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촬영 당한 것이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온지유는 영상을 보고도 조용히 있었다. 노승아와 그 남자 배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이현이 그렇게 신경 쓰고 화를 낸다니,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걸까?온지유는 노승아와 단둘이 사무실에 있든 말든, 여이현이 화를 내는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신경 쓰면 스스로 고생하는 길일 뿐이었다.온지유는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한편, 곁에서 이윤정과 송서연은 여이현이 노승아에게 해줬던 일들을 두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사무실 문이 다시 열리고 이번에는 노승아가 문을 열고 나왔다.이윤정과 송서연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오빠, 나랑 그 남자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기자들이 그냥 짜집기 한 거예요.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화 푸세요, 네?”노승아는 울먹이며 여이현을 달래려 했다.이윤정은 입을 삐죽이며, 노승아의 연기가 과하다고 생각했다.반면 여이현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도 무거웠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한 번뿐이야. 다시는 이런 스캔들이 나오지 않도록 해.”“신경 쓸게요.”노승아가 다시 말했다.“아시다시피 저는 신인이라 아직 연예계 사정에 대해 잘 몰라요. 앞으로 남배우들과는 거리를 둘게요.”“그래.”여이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들의 대화는 온지유에게 고스란히 다 들렸다.송서연의 말처럼, 확실히 여이현은 노승아의 스캔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노승아가 사무실을 나섰다.온지유의 책상은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금방 눈에 띄었다.노승아는 모두가 그곳에 모여 서 있는 것을 보고,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고 말했다."왜 다들 여기에 모여 있는 거예요? 오빠, 사무실에 비서가 두 명이나 더 늘었나요?"여이현은 이윤정과 송서연을 쳐다보고는, 기웃거리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일은 안 하고?"이윤정과 송서연은 놀라서 금세 고개를 숙였다.여이현이 이런 말을
노승아는 온지유의 말에 자존심이 긁혔다. 온지유가 노승아의 드라마는 대단한 기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노승아는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다. 가수로서도 성공했고, 배우로서도 더 높은 경지에 올랐으며, 예전보다 훨씬 인기도 많아졌다.그러나 온지유의 말은 순전히 그녀를 모욕하는 것이었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여이현이 있는 자리라 어쩔수 없이 화를 억눌러야 했다.“이번에 새로 찍은 포스터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노승아는 일부러 창가로 가서 밖의 대형 광고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녀는 피식 웃었다. 온지유의 자리가 마침 이 포스터가 훤히 다 보이는 좋은 위치라 매일 보면서 기분을 잡칠 것이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승아 씨, 저는 일을 마저 해야 하는데, 아직도 남은 할 말이 있나요?”온지유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노승아는 단지 자신을 과시하려 할 뿐이고, 온지유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없어요. 오랜만에 봤으니 잠시 수다나 떨까 해서요.”노승아는 다시 온지유의 책상 옆에 섰다.“듣자 하니, 퇴사할 생각이라면서요. 혹시 다른 일자리는 필요하세요?”노승아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가 퇴사하면, 우리 회사에서 비서로 고용할 수도 있어요. 경력도 풍부해서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이는 온지유와 여이현 모두에게 기분 나쁜 말이었다.특히 여이현은 온지유가 회사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노승아가 하필 그 점을 건드리자, 여인 현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온지유가 사직한다고 누가 말했어?”여이현의 얼굴빛을 보고 노승아는 당황했다.“아니, 저도 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거예요. 지유 언니가 사직한다는 게 비밀도 아니잖아요.”이미 소문이 돌고 있는 걸 보니 별일도 아닐 텐데, 왜 여이현이 그렇게 크게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온지유가 여이현 곁에서 7년을 보냈는데, 사직한다는 건, 그들이 곧 이혼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노승아는 이날이 오기를 한없이
지시를 받은 송서연은 빠르게 대답했다.“네.”여이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내가 다른 사람이 탄 건 마실 수 없어서요.”송서연은 또다시 멈춰 섰다. 이때 온지유가 말했다.“승아 씨 얘기 못 들었어요? 회사는 쓸데없는 사람을 남겨두지 않아요. 커피 타는 일도 제가 해야 하면, 송 비서를 고용해서 뭐 하죠?”온지유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이윤정과 송서연이 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아무래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온지유와 꽤 긴 시간 함께 있은 이윤정도 당황할 정도였다. 평소 냉정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 없는 그녀였다.두 사람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이현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불쾌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온 비서가 고용한 비서잖아요?”“맞아요. 제가 고용한 비서예요. 그러니 가르치는 것도 제 책임이겠네요. 