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리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전의 열정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괜찮아, 손님이니 그쪽에 앉아 있어.”예전의 정미리는 여이현을 몹시 좋아했었다.사람을 사랑하면 그 집 위의 까마귀도 사랑하게 된다더니.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정미리는 유감스러웠지만 그걸로 인해 딸과 정이현을 탓하고는 싶지 않았다.결혼은 두 사람의 일이다.그들이 이혼을 결정한 이상, 정미리도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이제 여이현이 집에 들어온다면 손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더 이상 여이현에게 도움을 받지 않을 거다.여이현은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온지유 부모님 마음 속에서의 자신의 이미지가 크게 떨어졌다는 것을 느꼈다.여이현은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싶었고, 온지유의 부모님 앞에서 잘 보이려 애썼다.“앉아만 있기에는 한가하니 조금이라도 도울게요.”여이현은 정미리의 냉담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도우러 갔다.정미리는 몇 마디 하려 했지만, 여이현은 이미 주방에서 예전처럼 자발적으로 일을 도왔다.정미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예전에는 분명 행복했다.온지유는 그녀의 유일한 딸이었고, 남편은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가족 앞에서는 겸손하게 행동해 지유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보여주었었다.정미리는 그렇게 생각했었고, 소중한 딸이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그러나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정미리는 아무 말 없이 여이현이 돕게 내두었다.온지유는 부모님의 기분을 항상 신경 쓰고 있었다. 겉으로는 예의 있게 행동하지만, 부모님은 그녀와 여이현의 결혼에 대해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아버지는 늘 염려하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더 크게 낙심하셨을 것이다.좋은 배우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형수.”강윤희는 온지유를 여러 번 불렀다.온지유는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며 말했다.“응, 왜 그래?”“여러 번 불렀는데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예요?”강윤희는 온지유가 생각에 잠
정미리는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다. 아무리 예전에는 여이현에게 만족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결혼이 그저 거래의 일부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정미리는 딸이 행복하기를 원했지, 사랑조차 없는 결혼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았다.정미리가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예측이 갔던 여이현은 손을 멈추지 않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장모님, 곧 저의 대답을 들려드릴 겁니다.”정미리는 말했다. “지유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하지. 너무 오래 기다리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정미리의 말은 분명했다. 이혼하게 된다면, 지유의 조건으로는 충분히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부모인 그들은 이미 나이가 들어, 평생 지유와 함께할 수는 없었다.지유가 좋은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고 자식을 갖는 것을 원하며, 아무도 지유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다.식사 시간이 되었고, 가족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강윤희는 기실 여태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해봤다. 할아버지 생신이나 중요한 명절에는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정미리는 지유에게서 강윤희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들었다.어머니로서 정미리는 그것에 깊이 공감했기에 강운희를 특별히 보살펴 주었다.“많이 먹어, 지유보다도 더 말랐네. 조금 더 통통해야 보기 좋아.”정미리는 강윤희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강윤희는 얼른 그릇을 받아서 들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이모님.”온지유는 또 말했다.“윤희야, 우리 집을 네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 이번에는 준비가 잘 안됐지만, 다음에 올 때는 먹고 싶은 걸 미리 말해줘. 우리가 다 만들어 줄게.”이토록 진심으로 보살펴 주는 모습에 강윤희는 심히 감동했다.강윤희는 컵에 담긴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그러고는 불현듯 멈칫했다.온지유는 그녀가 말없이 묘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 입맛에 안 맞아?”강윤희는 고개를 저었다.
