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희의 말에 강하임의 얼굴이 굳어졌고, 한동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강윤희는 단순하고, 누군가 자신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강윤희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하지만 강윤희의 말이 완전히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 있을 때, 강하임은 강윤희가 강태규의 손녀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강윤희는 나이가 어렸고,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기 때문에 생활 습관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 적응하지 못했고, 친구도 없어서 자주 혼자 지냈으며, 다른 사람과의 소통도 꺼렸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강윤희는 약하고 무력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불행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강하임은 어릴 때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며 풍족한 생활을 해왔고, 외국에서도 잘 지냈다. 그런 상황에서 강윤희는 강하임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강하임이 강윤희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강윤희는 그녀를 의지하게 되었고, 이는 강하임에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강윤희와의 관계는 매우 원만했다. 그러나 귀국 후, 강윤희가 강태규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에게서 느끼던 만족감이 줄어들었다.강하임은 머릿속에서 이 모든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강윤희의 질문은 그녀의 내면을 흔들어 놓았다."윤희야, 나는 그때도 진심으로 너를 도우려 했어. 너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느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난 정말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강하임은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넌 정말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는데, 너는 되려 나를 의심하네. 온지유와는 며칠 지내보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마음을 다 줘버리고. 내 마음은 생각해 본 적 있어?"강윤희는 말했다."그럼 내가 어제 위험 상황이었다는 건 알아? 온지유가 날 구해준 거야!"강윤희가 외국에 있을 때 강하임
강하임은 강윤희가 순종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강윤희가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그녀는 더 이상 순종적이지 않았다.강하임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고, 강윤희를 실컷 비난한 후, 이번에는 온지유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만약 온지유가 없었다면, 강윤희는 여전히 그녀 앞에서 작은 토끼처럼 순순히 명령을 따랐을 것이다.온지유가 이 모든 것을 다 망쳤다!---여이현이 서재에 가 곁에 없는 틈을 타, 온지유는 휴대폰을 들고 온라인 쇼핑을 했다.몇 권의 육아 서적을 샀다.온지유는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아직은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기분 탓인지 배 속이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아이가 있으면 그녀도 입지가 단단했다.온지유가 산 책들은 당연히 집으로 배송할 수 없었기에 일단은 백지희 쪽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백지희에게 받아달라고 부탁해 두고, 시간이 나면 찾아가서 겸사겸사 보려고 했다.그녀는 백지희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알렸다.백지희가 답장했다: ‘알겠어! 우리 집으로 보내. 그리고 나중에 나도 한번 읽어 볼게. 임산부가 뭘 먹어야 좋을지 봐 둬야지, 너와 네 아기 모두 건강하게.’백지희는 온지유에게 진심으로 감정을 쏟았다.그에 온지유도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뭘 그렇게 웃고 있어?”인기척도 없이 여이현이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는 바로 보냈던 메시지를 삭제하고 휴대폰을 껐다.“아무것도 아니에요.”여이현은 온지유가 휴대폰을 몇 번 움직이더니 빠르게 꺼버리는 것을 보고 눈빛이 변하며 다시 물었다.“누구랑 채팅하고 있었어?”“백지희예요.”“무슨 얘기였길래 그렇게 재밌어하는 건데?”여이현은 외투를 벗으면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온지유는 그에게 어떠한 의심도 주고 싶지 않아 계속 대답을 회피했다.“지희가 오늘 웃긴 일이 있었다고 나한테 말해준 거예요. 꽤 재미있어서 잠깐 웃었어요.”여이현은 옷을 잘 걸어두고 다시 온지유 곁으로 다가왔다.그녀는 이미 목욕을
여이현이 의심할수록 온지유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설명했다.“부모님이 내가 게를 좋아하는 걸 아셔서 매번 해주시는데, 이제는 좀 질린 것 같아요. 오늘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내가 뭘 먹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건데요?”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졌다.“별건 아니야, 그냥 네가 최근에 많이 변한 것 같아서. 아무 일 없으면 됐어.”“하지만... 지유 네가 나한테 숨기는 일은 있으면 안 돼.”여이현의 다정한 손길에, 이토록 자신을 신경 써주고 친밀하게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 가득한 말을 하는 모습에 온지유는 한순간 당황스러움을 느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응시했다. 그 눈은 마치 온지유가 숨기고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만약 여이현이 알고 있었다면, 절대 이런 반응이 아닐 것이다.평소에는 온지유에게 신경 쓴 적이 없는 사람이다.아마도 아직 의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온지유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매일 같이 출퇴근하는데, 내가 당신에게 뭘 숨기겠어요. 너무 생각이 많은 거예요.”“전에 주소영 기억나?”갑자기 그녀를 언급하자 온지유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기억나요, 이미 죽었잖아요.”“주소영은 그 여자가 아니야!”여이현은 설사 이미 죽었다고 해도 죽은 그 여자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여인 현은 지금 변명하고 있는 걸까?온지유는 주소영이 죽으면 여이현은 더 이상 그날 밤의 여자를 묻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어차피 그가 온지유를 의심할 리 없으니까.결혼한 지 3년이 지나지만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항상 그와 거리를 지켰고 여이현도 온지유가 선을 넘어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그건 나도 모르죠."온지유의 무관심함에 오히려 여이현의 반응이 조금 과도하게 느껴졌다.그날 밤의 여자는 이미 중요하지