제가 커피 타는 법을 가르치는데 의견 없으시죠?”여이현은 비서가 필요 없었다. 그건 단지 온지유를 붙잡을 핑계에 불과했다.온지유는 오늘 유독 예민해 보였다. 여이현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싸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르쳐요. 대신 오늘은 온 비서가 탄 커피를 마셔야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고 사무실에 들어가 버렸다. 이윤정은 이제야 한숨 돌리며 온지유에게 말했다.“온 비서님 너무 멋져요! 노승아 씨 표정 봤어요? 아마 단단히 빡쳤을 거예요.”노승아는 등장 자체가 온지유에게 스트레스였다. 더군다나 듣기 싫은 말까지 해대니 당연히 쉽게 보내줄 수 없었다.“노승아 씨는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예요. 평생 온 비서님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테니까요!”노승아가 반갑지 않기는 이윤정도 마찬가지였다. 온지유의 말 덕분에 그녀도 덩달아 속이 후련해졌다. 동시에 깨달았다. 온지유의 적이 되어서 득이 될 건 없다는 것을 말이다.“이 얘기는 그만해요.
온지유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여이현은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결혼한 지 한참 되었지만 외식 한 번 한 적 없다. 원래도 진짜 커플끼리 하는 일이기에 바란 적이 없다.그녀가 대답 없는 것을 보고 여이현이 말을 이었다.“왜 대답 안 해? 레스토랑은 이미 예약했어. 밥 먹고 영화관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가자.”“갑자기 왜요? 무슨 영화까지... 오늘 무슨 날이에요?”그녀는 모든 일에 의심을 품었다. 여이현과 관련된 일에는 무조건 그래야 했다.요즘 이혼 얘기를 꺼내고 나서 그녀는 계속 차갑게 굴었다. 여이현은 조금만 잘해주면 그녀가 생각을 바꿀 것으로 여기고 대답했다.“그냥 그러고 싶어서. 이따가 나랑 같이 가자.”말을 마친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미간을 찌푸렸다.“브랜드 바꿨어?”“원래 브랜드가 없어서 다른 걸 사봤어요. 원래 마시던 게 오면 금방 바꿔줄게요. 오늘은 일단 있는 걸 마셔요.”“괜찮아.”여이현은 예상 밖으로 덤덤하게 커피를 계속 마셨다. 온지유는 무조건 안 마실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녀는 커피 때문에 한바탕 또 시끄러워질 줄 알았다.그러나 새로 바꾼 브랜드도 괜찮은 듯 그는 묵묵히 마시고 있었다. 온지유는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오늘따라 일로도 너그럽게 굴었던 것 같다.‘갑자기 무슨 외식이야. 오늘 노승아랑 마주친 것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나?’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하지만 뭐가 됐든 여이현은 인간적으로 그녀와 이혼하고 노승아에게 명분을 줘야 했다....같은 시각, 노승아는 회사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 한 차량이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왔다.“하임아, 저 사람 노승아 아니야? 대박, 이렇게 실물을 보다니!”강하임과 같은 차에 타 있던 여자가 흥분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강하임은 아직도 강윤희와 어색했다. 어차피 친구는 많으니, 이제는 그냥 다른 사람과 놀 생각이었다.연예계에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덤덤하게
여자는 궁금한 듯 물었다.“넌 어떻게 알아? 아, 혹시 전에 여진이랑 협력하면서 여이현 대표한테 들은 거야?”강하임은 곁으로 지나가는 노승아를 힐끗 봤다. 확실히 첫사랑으로 불릴 만한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이현에게 직접 물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지나가던 노승아는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노승아 씨.”노승아가 다시 머리를 돌리려고 할 때 강하임이 그녀를 불렀다. 상대가 여자인 것을 보고 그녀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그녀는 일반인이 아닌 연예인이다.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친절한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했다.“안녕하세요.”“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저 노승아 씨 팬이에요. 노승아 씨가 나온 영화랑 드라마는 전부 봤어요. 장다희 씨보다 백배 천배 아름다우세요.”강하임은 신이 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승아가 출연한 작품은 조금 전 검색으로 알아본 것이었다.노승아는 이런 칭찬에 아주 약했다. 특히 장다희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가장 좋았다. 장다희는 그녀의 경쟁 상대로 쉽게 이길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그녀를 아니꼽게 여기는 장다희는 태도가 좋았던 적이 없다. 그녀가 이미지를 위해 먼저 미소를 지어 보여도 무시하기 일쑤였다.다행히 신은 공평했다. 좋은 캐릭터를 만난 덕분에 그녀의 인기가 장다희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도 겉으로는 항상 겸손하게 공로를 돌렸다.“아니에요. 선배님은 실력파 배우예요. 저는 아직 선배님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걸요. 계속 공부해야죠.”강하임은 원래 노승아와 인사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강한 사람을 선호했다. 하지만 노승아는 예외였다. 어쩐지 알아 둬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았다.“이건 제 명함이에요.”그녀는 명함을 건넸다. 노승아는 힐끗 보고 놀란 듯 물었다.“금강그룹의 대표님이셨어요?”노승아는 강하임을 잠깐 바라보다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그러