강윤희는 온지유가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가족을 가진 것이 부러웠다.강윤희는 자신이 온지유의 친구이기 때문에 이렇게 관심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울지 마, 여자의 눈물은 함부로 흘리는 거 아니야.”온지유는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하지만 강윤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온지유는 사람들에게 쉽게 공감하는 성향이었다.강윤희가 부모도 없이, 강태규만이 유일한 친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에 연민을 느꼈고, 그랬기에 강윤희를 부모님께 데려가 주고 싶었다.“눈물 그쳐, 오늘 이미 많이 울었잖아.”온지유는 강윤희가 더 이상 울지 않기를 바랐다.강윤희는 눈물을 멈추고 코를 훌쩍이며, 에이드를 품에 꼭 안고 말했다.“고마워요, 삼촌, 이모. 다음에 또 올게요.”정미리와 온경준은 문 앞에서 그들을 배웅했다.강윤희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온지유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넸다.여이현아 냉정하게 말했다.“이렇게 울고 있으면, 네 할아버지가 보면 온지유가 널 괴롭혔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온지유는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이현은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온지유가 말했다.“그럴 리가요. 제발 그만 하세요, 더 울리지 말고.”기쁨의 눈물보다 슬픔의 눈물이 더 참기 힘든 법이다.강윤희는 휴지로 코를 풀며 말했다.“역시 형수는 다정해요. 이현 오빠, 그만 안 하면 나중에 할아버지한테 날 괴롭혔다고 말할 거예요.”여이현은 개의치 않았다.“그게 소용이 있을 것 같아?”강윤희가 뭐라고 말하든, 여이현은 항상 반박했다. 강운희는 화가 나서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형수, 저 사람 좀 보세요... 정말 매정해요. 대체 어떻게 견디시는 거예요?”이토록 냉정한 남자에게 절대 반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강윤희는 생각했다.온지유는 말했다.“빨리 운전하세요, 윤희를 집에 데려다줘야죠.”여이현은 어쩔 수 없이 차를 시동 걸었다.“그래.”강태규는 이미 마음이 조급했다.그는 강윤희가 괴롭힘
강하임이 고윤희의 가방을 건네주었다. 고윤희는 약간의 의심을 품고 물었다."어제 내 옆에서 어딘가에 전화하고 있지 않았어?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이미 안 보이더라. 내가 사라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강하임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강윤희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았지만, 도와주지 않았다. 그녀도 여자였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개입하면 자신만 위험해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저 바라만 보다가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서 자리를 떠났던 것이었다그녀는 강윤희가 자신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했다. 강하임은 웃으며 말했다."맞아, 중요한 사업 얘기를 하고 있어서 한창 통화하고 있었거든. 끝나고 보니 네가 없더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갔나 싶었는데, 네 가방이 내게 남아 있어서 가져다주러 왔어.""윤희, 무슨 일 있었어?"강하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이전 같았으면 강윤히는 당연히 강하임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강하임은 그녀의 선배였다. 강윤희가 유학하러 갔을 때, 낯선 땅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강하임을 만났고, 같은 도시 출신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그리고 강하임은 강윤희를 매우 잘 챙겨주었었기에, 당연히 그녀를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강하임은 바로 사라져 버렸고, 온지유가 했던 말들이 그녀에게 의심을 품게 했다."왜 기분이 안 좋아?"강하임은 고윤희가 말이 없자 친근하게 손을 잡으며 물었다."혹시 화난 거야? 어제 같이 밥 먹으러 못 간 건 내 잘못이야. 이따가 밥 먹으러 가서 어제 못한 걸 채우자,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할게, 어때?"강윤희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어제 온지유의 부모님 댁에서 밥을 먹었어. 지금은 배가 안 고파."강하임은 얼굴이 굳어지며 다시 물었다."왜 온지유랑 같이 간 거야? 혹시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이라도 했어?"강하임은 본능적으로
강윤희의 말에 강하임의 얼굴이 굳어졌고, 한동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강윤희는 단순하고, 누군가 자신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강윤희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하지만 강윤희의 말이 완전히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 있을 때, 강하임은 강윤희가 강태규의 손녀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강윤희는 나이가 어렸고,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기 때문에 생활 습관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 적응하지 못했고, 친구도 없어서 자주 혼자 지냈으며, 다른 사람과의 소통도 꺼렸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강윤희는 약하고 무력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불행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강하임은 어릴 때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며 풍족한 생활을 해왔고, 외국에서도 잘 지냈다. 그런 상황에서 강윤희는 강하임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강하임이 강윤희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강윤희는 그녀를 의지하게 되었고, 이는 강하임에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강윤희와의 관계는 매우 원만했다. 그러나 귀국 후, 강윤희가 강태규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에게서 느끼던 만족감이 줄어들었다.강하임은 머릿속에서 이 모든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강윤희의 질문은 그녀의 내면을 흔들어 놓았다."윤희야, 나는 그때도 진심으로 너를 도우려 했어. 너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느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난 정말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강하임은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넌 정말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는데, 너는 되려 나를 의심하네. 온지유와는 며칠 지내보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마음을 다 줘버리고. 내 마음은 생각해 본 적 있어?"강윤희는 말했다."그럼 내가 어제 위험 상황이었다는 건 알아? 온지유가 날 구해준 거야!"강윤희가 외국에 있을 때 강하임