온지유는 다시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대표님에게 말해줘요, 필요 없다고."배진호는 약간 곤란해하며, 힘주어 열쇠를 그녀 손에 쥐여주었다."그냥 타세요. 대표님이 이미 사모님 명의로 이전 해두었어요. 받지 않으시면 저는 돌아가 보고할 면목이 없어요."여이현은 어떤 상황에서도 온지유가 이 차를 타야 한다고 했었다. 그녀가 거절하면, 배진호는 난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고, 비난받게 될 것이다.온지유는 입술을 꼭 다물고 열쇠를 받아 들고 새 차를 다시 한번 보며 고민했다.여이현의 의도는 무엇일까?온지유가 이렇게 좋은 차를 타고 출근하면, 사람들이 무언가 의심하지 않을까?배진호는 온지유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에 말했다."출근 시간에 늦겠어요. 제가 운전할게요. 사모님을 태워다 드리죠."배진호는 차 열쇠를 받아 들고 급히 차에 올라탔고, 온지유를 기다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좋은 차를 타게 한다니.여이현이 이런 면에서는 꽤 관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의심을 피할 필요는 있었다.차는 전용 차고에 주차될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볼일은 없을 것이다. 출근 시간이 늦어져서, 온지유는 부득불 배진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곤란할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여이현의 까다로움은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너희들 어제 강윤희 씨가 온지유를 형수라고 부르는 거 들었어?"아침 일찍, 회사에는 다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데 당연히 다 들었지. 강윤희 씨가 온지유를 형수라고 부르는 걸 보니 서로 아는 사이 같아 보이던데, 강윤희 씨가 또 대표님을 오빠라고 부르더니만, 설마...""너 온지유와 대표님이 뭔가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는 거야?""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윤희 씨의 호칭을 들어보면, 나도 온지유가 대표님의 그 신비한 부인이 아닐지 의심되더라고.""말도 안 돼!"누군가는 믿지 않았다."온지유는 대표님 곁에서 7년이나 일했
이윤정의 초조한 어조를 들은 온지유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윤정의 시선은 여이현의 사무실 쪽을 향하고 있었고, 빨리 온지유가 그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예전 같으면 여이현 사무실에 있는 일로는 이윤정을 이토록 신경 쓰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동료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었고, 이윤정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다.그리고 사무실 안에는 정말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대부분은, 온지유는 감이 무뎌서 별생각이 없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기 쉽기 때문이다.온지유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사무실에 가서 뭐 하게? 대표님의 일을 내가 어떻게 함부로 끼어들겠어?”사실 그녀는 이윤정에게 동료들 사이의 소문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이윤정은 온지유가 여전히 컴퓨터를 보고 정말로 급하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노승아가 아침 일찍부터 와서, 대표님이 사무실로 불렀는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어요. 안에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아요.”이윤정은 온지유가 상황을 모른 채 있기를 원치 않았다.만일 그녀가 대표님의 부인이라면, 정식 부인의 위치를 굳게 지켜야 하고, 다른 여우 같은 여자가 올라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온지유가 대표의 부인이라는 사실은 이윤정에게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해주었다.그녀는 전부터 여이현과 온지유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여이현에게 부인이 있다는 사실이 그 생각을 접게 했다.정말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이윤정은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노승아 같은 여우가 올라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금 그녀는 매우 오만한 상태로, 자신만만하게 지내고 있다. 만약 대표님이 속는다면 어쩐다!노승아의 이름을 듣자, 온지유의 손이 잠시 멈췄다. 현재 노승아는 연예계에서 아주 잘나가고 있으며, 아주 빛나는 사람이다.여이현 곁에 서 있어도 충분히 어울린다.온지유는 침착하게 이윤정을 보며 말했다."일찍 오셨는데
기자의 촬영 당한 것이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온지유는 영상을 보고도 조용히 있었다. 노승아와 그 남자 배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이현이 그렇게 신경 쓰고 화를 낸다니,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걸까?온지유는 노승아와 단둘이 사무실에 있든 말든, 여이현이 화를 내는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신경 쓰면 스스로 고생하는 길일 뿐이었다.온지유는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한편, 곁에서 이윤정과 송서연은 여이현이 노승아에게 해줬던 일들을 두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사무실 문이 다시 열리고 이번에는 노승아가 문을 열고 나왔다.이윤정과 송서연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오빠, 나랑 그 남자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기자들이 그냥 짜집기 한 거예요.