없는 관계이니... 그냥 방금 한 얘기는 잊어버려요.”문지원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강윤슬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문지원은 어른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지석훈은 그녀가 반쯤 울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속일 생각하고 있어?”문지원은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지석훈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은 듯 다른 말로 그녀를 앉혀 식사 하게 하였다.마침, 문지원은 급하게 회사에서 나와서 아직 먹지 않았다.오늘뿐만 아니라, 요 며칠 동안 주주들과 상의 하느라 바빠서 그녀는 종종 하루에 두 번, 심지어 하루에 한 번 밥을 먹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초췌하여 지 씨 아버지께서 한눈에 알아차리지 않았을 것이다.지석훈은 병원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왔다.병원의 식당은 바깥 식당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양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는 마치 진작에 그녀와 함께 식사하기로 계획한 것처럼 미리 두 개를 준비하였다.조용히 도시락을 먹으며 문지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 지석훈이 입을 열었을 때도 반응하지 못하였다.“요즘 뜻대로 안 돼?”“조금.”문지원은 무의식으로 대답하고 살짝 굳었는데 지석훈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지 의사 선생님, 계세요?”밖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 수술이 있기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네, 알겠어요.”지석훈이 대꾸하자 곧 밖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떠났다.문지원은 이제야 그녀가 바빠서 몸을 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선츠도 비슷하고, 심지어 지나쳐도 모자랄 정도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의사는 워낙 바쁜 직업이라.그런데 그는 이렇게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문지원을 위로하려고 하다니... 문지원은 갑자기 양심이 은근히 아파 났다.지석훈은 한쪽에 걸려 있는 흰 가운 외투를 입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난 먼저 일하러 갈게 넌 여기 있을래 아니면 먼저 돌아갈래? 먼저 돌아가면 저녁에 널 찾으러 갈게.”문지원은 도시락을 다 먹고 내려놓았다.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돌아간 후 지석훈이 그녀를
그 남자는 분명히 강윤슬한테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니 문지원은 돌아가서 주의하기로 결정했다.“화닝 빌딩의 프로젝트에 대해 귀 그룹의 요구 사항을 문정 그룹에서 보았어요. 우리 그룹에서는 두 가지 사항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 우리는 보수와 지불이 불균형하다고 생각해요. 귀사는 모든 재료를 최고 수준으로 배분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익은 10% 미만만 이에요.”“둘째, 우리는 자체 인력이 있으며, 채용 측면에서 귀 그룹에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요.”이것이 바로 문지원이 오늘에 온 목적이었다.문지원은 성격이 매우 좋은 사람이기에 일반적으로 갑방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그녀는 그 조건들을 진지하게 경청하지만 이번에 강윤슬은 너무 심했다.심지어 강윤슬 자신조차도, 한 짓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갑방이 협력 파트너에게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무슨 사람을 쓰는지까지 상관 한다니 한 일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10%도 안 되는 이윤을 양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약서에서 말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기자'는 말장난을 하는 것은 문자께임으로 사람을 놀리는 거짓말인 것같앗다.강윤슬은 그녀가 왜 왔는지 진작 알고 있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고객이 신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아.”“고객이 이렇다 하지만 갑방이 프로젝트를 당신들에게 맡기고 당신들도 받아들였는데 지금 할 수 없다고 하면 계약을 위반한 것이야. 계약을 위반하면 두 배의 계약금을 물어내야 하는데, 이 돈을 문정 그룹에서 감당할 수 있어?”그 전에 문지원은 강윤슬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비록 그녀와 지석훈은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문지원은 정말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상대방의 악의를 느낄 수 있지만, 왜 사람들은 모두 근거 없는 악의를 가지고있는지 몰랐다.문지원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강윤슬 씨, 저에게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그러나 협력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았
문지원은 강윤슬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반드시 가야 했다.한바탕 망설인 후, 그녀는 빠르게 결정 하였다. 가야 할 바엔 가자, 무슨 칼산 불바다도 아니고...강윤슬이 근무하는 회사는 규모가 상당했고, 국내에서 10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큰 회사답게 프런트 데스크 직원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문 대표님, 강윤슬 대표님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프런트 데스크에서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였다. “이쪽으로 오세요.”문지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있는 강윤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문지원은 강윤슬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비서가 말했다.