노승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실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오빠는 오래전에 결혼했다는 걸 인정했거든요. 하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노승아 씨는 알아요?”“네. 하지만 말할 수 없어요. 괜히 비밀 결혼인 게 아니니까요. 결혼한 지 한참 됐는데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예민한 문제예요.”“...”“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다음에 같이 커피라도 한잔해요.”말을 마친 노승아는 차에 올라탔다. 강하임은 제자리에 덩그러니 서서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차에 오르고 시선이 차단된 다음, 노승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언니, 이럴 때 기선 제압해야지 왜 가만히 있었어요? 대표님이 언니를 좋아한다는 걸 밝혀야 그 여자들이 귀찮게 굴지 않을 거 아니에요!”김예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만약 예전 같으면 노승아도 오늘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하임과 여이현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다음에는 달랐다.두 사람은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여이현이 학교에 있은 시간이 별로 길지 않았는데도 인상이 깊을 정도면 무언가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그 여자 절대 내 드라마를 본 적 없어.”“네?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노승아는 손톱을 바라보며 말했다.“핸드폰에 내 이름을 검색한 기록이 있었어. 팬은 무슨, 그냥 말 걸려고 급하게 찾아봤던 거야. 나랑 오빠 사이가 궁금했겠지. 저 여자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 괜히 엮여 봤자 좋을 게 없어. 운 좋으면 도움받을 수도 있겠지.”김예진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언니 진짜 똑똑해요!”강하임은 제자리에서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여이현이 결혼했다고? 말도 안 돼!’그녀는 섬뜩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우리의 약속은 잊은 거야? 내가 성인이 된 다음 결혼하기로 했잖아! 나랑 그런 약속을 해놓고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 있지? 도대체 누구랑 결혼한 거야?’노승아의 대답은 아주 애매했다. 정
여이현은 살짝 기대되었다. 한 번도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한 적이 없었기에, 온마음의 반응이 궁금했다.하지만 막상 사무실에 도착하니, 온마음의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컴퓨터가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가오는 이윤정에게 차갑게 물었다.“온 비서는 어디 있죠?”이윤정은 서류 다발을 들고서 대답했다.“온 비서님은 10분 전에 나가셨어요. 친구랑 저녁 약속 있다고 하던데요?”여이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친구랑 저녁 약속?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 전에 오늘은 나랑 밥 먹자고 하지 않았나? 이건 혹시 거절...?’여이현은 굉장히 언짢았다. 깊고 날카로운 눈동자도 순식간에 서늘해졌다.그의 점점 어두워지는 안색을 보면서, 이윤정은 도망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왜 갑자기 화났는지 몰랐지만 일단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여자분과 약속을 잡은 것 같습니다.”여이현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아래층에는 배진호가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의 식사를 위해 그들은 많은 준비를 했다. 배진호는 여이현이 혼자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급히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대표님, 이건 주문하신 꽃입니다. 사모님께서는 데이트한다고 위에서 준비하고 계시죠?”꽃은 여이현의 눈앞에 다가왔다. 그는 배진호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배진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여이현의 감정 변화는 대부분 온지유 때문이었다.“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 먼저 가신 건 아니겠죠...?”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기를 바랐다.여이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분노를 억누르다가 말했다.“차에 타요!”“네!”배진호는 오늘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너무 터무니없었던 것 같다. 그는 꽃다발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는
“왜 그래?”온지유가 갑자기 얼어붙은 것을 보고 백희지도 장난을 멈췄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그러다가 머리를 돌리자 불청객 여이현이 떡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백지희도 당황했다.‘여이현이 어떻게 여기에...?’그러나 이곳에 온지유보다 더 떨리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는 백지희와 수다 떨려고 만난 것인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여이현이 나타난 것이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정리하며 당황함을 감추려고 했다. 여이현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온지유가 백지희와 즐겁게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은 잊힌 것 같아 더욱 불쾌해졌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두 사람이 주문한 디저트, 그리고 레스토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택배 상자와 그 아래 숨겨진 몇 권의 책에 머물렀다. 온지유는 황급히 책과 택배 상자를 손에 쥐고 뒤로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지희랑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장난을 쳤어요.”“맞아요, 맞아요.”백지희도 말을 덧붙였다.“여이현 씨가 따라올 줄은 몰랐네요. 우리 지유랑 그렇게 떨어지기 싫었어요?