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화 푸세요, 네?”노승아는 울먹이며 여이현을 달래려 했다.이윤정은 입을 삐죽이며, 노승아의 연기가 과하다고 생각했다.반면 여이현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도 무거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한 번뿐이야. 다시는 이런 스캔들이 나오지 않도록 해.”“신경 쓸게요.”노승아가 다시 말했다.“아시다시피 저는 신인이라 아직 연예계 사정에 대해 잘 몰라요. 앞으로 남배우들과는 거리를 둘게요.”“그래.”여이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들의 대화는 온지유에게 고스란히 다 들렸다.송서연의 말처럼, 확실히 여이현은 노승아의 스캔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노승아가 사무실을 나섰다.온지유의 책상은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금방 눈에 띄었다.노승아는 모두가 그곳에 모여 서 있는 것을 보고,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고 말했다."왜 다들 여기에 모여 있는 거예요? 오빠, 사무실에 비서가 두 명이나 더 늘었나요?"여이현은 이윤정과 송서연을 쳐다보고는, 기웃거리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일은 안 하고?"이윤정과 송서연은 놀라서 금세 고개를 숙였다.여이현이 이런 말을
노승아는 온지유의 말에 자존심이 긁혔다. 온지유가 노승아의 드라마는 대단한 기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노승아는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다. 가수로서도 성공했고, 배우로서도 더 높은 경지에 올랐으며, 예전보다 훨씬 인기도 많아졌다.그러나 온지유의 말은 순전히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었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여이현이 있는 자리라 어쩔수 없이 화를 억눌러야 했다.“이번에 새로 찍은 포스터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노승아는 일부러 창가로 가서 밖의 대형 광고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녀는 피식 웃었다. 온지유의 자리가 마침 이 포스터가 훤히 다 보이는 좋은 위치라 매일 보면서 기분을 잡칠 것이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승아 씨, 저는 일을 마저 해야 하는데, 아직도 남은 할 말이 있나요?”온지유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노승아는 단지 자신을 과시하려 할 뿐이고, 온지유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없어요. 오랜만에 봤으니 잠시 수다나 떨까 해서요.”노승아는 다시 온지유의 책상 옆에 섰다.“듣자 하니, 퇴사할 생각이라면서요. 혹시 다른 일자리는 필요하세요?”노승아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가 퇴사하면, 우리 회사에서 비서로 고용할 수도 있어요. 경력도 풍부해서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이는 온지유와 여이현 모두에게 기분 나쁜 말이었다.특히 여이현은 온지유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노승아가 하필 그 점을 건드리자, 여인 현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온지유가 사직한다고 누가 말했어?”여이현의 얼굴빛을 보고 노승아는 당황했다.“아니, 저도 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거예요. 지유 언니가 사직한다는 게 비밀도 아니잖아요.”이미 소문이 돌고 있는 걸 보니 별일도 아닐 텐데, 왜 여이현이 그렇게 크게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온지유가 여이현 곁에서 7년을 보냈는데, 사직한다는 건, 그들이 곧 이혼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노승아는 이날이 오기를 한없이
지시를 받은 송서연은 빠르게 대답했다.“네.”여이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내가 다른 사람이 탄 건 마실 수 없어서요.”송서연은 또다시 멈춰 섰다. 이때 온지유가 말했다.“승아 씨 얘기 못 들었어요? 회사는 쓸데없는 사람을 남겨두지 않아요. 커피 타는 일도 제가 해야 하면, 송 비서를 고용해서 뭐 하죠?”온지유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이윤정과 송서연이 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아무래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온지유와 꽤 긴 시간 함께 있은 이윤정도 당황할 정도였다. 평소 냉정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 없는 그녀였다.두 사람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이현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불쾌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온 비서가 고용한 비서잖아요?”“맞아요. 제가 고용한 비서예요. 그러니 가르치는 것도 제 책임이겠네요. 제가 커피 타는 법을 가르치는데 의견 없으시죠?”여이현은 비서가 필요 없었다. 그건 단지 온지유를 붙잡을 핑계에 불과했다.온지유는 오늘 유독 예민해 보였다. 여이현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싸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르쳐요. 대신 오늘은 온 비서가 탄 커피를 마셔야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고 사무실에 들어가 버렸다. 이윤정은 이제야 한숨 돌리며 온지유에게 말했다.“온 비서님 너무 멋져요! 노승아 씨 표정 봤어요? 아마 단단히 빡쳤을 거예요.”노승아는 등장 자체가 온지유에게 스트레스였다. 더군다나 듣기 싫은 말까지 해대니 당연히 쉽게 보내줄 수 없었다.“노승아 씨는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예요. 평생 온 비서님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테니까요!”노승아가 반갑지 않기는 이윤정도 마찬가지였다. 온지유의 말 덕분에 그녀도 덩달아 속이 후련해졌다. 동시에 깨달았다. 온지유의 적이 되어서 득이 될 건 없다는 것을 말이다.“이 얘기는 그만해요.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두 사람은 익숙하게 별장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희영을 부축하면서 나왔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여희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여희영은 그런 온지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괜찮아. 