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소설? 이건 왜 숨긴 거야?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나?”백지희는 곧바로 해명했다.“자고로 로맨스 소설은 방에서 몰래 읽어야 맛있어요. 그리고 살짝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잖아요. 아무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다행히도 온지유는 언제나 신중하게 행동한다. 그녀는 육아 책과 같은 것을 함부로 꺼내 놓지 않았다. 육아 책은 이미 가방에 숨겨져 있었고, 밖에 있던 것은 페이크로 함께 산 소설뿐이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이토록 작은 부분도 결코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여이현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의심이 그녀가 임신한 것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임신 여부를 떠나 여이현의 강압적인 태도에 화가 나서 떠나고 싶었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 들고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여이현은 책을 테이블 위에 던지며 언성을 높였다.“온지유, 거기 서!”온지유는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여이현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내 말 안 들려? 이제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온지유는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뒤돌아보며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퇴근했어요. 지금은 제 자유 시간이에요. 근데 왜 대표님 말을 들어야 하죠?”이 말에 여이현은 잠시 넋이 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여이현은 항상 이득을 보는 쪽이었다. 그만큼 온지유가 순종적이라는 말이다. 직장이든 집이든 간에 그녀는 항상 그를 배려해 줬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는 안 이랬잖아.”온지유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약간 불안해 보였다. 그의 목소리도 전처럼 강압적이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손을 빼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맞아요, 예전에는 안 이랬죠. 이현 씨한테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순종적이기만 했어요. 심지어 이현 씨가 원하는 건 전부 해줬죠. 이현 씨 입장에서는 제가 하는
온지유와 마주친 배진호는 우뚝 멈춰 서서 물었다.“사모님, 두 분 오늘 함께 식사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온지유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른 것을 보고, 배진호는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표님이 많이 반성하고 계세요. 보세요, 오늘 꽃다발까지 준비하셨어요. 사모님을 위해서요.”배진호는 두 사람이 빨리 화해하기를 바랐다.그는 여이현의 아래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다. 그래서 더 잘 알았다. 여이현은 누군가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여이현은 연애하는 법을 전혀 몰랐다. 정확히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정성을 쏟을 여자가 없었던 것이다.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였다.온지유는 배진호가 들고 있는 꽃을 보고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전에 온 비서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왜 또 사모님이라고 부르세요. 이제 그 호칭은 쓰지 마세요. 저는 이제 평범한 직원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 꽃은 진짜 중요한 사람한테 주길 바라요.”“아니에요. 사모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어요!”배진호는 어떻게든 좋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지 이혼, 그리고 깔끔한 이별일 뿐이었다.“사모님...”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배진호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여이현에게 말했다.“대표님, 빨리 쫓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모님이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에요.”그는 여이현보다 더 걱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구하기 위해 속이 다 타들어 갔다.반대로 여이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배진호에게 물었다.“아까 지유가 우는 것 같던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요?”“네. 저도 봤습니다. 많이 힘들어 보였어요.”“그런 눈으로 끝내자는 말은 왜 할까요? 나랑 있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던 건가요?”“그럴 리가 없어요!”배진호는 급히 말했다.“여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게 마셔?”맞은편에 앉은 최주하가 물었다.그들은 나이트클럽에 있었다. 음악의 사운드는 크고 열정적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섹시한 여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가 이 밤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분위기 또한 시끄러웠다.여이현이 이 온 것은 단지 마음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시끄러운 곳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반대로 최주하에게는 일상과 다름없었다.“아무것도 아니야.”여이현은 온지유와의 갈등을 말하고 싶지 않아 얼굴을 굳힌 채 생각에 빠졌다.최주하는 와인을 가볍게 홀짝였다. 품에는 진한 메이크업을 한 여자를 안고 있었다.“왜, 연애가 또 잘 안돼?”“에이, 설마...”지석훈이 잘 아는 양 입을 열었다.“이현이 형이 어떤 사람인데. 안 넘어올 여자는 없어.”“너 그 여자 얕보지 마. 지난번 온지유 씨가 다른 남자랑 말 좀 했다고, 이현이 질투를 얼마나 하는지... 내가 그 산 증인이다, 이거야.”지석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결혼한 사이에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둘 다 닥쳐!”여이현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최주하도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똑똑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알 수 있었다. 여이현의 결혼 생활에 적신호가 떴다는 것을 말이다.그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전에는 외박을 밥 먹듯이 하며 온지유는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지금도 몸은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온지유에게 가 있는 듯했다.“도현이 있었으면 좋겠다. 도현이는 제대로 분석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변호사니까 이런 문제 자주 보지 않겠어?”최주하가 다시 말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냥 형이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지난번처럼 전화를 걸어 볼게. 아무리 매정한 여자라고 해도 걱정을 안 할 수 없을걸.”두 사람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여이현은 점점 짜증이 났다. 온지유의 이름 석 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모든 말에 그녀가 들어있었다.“내가 언제 온지유랑 관련 있다고 했