강하임은 강윤희가 순종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강윤희가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순종적이지 않았다.강하임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고, 강윤희를 실컷 비난한 후, 이번에는 온지유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만약 온지유가 없었다면, 강윤희는 여전히 그녀 앞에서 작은 토끼처럼 순순히 명령을 따랐을 것이다.온지유가 이 모든 것을 다 망쳤다!---여이현이 서재에 가 곁에 없는 틈을 타, 온지유는 휴대폰을 들고 온라인 쇼핑을 했다.몇 권의 육아 서적을 샀다.온지유는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아직은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기분 탓인지 배 속이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아이가 있으면 그녀도 입지가 단단했다.온지유가 산 책들은 당연히 집으로 배송할 수 없었기에 일단은 백지희 쪽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백지희에게 받아달라고 부탁해 두고, 시간이 나면 찾아가서 겸사겸사 보려고 했다.그녀는 백지희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알렸다.백지희가 답장했다: ‘알겠어! 우리 집으로 보내. 그리고 나중에 나도 한번 읽어 볼게. 임산부가 뭘 먹어야 좋을지 봐 둬야지, 너와 네 아기 모두 건강하게.’백지희는 온지유에게 진심으로 감정을 쏟았다.그에 온지유도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뭘 그렇게 웃고 있어?”인기척도 없이 여이현이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는 바로 보냈던 메시지를 삭제하고 휴대폰을 껐다.“아무것도 아니에요.”여이현은 온지유가 휴대폰을 몇 번 움직이더니 빠르게 꺼버리는 것을 보고 눈빛이 변하며 다시 물었다.“누구랑 채팅하고 있었어?”“백지희예요.”“무슨 얘기였길래 그렇게 재밌어하는 건데?”여이현은 외투를 벗으면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온지유는 그에게 어떠한 의심도 주고 싶지 않아 계속 대답을 회피했다.“지희가 오늘 웃긴 일이 있었다고 나한테 말해준 거예요. 꽤 재미있어서 잠깐 웃었어요.”여이현은 옷을 잘 걸어두고 다시 온지유 곁으로 다가왔다.그녀는 이미 목욕을
여이현이 의심할수록 온지유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설명했다.“부모님이 내가 게를 좋아하는 걸 아셔서 매번 해주시는데, 이제는 좀 질린 것 같아요. 오늘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내가 뭘 먹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건데요?”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졌다.“별건 아니야, 그냥 네가 최근에 많이 변한 것 같아서. 아무 일 없으면 됐어.”“하지만... 지유 네가 나한테 숨기는 일은 있으면 안 돼.”여이현의 다정한 손길에, 이토록 자신을 신경 써주고 친밀하게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 가득한 말을 하는 모습에 온지유는 한순간 당황스러움을 느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응시했다. 그 눈은 마치 온지유가 숨기고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만약 여이현이 알고 있었다면, 절대 이런 반응이 아닐 것이다.평소에는 온지유에게 신경 쓴 적이 없는 사람이다.아마도 아직 의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온지유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매일 같이 출퇴근하는데, 내가 당신에게 뭘 숨기겠어요. 너무 생각이 많은 거예요.”“전에 주소영 기억나?”갑자기 그녀를 언급하자 온지유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기억나요, 이미 죽었잖아요.”“주소영은 그 여자가 아니야!”여이현은 설사 이미 죽었다고 해도 죽은 그 여자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여인 현은 지금 변명하고 있는 걸까?온지유는 주소영이 죽으면 여이현은 더 이상 그날 밤의 여자를 묻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어차피 그가 온지유를 의심할 리 없으니까.결혼한 지 3년이 지나지만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항상 그와 거리를 지켰고 여이현도 온지유가 선을 넘어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그건 나도 모르죠."온지유의 무관심함에 오히려 여이현의 반응이 조금 과도하게 느껴졌다.그날 밤의 여자는 이미 중요하지
온지유는 다시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대표님에게 말해줘요, 필요 없다고."배진호는 약간 곤란해하며, 힘주어 열쇠를 그녀 손에 쥐여주었다."그냥 타세요. 대표님이 이미 사모님 명의로 이전 해두었어요. 받지 않으시면 저는 돌아가 보고할 면목이 없어요."여이현은 어떤 상황에서도 온지유가 이 차를 타야 한다고 했었다. 그녀가 거절하면, 배진호는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고, 비난받게 될 것이다.온지유는 입술을 꼭 다물고 열쇠를 받아 들고 새 차를 다시 한번 보며 고민했다.여이현의 의도는 무엇일까?온지유가 이렇게 좋은 차를 타고 출근하면, 사람들이 무언가 의심하지 않을까?배진호는 온지유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에 말했다."출근 시간에 늦겠어요. 제가 운전할게요. 사모님을 태워다 드리죠."배진호는 차 열쇠를 받아 들고 급히 차에 올라탔고, 온지유를 기다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좋은 차를 타게 한다니.여이현이 이런 면에서는 꽤 관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심을 피할 필요는 있었다.차는 전용 차고에 주차될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볼일은 없을 것이다. 출근 시간이 늦어져서, 온지유는 부득불 배진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곤란할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여이현의 까다로움은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너희들 어제 강윤희 씨가 온지유를 형수라고 부르는 거 들었어?"아침 일찍, 회사에는 다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데 당연히 다 들었지. 강윤희 씨가 온지유를 형수라고 부르는 걸 보니 서로 아는 사이 같아 보이던데, 강윤희 씨가 또 대표님을 오빠라고 부르더니만, 설마...""너 온지유와 대표님이 뭔가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는 거야?""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윤희 씨의 호칭을 들어보면, 나도 온지유가 대표님의 그 신비한 부인이 아닐지 의심되더라고.""말도 안 돼!"누군가는 믿지 않았다."온지유는 대표님 곁에서 7년이나 일했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