정말이야.”“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너희 탓이 아니야. 이것도 다 내 운명인 거지. 이런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여희영은 말을 마친 후 여이현을 보았다.“여재호가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얼른 다시 원상복구 해야 해. 절대 다른 사람이 빈틈을 노리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여재호는 고민할 것 없어. 그냥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회사 쪽은 여희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다.속도는 빠르게 진행도이었다. 아무리 여재호가 업소녀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해도 늦었다. 경찰이 너무도 빠르게 도착했기 때문이다.여재호의 사람들을 전부 해고했다. 그리고 그가 매수한 거래처들과도 전부 거래를 끊어버렸다.여재호에게 처음으로 매수당한 고객은 차정혁이었다.그는 가짜를 진품처럼 팔고 품질이 안 좋은 물건을 대놓고 팔았다. 여재호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어도 여이현은 그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정혁은 바로 여재호에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 자료에는 여진 그룹 서류뿐만 아니라 온지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간도 적혀 있었다.여재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의 여자를 건들라고? 죽고 싶어?”“대표님, 정말로 판을 뒤엎고 싶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횝니다. 아니면 정말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밟히고 싶은 겁니까. 잊지 마세요, 여진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대표님이십니다.”차정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다 준비를 해뒀으니 대표님께선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사람들이 바로
“날 조롱할 것 없어. 여이현,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여진을 조정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래, 여진은 내가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여진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거라고.”여재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말했다. 꼭 반항기가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말이다.여이현은 술을 한잔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회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재호에게 고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왔다.오는 길에 이미 여희영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여희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추측이 거의 확신이 되어갔다.여재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추었다.“여희영을 데려가도 돼. 하지만 내일 회사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해. 여진의 모든 지분과 운영할 권리는 내게 넘긴다고.”“제가 싫다고 하면요?”“그럼 여희영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 희영이가 걱정되지?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희영한테 그렇게 네 편에 서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이야. 오빠인 내 말을 안 듣더라고.”여재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그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 키를 들고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여재호를 보았다.“그동안 꽤나 많은 돈을 빼돌리고 계셨나 봐요. 집까지 업소녀를 부르고 말이에요. 지금 신경 써야 할 게 명성이 아닌가요? 이미지 나락으로 빠지고 싶은 거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여재호는 코웃음을 쳤다.“저의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 그동안 봐서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자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죠.”말을 마친 여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재호는 여이현의 말에 순간 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간 여자에게 화풀이했다.여재호에게서 단서를 알아내지 못한 여이현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모든 CCTV를 돌려보았다.여희영이
“날 오빠 취급하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돈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니까.”여재호는 결국 여희영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한 후 작은 다락방에 가둬버렸다.밤이 되니 온지유와 여이현이 탑승한 비행기도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광고판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공항에 설치된 가장 큰 광고판에는 여진 그룹에서 출시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장품 영상을 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 밀키트 광고로 바뀌었다.여이현의 동의도 없이 광고를 바꿨다는 건 너무도 이상했다.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경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가 입을 열려던 순간 여이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기획부 부장이었고 여진 그룹의 원로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였고 여진을 향한 충성이 아주 높았다..