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셨네요. 만약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적지 않게 놀랐을 거예요.”백지희는 온지유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논담으로 말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사람은 백지희밖에 없었다.주변은 정적에 휩싸였고 백지희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예리하게 온지유의 손을 바라봤다.“평소 그렇게 틱틱대던 분이 오늘은 왜 이렇게 친절할까요?”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신호를 여이현도 느꼈다. 그는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백지희는 혹시라도 무언가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럴수록 여이현의 의심은 점점 더 켜져 갔다.“저는...”백지희는 설명하려고 했다.“지희도 이제 반쯤 사업가가 됐으니, 이현 씨랑 친해져
여자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하, 지금 그런 거로 날 협박하는 거예요?”“이건 협박인지 아닌지는 그쪽의 행동에 달린 거죠. 먼저 멋대로 물건을 던진 건 그쪽이잖아요.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는 건 미끼를 던진 거나 다름이 없다는 소리죠. 그쪽이 멋대로 던진 물건을 돌려주는 건데 주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죠?”양시은은 잔뜩 비꼬며 말했다. 양시은을 상대로 하는 말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 여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달라졌다.“지... 지금 잘못을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예요?! 그쪽 같은 사람은 살면서 처음 보네요! 잘못을 했으면서 반성의 기미도 없고 오히려 적반하장이라니!”“우리 엄마한테 멋대로 말하지 마시죠. 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쪽을 욕한 적 한 번도 없는 거로 아는데요. 이미 충분히 참고 있는 건데 자꾸 화를 돋우면 제가 이렇게 나긋나긋하게 그쪽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겠어요?”양시은은 헛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자는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딸에게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여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양시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자아이는 말라도 너무 말랐고 머리카락마저 푸석푸석했다.여자에게 밀쳐버린 여자아이는 바닥에 철퍼덕 앉더니 눈을 비비며 울기 시작했고 여자는 양시은의 탓을 해댔다.“그쪽 때문에 내 딸이 울잖아요! 당장 돈 물어내요!”양시은은 여자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만 너무도 능숙한 여자의 모습을 보니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일부러 일을 만들고 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너무도 능숙한 모녀의 모습에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양시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너무도 불쌍했지만 그녀는 보살도 아니었고 제 발로 걸어들어온 사기꾼에게 동정을 베풀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바로 신고했다.“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우리 경찰서로 가서 다시 얘기하죠.”그러자 여자는 눈
하민이는 낮에 친구들에게 외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묻기도 했었다.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자신의 외할머니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외할머니는 다른 외할머니와 다르게 아이처럼 행동하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런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멀지 않은 곳에 함께 있는 문해미와 하민이의 모습에 양시은은 그제야 마음 놓고 장을 보았다. 대충 다 고르고 두 사람을 찾으러 계산대로 갔을 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여러분! 이 할망구가 지금 남의 물건을 훔치고 있어요! 얼른 도둑 잡아요!”“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희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주머니가 물건을 이쪽으로 던지니까 제 외할머니가 주워서 본 거잖아요!”하민이는 논리를 따지며 맞섰다. 하지만 상대는 중년의 여성이었고 딸을 데리고 있었다. 다 큰 어른으로서 아이의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던지라 여자는 모든 잘못을 문해미에게 돌렸다.“난 아이를 봐야 했다고. 물건도 들고 있어서 핸드폰을 잠시 거기에 둔 거야. 아니, 내 핸드폰을 가져간 건 네 할머니인데 왜 적반하장이니?”여자는 차갑게 비꼬아 말했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여자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다들 누가 옳은 건지 판단 좀 해주세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다 큰 어른이 어떻게 핸드폰이 뭔지도 모르고 가져갈 수 있겠어요!”“그렇네요. 물건을 훔쳤으면서 적반하장이네요.”“꼬마야. 이번 일은 네 할머니 잘못이란다.”조급해진 하민이는 얼굴이 빨개졌다.“아니에요! 우리 할머니는 핸드폰을 돌려주려고 한 거라고요!”그러자 여자는 더 가소롭게 여기며 웃었다.“그래. 그 핸드폰이 내 거라니까.”무슨 말을 해도 상대를 이길 수 없었던 하민이는 마음이 조급하면서도 억울했고 살면서 자신을 이렇게 대한 사람은 처음이었던지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옆에 서 있는 문해미를 보며 겨우 눈물을 참았다.‘울면 안 돼. 엄마가 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은의 손에는 팔찌가 들려 있었다. 