“대표님이 회의하느라 바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문지원은 이 말투가 아주 익숙하였다. 그녀는 강윤슬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소심인 배 한 것이 아니라 전화는 부재중이고,직접 왔는데 바쁘다고 하니, 일부러 그녀를 피하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협력을 위해 특별히 진심으로 여러분을 찾아왔는데 만약 여러분이 문 씨와 협력할 마음이 없다면, 직접 말하면 될 테니 저를 원숭이로 놀릴 필요는 없어요.”“그럴 리가요.”비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 하였다.아마도 그들은 생김새가 온화하고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선의를 가진 문지원이 이렇게 기세등등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문지원은 이미 결정하였다. “5분, 5분만 더 기다릴게요.”“5분후에 오지 안으면 합작이 무산된 걸로 칠 것이에요.”협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는것은 안 되였다. 적어도 문지원은 그런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그녀는 강윤슬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지만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니 급하지 않았다.5분이 지나자, 문지원은 떠날 준비를 했다.강윤슬은 하이힐에 리듬을 타며 느릿느릿 걸어왔다.“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죄송하네.”그녀는 손을 내밀고 입가에 선의의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문지원을 응시하
“조금만 더 늣더라도 아이를 볼 수 있을거야!” 강윤슬은 여기 오기전에 문지원의 상황을 알아보았기에 그녀의 금황을 알고 있었다. 강윤슬은 지금 기분이 좀 상해 있었다.그녀는 산에서 구출된 여자들을 경멸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날을 누가 알가? 누군가 문지원을 건드린 적이 있는지.문지원의 머리는 세게 부딪힌 것만 같았다. 한바탕 격동이 지나간 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려고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자신이 지금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섣불리 눈을 뜨면 오해받을 수 있기에 문지원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기다리는 과정이 특히 길고 견디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나는 지원 씨를 관심하니 그런 것과는 무관해.”지석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몇 글자는 문지원의 마음속에서 순간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이 말을 들은 강윤슬의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 하였다.“지석훈, 너 진심이야?”“응, 난 이전 너한테 예전같은 마음이 없어.”말하면서 지석훈은 돌아섰다.“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를 바래.”강윤슬은 남자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남긴 쓴맛을 맛보았다. 이 쓴맛은 옛날 지석훈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그녀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며 병실을 떠났다.문지원은 계속 자는 척하고 하려 하였는데 머리 위에서 지석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자는 것처럼 있을 거야?”문지원은 천천히 눈을 뜨면서 그를 향해 어색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갖다 줄까?”문지원은 난처해하고 있기에 간절히 바랐다.지석훈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녀에게 따뜻한 죽 2인분을 가져왔다.문지원이 자신을 보자 그는 천천히 포장을 풀면서 말했다.“나도 마침 배가 고파서 너랑 같이 먹을 거야”문지원은 아주 행복하다고 느꼈다.그녀는 병원에서 이삼일 휴양하고 퇴원했다. 안 그래도 큰 문제는 없는데 그냥 좀 피곤한데 갑자기 저혈당까지 돌발하였기에 쓰러진
깜짝 놀란 지석훈은 급히 문지원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그녀가 수면부족으로 쓰러진 것을 알자 지석훈은 무력하고 마음이 약해졌다.“넌 왜 자신을 이렇게 돌보고 있어?”지석훈은 병석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문지원은 아직 혼수상태기에 아쉽게도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문지원에게 포도당 점액을 처방하여 지금 그 수액을 맞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충분히 자야 깨어날 것 같았기에 지석훈은 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미 사람을 찾았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지석훈!”강윤슬이 급히 병실로 뛰여 들어오자 지석훈이 밤을 새워도 잠깐 눈붙일 생각을 하지않고 가만히 병석 앞에서 지켜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강윤슬이 들어온 것을 보자 지석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신 여긴 왜 왔어?”그의 말투는 아주 평범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조그마한 눈물이 고였다. 그는 진작에 마음을 내려놓았기에 그녀에 대해 예전의 느낌은 없었으나 강윤슬은 아직 내려놓지 못하였다.그녀는 원래 지석훈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손에 있는 일도 돌볼 겨를 없이 서둘러 왔는데 그는 다른 여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윤슬은 손바닥의 부드러운 살을 꼬집으며 입가에 보기 싫은 미소를 지었다.“석훈 씨가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네,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다친 줄 알았어.”말한 후 강윤슬은 병석에 누워있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문지원 씨는 괜찮아?”문지원은 눈꺼풀을 움직였지만 뜨지 않았다. 사실 강윤슬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척하였다.강윤슬은 눈을 반짝이며 방금 문지원이 약간 흔들린 눈꺼풀을 보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의심하였다.지석훈은 병석에 있는 문지원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일이 좀 생겼는데 사람은 괜찮아.”강윤슬은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사람이 괜찮은데 왜 여전히 여기에서 지키고 있어?”“병원에 그렇게 많은 환자가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네.”지석훈은 얼굴을