“서 부장님, 마침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공항 광고판 광고가 왜 바뀐 거죠?”“대표님, 안 그래도 이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얼른 저의 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다들 대표님만 기다리고 계십니다.”서철민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더는 묻지 않고 바로 서철민의 집으로 출발했다.서철민의 집 서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모든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은 그들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한 뒤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를 말해보세요.”그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나 증거가 없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여재호가 저희 회사 재무부장과 구매부 부장, 그리고 일부 고객들을 매수했습니다. 현재 여진이 여재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서철민과 일부 사람들이 까발린 여재호의 만행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줄 알았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에게 연락하며 상황을 알렸다.하지만 그는 배진호와 함께 비행기에 있어 전화를 받지 못했다.여재호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돈과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과거에 자신이 손에 넣지 못했던 재산을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그가 여진그룹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자 결국 여희영도 나서게 되었다.여희영은 직접 찾아와 그를 말렸다.“할 말은 이미 다 했어. 그날 결혼식에서 이현이의 태도가 얼마나 분명했는지 오빠도 직접 봤잖아. 그런데 왜 또 이러는 거야?”“이현이는 너를 홀대한 적이 없잖아?”여진 그룹이 위태로웠던 시절 여이현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그룹은 조금씩 번창하며 오늘날의 위치에 올랐다.하지만 지금...여재호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이현이 여진 그룹을 이 정도로 키운 건 맞아. 그런데 문제는 나도 빈손으로 남을 수는 없다는 거야.”“네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너를 불러들였을 때엔 왜 거절하지 않았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여희영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말하는 성격이었다.게다가 그녀의 오빠는 지금까지 제대로 한 일이 없었을뿐더러 지금은 더 악랄하게 굴고 있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어이가 없어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할 말이 없으면 하지 마. 내가 하는 일이 네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뭘 걱정하는 건데? 여희영, 너도 알잖아. 이현이는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 왜 네 팔은 밖으로만 굽는 거야?”여재호는 돈을 받지 못하고 여이현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만으로도 이미 인내심이 폭발할 지경이었다.여기에 여희영의 말까지 더해지자 그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여희영도 화가 치밀었다.“내 팔이 밖으로 굽는다고? 오빠가 가문을 내팽개쳤을 때 나는 가문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아버지와 이현이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는 이제 와서
“전 무열 씨의 의지력을 믿어요. 당신이라면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는 제가 계속 상태를 관리할게요.”인명진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약물 금단 증상은 고통스러웠지만 신무열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김혜연은 늘 그의 주변에 함께 있어 주었다.덕분에 신무열은 일주일 만에 약물 의존을 끊어냈다.이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었고, 특히 김혜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무열 씨, 우리 현장에도 내려가 봐요. 현장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김혜연의 생각은 간단했다. 함께 일에 몰두하면 그는 아린의 죽음을 떠올릴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동안 신무열은 막 결혼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껴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신무열은 김혜연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현장으로 가자.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 요한도 있으니까 걱정 마.”“좋아요.”그들의 결정을 들은 법로는 남아서 Y국의 상황을 관리하기로 했다.그는 별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경성에서 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매우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이번은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Y국에 온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버렸다.“별아, 이번에 엄마랑 아빠랑 같이 돌아가면 말 잘 들어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나중에 보러 갈게.”법로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외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아빠랑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돌아오시면 꼭 다시 만나요!”“그래.”법로는 그들을 공항까지 직접 배웅했다.업무적으로는 배진호가 있었지만 온지유와 관련된 부분은 온지유의 결정을 존중했다.배진호는 먼저 제안했다.“대표님, 아드님을 제가 먼저 데려가서 학교에 보내겠습니다. 두 분은 Y국에서 조금 더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모님의 양부모님들과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