온지유는 별다른 감정 없는 얼굴로 한동안 셔츠의 자국을 응시했다.여이현이 접대하는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여자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점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도 그의 셔츠에 립스틱 자국을 남긴 적은 없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셔츠를 꼭 잡았고, 셔츠는 그녀의 손에서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때 욕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벌떡 정신을 차렸다.여이현은 욕실에서 나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왜 거기에 그러고 서 있어?”온지유의 감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그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한 후 다시 말했다.“평소에는 잠들었을 시간 아니야? 오늘은 왜 안 잤어?”최근 온지유는 거의 그를 기다리지 않고 잠에 들었다. 예전에는 그가 돌아와야만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는데 말이다.지금은 그가 늦게 돌아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었다. 물론 온지유가 잠자는 시간까지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전과 다른 세세한 변화에서 오는 기분의 낙차가 도무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다.그가 술을 먹고 돌아왔는데도 온지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이건 노승아가 물어봐야 할 일이다. 애초에 립스틱 자국의 주인이 노승아일 수도 있었다.“옷은 세탁기에 넣어줄게요.”온지유는 차분하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여이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냉기를 알아챘던 것이다.‘이제는 나를 쳐다보는 것도 싫다는 건가?’생각하다 보니 여이현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이불을 덮고 옆으로 누워 잠을 청하려 했다.온지유가 돌아왔을 때, 여이현은 등을 돌린 채 이불을 단단히 덮고 있었다. 이미 잠들었는지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온지유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 누웠다.두 사람 사이에 드넓은 강이 있는 것 같았다.잠시 후 여이현은 이불을 걷어냈다. 잠들기는커녕 땀만 흠뻑 났다. 그는 고개를 돌려 깊은 잠에 빠진 온지유를 확인했다. 그녀는 그의
만약 회사에 여이현을 대표할 다른 사람이 있다면 온지유는 무조건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서 그녀가 직접 갈 수밖에 없었다.“그럼 어쩔 수 없이 제가 가야겠네요. 서연 씨도 같이 가요.”“네.”송서연이 대답했다.온지유는 몇몇 사람과 함께 출발했다. 송서연은 신입사원으로서 회사 업무를 익혀야 했고, 온지유는 가는 길 내내 주의할 점을 당부했다.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항구에 도착했다. 배는 이미 항구에 와 있었고, 금강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었다.온지유가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대표님이 아닌 온 비서가 온 거죠? 온 비서가 언제부터 대표님 대행까지 했어요?”온지유는 머리를 돌렸다. 강하임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대표님이 오늘 좀 바빠서요. 제가 대표님 대신 금강과 협상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에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강하임은 온지유가 점점 눈에 거슬렸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여이현의 비서로 등장한 첫 순간부터 눈엣가시 같았다. 왜 꼭 여자 비서를 써야 하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남자 비서가 체력적으로 훨씬 낫지 않는가?온지유가 여이현의 아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 의문은 완전히 풀렸다. 온지유는 그녀가 경계해야 하는 상대가 틀림없었다.“이해 못 할 건 없지만, 온 비서가 월권한 것 같은데요. 온 비서의 권력이 언제 이렇게 커진 건가요?”강하임은 냉정한 말투로 물었다. 눈빛에는 온지유에 대한 적의로 가득했다.“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대표님이 오늘 바쁘다고요.”“저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강하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녀는 몸이 뚫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강하임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그녀는 강하임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을 따
여이현과 노승아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하임에 관한 일은 전혀 들어본 적 없었다.강하임은 추억에 잠겼다. 인생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격정적인 순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온 비서는 몰라요. 대표님이 구해준 순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내가 성인이 된 다음 꼭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했다고요! 이건 가장 신성한 약속이에요!”온지유는 강하임의 말이 하도 어이없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어린 시절에 만난 것 같다. 어린애가 한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더군다나 여이현은 강하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거창한 약속이라고 잊었을 게 뻔했다. 마치 그녀를 잊은 것처럼...여이현은 많은 사람을 구했다. 그건 그의 일이었으니까. 일로 만난 상대에게 감정이 생길 일은 절대 없었다. 그래서인지 강하임의 말도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그렇다면 대표님께 직접 여쭤보시죠. 저한테 말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그녀는 남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 없었다. 하지만 돌아서려는 그녀를 강하임이 꽉 붙들었다.“두 사람이 부부라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서요? 진짜 좋아서 한 결혼이면 숨길 리가 없어요. 전 세상에 알리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죠. 대표님은 온 비서를 좋아하지 않아요. 온 비서가 더러운 수작으로 결혼까지 한 거 맞죠?”강하임은 잔뜩 흥분한 모양새였다.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팔을 뿌리쳤다.“이거 노세요. 저한테 말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요!”“회피는 묵인이에요. 난 내 말이 맞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강하임은 금방이라도 온지유를 삼켜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역시 온 비서는 처음부터 나한테 악감정 있었죠? 나랑 윤희 사이에서 이간질 하더니, 이제는 내 남자까지 가로채요? 정말 확 죽려버리고 싶게 만드네요.”온지유는 그녀에게 밀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임신한 몸으로 다치면 안 되기에 최대한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
강하임을 문 것은 마지못해서 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너무 위험한 곳에 서 있었고,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면 바다에 빠질 수 있었다.그녀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죽더라도 강하임은 꼭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하임이 손을 뿌리친 순간 다른 손으로 그녀를 붙잡았다.두 사람은 동시에 바다에 빠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물보라가 쳤다.수영할 줄 몰랐던 강하임은 세차게 버둥대며 외쳤다.“살려주세요!”오늘은 강풍이 부는 날이었다. 그만큼 파도의 힘도 강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덮이자, 살려달라는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온지유는 수영할 줄 아는데도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점점 멀리 밀려나기만 했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배 속의 아이도 다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 남기 위해 수영했는데도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무기력감이 몰려오는 동시에 힘이 빠져버렸다. 바닷물은 끝없이 입속으로 들어왔고, 정말 죽는 것인지 주마등도 스쳐 지나갔다.아이... 부모... 그리고 여이현.‘엄마랑 아빠한테 효도해야 하는데. 이현 씨랑 이혼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이대로 죽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너무 많았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과 만나겠다고 다짐했다.‘힘들어... 잠깐만 쉴래.’의식은 점점 모호해지고 몸도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저기 사람이 있어요!”“빨리! 빨리 건져내!”“아가씨, 잠들면 안 돼요! 정신 차리고 밧줄을 잡아요!”온지유는 시끄러운 말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마침 지나가던 어선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밧줄을 던지고 있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밧줄을 잡았다. 어디에서 온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어부들이 도와준 덕분에 그녀는 무사히 배에 탈 수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곁에 빙 둘러서서 우왕좌왕했다.“아가씨, 괜찮아요?”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의식이 점점