문지원은 지석훈만 홀로 남겨서 이 모든 상황을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안에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마지막으로 문지원은 그 지석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후시경을 통해 보이는 그의 날씬한 실루엣은 차가 나아갈수록 서서히 멀어졌지만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 역력했다.문지원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으며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차는 마치 활시위에서 쏘아 올린 화살처럼 순식간에 도로를 벗어나 달려 나갔다.곧바로 마을 사람들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몰려와 지석훈을 완전히 포위했다....한편 마을의 경찰서에는 한 통의 신고 전화가 접수되었다.신고자는 네 명의 갇힌 여성을 데리고 경찰서에 도착해 신고했으며 그 모습을 본 경찰 내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신원 확인 후 이들 여성의 몸에는 장기간 감금과 학대의 흔적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마을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을 꼭 구출해 주세요.”문지원은 지친 목소리로 경찰을 바라보며 애원했다.그녀는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새도록 차를 몰았다. 식사 대신 몇 모금의 물만 마셨다.이제는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려 눈꺼풀이 무겁지만 문지원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그 이유는 지석훈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경찰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네. 이름은 지석훈. 마을에 의료 봉사하러 간 의사예요.”문지원은 지석훈에 관한 기본 정보를 말했다.“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빼앗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번에 우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사람 덕분이에요.”그런 사람이 그토록 황량한 산골짜기 같은 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경찰서 사람들은 바로 회의를 열어 구조대를 꾸려 밤새도록 그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문지원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경찰들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처음엔 단호히 반대했다.하지만 문지원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안 돼요. 꼭 가야 해요. 그 사람이 무사한지 제가 직접 확인해야
지석훈은 그녀들을 방 안으로 들인 후 여성들이 마을에서 겪은 처참한 상황을 듣고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문지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요. 그들은 원해서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산 너머에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곳에 남아 그들의 아이 낳는 도구가 되어 살아갈 이유는 없어요.”그 말에 문지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조수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 중 일부는 이미 아이를 낳은 상태였고 이곳을 떠난다는 건 곧 자신의 아이를 두고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로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곳에 남아 계속 학대받으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이 망설일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서둘러야 해요. 마을 사람들이 곧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챌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찾으러 오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우린 석훈 씨한테 폐 끼칠 생각 없어요. 그저 차 한 대만 빌려주면 돼요.”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석훈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차만 있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다. 문지원은 운전을 할 줄 알았기에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모두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차는 빌려줄 테니까.”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예상했던 대답이었음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며 얼굴에 희망을 띄웠다.눈앞에 놓인 탈출의 기회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석훈은 곧장 차를 가지러 갔다. 차 한 대에 모든 인원을 태울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붙이면 간신히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이었다.문지원은 재빠르게 조수현과 다른 여성들을 차에 태운 후 지석훈이 계속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근데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요? 같이 안 갈 거예요?”지석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눈치 못 챘어? 이들은 남자한테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몇몇은 나랑 눈도 못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