“있어요!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건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마유주를 마시는 일정이에요. 총 7박 8일이고 모든 비용은 전부 저희가 책임집니다!” 여대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아르바이트 첫날 만에 벌써 계약을 성사시키다니!급여를 받으면 바로 외할머니 치료비에 보탤 수 있었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어차피 어디든 상관없었다.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배진호와 남태건을 마주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권다솔은 가이드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출발지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저 내일 여행사 패키지로 여행 가려 해요. 다음 주쯤 돌아올게요.”“좋지! 네 나이에는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을 봐야 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면 만 리를 걸어야 한다잖니. 짐은 다 챙겼니?”김영은은 딸이 여행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다만 여행길이 불편할까 걱정될 뿐이었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지만 괜찮았다.“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요. 필요한 건 현지에서 사면 돼요.”“다른 건 밖에서 사도 되지만 침구류는 우리가 보내줄게. 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 호텔 이불 덮었다가 알레르기라도 나면 어쩌려고.”권용민이 덧붙였다.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집의 침구와 비길 순 없었다.그는 아직도 권다솔이 어릴 적 피부 알레르기로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약을 사고 주사를 맞으며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저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롭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었다.권용민은 끝내 직접 가겠다고 고집했고 권다솔은 결국 그들을 이기지 못해 승낙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문득 배진호를 떠올렸다.‘지금쯤 석규리와 단둘이 집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다만
할머니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고,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아직도 너를 만나주지 않니? 이 할미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은데 들어볼 생각 있니?”배진호는 당연히 할머니가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다.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배진호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먼지가 아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질 수 없었다.다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나도 젊었을 때 우리 집 할아버지를 엄청 쫓아다녔단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안 사람들 또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내가 시골 출신이라 배운 게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니? 나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어.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결국 내 사람으로 만들었단다.”할머니는 눈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배진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두 분이 함께하신 후에도 할아버지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할머니를 예전처럼 대하셨나요?”“그럴 리가 있겠니? 부모는 그저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야.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 결혼 후엔 날 친딸처럼 대했단다. 집안의 돈까지 전부 나한테 맡겼으니. 설령 그 집안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도 두려울 게 없었어.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텐데.”할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적어도 99살까지는 살 거 같아.”배진호는 할머니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그는 권다솔의 부모님이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결혼 전에는 반대했지만 결혼 후에는 축복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해서 방해할 분들이 아니었다.그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미 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결국 병문안 갈 때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할머니,