익숙한 감촉에 그녀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문해미가 아주 오래전에 그녀에게 남긴 팔찌였으니까...문해미가 실종된 후 팔찌를 볼 때마다 생각날까 봐 그녀는 팔찌를 이곳에 맡겨두고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그녀의 손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지만 말이다.팔찌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니 문해미는 혼자 놀고 있었다. 하민이가 없으니 이런 식으로 무료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문해미의 정신 연령은 다섯 살과 비슷했기에 혼자서 놀고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지금처럼.“엄마, 저 왔어요. 이거 혹시 아직도 기억해요?”“팔찌... 시은이한테 준 팔찌.”문해미는 그녀의 손에 있던 팔찌를 가져갔다. 여전히 팔찌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양시은은 2초간 멍해 있더니 눈시울이 붉어졌고 목소리도 어느새 잠겨버렸다.“엄마, 기억하고 계셨군요.”문해미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많은 것을 잊어버린 상태였고 그녀의 아버지에 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만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줬던 팔찌와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네, 엄마가 저한테 준 팔찌에요. 엄마, 조금만 더 자세히 보세요. 제가 이걸 그동안 금은방에 맡겨두고 있어서 그때랑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양시은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문해미는 팔찌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시은의 손을 잡았다.문해미는 팔찌를 그녀의 손목에 끼워주었다.“시은아, 껴.”양시은의 목이 메어왔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입을 벌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적어도 문해미의 앞에서는 목 놓아 울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해미가 걱정할 수 있으니까. 그러자 문해미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문해미의 목소리엔 형언할 수 없는 온화함이 묻어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양시은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싫어 식당 직원에게 눈빛을 보냈다.“여기 잘나가는 메뉴 전부 가져다주세요.”그의 말을 들은 직원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이 귀에 걸린 듯 웃었다. 통이 큰 손님이지 않은가.시그니처 메뉴를 전부 테이블에 놓여 있었고 중간에 샤부샤부가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매운 육수가 마침 양시은의 앞에 있어 양시은은 눈마저 매워지는 것 같았다.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옆으로 앉는 양시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아까는 불러도 대답하지 않더니 이제야 내 옆으로 와주는 거야? 역시 넌 억지로 오게 하지 않으면 안 올 생각이었지?”반박할 수 없었던 양시은은 침묵했다. 확실히 그러했으니까.다만 이 일로 그녀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모든 메뉴가 나온 뒤 샤부샤부를 먹기 시작했다. 나도현은 거의 먹지 않았고 음식을 집어 전부 양시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은의 그릇엔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그만해. 이거면 충분해.”그녀는 얼른 그릇을 옆으로 옮기며 말했다. 행여나 나도현이 계속 음식을 집어줄까 봐 말이다.나도현은 그제야 수저를 내려놓았지만 어딘가 아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양 비서?”이때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들려오고 양시은은 고개를 돌렸다. 겨우 돌아온 입맛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고 점차 짜증이 치밀었다. 어딜 가나 마주치고 있으니 재수가 없지 않은가.“어라, 형도 있었네? 난 양 비서가 보이기에 다른 남자랑 밥 먹고 있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보네.”나태욱은 일부러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양시은은 처음으로 나태욱이 싫어졌다. 그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나태욱처럼 그녀의 미움을 산 사람은 없었다.나도현은 태연하게 음식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꺼져.”나태욱은 고개를 돌려 양시은을 보았다.“이렇
하민이에게 일단 나도현의 존재를 적응시킨 후에 아빠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여전히 죄책감이 들었다.“오늘 나한테 물어봤을 때 하마터면 사실대로 말할 뻔했어. 하민이가 아빠가 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냐는 식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거든.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나도현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으며 자신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역시나 하민이는 나도현의 존재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고 예전에는 그저 좋은 아저씨로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아빠처럼 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양시은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고 나도현과 함께 있을 때 하민이의 도움을 받아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아이에게 어떻게 밝혀야 할지 몰랐다. 