기자는 두 사람을 인터뷰하는 중이었다.“노승아 씨는 여이현 대표님이 직접 배양한 배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오늘 신인상을 받으신 노승아 씨한테 한 마디 해주세요.”여이현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걸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네요.”노승아는 트로피를 든 채로 싱긋 웃었다. 약간 부끄러운 듯한 미소였다.이번에 기자는 노승아에게 말했다.“오늘 아주 역사적인 날이에요. 데뷔작으로 신인상까지 받은 걸 정말 축하드려요. 그동안 도움 주신 여이현 대표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기사 10편을 쓸 정도의 가십거리였다. 노승아는 마이크에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이런 영광을 받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앞으로 계속 노력할게요. 제 배우 인생은 이제야 시작이니까요. 그리고 이 영광은 여이현 대표님께 돌리겠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세상 다정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 TV 밖에서 그 사랑이 느껴질 정도였다.현장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여이현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 모른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조차도 온지유의 눈에는 애정 행각으로 보였다. TV 속에서 두 사람은 여느 커플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었다.‘하긴, 요즘 시대에 스폰서가 있는 게 무슨 대수라고. 더군다나 노승아는 신인상을 받았으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만 듣겠지.’카메라 앞에 서 있는 노승아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사석에서 만났을 때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저 정도 위치에 있으면 누구나 눈 부셔지는 법이었다.두 사람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랑놀이를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그녀는 자칫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도 말이다.한쪽은 물귀신이고, 다른 한쪽은 천사였다. 노승아와 그녀 사이의 차이점이 오늘따라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저체온증이라도 온 듯 벌벌 떨리는 몸보다 마음이 더욱 차가웠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
“있어요!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건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마유주를 마시는 일정이에요. 총 7박 8일이고 모든 비용은 전부 저희가 책임집니다!” 여대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아르바이트 첫날 만에 벌써 계약을 성사시키다니!급여를 받으면 바로 외할머니 치료비에 보탤 수 있었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어차피 어디든 상관없었다.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배진호와 남태건을 마주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권다솔은 가이드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출발지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저 내일 여행사 패키지로 여행 가려 해요. 다음 주쯤 돌아올게요.”“좋지! 네 나이에는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을 봐야 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면 만 리를 걸어야 한다잖니. 짐은 다 챙겼니?”김영은은 딸이 여행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다만 여행길이 불편할까 걱정될 뿐이었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지만 괜찮았다.“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요. 필요한 건 현지에서 사면 돼요.”“다른 건 밖에서 사도 되지만 침구류는 우리가 보내줄게. 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 호텔 이불 덮었다가 알레르기라도 나면 어쩌려고.”권용민이 덧붙였다.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집의 침구와 비길 순 없었다.그는 아직도 권다솔이 어릴 적 피부 알레르기로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약을 사고 주사를 맞으며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저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롭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었다.권용민은 끝내 직접 가겠다고 고집했고 권다솔은 결국 그들을 이기지 못해 승낙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문득 배진호를 떠올렸다.‘지금쯤 석규리와 단둘이 집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다만
할머니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고,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아직도 너를 만나주지 않니? 이 할미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은데 들어볼 생각 있니?”배진호는 당연히 할머니가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다.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배진호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먼지가 아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질 수 없었다.다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나도 젊었을 때 우리 집 할아버지를 엄청 쫓아다녔단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안 사람들 또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내가 시골 출신이라 배운 게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니? 나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어.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결국 내 사람으로 만들었단다.”할머니는 눈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배진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두 분이 함께하신 후에도 할아버지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할머니를 예전처럼 대하셨나요?”“그럴 리가 있겠니? 부모는 그저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야.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 결혼 후엔 날 친딸처럼 대했단다. 집안의 돈까지 전부 나한테 맡겼으니. 설령 그 집안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도 두려울 게 없었어.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텐데.”할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적어도 99살까지는 살 거 같아.”배진호는 할머니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그는 권다솔의 부모님이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결혼 전에는 반대했지만 결혼 후에는 축복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해서 방해할 분들이 아니었다.그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미 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결국 병문안 갈 때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할머니,