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권다솔의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차가워진 걸까?“저를 때리든 욕하든 심지어 문밖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 해도 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솔 씨, 제발 절 무시하지는 말아줘요.”배진호는 간절히 애원했다.그는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그는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권다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그녀만은 잃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그러나 배진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발이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봤다가는 다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호 씨, 우린 이미 끝났어요. 만약 다시 만나더라도 여긴 아니에요.”둘의 마지막은 구청이어야 했다.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우리가 끝났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다솔 씨 마음속에 제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배진호는 집착했고 고집스러웠다.권다솔이 그를 뻔뻔하다 욕하든 귀찮다 욕하든 전혀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우리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어요. 아이도 없고... 그리고 며칠 전 술을 마시다가...”권다솔은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이미 남태건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정작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이혼까지 가는 마당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이 사실을 배진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천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그녀는 한편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을 경멸할까 봐 두려웠다.‘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그날 다솔 씨가 취했을 때 저도 같은 술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솔 씨가...”“그
김영은도 이번 일로 남태건이 막무가내로 느껴졌다.하지만 남태건의 인성에 문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태건이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는 거지.”“마음이 급하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전 태건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날은 제가 술에 잔뜩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누군가 제 술잔에 약을 탔거든요. 그래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전 절대 하룻밤의 실수로 제 평생을 누군가에게 보상으로 주려는 생각은 없어요.”권다솔은 계속 자기 생각을 말했다.아무리 김영은이 설득한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려웠으니까.더구나 남태건이 이토록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하니 그녀는 더더욱 그와 결혼 할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다솔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냥 네가 태건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어.”뜻밖에도 김영은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피우다가 꺼버린 후 김영은의 옆으로 다가왔다.“설령 네가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괜찮다. 너 하나쯤은 평생 먹고 살게 해줄 돈은 있으니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행복할 방법은 아주 많지.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해.”권다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이렇게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을 들어주니까.동시에 그녀는 두렵기도 했다.만약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억지로 남태건과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아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빠. 역시 저한테는 두 분밖에 없네요.”권다솔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김영은은 딸 대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권용민에게 눈짓했다. 권용민은 얼른 차를 따라주었다.“태건아, 아직 차 한잔도 못 마셨지? 얼른 한잔하면서 좀 쉬어.”“아버님, 어머님. 전 진심으로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저희는 급도 맞잖아요. 다솔이와 결혼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잘해줄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다솔이를 딸처럼 예뻐하고 계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남태건은 찻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기대하는 얼굴로 권용민과 김영은을 보았다.권용민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태건아, 난 이 일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결혼 전에 먼저 약혼부터 해야 하잖니. 약혼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걸 절차대로 마쳐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일단 이 물건들을 가져가. 그리고 다음에 내가 집사람과 함께 찾아가마.”남태건은 그의 말에서 거절의 의미를 눈치챘다.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다솔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인신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가져온 예물과 금붙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기고 가려고 했다.“태건아, 네가 우리한테 준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하지만 예물은 도로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권용민이 허리를 굽혀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남태건은 이미 현관까지 가버렸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용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일단 다솔이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김영은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권다솔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권다솔은 전화를 받기 전 특별히 거울을 보며 차림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혈색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엄마. 전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너랑 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