여하간에 아이는 아직 어렸던지라 많은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녀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던 때 사고가 나게 되면서 문해미는 입원하게 되었다.“제 엄마는 어떻게 됐어요? 어젯밤 갑자기 엄마가 소리를 지르더니 아빠 이름을 크게 부르더라고요. 왜 갑자기 그러신 건지 전 정말로 모르겠어요.”양시은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명진은 그런 그녀가 잡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일단 심호흡부터 하세요.”양시은은 그제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여전히 신경은 온통 문해미에게 쏠렸다.“전 정말로...”“환자의 상태는 불안정해요. 시은 씨가 말했던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누군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는 건 무엇으로부터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죠.”양시은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지만 엄마를 자극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걸요.”문해미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지라 다들 조심스럽게 대했다. 정신 연령대가 비슷한 하민이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하민이는 아직 어린이였기에 문해미를 자극할 리가 없지 않은가.양시은이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누가 자극했는지는 나중에 생각하
하민이 앞에 있는 도구도 가장 작은 것이었다.세 사람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열심히 만두피를 만들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만들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양시은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하민아, 그렇게 힘을 쓸 필요 없어. 엄마가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돼.”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고 나도현도 옆에서 집중하며 보았다. 당연히 양시은은 눈치채지 못했고 하민이는 점차 만드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만두피를 만든 후 밀가루를 뿌려 붙지 않게 했고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양시은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나도현이 손을 뻗었고 그녀는 고개를 피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피하지 마. 얼굴에 밀가루 묻었으니까.”양시은은 그제야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닦으면 닦을수록 얼굴에 묻은 밀가루가 더 많아졌고 나도현은 그제야 자신의 손을 보더니 침묵했다.그녀는 아직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는 거야? 얼굴에 묻은 건 다 닦았어?”“응, 아마도.”나도현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아마도라니?'양시은은 그제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때 하민이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커다란 눈을 했다.“엄마, 왜 고양이가 된 거예요?”거울을 본 양시은은 바로 고개를 돌려 나도현을 보았다.“나도현. 닦아준다면서 이게 닦아준 거야?”그리고 이내 손에 밀가루를 묻히더니 망설임도 없이 그의 얼굴에 비볐고 나도현은 피하지 않았다.그렇게 거실에선 밀가루 대전이 일어났고 양시은이 적당한 때에 멈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민이와 나도현의 얼굴엔 밀가루로 가득했고 그녀도 그러했다.세 사람은 함께 세수하러 가게 되었다. 그녀는 하민이의 얼굴을 닦아주었고 나도현은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내가 알아서 할게.”“내가 해줄게.”나도현은 자신의 손을 밀어내려는 양시은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양시은은 더는 거절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거대한 회사에서 정식적인 정장 차림으로 출근한 사람은 사실 많지 않았고 단 둘뿐이었다.양시은은 문밖에 있는 사람이 나태욱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비서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저희 대표님이 이길 거로 생각해요. 어쨌든 전 대표님 비서니까 대표님 편을 드는 건 당연한 거죠.”비서들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에 있던 나도현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가버렸다.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한 양시은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기분을 위해 가끔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하민이가 유치원에 다닌 지 어느새 보름이 지났고 양시은은 하민이 선생님에게 연락해 평소 하민이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하민이의 칭찬만 해댔다.“하민이 어머니, 하민이는 제 학생들 중에서 제일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예요. 하민이처럼 착한 아이는 더 없을 거예요.”선생님의 칭찬과 설명을 들은 양시은은 마음이 놓였고 하민이는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착한 아이였다.“하민아, 엄마가 오늘 하민이 선생님께 연락해서 물어봤는데 하민이가 엄청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 하민이 정말 최고야.”그녀는 하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민이는 부끄러운 듯 귀까지 빨개졌다.“하민이는 엄마가 한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걸요.”아이의 말에 양시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더구나 그녀의 아들이 아닌가. 그녀는 커다란 손을 들어 하민이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하민이가 맛있는 음식이나 장난감을 사달라고 할 줄 알았지만 하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양시은을 보았다.“그럼 아저씨를 불러와서 같이 만두를 빚으면 안 돼요?”“만두를 빚자고?”양시은은 의아한 얼굴로 아이를 보았다. 그러자 하민이는 유치원에서 내준 숙제를 말해주었고 그 내용은 가족과 함께 만두를 빚는 것이었다.“하민이는 아빠를 본 적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까 아저씨랑