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권다솔의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차가워진 걸까?“저를 때리든 욕하든 심지어 문밖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 해도 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솔 씨, 제발 절 무시하지는 말아줘요.”배진호는 간절히 애원했다.그는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그는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권다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그녀만은 잃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그러나 배진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발이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봤다가는 다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호 씨, 우린 이미 끝났어요. 만약 다시 만나더라도 여긴 아니에요.”둘의 마지막은 구청이어야 했다.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우리가 끝났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다솔 씨 마음속에 제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배진호는 집착했고 고집스러웠다.권다솔이 그를 뻔뻔하다 욕하든 귀찮다 욕하든 전혀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우리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어요. 아이도 없고... 그리고 며칠 전 술을 마시다가...”권다솔은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이미 남태건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정작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이혼까지 가는 마당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이 사실을 배진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천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그녀는 한편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을 경멸할까 봐 두려웠다.‘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그날 다솔 씨가 취했을 때 저도 같은 술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솔 씨가...”“그
김영은도 이번 일로 남태건이 막무가내로 느껴졌다.하지만 남태건의 인성에 문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태건이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는 거지.”“마음이 급하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전 태건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날은 제가 술에 잔뜩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누군가 제 술잔에 약을 탔거든요. 그래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전 절대 하룻밤의 실수로 제 평생을 누군가에게 보상으로 주려는 생각은 없어요.”권다솔은 계속 자기 생각을 말했다.아무리 김영은이 설득한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려웠으니까.더구나 남태건이 이토록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하니 그녀는 더더욱 그와 결혼 할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다솔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냥 네가 태건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어.”뜻밖에도 김영은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피우다가 꺼버린 후 김영은의 옆으로 다가왔다.“설령 네가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괜찮다. 너 하나쯤은 평생 먹고 살게 해줄 돈은 있으니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행복할 방법은 아주 많지.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해.”권다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이렇게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을 들어주니까.동시에 그녀는 두렵기도 했다.만약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억지로 남태건과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아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빠. 역시 저한테는 두 분밖에 없네요.”권다솔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김영은은 딸 대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권용민에게 눈짓했다. 권용민은 얼른 차를 따라주었다.“태건아, 아직 차 한잔도 못 마셨지? 얼른 한잔하면서 좀 쉬어.”“아버님, 어머님. 전 진심으로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저희는 급도 맞잖아요. 다솔이와 결혼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잘해줄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다솔이를 딸처럼 예뻐하고 계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남태건은 찻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기대하는 얼굴로 권용민과 김영은을 보았다.권용민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태건아, 난 이 일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결혼 전에 먼저 약혼부터 해야 하잖니. 약혼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걸 절차대로 마쳐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일단 이 물건들을 가져가. 그리고 다음에 내가 집사람과 함께 찾아가마.”남태건은 그의 말에서 거절의 의미를 눈치챘다.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다솔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인신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가져온 예물과 금붙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기고 가려고 했다.“태건아, 네가 우리한테 준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하지만 예물은 도로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권용민이 허리를 굽혀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남태건은 이미 현관까지 가버렸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용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일단 다솔이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김영은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권다솔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권다솔은 전화를 받기 전 특별히 거울을 보며 차림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혈색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엄마. 전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너랑 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