그저 분위기를 몰 뿐 아무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하간에 데리고 온 파트너가 있다고 해서 그 상대가 정말로 결혼할 상대인 것은 아니었고 어쩌면 놀다가 질릴 놀이 상대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다 그러했으니까.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하는 농담에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때 나도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웃음소리를 멈추게 했다.“최근에 확실히 있죠.”그 순간 그들은 목에 무언가라도 턱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큼, 큼큼...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분이 대표님께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웃음거리로 만들던 사람이 헛기침해대며 말했다. 양시은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때 나서준 나도현 덕에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기분이었다.비록 술자리라곤 했지만 사실상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였고 나도현의 위치와 성격 탓에 아무도 그에게 술을 잔뜩 따라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몇 잔 마시게 되었다.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양시은은 나도현에게서 은은하게 나는 술 냄새를 맡게 되었다. 술에 박하잎이라도 들어간 것인지 어딘가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나도현, 내 목소리 들려?”양시은은 그가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정말로 취한 건가...”“안 취했어.”이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고 양시은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다음 순간 그녀는 시원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양시은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얼른 차창을 닫으려고 그를 밀어냈다.“이거 놔. 창문 안 올렸단 말이야.”“싫어.”나도현의 담담한 말에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스쳐 지나가더니 버튼을 눌렀고 창문이 스르륵 닫혔다. 양시은은 그제야 안도했고 입술 위로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박하 잎을 입에 머금은 것처럼 시원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를 잡고는 다정한 키스를 쏟아부었고 차 안의 분위기
“잠시만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은 이미 제가 손에 넣었거든요.”이때 나태욱이 갑자기 손을 들며 끼어들었고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양시은도 놀란 눈빛을 하며 그를 보았다.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을 나태욱이 이미 손에 넣었다니...다들 수군거리고 있던 때에 나태욱은 턱을 괴며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다들 모르셨어요? 아, 제가 말해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래도 큰일이라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말을 하면서 그는 나도현을 보았다. 그 순간 회의실 안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양시은은 걱정 어린 눈길로 나도현을 보았다.“그럼 다른 프로젝트를 논의하죠.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요.”나도현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고 심지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했다. 하지만 나태욱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회의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이번에 민망해진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여하간에 방금 자랑을 했지만 무시를 당하지 않았던가. 민망한 사람은 나태욱이었다.회의가 끝나고 양시은은 서류 정리 때문에 늦게 나오게 되었다. 나도현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양시은이 그를 따라잡으려 할 때 나태욱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양 비서, 나한테 아직 일 잘하는 개인 비서가 없는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형한테 말해서 나한테 오는 건 어때요?”또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들이려는 속셈이었다. 나태욱은 자신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괜찮아요. 전 이미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대표님 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없네요.”그러자 나태욱이 픽 웃었다.“양 비서, 정말로 그렇게 붙어 있으면 형이 양 비서랑 결혼해줄 줄 알았어요? 그만 포기해요. 우리 고집 센 아버지는 절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까.”양시은은 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